당위적인 신념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당위적인 신념이란 ‘여자는 이래야 돼’, ‘남자는 이래야 돼’, ‘애들은 그러면 안 돼’처럼 무조건적인 굳은 믿음을 말한다. 삶에서 나침반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신념이 꼭 나쁘지만은 않지만 ‘무조건’ 그래야 한다거나 ‘절대로’ 그래선 안 된다는 식의 믿음은 때때로 위험하다. 조화와 질서를 해칠 수 있기 때문이다.

세상에 아무것도 믿지 않는 사람은 없고 모든 것을 믿는 사람도 없다. 같은 믿음처럼 보이더라도 서로 전혀 다른 것을 믿는 경우도 있으며, 다른 것을 믿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꽤 비슷한 것을 믿는 경우도 많다. 진리는 모든 사람이 뭔가를 믿거나 의심하며 살아간다는 것이다.
나의 믿음을 귀하게 여기는 마음만큼이나 아름다운 것은 나의 믿음만 옳다고 고집하지 않는 열린 마음이다. 그리고 내가 믿지 않는 것으로부터 나를 지키려는 마음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남에게 나의 믿음을 강요하지 않을 수 있는 겸손한 마음이다.

융통성이란 그때그때 알맞은 도리 편에 서고 알맞은 도리를 따르는 삶의 지혜를 말한다. 융통성은 나와 남 모두를 자발적이고 능동적으로 만든다. 하지만 고집은 나와 남 모두를 수동적이며 강제적인 존재로 전락시킨다.
꼭 그래야 되거나 절대로 그래선 안 된다는 억지스러운 고집과 당위적인 신념 대신 다른 사람의 마음과 상황을 살필 수 있는 여유와 융통성을 잊지 않을 수 있다면 어떨까. 한없이 늘어지는 하루가 조금은 덜 피로해질지도 모른다. 공자는 "함께 따라 주는 것이 곧 바름이다"28라고 말했다. 고집의 다른 말은 고정관념이며 가장 깨기 어려운 고정관념은 다름 아닌 나 자신이다. 나라는 고정관념을 깨는 것. 큰 사람의 길은 이로부터 열릴 수 있다.

메아리를 그치기 위해선 소리를 멈춰야 하고 그림자를 바로 보기 위해선 움직임을 멈춰야 하듯이 두루두루 어울리기 위해선 비교를 멈춰야 한다. 비교도 세상의 지식처럼 끝이 없는 것이다. 남과 나를 비교하며 삶의 의미를 찾는 사람은 자신을 해치고 불행한 처지에 놓여 늘 위태로울 수밖에 없다.

공자와 장자는 세상을 내게 맞추는 대신 나를 세상에 맞추는 지혜를 소개한다. 동양에서 성인군자聖人君子란 대인大人과 같은 말이다. 대인이란 큰 사람을 뜻한다. 공자와 장자가 말하는 큰 사람의 기준은 체구가 아니라 마음에 있다. 넓은 마음씨를 가진 사람은 큰 사람이며 좁은 마음씨를 가진 사람은 작은 사람이다.
넓은 마음씨란 여유 있는 마음가짐을 말하며 좁은 마음씨란 급급한 마음가짐을 말한다. 여유 있는 마음은 남들이 나를 쫓아 살도록 만들지만 급급한 마음은 내가 남들을 쫓아 살도록 만든다. 장자는 ‘미삭삭연야未數數然也’라 하여 매사에 조급해하지 않는 삶의 태도야말로 행복의 지름길이라고 하였다.

공자가 끊었다고 알려진 네 가지를 한마디로 줄이면 ‘융통성’이 된다. 융통성은 일종의 균형 작용이며 동양철학에서는 중용의 좋은 방법론이기도 하다. 일과 삶에 ‘워라밸’이 필요하듯이 세상 모든 일에는 중용이 요구된다. 사사로운 의견을 함부로 표출하지 않을 것, 반드시 해야 된다는 생각으로부터 자유로울 것, 상통 가능한 고집을 부릴 것, 내가 아니면 안 되리라는 마음을 비울 것. 이는 공자가 소개하는 삶의 중용을 실천하기 위한 기술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욕심의 특징 중 하나는 끝이 없다는 것이다. 간절히 하고 싶었던 일을 하게 되면 금세 또 다른 일이 하고 싶어지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다. 그러나 끝이 없는 앎을 뒤쫓는 것은 위태롭다는 장자의 말처럼 유한한 생명을 가진 존재가 무한한 것을 추구하게 되면 스스로를 해칠 수밖에 없다.

살다 보면 무슨 수를 쓰더라도 어찌해 볼 수 없는, 그저 눈을 감고 간절히 빌며 기적을 바랄 수밖에 없는 일들을 맞닥뜨릴 때가 있다. 무슨 이유에선지 또 누구의 책임인지조차 알 수 없기에 더욱 괴롭고 답답하다. 이럴 때 동양의 철학자들은 ‘어찌할 수 없는 일은 그대로 둔다’는 마음을 강조했다.

현명한 사람은 자신의 분수에 맞는 높이를 설정하여 나를 보전한다. 그러나 지혜롭지 못한 사람은 닿지 못할 높이로 나를 쏘아 올리기를 반복한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닳아 없어진 나는, 겨울이 되어 앙상해진 나무가 늘 푸른 소나무와 잣나무를 부러워하듯 후회하게 될 것이다. 멀리 쏘려면 힘껏 당겨야 하고 힘껏 당긴 뒤에는 힘을 비축할 시간이 필요함을 기억하자.

최근 들어 사이코패스니 소시오패스니 하는 말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나밖에 모르는 성향이 극단으로 치달으면 사이코패스가 되고, 사람을 도구화하려는 성향이 극에 달하면 소시오패스가 된다. 분명한 것은 이들의 마음은 평화로울 수 없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마음의 불안과 혼란은 이들이 스스로에게 내린 저주인 셈이다.

많은 사람이 입을 모아 잘못됐다고 하는 게 꼭 틀린 것만은 아닐 수도 있다. 많은 사람이 좋다고 하는 게 꼭 옳다고도 할 수 없다. 하지만 옳고 그름보다 중요한 건 세상과 조화를 이루는 일이다. 세상이란 서로 다른 너와 내가 모여 함께 살아가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중용을 지키는 네 가지 기술

공자께서는 네 가지를 끊으셨으니 사사로운 의견이 없으셨으며, 반드시 해야 된다는 것이 없으셨으며, 고집함이 없으셨으며,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것이 없으셨다.38
──────── 《논어》 〈자한〉

"박수 칠 때 떠나라"라는 말이 있다. 전성기가 끝나기 전에 미련 없이 욕심을 그칠 줄 알아야 한다는 의미로 쓰이곤 한다. 이 말에는 사실 두 가지 뜻이 있다. 첫째는 남들이 박수를 쳐 줄 때 떠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고, 둘째는 내가 박수를 칠 수 있을 때 떠나야 한다는 것이다.

날이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돋보이듯이, 내가 희미해진 다음에야 내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알게 된다. 공자는 삶에서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질문한다. 추위는 어려운 고비와 시련을 상징한다. 인생의 가장 큰 시련은 나를 잃었을 때 닥쳐온다. 나로 태어나 나로 살아가는 사람은 무엇이든 해낼 수 있다는 희망이 있다. 하지만 세상을 다 얻어도 나를 잃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메아리는 소리를 멈춰야 그치고 그림자는 내가 멈춰야 움직이지 않는다. 아무리 고군분투하더라도 결국 세상의 모든 지식을 섭렵할 수 없음을 인정할 수 있는 사람만이 진정으로 현명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양주의 사상은 ‘위아爲我주의’로 잘 알려져 있다. 위아란 나를 위한다는 뜻이다. 위아주의와 이기주의는 다르다. 이기주의가 남들이 어떻게 되든 말든 내 이익만 챙기는 것이라면 위아주의는 ‘먼저 나 자신을 잘 챙기는 것’을 의미한다. 양주가 먼저 나 자신을 잘 챙기라고 충고하는 이유는 내가 없으면 남도 없고 내가 없다면 이 세상도 아무런 의미를 지닐 수 없기 때문이다.

남들과 힘을 합쳐서 공을 이루는 사람이야말로 위대한 사람이다. 위대한 사람은 남의 의견을 들었을 때 나와 생각이 다르더라도 내 생각에만 집착하지 않는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의 날씨는 제각기 다르지만 결국 한 해는 봄, 여름, 가을, 겨울이 합쳐서 이루어진다.

조급한 생각이 들도록 부채질하는 것이 있으니 바로 고집이다. 물론 모든 고집이 다 나쁜 것은 아니다. 고집에도 좋은 고집이 있고 나쁜 고집이 있다. 좋은 고집을 의지라 하고 나쁜 고집을 억지라 한다. 의지란 나를 극복하는 데 열중하는 것이다. 억지란 남을 이기는 데 집중하는 것이다. 억지 고집을 덜어 내고자 하는 의지가 생기면 자연스레 따라오는 것이 융통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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