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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의 외인구단 1:패배자들
이현세 / 고려원(고려원미디어) / 1986년 10월
평점 :
절판
<공포의 외인구단>이란 책을 손에 들어 본 것은 아주 오래 전의 일이다. 그 때 나는 아주 길었던 어둠의 터널의 끝에서 나와 겨우 한숨을 돌리고 있었던 그런 시절이었었던 것이다. 초등학교 상급학년이던 그 시절의 나는 오랜 동안의 열등학생으로 지내던 때의 열등감에서 가까스로 벗어나 조금은 우등생의 대열에 들어와 있다고 안도하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우리 담임선생님은 연로한 나이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해외에서 수출이 잘되어서 매우 기쁘다고 특유의 지루한 연설을 했던 것을 기억한다. 그러나 만화가게란 으레 불량한 아이들이나 가는 곳으로 알고 있었던 나는 이 책을 접할 수 없었고 우연히 친구집에 수북히 쌓여있는 만화들 중에 겨우 발견하여 그 중 1권을 손에 잡았던 것이다. 친구가 책을 빌려줄 것 같지는 않았으므로 첫 페이지를 펼쳤을 때 나는 까치가 짝을 바꾸던 때에 짝이 거부감을 느끼지나 않을까 고민하는 모습을 보고 마치 이건 내 얘기가 아닐까하는 착각에 사로잡히었다. 그리고 엄지를 만났다는 부분에서 과연 나에게도 엄지와 같은 짝궁이 있었는가에 이르러서는 애매해지기 시작하였다. 있었던 것도 같고 없었던 것도 같고 그렇지만 왠지 있었으면 좋을 것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하지만 더 읽기도 전에 친구가 나가자고 해서 더 이상 읽기를 지속할 수 없었다.
그 후로 나는 오랫동안 이 책을 외면해 왔다가 지금에서야 읽어보고 청춘과 사랑의 아름다움이 만들어낸 감상을 다시금 기억해 내고 미소짓고 있음이다. 특히 강한 것은 아름답다는 말과 네가 원하는 일은 뭐든지 할 수 있다는 말은 아직도 내가슴에 울리고 있다. 급우들과의 관계가 좌불안석이었을 까치에게 있어 엄지가 보여준 친절은 차라리 神性에 가깝고 그녀의 말은 하나의 聖典의 가치를 지니게 된다. 까치는 늘 엄지를 향하여 이렇게 말한다.
"난 네가 기뻐하는 일이라면 뭐든지 한다."
까치는 이러한 연심을 죽을 때까지 잊지 않겠노라고 다짐을 하고 모든 세속적인 것들을 그를 위해 희생하고자 한다. 그러나 문제는 고등학교 야구선수로서 다시 만난 엄지는 더 이상의 그의 기억 속에 엄지는 아니라는 점에 있는 듯 싶다. 그 때 엄지는 유망한 고교야구선수 마동탁의 여자친구의 지위를 지키고 싶은 마음에서 까치에게 다음과 같은 부탁을 한다.
"혜성아. 넌 내가 원하는 일은 뭐든 한다고 그랬지. 난 지금 동탁이를 좋아하고 나에게는 그를 좋아하는 수많은 경쟁자가 있어. 부탁인데 난 너의 일로 동탁이를 잃고 싶지 않아. 그러니 이 번에는 네가 동탁이에게 져 주었으면 좋겠어."
인생의 목표를 오직 엄지에게 두고 있었던 까치에게 이것은 아마도 감당키 어려운 운명의 횡포였으리라. 까치는 대학야구 진학을 포기하고 산속에서 혼자만의 야구연습을 계속한다. 엄지. 내가 더 이상 너의 남자로 행복하게 해 줄 수 없지만 이젠 다른 방법으로 너의 행복을 지켜 줄께.
결국 혜성과의 약속도 어겨버리고 동탁과 결혼하는 엄지와 지옥의 재활훈련을 떠나는 까치. 승리지상주의자인 외인구단 감독의 광기아래 까치의 사랑도 하나의 광끼로 변해가는 것을 묵묵히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 반 쯤 미친 까치는 때때로 엄지를 엄지로 인정하지 못하여 그녀의 동생 현지를 엄지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 파국적인 결말은 까치의 실명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두 남자사이의 상처로 정신병원에 있는 엄지의 얼굴을 더듬기까지... 그 순간 까치가 엄지에게서 무엇을 느낄지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