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 세트 - 전10권
나관중 지음, 황석영 옮김, 왕훙시 그림 / 창비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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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이 문학에 대해서 전문가는 아니지만 요즘 하고 싶은데도 못하는 말들이 너무 많은데 차마 다 하지 못하고 울컥 삼키는 말들이 너무 많다. 한마디로 우리의 문학풍토와 현실이 너무 싫은 것이다. 단적인 예로 삼국지 번역이 널리 유행하여 출판계의 판도를 바꾸어 놓는 것 이것이 과연 바람직한 현상일지 걱정이 앞선다. 꼭 삼국지 현상만은 아니지만 그래도 내가 이 삼국지를 통해서 정말 입에 발린 소리가 아닌 쓴소리를 해보아야 할 것 같은 생각에 이렇게 키보드를 두드린다.

황석영씨가 "노후"대비 차원에서 썼다고 태연히 밝히고 있는 이 황석영의 삼국지 정말 이렇게 낯이 두꺼워 질 수 있는가. 그간 그가 그려왔던 작품세계에 비춰 정말 그러한 발언이 농담임을 굳게 믿음으로서 스스로 위안을 삼아볼 수 밖에 없는 자신이 너무 원망스러울 뿐이다.

지금 시중에 대략 3개의 삼국지가 유행하고 있는데 각각 황석영, 장정일, 이문열의 삼국지이다. 이 들 삼국지의 특징을 상징적으로 나타낼 수 있는 것은 황석영의 삼국지는 "정본 정통 삼국지"를 장정일의 삼국지는 "탈중화 범동아시아적 시각" 이문열 삼국지는 "삼국지 한권에 못 논할 것이 없는" 삼국지를 자신의 대표적 입장으로 표방하고 있는 것이다. 나의 생각으로는 그 나마 황석영 삼국지가 제일낫고 그 다음이 장정일의 삼국지 이문열의 삼국지가 가장 안 좋다고 생각한다.

왜 그럴까? 먼저 이들 삼국지 작가들이 내세우는 상대방에 대한 비난 논리를 들어보자. 장정일의 경우 정통 삼국지가 없다는 것으로 황석영씨를 우회적으로 공격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설득력이 약하다. 세상에 어중이 떠중이 들이 쓰고 가필한 삼국지는 무수히 많을 것이나 결국은 그러한 삼국지들도 대략은 어떤 유형으로 수렴되었을 것이고 가장 사랑을 많이 받는 삼국지가 바로 정통 삼국지라 할 수 있다. 동양 삼국에서 유행하는 삼국지는 대체로 촉한 정통론에 기반을 둔 것이며 대체로 이러한 정서 속에서 삼국지가 널리 읽혔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리고 황석영의 이러한 주장은 이런한 원본 텍스트를 교묘하게 비틀고 있는 이문열 삼국지에 대해서 유효한 주장이고 단지 "사대주의적" 발상이라고 매도될 수 없는 것이다. 나 역시 삼국지가 이러한 중화주의적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이 마치 대단한 문제인 것처럼 호들갑 떨일일지 과연 의심이 든다. 모든 문학작품은 각기의 문화와 시대에 따른 한계를 가지기 마련이며 1000년도 전의 문학작품에서 그런 문제를 가지고 원래의 고유에 그것이 가진 작품성과 문학성에 훼손을 가하면서 자기 나름의 삼국지를 지어낼 필요가 과연 그렇게 절실할지가 더 의문스럽다. 그래서 나는 무엇보다 다소 비틀린 삼국지보다는 정통 삼국지를 최상으로 보아주고 싶다.

그리고 남은 것은 소위 비틀린 삼국지라는 면에서 장정일과 이문열의 것은 같다고 할 수 있다. 물론 두 삼국지 나름의 장점은 있으나 굳이 평가를 내리자면 이제는 이문열보다는 장정일 삼국지를 읽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하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전체적으로 삼국지 하나로 세상의 모든 문제를 논할 수 있다는 발상 자체가 하나의 무리라고 생각한다. 중국인들은 그냥 삼국지를 좋은 소설 중의 하나라고 생각한단다. 우리나라 사람들과 일부 지식인들이 한마디로 설치고 있는 것이다. 삼국지에 무슨 인생과 권모술수의 정수가 들어있는 것처럼. 그럼 본론으로 다시 돌아와서 이문열의 삼국지의 저자의 평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부분적으로 그것은 매우 통찰력 있는 설명은 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매번 거슬리는 것이 전체적으로 부조화 상태에서 전체 흐름을 뚝 끊어놓는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왠지 결국은 저자의 평만 그것도 일관성도 없는 것만 남고 삼국지의 감동은 사라저 버린는 듯한 허무감이었다. 반면에 장정일의 삼국지는 어느 정도 일관성과 뚜렷한 주관을 가지고 삼국지 텍스트를 비판적으로 볼 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재구성하는 시도를 보이고 있고 대체로 삼국지를 통해 자신의 생각을 독자와 공유하려는 시도가 매우 참신해 보이기 때문이다. 이문열의 삼국지는 너무 오래된 것이 아닌가 이젠 그만 읽을 때도 된 것이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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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인 1
최인호 지음 / 문학동네 /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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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에도 유아기로부터 시작하여 아동기 청소년기 성년의 성장기간을 가지는 것이 적용되는 것일까?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그런 말에 동의할 수 없을 것 같다. 국가란 너무나 많을 연령층들을 모두 포함한 유기적 집합체이며 다소의 미숙한 면이 있다면 나름대로의 성수간 측면들이 반드시 있기에 그러한 식으로 한 문화를 가볍게 평가를 내리는 것은 왠지 서구식의 피상적인 오리엔탈리즘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더구나 우리 민족의 경우 반만년의 유구한 역사를 가진 실로 전통깊은 문화 민족이지 아니한가?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이 소설은 이런 유구한 역사를 가진 대한민국을 한낱 어린아이에 불과한 것으로 간주하고 그에 관한 한편의 성장의 이야기들을 늘어놓고 있다. 첫 장면은 주인공 종세가 군화발에 치이며 어디론가 끌려가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그것은 마치 해방이후 우리의 역사가 이렇게 정신차릴 여유조차 없이 허겁지겁 외세나 그밖에 군사집단의 총칼의 협박에 못이겨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 한번도 생각해보지 못하고 잠에 취한 상태에서 끌려다니고 있다는 하나의 암시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아직 술이 덜 깼는지 잠에서 덜 깼는지 모를 이 대한민국이란 아이가 어떻게 성장하고 눈부신 성장을 거듭하는지에 관해서 우리에게 그 진실을 들려줄 것이다. 3권 분량에 책에서 작가는 이 아이의 모든 행동들에 대해 날카로운 비판 때로는 풍자와 조소를 우리들 앞에 마음껏 펼쳐 놓을 것이다. 그리고 나이가 왠 만큼 있는 사람이라면 아직 유년기에 있는 대한민국의 모습들과 과거의 추억들을 회상하며 즐거움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주제는 결국 이러한 사회를 살아가는 두가지 대조적인 모습을 한 선인과 악인에 대한 대비라 할 수 있다. 이복동생 종세는 이러한 사회속에서 착실하게 한발짝씩 성실하게 자신의 생활을 지켜나간다. 이에 비해 종대의 경우는 좀 특별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어린시절에는 그저 재미로 동네 건달 생활을 해내는데 비해  출소한 이후의 그는 더이상 재미가 아닌 직업으로서 어린 아이와 마누라를 부양하기 위해 한탕을 해야 하는 신세가 된다. 여기에 종대는 당시로서는 아주 불온한 반 자본주의적 대사마저 거침없이 외치며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하려고 한다. 하지만 그런 범죄가 오로지 사회의 탓으로만 돌려질 수 있을까? 나 개인적으로 종대와 같은 인물보다는 성실한 종세와 같은 인물들을 더 많이 보아왔고 누구보다 도 그런 인물들을 존경하고 있기에 그의 변명은 일고의 가치가 없다고 생각한다.

이 소설은 결국 베스트셀러 작가 최인호의 유일한 사회소설로 남게 되지 않을까한다. 작가가 이미 우리나라의 대표적 작가이지만 대체로 연애로맨스소설이나 역사소설을 써왔다는 것을 생각할 때 역시 작가의 작품세계와 다른 상대적으로 다른 작품에 비해 무거운 주제를 가진 어두운 소설이라 할 수 이지만 대체로 우리사회를 무난히 그려내고 있다.  "지구인"이란 답답한 제목같지만 작가의 다른 어떤 소설보다 읽는 재미도 충분한 소설이니 안심하고 한 번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재미와 주제의 무거움이 적당히 타협을 하는 좋은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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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충열 교수의 노자강의 예문서원 강의총서 3
김충열 지음 / 예문서원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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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별로 노자나 동양사상과 별 관련도 없는 사람들이 시류를 타고 너도 나도 "노자"에 관한 책들을 써내는 풍조이다. 재미있는 일이다. 그 만큼 노자에 관해 해석할 만한 여지가 많다는 것그것이 바로 노자가 가지고 있는 다향한 각자의 경험들에 대해 풍부한 함축성을 가지고 있다는 어찌할 수 없는 증거이기에. 다만 내가 그들에 관해 좀 짜증이 나는 것은 그렇게 그들이 장님 코끼리만지듯 코끼리 한모퉁이를 가지고 떠드는 것은 인내해 줄 수 있지만 마치 그 한 모퉁이를 가지고 자기가 가장 천하에 최고 정통의 노자 해석자라며 핏대를 세우고 입에 침을 튀기며 남을 비난하는 꼬락서니를 볼때, 나는 그 인간에 대해 완전히 절망하게 된다. 나는 도저히 그들의 무지에 대해 할말을 잃는다.  그들 중에는 초간 노자와 왕필본의 차이도 모르면서 노자를 운운하고 있기까지 하다. 아 이 얼마나 개탄스런 현실인가.

그러나 썩 만족스럽진 않지만 그런대로 이상한 노자해석현상을 바로잡을 것을 기약할 수 있는 국내 최고의 노자에 관한 서적이 나와서 조금은 위안이 된다. 그 책이 바로 이 책이다. 사실 우리가 그저 막연히 노자라고 불리는 책은 위작을 좋아하고 수시로 개작을 하고도 이를 밝히지 않는 중국학의 풍토때문에 모르고 있었지만 고대에 많이 그 텍스트가 변형되어 왔으며 특히 최근 발견된 "초간 노자"는 기존의 텍스트와는 상당히 달라 과연 노자라는 것이 시대에 따라 그 해석이 전혀 판이 했다는 학계에 보다 그 근거를 뚜렷하게 해 주었다. 이 책은 그러한 최신의 하계의 연구 성과와 근래에 이르기까지 여러가지 다양한 형태로 매겨졌던 주석들을 비교하여 저자가 자신의 개인적인 의견역시 피력해 보고 있다. 따라서 노자에 대해 제대로 알고 싶은 사람에게는 서슴없이 이 책을 추천하겠다.

내 생각에 이러한 작업들이 의미가 있다고는 생각하지만 무언가 아쉬운 느낌도 있다. 그의 독창적인 해석은 역시 생각해 볼만하다고 느낀다. 내가 지적하고자 하는 바는 그 해석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닌다.김교수의 대부분의 저작들에서 보면 뭔가 열정이 크게 부족하다고 생각이 된다. 한마디로 답답하다는 것 그런 감정이다. 아예 도올처럼 배우는 사람에게 열정적으로 다가가 자신을 어필하는 것이 좀 더 올바른 방향이 아닐까한다. 신세대의 입장에서 보면 자기 피알이라고나 할까 하는 자신의 의지를 너무 죽여 오신것이 습관이 되신 것이 아닌가 한다. 그냥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면 되지 저자는 그 점에서 혹 자신이 틀릴까봐 소심한 걱정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 얼마나 앞에서 말한 쓰레기같은 노자저술과와 대조된 태도인가? 김교수님은 좀 순진하신 것같다. 과연 정통적이고 가장 바른 노자의 해석이란 것이 존재한다고 믿으시는 것은 아닐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노자를 오래 연구했다면 그 정도는 당연히 알았을 텐데... 다소 안타깝지만 이 책을 서슴없이 추천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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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봉 정도전의 건국철학 - 도올문집 4
김용옥(도올) 지음 / 통나무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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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우리나라의 조선왕조 개창에 있어서 혁혁한 공을 세운 삼봉 정도전의 문집인 "삼봉집"에서 그의 주요한 철학적 입장을 표명한 부분을 발췌하여 도올선생의 평을 덧붙인 책이다. 독일의 대표적 역사학자인 막스 베버에 의하면 세계의 탈미신화야 말로 근대와 이전의 시대를 구분하는 가장 근본적 차이이며 서양역사가 기독교로 부터의 탈미신화를 통하여 합리적인 사회질서를 건설하였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조선왕조 개창의 가장 혁명적인 성격은 당시 도덕적으로 타락하고 세속화하여 민중에게 더이상 합리적 질서를 제시할 수 없었던 일종의 미신으로 전락한 불료를 비판하지 않을 수 없었던 삼봉의 투철한 역사의식을 우리는 발견하지 않을 수 없다. 아울러 그의 민주적 민본적 건국이념을 조선건국전에서 살펴본 순간 사실에 있어 우리역사의 근대는 서양의 그것보다 이미 훨씬 앞서 있었다는 것을 확신하게 해 줄 것이다.

삼봉 정도전 하면 흔히 생각하는 것이 "과격한 유교적 원리주의자"이며 불교에 대해 무지하면서도 유교에 입각해서 대책없이 불교비판을 행하는 성리학적 교조주의자이다. 그러나 불씨잡변에 있는 그의 논설을 보면 그의 불교에 대한 이해의 깊이가 당대 동아시아의 어떤 학자들에 비겨 뒤지지 않는 수준이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사실 삼봉의 아버지는 중진관료였지만 어머니는 노비이어서 불교의 평등관이 그에게 상당한 매력을 주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래서 그런지 이를테면 같은시대 그에게 영향을 주었던 宋儒들이 불교에 대해서 별로 이해를 하지 못하고 거의 무지한 수준에서 불교를 비판하고 있는데 반해 정도전은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불교를 비판하고 있다.

안타까운 것은 그의 불교비판이 다소 과장되고 있다는 것과 그러한 비판이 똑같은 입장에서 유교를 비판하는데 까지 이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한마디로 그의 입장은 "교조적 성리학"으로 타락하고 만다. 이러한 삼봉의 위헙한 세계관은 그의 정치적 몰락과 함께 사라지게 되지만 조선후기의 성리학에서 부활하게 되면서 민족문화의 발전에 심각한 타격을 입히게 된다. 이를 일러 삼봉 사후의 복수라할 만한 것이다.

아울러 삼봉이 저술한 삼봉의 수필을 통해 한 혁명가의 인간적 고뇌와 그로 부터 생산된 사상의 향기를 느낄 수 있다는 것도 이 책이 주는 이로움이라 할 수 있다. 아마 삼봉은 역사적인 인물로 지나친 욕심을 부렸던 것 같다. 그는 유교만의 독존이 아니라 여러 학파의 자유로운 비판이 존재하는 그러한 사회를 지향하는데 만족하는 것이 좋았었다. 그러나 이러한 근본을 모르고 어쭙잔은 지식과 성균관에서 수집한 서적을 근거로 남의 신앙과 학문을 이런 식으로 난도질한데서 조선후기의 극심한 사상통제는 이미 예비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도올 선생은 삼봉의 좋은 점만을 얘기하지만 우리는 그의 잘못됨과 편협함도 합께 배우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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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우(尋牛) 2007-08-23 09: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진 서평을 보았습니다.
 
인도철학사 2 한길그레이트북스 4
라다크리슈난 지음, 이거룡 옮김 / 한길사 / 199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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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으로 인도대륙은 전세계 모든 문명 특히 몇몇 주요한 문명들에게 심대한 영향을 미쳐왔다는 것을 우리는 곧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우리나라의 경우도 결코 예외가 될 수 없으며, 비록 조선시대를 거치며 그 기억이 많이 퇴색되어 희미해졌지만 신라시대에는 불교라는 종교를 매개로 많은 지성인들이 인도문화와의 직간접의 교류를 시도하고 그들의 앞선 사상체계를 받아들여 스스로의 상황에 맞춰 재창조하는데 심혈을 기울였음을 알 것이다.

인도철학사를 읽게 되면 이러한 인도문명의 수준이 이와 같이 일상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정도보다 훨씸 심원한 경지에 있었음을 더 절실히 이해하게 될 것이다. 개인적으로 인도철학을 공부하면서 놀라게 된 사실은 산스크리트어의 문자들이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게된 "가장 완전한 문자"인 한글의 한 모형이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특히 우리의 미음에 해당하는 글자를 보면 이를 여실히 느낄 수 있다. 조선시대에 한글창제를 위해 신숙주가 인도에 갔었다는 것이 단순히 놀러 갔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인도 철학의 내용을 살펴보더라도 그들의 사유구조가 당대의 서구라파의 철학이나 중국의 철학에 비해 오히려 더 아방가드르적이었으며 결코 뒤지지 않는 사상체계를 건립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단순히 여러가지 자유적인 비정통 사상에 의한 인식론 뿐 아니라 자아 성찰 및 도덕적인 삶과 그것에 이르는 수단을 강구하는 데 있어서도 현대인들에게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이 바로 이 책이라고 확신한다.

이 책은 불교와 자이나교와 같은 이단 즉 "외도"에 대해 매우 심도 있게 다루고 있으며 그를 통해 한국불교와 인도불교와의 차이를 가늠해 볼 수 있다. 또한 인도의 소위 정통 육파사상의 사상에 대해 체계적인 접근을 하고 있으면서 상카라나 라나누사 등의 근래의 천재 우파니샤드 주석가 들에 전재되온 불이론적 인도 철학의 정수를 무난하게 설명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값이 비싼 것은 흠이지만 그럭저럭 읽어 줄 만하나.

한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다면 지은이 라나크리슈난이란 인물의 태도이다. 별로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인 것 같다. 대개의 비유럽권 국가에서 철학사를 쓰는 사람들의 고심이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근대에 이르러 물질적영역에서의 서구에 대한 패배는 사상적인면에서 조차 쉽게 씻을 수 없는 열등감을 느끼게 하는 것이 사실이다. 때문에 비단 인도철학사를 기술하는 문제 뿐아니라 중국철학사의 문제역시 이러한 압박감으로 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은 이해하고도 남음이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중국철학사에 관한 저자들이 어느 정도는 서구유럽의 사상에 대한 우위성이나 자신들의 철학체계의 미흡함을 인정하는 보다 인류사적 보편성에 의거하여 자신들의 철학사를 서술하는데 반해 이 책의 저자는 어쭙지 않은 베딴따 사상이 마치 인류적 최종 가치거나 그에 가장 근접한 사상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것에 의거해 타 학설이나 서양학설을 가차없이 비판하고 있다. (잠깐 딴소리를 하자면 중국의 철학기술자들은 대체로 서양에 대한 패배를 겸허히 받아들이고 있다. 오히려 그것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소위 한국의 자칭 "동양학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마치 전노 군사정권의 정부가 미국에 미국인들보다 더 충성을 표시하듯 중국학에 더 강한 충성을 보인다.) 그래서 그런지 작가의 이런 모순된 심리상태를 나타내기나 하는 것처럼 많은 표현들이 일관성을 상실했다. 예를 들어 원시불교에 대하여 세계에서 가장 독창적인 사상이라고 서두에 칭찬하더니 느닷없이 그 장에 석가모니에 대한 평에서 애써 그의 사상이 우파니샤드에 내재된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라는 황당한 말을 한다. 이것은 명백히 모순이다. 물론 이 책은 이렇듯 많은 시각의 한계를 가지고 있다. 분명한 것은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문화적 대립과 이질감을 넘어 그것을 이해하여 자신의 살에 보탤 수 있는 창조적인 원동력을 얻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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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8 2013-02-24 17: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꼭 물질적으로 정복했다고해서, 우월한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환원주의적 접근이 엄청난 힘을 가진건 사실이지만, 결국 환원주의적으로 과학적 관찰값을 토대로 우주를 구성해보니, 기타에 나온 온 세상이 마야라더라 라는 결론이 나온 것을 보면, 서양식 환원주의적 철학이 인도 철학보다 우위라고 생각은 안합니다. 서로 강점을 절충해야지, 환원주의적 사고 방식이 파워풀한 툴이어도, 어느 순간부터는 그것이 덫으로 작용할 수 있는 겁니다. 상황의 통합주의적인 인식의 부재로 인한 구성의 합의 오류가 그것이고, 단순히 우리가 생각하는 정복, 피지배의 논리로 철학계의 우위를 정하는 것도 사실 무리가 있다고 봅니다. 몽고인은 중국인을 지배했습니다. 그러나 중국 문화에 지배당했습니다. 지배한 것은 중국인인가요? 몽고인인가요? 논리적 추론을 얘기할떄, 단순한 인과논리로 세상사를 설명할 수 없습니다. 추론의 근거가 되는 귀인이 결국 또다른 귀인의 결과이며, 변수이니까요. 오히려 단순 인과논리로 세상을 이해하는 것은 오류만 낳을 뿐이며, 그 무수한 오류 덩어리가 우리의 삶을 해치는 칼과 창이되어 돌아오고 있음을 우리는 목격하고 있습니다. -환원주의, 물질주의적 세계관의 정글 속에서 생존투쟁하는 1인이....

꼴깝을떨어라 2021-08-10 01: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머래는거야 이 병신새끼는 먼 얼토당토않은 개소리를 하고 있어 책 제대로 다시 읽어 병신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