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보, 나좀 도와줘 - 노무현 고백 에세이
노무현 지음 / 새터 / 2002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노무현 신드롬이라. 이 글을 쓴 노무현 "의원"이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될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었다. 오늘의 복잡한 정치 문제는 뒤로 하고 이런 질문을 해 본다. 지금은 30퍼센트의 지지받기도 힘겨워하지만, 짧은 시간 동안 그 토록 열광적인 지지자들과 국민 과반의 지지를 이끌었던 2002년 대선에서 우리들은 과연 노무현에게서 과연 무엇을 바랬던 것일까. 이 책은 어렴풋이 나마 그 답을 이야기해 줄 수 있다.

이글을 통해 인간 노무현이 참 다양한 성격을 가진 인물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우선 그는 정치적인 인물이기 보다는 가정적인 인물인 듯 싶다. 솔직히 정치같은 일에는 어울리지 않다는 이야기로 들어도 좋다. 대통령 출마의 변으로 국민들에게 나 좀 도와 달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여보"의 도움이 필요한 줄로 착각하는 그는 실은 생각하는 반경이 아주 협소해 보이는 것도 사실일 것이다. 뿐만 아니라 정견에 있어어도 대다수의 정치광신도인 한국인처럼 그저 정치혐오 정서만을 가진 것으로 보이는 노무현 대통령. 그런 면에서 역시 정치인으로서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고 그의 정치에 대한 무적성을 도덕적으로 비난하고 싶지만은 않다. 그것 외에 인간 노무현은 여전히 매력적인 인물이고 장점도 많다. 88년 민주화 이후 수많은 정치신인들이 등장해 각광받고 명멸해갔지만 그 만은 원칙과 소신을 가지고 자신의 지조를 지켰다는 점에서 그가 완전히 무능한 인물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또한 그가 밖에서만 민주주의자 인척 하는 그의 선배정치인들이나 "진보"들과 달리 가정에서나 밖에서나 일관된 민주주의자였다는 점을 이 책에서 확인할 수 있어 좋았다. 그는 야당내에서나 국회에서나 그 어느 곳에서나 일관된 민주투사였다는 점을 기억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그리고 인간 노무현은 고시공부시절 아내를 불러내 시골 데이트를 즐기던 시절을 회상하는 영원한 낭만주의자이기도 하다. 그리고 의협심이 강해서 시국사건 전문 변호사가 되어 노동자를 위한 투쟁에 발벗고 나선것도 어쩌면 낭만주의자로서의 타고난 기질때문이 아닐까하는 생각이다.

그러나 저러나 재밌는 것은 군사독재시절에는 독재를 그렇게 욕하던 사람들이 노무현 시절에는 노무현을 욕한다. 대통령은 이러나 저러나 욕먹는다는 말이 실감이 난다고 하겠다. 정치학자 마키아벨리는 민중이란 어려운 시절을 불평을 하지만 태평성대에도 권태를 느끼는 변덕스런 존재라고 갈파한 바 있다. 내가  이 책을 다시 읽고 생각한 것은 과연 대한민국  국민들이  대통령에게 무엇을 바라는지 아리송하다는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대망 세트 1 : 1~12권 - 전12권 (무선) 대망
야마오카 소하치 지음, 박재희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5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근래 명성이 자자했던 대망을 직접 읽어보고 크나큰 감명을 받고 있는 중이다. 마치 금년에 월드베이스볼 클래식에서 일본의 "스몰볼 야구"가 미국의 힘의 야구와 당당히 맞서서 세계 1위라는 엄청난 성적을 내었듯이 이본이라는 작고 외딴 섬나라에서 있었던 사사로운 사건들에서 이처럼 많은 절절한 감동과 정신을 맑에 깨치는 교훈을 주는 이야기를 풀어갈 수 있다는 데서 일본 나라의 저력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읽어가는 동안 저자 소하치의 역사에 대한 통찰과 유려한 심리묘사에 탄복하여 거듭 고개가 숙여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 책은 명실공히 아시아 소설사상 최고의 베스트셀러 중에 하나일 것이다. 일본 소설로서 일본과 한국에서 동시에 이처럼 많은 판매부수를 기록한 책은 이 책이 처음이 아닐까 한다. 이 책이 이와 같이 될 수 있었던 이유를 곰곰히 생각해보면 그것은 단지 소하치의 필력의 힘만으로 생각되지 않는다. 생각해보면 그가 이에야스의 시대를 그리지 않았다면 소하치도 그저 별볼일 없는 삼류작가로 늙어죽었을런지도 모른다. 작가의 역량도 역량이지만 소재자체도 좋았다. 내 개인적인 견해로는 일본에 있어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뒷날 토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되는 다께찌요가 태어나던 시기의 일본은 새로운 문화적 충격의 소변혁의 시대였다. 이 때 멀리 포루투갈에서 바다를 건너 일본에 와서 통상을 시작하였다. 하비얀 같은 선교사는 포교활동을 시작하면서 전통적인 유학자 승려들과 학문적 논쟁을 벌였으며 이미 일본서민층에 깊이 침투한 기독교는 봉건압제자의 수탈에 신음하는 민중으로 하여금 반란을 일으키는 등 일본의 기존 질서는 동요하고 있었다. 아시카가(足利)가문의 무로마치 막부는 이미 유명무실하고 이제 일본 나라는 군웅할거하는 센카쿠(戰國) 시대로 접어들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오다 노부나가는 서양에서 수입한 조총 개량 및 전술 개발을 통해서 강력한 라이벌인 다케다 신겐을 물리치고 일본 통일의 가장한 유력한 주자로 나섰던 것이었다. 뒷 날 천민에 불과했던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새로운 패자로 등극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만큼 노부나가가 능력위주의 등용에 혜택을 본 첫 세대였던 것이었다. 그래서 내 생각은 오다 노부나가가 없었다면 그의 이러한 신사고가 없었다면 결코 히데요시나 이에야스의 통일도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솔직히 이 책의 원제가 <토쿠가와 이에야스>라 하나 사실은 오다 노부나가가 죽고 나면 재미가 반이상 감소할 만큼 노부나가의 역할이 큰 것이다.

이 책은 노부나가의 아버지 오와리의 성주 오다 노부히데가 "약한 놈은 망해야 돼!"라는 말을 지껄이는 데서 시작한다. 그는 번영하는 영주로서 아들 노부나가에게 제법 되는 유산을 남겨주고 죽는데 반해 다께찌요는 고작  강력한 인근 오다 가문과 이마가와 가문 사이에서 핍박당하는 작은 오카자키의 영주의 아들로 5살 부터 부모를 떠난 볼모생활을 시작한다. 그리고 분열된 일본이 오다-토요토미-토쿠가와에 의해 통일되는 과정을 이 소설을 통해 볼 수가 있다. 정말 훌륭한 동양적 전통을 계승한 소설이라고 생각한다. 흠이라면 오다 노부나가가 죽고나서 다소 재미가 없어지는 것이 그렇다. 오다는 토쿠가와 이에야스와 동맹을 맺고 일본통일의 문턱까지 와서 자신의 부장이던 아케치 미쓰히데의 기습을 받고 혼노지(本能寺)에서 어처구니 없이 사망한다. 오늘날까지 아케치의 반란 동기에 대해서는 의문점이 많다고 전해진다. 일본통일을 눈앞에 두었던 노부나가에게는 원통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도  적은 멀리있는 것이 아니라 혼노지안에 있는 것이라는 값비싼 교훈을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다. 노부나가의 죽음으로 일본은 결국 이에야스 가문의 통치를 받게 되고 그가 여는 에도시대가 평화의 시대라곤 하지만 다소 보수적 복고시대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어쩌면 일본 나라가 여러가지 격변과 변화를 수용하면서 안정을 찾아가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어쨌든 이 책은 동양적인 전통을 고수하면서도 높은 품격을 유지하는 동양의 대표소설이라고 할 만하다.

또한 이 책은 일본 군국주의의 바탕이 되기도 하는 위험한 책이기도 하고 일본 전통의 칼의 문화 단면을 가장 잘 나타내는 책이기도 하다. 독자들의 주의가 각별히 필요하기도 하다. 이 책의 다른 번역본으로 솔출판사의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있으나 본인이 읽은 것은 <대망>이므로 여기에 리뷰를 남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몽테뉴 나는 무엇을 아는가
미셸 드 몽테뉴 지음, 손우성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5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드디어 이 책이 온전한 형태로 재간되었다는 점을 먼저 기쁘게 생각한다. 사실 한 일 년 전 쯤 재간된 판에 인명사전 등이 삭제된 형태로 나와서 적지 않이 분노하였던 차이다. 이 번 판에서는 인명 및 테마 사전이 다시 나왔기에 독자들에게는 보다 몽테뉴를 제대로 느낄 쑤 있는 좋은 기회를 제공하게 될 것이다.

몽테뉴. 흔히 어쭙지 않은 사람들이 이 몽테뉴의 사상을 함부로 이러느니 저러느니 단정을 짓는데 나는 그것을 보면 코웃음이 나온다. 어떤 면에서 몽테뉴는 동양적인 의미의 겸손함을 가진 인물이었던 것이다. 그의 좌우명은 한마디로 요약된다.

"내가 무엇을 알겠는가?"

이런 좌우명을 가진 그가 자신의 사상을 자랑하려 이 글을 쓰는 위선을 행하였으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몽테뉴는 신구교의 대립에 의한 종교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소극적이나마 관용을 주장하는 어쩌면 한 평범한 소시민의 바램을 좀 현학적으로 세련되게 표명한 것일 수도 있다. 따라서 몽테뉴의 이런 자유자재한 수필들을 이러저러한 이야기를 해서 자신만의 독특한 몽테뉴를 빚어내기 보다 이 책을 한자 한자 읽어가며 몽테뉴의 이야기를 들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이 책을 읽는데는 서양 역사에 대한 어느 정도의 이해가 잇어야한다. 특히 고대 중세사를 알아야 하며 중세 철학 이나 적어도 플라톤 정도는 미리 알면 도리어 아주 재밌게 읽을 수 있기도 하다.

그러나 나 역시 한가지 나름대로 해석하고자 한다면, 한국적인 상황과 맞물려 이 관용이란 주제에 대해 한마디 하고 싶다. 지금의 한국 사회는 지나치게 관용이 부족하다. 무엇이든 빨리빨리이고 사람들이 깊이 생각해서 의사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때 그 때 감정에 아주 충실한데 그 바탕은 아마 사회적인 불공평에 대한 반발심때문으로 보인다. 아마도 한국 현대사를 관통하는 종교전쟁 못지 않은 비극이었던 625의 영향으로 보여진다. 전쟁전에는 북진통일을 주장했던 노대통령은 막상 전쟁이 나기가 무섭게 도망가는 것으로 부족해 전략적인 가치조차 의심스런 조치를 취했다- 북한은 다른 도강 준비가 된 상태였다. 한강 폭파. 자세히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것도 대한민국의 정통성에 의문을 제기하고도 족히 남음이 있다. 담당자는 통행제한을 가한 상태에서 폭파한 것도 아니오
피난민들이 북적되는 다리 한복판을 파괴했다. 이런 대통령이 다시 돌아와서는 살기 위해 부역했던 사람들에게는 가혹하게 대했으니 참으로 어질지 못한 사람이란 생각이 든다. 오늘날 이 대한민국이 비록 밥술이나 먹게 되고 좀 사는 것처럼 되었지만 여전히 이 나라가 정의로운 나라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는 것 같다. 오히려 약육강식의 정글의 법칙이 좌우한다고 많은 사람들은 느끼고 하루하루 내가 먼저 사기치지 않으면 손해본다고 생각하며 사는 것으로 필자는 본다. 관용을 말하기 전에 이 대한민국에서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무자비하게 굶어죽거나 맞아죽거나 혹은 손해보고 살았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에게 남은 것은 오직 무질서 뿐이라는 생각이다.

그런 의미에서 몽테뉴가 꿈꾸던 관용에 매력을 느낀다. 그것은 다른 말로는 "신중함"이라고도 할 수 있을 듯 싶다. 사실 서양이 우리랑 다른 별천지에 그 나라 사람은 매우 우수한 것과 같이 느끼지만 서양사람들도 역사를 들여다보면 우리의 오늘처럼 무질서와 혼란을 다 겪어 보았던 것이다. 몽테뉴가 이 책을 쓴 이유도 바로 인간은 다 거기서 거기인 그런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개인 적으로는 몽테뉴의 죽음에 관한 고찰을 매우 감명깊게 읽었다. <철학을 하는 것과 죽음을 배우는 것>을 동일시까지 했던 그였기에 죽음은 결코 두려워 할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탐구되어야 할 인간사의 한 부분에 불과한 것으로까지 격하되었다. 이는 전편에 넘치는 몽테뉴의 소극성에 비해 매우 적극적이라는 인상을 받는다.

<식인종에 관하여>,<기형아에 대하여> 와 같은 문화인류학적 또는 병자 사회학적인 편견에 대한 고찰을 통한 관용론에 대해서는  열광적인 지지를 보내고 싶다.

그나저나 혼자만 잘살면 된다는 정글의 법칙이 지배하는 이 대한민국에서 한 번쯤 보다 잘 살기 위해서라도 한번 쯤 쉬어가는 마음으로 편안히 읽어보기를 권해보고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국제어 시대의 민족어
복거일 / 문학과지성사 / 1998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識者憂患.

나는 이 책과 그간 복거일의 주장을 살펴보면서 이러한 생각이 들었다.보통의 인물들 평범한 인간들은 사물을 있는 그대로 정직하게 본다. 그런데 꼭 문제가 되는 것은 스스로 "조금 더 안다"고 생각하는 어쭙잖은 지식인일 때가 많다.  그런 면에서 <범인에겐 침을, 바보에겐 존경을, 천재에겐 감사를> 이란 어느 가난한 조각가에 슬픈 유언에  더욱더 고개가 끄덕여진다.

민족을 핑계로 무지막지한 쇄국주의 폐쇄주의를 애국으로 착각하는 많은 한국의 세태에 일침을 가하는 것까지는 좋은 생각이었다고 인정한다. 그런데 그것에 한걸음 나아가 영어를 공용화하여야 한다는 데에서는 어쩌면 이 복거일이란 사람도 사실 지적으로는 그가 비판하는 보수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협소한 주견밖에는 없을 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가진다. 識者憂患. 자신의 전문분야에 대해 잘 아는 듯한 착각이 들면 괜히 우쭐하는 것이 인간의 심사인 것을 보면 그러한 무모함이 오늘날 우리사회에 쓸데없는 근심거리를 더하는 것 같아 마음이 매우 착잡하다. 하긴 잘 생각해 보면 이 복거일이란 사람 비록 識者憂患 의 범주에 들더라도 꽤 순진하고 들어줄 만한 주장이 많다고 느끼기는 하다. 국어를 공격하는 더욱 사악한 시도의 조갑제나 조선일보류의 꼴보수주의 보다는 매우 순수한 주장일 것 같다.

두 조씨들은 마치 한글전용이 우리 문화수준을 크게 하향시켰다고 보는 것 같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는 우리 무화수준은 예나 지금이나 그대로이다. 우리 문화는 조선후기이래 큰 침체기를 맞았고 아직 회복하지 못했을 뿐이고 그리고 이제 얼마 안된 한글 전용 당연히 우리의 지금의 문화수준을 고대로 반영하고 있을 뿐인 것이다. 이들에게는 과거 세종대왕님께서 최만리등 속된 선비를 꾸짖으셨던 "庸俗"한 지식인의 범주에 든다 하겠다.

영어공용화론을 주장하는 복거일은 전형적인 무력학 지식인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공용화하는 인도, 필리핀은 얼마나 잘사는가? 무력한 지식인은 헛된 이미지에 잘 속는다. 어디 미국 영국이 잘사는 것이 영어를 쓰기 때문이라던가? 참으로 식자우환이란 한국사회의 불치의 병이란 생각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신기관 - 자연의 해석과 인간의 자연 지배에 관한 잠언 한길사 한국연구재단 학술명저번역총서 서양편 1
프랜시스 베이컨 지음, 진석용 옮김 / 한길사 / 2001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그럭 저럭 괜찮은 책이다 싶은 것들이 모처럼 나와서는 속속 절판되는 현실을 가슴 아프게 지켜 보고 있다. 그런 아쉬움을 주고 있는 책 중에 하나가 프란시스 베이컨의 이 <신기관>이다. 베이컨을 흔히 철학자로 인식하지만 오늘날의 기준으로 그가 어디에 속하는지는 좀 모호한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이 글의 2부에서 과학적인 문제를 다루고는 있으나 동시대의 케플러등의 발견을 "사기"정도로 밖에 보아줄 식견을 가지지 못한 그에게 일정한 과학적 소양이 있었다고 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베이컨은 철학자라고 하기에도 좀 문제가 있다. 흔히 경험론의 시조라고는 하나 철학적 측면에서 경험론이라 할 만한 것을 내세웠던 것은 로크이다. 실제 그에게는 철학이론이라 할 게 전혀 없는다. 그가 철학자로 오해되는 것은 일부 비전문가적 대중에 의해서이다. 그것은 그가 목소리를 높여 "반(反) 플라톤"을 외쳤기 때문일 것이다. 대충 보기에 오늘 날의 기준으로 보기에 그는 역시 대부분의 동시대의 철학자들이 그렇듯 학자와는 거리가 멀다. 어떻게 보면 지식 사회학자이자 사회의 구습을 개혁하려는 문화운동가이자 사상가라 정리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이 명저에서 그가 전력으로 맞부딪히려하는 것은 중세이래의 정치,경제, 학술 등 전 분야에서 구태의연한 악습들이라 하겠다. 그러한 승부는 베이컨이 보기에는 불가피한 것이었으며 그것을 통해서 인간은 보다 높은 위치 자연의 지배자로 우뚝설 수 있다는 것이 그의 확신이었다. 비록 이 글에서 보듯 베이컨은 대단한 학자나 난해한 사상가는 아니었지만, 많은 부분 사회의 악습과 인간의 무한한 능력을 계발하는데 당시의 장애요인이 무엇인지를 명확히 제시하고 있다. 그것은 중세이래 쓸데없는 권위주의, 공허한 관념론, 경험무시 이런 것들이다. 그런 것들 이데아라고 미화되는 것들에 대해 그는 과감히 이돌라(Idola)-우상이란 이름을 붙여 주었으며 그의 사상을 계승한 영국은 수백년후 대양을 지배하는 세계의 패자가 되었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  

한국 사회를 보자. 실력은 갖추지 못하고 어정쩡한 권위로 군림하지도 못하고  무슨 일도 과감하게 실천하지 못하는 우왕좌왕 백태를 연출하는 정치지도자들. 그들이 왜 그렇게 무능하게 되었는가? 그것은 바로 경험의 부족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를 보더라도 관념적인 것을 아무 근거없이 숭무나 실용 실천이나 경험보다 우위에 두는 구습이 사회 발전의 동력을 무섭게 갉아먹고 진을 빼놓고 있는 셈이다. 그런 면에서 이 베이컨의 저서는 오늘날 한국사회에도 더 없이 소중한 빛을 던져주고 있다할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