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세트 - 전7권 이병주 전집
이병주 지음 / 한길사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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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동안 남한의 반역자들인 빨치산에 대해서는 이미 아주 많은 소설이 써졌다. 그 중에 하나가 조정래의 <태백산맥>이다. <태백산맥>이 나오기 까지는 가장 유명한 빨치산 소설이 바로 이 소설이었다. 그러나,  <태백산맥>이 진보적인 시각에서 빨치산의 형성과 발전 전개 과정을 다룬데 비해,  우익 성향 작가의 이문열의 이 글에대한 추천사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이 글은  다소 보수적인 관점에서 빨치산과 남한내 좌익진영의 활약을 비판적으로 다룬다는 점이 대비되는 점이라 할 수 있다. 두 소설 모두 기본적으로 빨치산 개개인에 대해서는 항일의식과 투쟁 경험을 가진 열정적 애국자들이라는 면에서는 공통적인 인식을 갖고 있지만, 그들의 투쟁 방향을 사실상 지도했던 남로당 등의 배후 정치세력들에 대해서는 다른 입장인 듯하다. 이 부분에 관해서 조정래는 철저히 침묵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고 저자 이병주의 경우 그들에 대한 책임을 엄중하게 묻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은 어떤 면에서는 다큐멘터리라고 할 수 있지만 소설로서 예술성 면에서는 <태백산맥>과는 뚜렷한 차이가 있다.  표현 기교에서도 마치 하나의 우화나 동화를 보는 느낌으로서 사건전개가 평이하고 나오는 인물들도 매우 순진하고 평면적인 인물들이다. 그런가 하면 후기에서 "작중에 등장하는 인물은 대부분 실존인물이다"라고 하였지만 대부분 그렇지 않아 보인다는 점이다. 박태영과 같은 인물 이규같은 인물들이 과연 실존인물이란 것은 도저히 믿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이현상과 같이 실명을 쓴 사람의 경우도 상당히 소박하고 단순한 인물로 처리되고 있다. 그는 남로당의 입장을 대변하는 인물이지 실제의 이현상과는 거리가 있는 것이다. 대표하는하준규의 경우 하준수로 짐작은 되지만 주요 사건은 맞지만 성격과 같은 것들은 저자가 임의로 단순화 시켜놓은 말하자면 작가가 만들어낸 작중인물에 불과한 듯 하다.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즉 이 소설의 상당부분이 저자의 주관에 의해 인위적으로 재구성되었다는 의심의 소지가 있지만, 그 대신 소설 <태백산맥>이 짚어내지 못하는 문제들과 함께 현대한국사에 대한 저자의  고뇌와 문제의식을 여러가지 사상과 문예사조 등과 결합시키고 있다. 그런 면에서 이 긴 다큐멘터리야 말로 저자의 투철한 역사의식의 산물임을 의심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편집자 이문열 말대로 "균형 있는 시대정신의 회복"이란 면에서 까지 이 소설의 의미를 폄하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 책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저자가 오랜 경험을 통해 쌓아온 고민의 성과들을 공유했으면 하는 바램이다. 아쉬운 점은 이것이 사상적으로 상당히 제약받은 7-80년대의 작품이라 <태백산맥>과 같은 시대에 씌어졌다면 좀더 직설적일 수 있을 지 않았을까하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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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호대부 2021-05-27 0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병주와 그의 대표작 중의 하나인 지리산의 문학적 무게를, 감히 조정래의 태백산맥 따위와 비교하는 것은 이병주에 대한 모독이라 할 것입니다
 
태백산맥 - 전10권 조정래 대하소설
조정래 지음 / 해냄 / 200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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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방정국과 6.25에 이르는 건국초의 혼란상에 남한 빨치산처럼 억울하게 죽어간 사람들도 없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그 들중 다수가 죽음을 각오할 만큼 자신의 신념이 옳다고 자신하고 있는 용사들이었고 또 상당수가 항일 경력이 있던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그들은 북한으로부터는 소모품처럼 취급되었으며 미군정과 신정부로부터는 가혹한 탄압을 받았던 것이다. 비록 이 소설에도 드러나듯 그들 자신이 수많은 증오 범죄와 보복학살을 행한 당사자로 자신들이 혼란을 더한 죄인이라는 것을 아주 부인할 수는 없을 망정 최소한 그들을 위해 충분한 변명의 기회를 주어야 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전후 빨치산을 소재로 한 소설이 계속 출간되었지만 이 책에 의해 비로소 빨치산의 다소 억울함이 해소되고 마치 그 때 그 인물들이 다시 나타난 듯한 느낌마저 든다. 왠지 그들이 원통하게 죽어 지금 지리산이나 태백산맥 어느 곳을 배회할 그들의 영혼이 이 책을 읽고 비로소 원한을 풀고 저승으로 갈 것같다. 그러한면에서 역사가 단지 '힘있는 자들의 기록' 이어서는  안된다는 저자의 말에 공감한다.

이 책은 여순반란이 실패로 돌아가서 벌교지역을 접수해 인민재판과 토지개혁을 실시했던 빨치산 두목 염상진이 노출된 조직원을 이끌고 다시 산으로 숨어드는 데서 시작한다. 그리고 여기서 부터 그들은 실제 역사에서 그러했듯이 해방정국과 맞물리며 토벌대,군경을 상대로 역사와 민족을 위한 가열찬 투쟁에 들어간다. 그러나 기쁨도 한 때, 그들은 잠시 6.25직후 인민군의 진주로 고생 끝에 해방의 감격을 맞이하였으나 인민군과 함께 북으로 가지 못하고 입산한다. 전선은 교착상태에 빠지고 김일성 등은 그들을 남겨둔채 휴전협정에 나선다. 이 때 부터는 더이상 빨치산들이 자신의 투쟁목표를 상실한 시점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민공화국"을 위해 순교자가 되어야 한다는 그들의 결의에서 나는 어떤 묘한 냉소를 느꼈다. 좌우익을 막론하고 많은 연구자들이 도대체 그들은 무엇때문에 순교자가 되었는지 혀를 끌끌 차는 것은 아마 이 때문일 것이다. 그들 중 과연 얼마나가 공산주의가 무엇인지나 알기나 했을까하는 이야기는 괜히 하는 것이 아닐 것이라는 것도 냉엄한 현실임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결국 이런 사면초가의 상황에서 그들의 선택은 투항이냐 죽음이냐하는 것이다. 주인공 염상진은 기꺼이 자신을 포위한 토벌대 앞에 투항을 거부하고 부하들과 자폭한다. 살아남은 사람들의 새로운 다짐과 결의로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어쨌던 당시의 숨막히는 상황을 소설을 통해 재현하는데 성공했다. 그것이 조정래 소설의 매력이고 그래서 그의 소설을 좋아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조정래의 인물 설정에 대해서는 유감이다. 쟁쟁한 실존인물들을 놔두고 하필이면 가공 인물은 염상진을 주인공으로 설정했다는 점이 그런것이다. 사실 고독한 영웅(?)을은 실제로도 널려있다. 의문의 죽음을 맞이한 남부군 사령관  리현상, 육본 지휘부까지 나서 구명운동을 했던 대남유격대총사령관 남도부 등은 실제로 남과 북으로 부터 무수한 훈장과 포상을 받고 영화를 누리를 사람들에 비해 전혀 손색이 없는 외면받은 한국전의 영웅이라고 생각하는 나로서는 염상진이 별로 기대에 맞지 않음이 아쉬움이다. 또한 김범우와 같은 갈등하는 지식인 상은 이광수의 최초 소설 이형식 이래 항상나오는 계몽주의의 표본인 것 같아 내내 마음에 걸렸다. 그는 행동하는 구태 그 자체였다. 또한 3류소설에서나 나올 만한 뻔한 소재도 간간히 신경을 거슬렸다. 예를 들어 우익단체 간부가 빨치산의 아내를 강간하는 장면 같은 것은 너무 유치하지 않은가 한다. 하지만 어차피 독자를 겨냥하는 소설이어야 한다면 이와 같은 통속성도 용인되어야 하는 것이 현실이니 어쩔수 없을 것이다. 

이렇게 말하니 내 본심이 드러난 듯하다. 사실 나는 이 소설이 완전히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소설의 한계이기 때문이다. 어차피 역사자체가 주인공인 이러한 류의 소설에서 인물설정에는 한계가 있을 것이다. 물론 소설로서는 훌륭한 소설이다. 하지만 조정래 못지않게 역사를 사랑하는 나의 입장에서 적지 않이 실망한다. 지은이의 역사관 자체에도 그다지 사실 큰 공감은 못한다. 나는 역사에 대한 어떤 주견을 가진 역사주의자가 아닌 리얼리스트이기에 직접 경험하기 전까지 역사에 대해서 아무것도 알수 없다고 생각한다. 어떤 역사라도 그 역사를 남긴 사람들의 가치관이나 기타의 주관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면 하물며 소설의 한계는 명확한 것이다. 물론 이와 같은 현장감있는 경우에 있어서는 하나의 시뮬레이션이 되기는 하겠지만. 이제는 우리 모두 하대치와 같이 상진의 무덤앞에서 눈앞에 닦친 진짜 현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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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자와 유키치 - 탈아론을 어떻게 펼쳤는가 역사 속에 살아 있는 인간 탐구 16
정일성 지음 / 지식산업사 / 200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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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최고액권의 모델이 메이지 천왕이 아니라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란 사실은 참으로 의외의 일이다. 메이지 유신을 필두로하는 일본의 개화시대에 있어서 그 만큼 후쿠자와 유키치의 역할이 지대함을 느낄 수 있을 뿐 만아니라 이 후쿠자와 유키치는 그 시대에 있어서만큼은 적어도 일본적 사상가가 아닌 범동양적 사상가였다. 그가 '일신의 독립이 일국 돕립의 기초"란 신념의 자유사상을 옹호하는 <학문의 권장>을 저술하던 1870년대까지만 해도 그는 서세동점의 정세 속에서 동요하던 동양의 학계에서는 거물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이후 그의 여러가지 국가주의자로서의 사상적 변모 과정을 통해 우리에게는 <탈아론>을 통해 일본 제국주의의 사상적 뿌리로 부정적인 인식을 남기고 있다.

아직 이 개화기의 거장이 남긴 변변한 역서가 부조한 이 때, 나름대로 이 책은 후쿠자와 유키치의 일생과 그의 사상적 변화과정을 개략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대략 후쿠자와의 삶과 사상은 1880년 경을 기준으로 확연히 나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이전에는 서양세력 침투에 따른 개방과 개혁을 통한 국가 재건을 목표로 한중일을 망라한 모든 아시아 국가의 개화와 협력을 주장했다면, 일본의 국가 건설이 어느정도 성장하고 해외로의 팽창을 준비하는 시점에서 그는 국가주의자로 일변하였다. 그러므로 그의 사상은 이러한 확연히 다른 두가지 관점에서 마치 두 명 전혀 다른 인물의 후쿠자와를 조명해 둘 필요가 있다.

 후쿠자와는 한국에 대해서도 비상한 관심을 가졌던 인물이었다. 그의 조선에 대한 평가는 과거 역시 한학을 했던 사람으로서 매우 훌륭하다는 한편으로 어떤 컴플렉스마저 갖고 있었는데 그의 당대에 조선은 왜 이렇게 퇴보해 보이느냐에 대해 매우 고민했다고 한다. 그에 대한 답은 조선은 진보도 퇴보도 한 것이아니라 그저 정체된 것일 뿐이어서 나날이 일신변화하는 현대문명으로서는 조선은 퇴보된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 한학과 서학을 겸하고 막말의 동양문명권과 개화된 메이지시대를 다 살아본 대학자의 평가이니 이는 우리도 한 번 귀기울여볼 만한 말이라고 생각된다. 또한 그는 한국내의 영세한 수준의 개화학자들에게는 넘을 수 없는 거대한 산이자 흠모의 대상이었고 유길준 등 많은 한국인 제자를 양성하고 김옥균 등의 개화정치가와 인연을 맺은 한국 개화사상에도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한 사람이었다. 여기까지면 한국과 그의 인연은 꽤 긍정적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 책에서는 그의 한국과의 악연을 이야기하고 있다. 명성황후 시해사건에 그의 추종자들이 다수 관련되어 있어 이 사건에 대한 그의 개입정도가 어느 정도일지 의심받고 있는 것이다. 후쿠자와의 학문적 위상과 그간의 인연을 볼 때 이는 돌이킬 수 없는 실수이다. 명성황후 사건으로 인해 일본과 한국은 그야말로 불구대천의 관계가 된 것이며 만일 사실이라면 동양평화를 그토록 부르짖던 그가 씻을 수 없는 원한의 씨앗을 그의 손으로 손수 뿌려노았을 것이니 안타까운 일이다.

대체로 후쿠자와의 후기행적은 한국인이 나로서 많은 아쉬움을 갖게 한다. 당대의 개화사상가들과 동양의 많은 서양학도들의 이유도 그랬겠지만 후쿠자와가 그 토록 흠모받은 이유는 서양학과 동양학의 간극 사이에 방황하는 그들에게 후쿠자와는 하나의 개척자요 선구자요 모범이었다. 그는 범 동양적인 인물로 자리매김 될 수도 있었지만 이제는 그저 일본의 영웅에 만족해야만 할 것 같다. 그는 도대체 왜 그랬을까? 허나 죽은자는 말이없다. 이 책 표지에 나오는 그의 사진 처럼...  후쿠자와를 흠모했던 조선청년 중에는 이광수도 있었다고 한다. 어쩌면 이광수가 <무정>에서 구식여자와 신식여자 사이에서 고뇌 갈등하는 지식인의 모습은 학자나 학생으로 치면 신학문과 구학문 신생활과 구습 모두에 잘 영합해야 하는 자신의 모습의 투영이었으리라. 재미있는 건 이광수 역시 후쿠자와와 비슷한 길을 걸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광수에게도 마찬가지겠지만 후쿠자와라고 그렇다고 모두 나쁜 면만 있는 것이 아닐 것이면 다소 위험한 사상가지만 혼란한 시기에 한 개척자였던 그의 사상도 좀더 냉정하고 정당하게 평가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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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솝우화 소담 베스트셀러 월드북 31
이솝 지음 / (주)태일소담출판사 / 199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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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에 읽은 동화 한편은 오랜 세월이 흐른 후까지 잊혀지지 않는 강렬한 인상을 남길 때가 많은데 그런 책 중에 이솝우화가 으뜸이다. 어린 시절에는 그저 재미로 읽어갔고 몇 메이지 넘긴 후에는 지루해 지기도 했었는데 요즘 다시 이솝 우화를 보면 이 것이야말로 참으로 빼놓을 수 없는 세계적인 명작이 아닌가 한다. 이 속에는 그야 말로 인간 세계의 모든 것들이 너무도 재치있게 다루어지고 있어서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솝이 태어난 그리이스는 가장 먼저 민주정치가 발전되어 합리적 토론 문화가 정착되어 합의된 공의에 의해서 인민이 국가의 정책을 직접 결정할 수 있는 공화국 체제였다. 그러나 이러한 정치가 순기능만 있는 것이 아닌 것이다. 많은 부분 대첵없이 포퓰리즘에 영합하는 정치인들이 나타남은 민주주의 숙명이 이라고 보면 지나친 것인가? 어쩌면 이솝우화에 등장하는 수많은 궤변들은 아마 그 당시 등장하는 수많은 선전선동가들을 풍자하고 있는 것같은 느낌이고 그 배후에 있는 인간의 심리 깊은 곳에서 그런 새빨간 거짓말들을 마구 지껄이게 하는 욕망들을 적나라하게 폭로하는 듯한 느낌이다. 이는 마치 한비자에 나오는 "모순(矛盾)"이란 설화를 연상케 한다. 즉 창장사와 방패장사를 겸한 한 장사꾼이 등장해 자신의 방패와 창을 공히 천하에 당할 것이 없다고 선전하는 것이다.

또한 여기에는 뚜렷한 지도자를 발견하지 못한채 "조삼모사"의 허튼 꾀에 빠지고 작은 자신의 욕망을 억제하지 못한채 그 욕심으로 인해 망하는 우중들의 슬픈 현실도 명백한 것이다. 이러한 한 판의 코미디극을 통해 이솝은 무엇보다 민중과 정치인의 각성을 촉구했던 것이리라. 그러한 잘못으로 빠져나와서 현실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우선 스스로 깨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문제의 첫 시작이라 할 만하다. 그러한 면에 있어서 이것은 한편의 감동적인 우화다.일찌기 예수나 석가도 헛되이 방황하다 무간지옥에 빠지는 불쌍한 중생들에 대해서 자연 많은 부분을 언급하였다. 그들이 포교한 이유도 이런 슬픈 현실을 개탄하고 중생을 제도하기 위한 것이었다면 이솝의 이러한 우화도 사람들에게 진실한 깨우침을 주기에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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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사 산책 1960년대편 1 - 4.19 혁명에서 3선 개헌까지 한국 현대사 산책 6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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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준만의 책을 어느 류로 묶어야 적당할 지는 모르겠지만 암튼 요즘 인문사회 계통에는 그 만큼 흥행에 성공하는 작가가 없는 듯하다. 또한 그는 상업주의를 자신이 굳이 지양할 뜻이 없음을 공언하고 있으며 <인물과 사상>단행본 시리즈이래 과도한 다작에서 오는 작품하나의 퀄러티에 대한 독자들의 의구심을 쉽게 불식시키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도 그는 아직 많은 강빠(?)들을 거느린 독서시장의 거물로 성장해 있다. 이는 오히려 우리나라 인문사회 쪽으로 정말 실력있고 성실한 작자들이 아직 나타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이런 류의 가벼운 농담을 곁들인 현대사류들이 권위있는 교양서역할을 대신하는 것이 아닐까? 그 나마 다행인것은 강준만의 자료실에는 학자들의 논문은 물론 일반 대중매체, 역사적 사료가 될 만한 갖가지 자료들이 무려 1만여 개의 테마별 파일 속에 정리되어 있다고 한다. 이 정도라면 비전공자인 강교수도 한국현대사를 논할 자격은 있지 않은가 싶다.

한국현대사에 관하여 대학시절 기억나는 책은 강만길의 <고쳐쓴 한국현대사>, 박세길의 <다시 쓰는 한국현대사>정도다. 지금와 생각하면 강만길의 책은 너무 학술적이라 따분하고 박세길은 친북적이고 다분히 선동적 관념사관으로 문장이 거칠었다는 생각이다. 그리고 강준만의 책은 흥미 본위의 사건을 많이 첨가했으며 저자 자신의 주관적인 역사의식이 과도하다고나 할까. 그는 마치 역사상의 실존인물들이 자신의 취향과 기호에 맞추어 행동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러한 면에서 그의 독특한 양비론이 이 책 전편을 휘감고 있다. 박정희의 기회주의도 문제지만 장면의 무능도 그에게는 도저히 봐줄 수 없는 문제다. 춘추전국의 대사상가인 한비자는 요를 칭송하는 동시에 순이 풍속을 바로잡았다는 유가의 주장을 모순이라 하였다. 그런데 강준만은 쿠데타세력과 장면을 번갈아 칭찬하기도하고 비난하기도 하는점이 의아하다. 저자에게 한가지 질문을 하고 싶다면 과연 저자가 516을 긍정으로 보느냐 부정적으로 보느냐에 대한 것이다.

어쨌든 나름대로 강준만은 균형적인 입장에 서려고 노력한 흔적이 보인다. 나름대로 박정희에 대해서도 긍정적인 면들을 실었고 장면을 위한 상당한 분량의 변명거리와 또한 그의 한계에 대해 나름대로의 답을 내놓고 있다.

한가지 아쉬운 점은 내가 저자의 서문에 조금도 동의할 수 없다는 점이다. 그는 박정희를 말하여 마치 한국적 기회주의자의 대표인 듯이 묘사했는데 나는 그것이 저열한 포퓰리즘정도로 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이렇게 말하면 내가 무슨 박빠라도 된 듯 생각할 지 모르겠으나 나도 박정희를 별로 좋아하는 사람은 아니다. 의심할 바 없이 박정희는 합법적 민주정부를 폭력으로 뒤엎고 민중위에 군림한 폭군이고 독재자이며 옛날같으면 삼족을 멸할 역적이다. 하지만, 박정희를 좀더 깊숙히 연구해 본 사람이라면 그런 이면에 나라의 대통령으로서는 할일을 했다는 점을 쉽게 무시할 수가 없고 바로 그 점 때문에 박정희에게 침을 뱉기가 망설여 진다. 요를 말하면 윤보선이 516을 올것이 온 일종의 당위라 인정하여 당시의 상황을 말했듯 그 이후의 상황도 박정희가 대통령으로 할일을 한 것 뿐었다. 나는 박정희정도의 인간을 가지고 기회주의자로 평가하는 것에 찬성할 수가 없다. 물론 포퓰리즘적으로 표피적인 면만 들여다 보면 천왕에게 혈서까지 쓰고 황군 장교로 자원했던 사람이 대통령이 되어 민족지상과 민족적 민주주의를 외쳤으니 대단한 위선이고 기회주의라고 봐줄 수도 있다. 인간이기에 물론 실수도 있었고 대통령 한 번 더 하려고 지역감정까지 부추긴 야비함도 있었지만, 박정희시대를 잘 들여다보면 의심할 바 없이 그가 대통령으로서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최선을 다한 사람과 기회주의자가 동일시 될 수가 있는지 한국적 포퓰리즘을 오히려 단죄하지 않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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