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 철학사 - 상
B.러셀 지음, 최민홍 옮김 / 집문당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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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철학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일생을 살아오는 동안 적지 않은 시간을
철학적 사고와 철학 서적에 투여하였다고 스스로를 생각해 온 지금 이 순간에도
철학이 무엇인지 간단히 정리하기는 쉽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은 이렇게도 이야기 한다. 사실상 서양철학의 시원이 된 플라톤이 정의하였듯
그것은 지식과 관련된 지식에 대한 일반론과 삶의 태도와 관련되는 듯 싶다.
동양세계가 서구문명에 압도당하고 박해받아 조롱과 자학을 일삼을 때 서양철학은 참된
지식의 모든 것이었다. 하지만 이제 동양에서도 어느정도 자신감과 문화적 정체성을
회복해감에 따라 이제 철학을 단지 "필로소피"로 서양에서 발생한 특수한 학문정도로
받아들이는 사람마저 생겼다.

러셀경의 "The History of Western Philosophy". 나는 우선 이미 이 세상사람이 아닌
그에게 왜 Western philososphy란 말을 사용하였는지 묻고 싶다. 과연 그와 같은 철학의
대가가 동양적 philosophy란 말을 인정하였는지 하는 대목이 궁금하기 때문이다.

그건그렇고, 시중에는 정말 여러가지 철학사관련되는 서적들이 출간되었고 출간되고 있다.
가장 대중적인 것으로는 철학사인지 아닌지 조금 경계가 모호하지만 듀란트의 <철학이야기>
가 읽기가 쉽다. 정말 이 정도만 읽으면 왠만한 철학자들의 삶에 충분히 공감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왠만큼 철학에 열정이 있지 않은 사람이면 철학사는 읽지 않았으면 한다.
괜히 철학에 관한 흥미를 잃기 쉽기 때문이다. 특히 힐쉴베르거의 책의 경우는 내용이 방대하고
초심자에게는 너무나 어렵다.

반면에 러셀철학사의 경우는 사실 철학에 대해 꽤 자세히 다루고 있으면서도 형식면에서나
내용면에서 깊이 따지고 들어가면 철학사인지 그냥 이야기인지 애매해지는 면이 있다.
아마도 그의 독특한 철학관 -종교적인 것과 과학적인 것의 중간자로서의 철학- 때문인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이 책은 철학의 전문가 뿐 아니라 그 외에 평범한 생활인을 대상으로
집필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서도 철학 전공자들조차 20세기 뛰어난 철학자 중의 한사람의
러셀의 간단 명료한 정리솜씨에 놀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사실 러셀이 하고 싶어하는 이야기는 단순히 학자나 직업으로서의 철학을 가진 철학도를
대상으로 할 난해한 이야기는 아닌 것같다. 그래서 그는 조금은 독단적이지만 철학에 관한
내용은 특유의 재치로 놀라울 만큼 압축해서 독자들에게 전달하고 나서 그 다음에는 진정으로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들을 진행해 나간다. 이 책의 다른 철학사와 또 다른 이상한 점은
영국의 철학자로서 경험론의 계승자로서 러셀의 독특한 입장인데 대체로 대륙에서 괴테가
들어갈 자리에 바이런이 들어가 있다든가 하여간 서양철학 특히 대륙쪽의 입장에서
볼 때는 좀 독특한 시점의 글쓰기라 할 수 있다.

이 책은 분명 비철학도에게도 상당한 교양과 재미를 줄 뿐아니라 철학도들에게도
상당한 통찰을 보여줄 것이라고 감히 추천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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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승優勝 열패劣敗의 신화 - 사회진화론과 한국 민족주의 담론의 역사
박노자 지음 / 한겨레출판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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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도올 김용옥은 그의 처녀작 <동양학 어떻게 할 것인가>에서 한말의 지식인들을
이렇게 비웃은 바가 있었던 것 같다. 같은 시대에 근대화와 전통과의 조화를
위해 수준 높은 사고를 펼쳤던 중국이나 일본의 대가들이 한국에서도 연
있었던가?
그는 단언했다. 한마디로 " 노우~" 라고.

박노자씨의 이 글을 읽어내려가면 그래도 도올의 뜻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는
아직 이해가 안 되지만 그럭저럭 당시 한국 지식인들이 주로 무엇을 하며
살았는지 대충 파악이 된다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기본적으로 1920년대
사회주의가 유행하기 전에 한국사회에 유행했던 사회적 진화론의 담론이
형성 강화되고 있는 과정들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이 책을 읽어보면 도올이 위대하게 생각했던 후쿠자와 유끼치나 량치차오 따위의
한말 지식인들에게 대단한 영향을 행사했던 사람들도 변변치 않은 인간들로
나오지만. 쭉 한번 읽어보면서 어떤 답답함을 느꼈다.
서구 세력의 동양침탈이란 현실적 위험에 직면한 당시 지식인들의 사고와 고민을
들어보면 일견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을 정확히 표현한 것일 뿐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물론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아주 국인이 되어버린 서재필이나 친일로 돌아선 윤치호
와 그 후계자 이광수 등에 대한 분노도 떨쳐 버림이 쉽지는 않았다. 아예 미국인이
된 서재필보다는 그래도 해방되고나서 자결을 택했던 윤치호에게 조금이라도
애정이 남기는 하지만. 더 무서웠던 것은 당시 지식인들이 생각보다 국제 정세에
매우 민감했었다는 것과 그것에 대해 역시 무서울 정도의 기회주의적 처신으로
일관되었다는 것일 뿐이다. 책을 덮으면서 이와 같은 비정상적인 격동기의 괴물적
사상이 낳은 전투적 생활방식이  아직도 박정희 시대를 거쳐 우리일상속에 깊이
스며들어 있다는데 아찔 함을 느낀다. 저자 박노자씨의 말대로 그러한 일상을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호주나 뉴질랜드로의 이민이다. 정말 씁슬한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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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이성비판 - 개정판
임마누엘 칸트 지음 / 박영사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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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0여년의 인생을 진리에의 길에 바쳤다. 그 동안 그는 쾨니히스베르크의 철학 강사를 시작으로 초기에는 성운설 등의 자연과학적인 연구에 바친 후에도 그러나 진리에 대한 그의 갈증은 다 해소되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그러나 바로 앞시대의 영국의 회의론자 데이비드 흄에 의하여 "독단의 꿈"에서 깨어난 충격이 이 위대한 저술의 집필작업에 그가 착수하게 되었던 계기가 되었으리라. 또한 당시의 시대 상황도 그에게 이 작업을 수행하지 않을 수 없는 의무감을 느끼게 하였을 것이다. 당시는 서구사에서의 대 변혁의 시기로 종교적이고 정신적가치가 헌신짝처럼 조소되고 물질적 숭배가 새로운 신앙으로 스스로를 혁명가로 생각하는 속물 지식인의 마음에 조금씩 스며들고 있었다. 그런가 하면 영국의 경험론자에게 특히 흄에 있어서 플라톤 이후 그토록 서양사상사에서 존중되던 "이성"이란 것도 그야말로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된 것이 현실이었다. 데카르트의 이성론은 오히려 유물론적인 의미로 잘못 사용되는 것이 현실이고 대륙과 영국은 인식에 있어 이성이근본적인지 아니면 경험이 보다 근본적인지에 대해 소모적인 논쟁에 몰두했다. 이러한 상황에 대한 항거로 칸트는 펜을 들었고 그간의 인생에서 얻은 수많은 시행착오와 노력때문인지 이 위대한 작업은 매우 순조롭게 이루어졌다.

이성에 대한 이러한 양 극단에 이른 태도는 사실상 오늘 날에 비유컨대 한낱 광기어린 이데올로기적 대립과도 같은 것이다. 더 근원적인 문제는 이성을 전부라고 생각하거나 만능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며 이성에 대해서 잘 아는 것이며 그것을 올바로 사용하도록 하는 것이며 이성의 월권행위 즉 이성이 간여할 사안이 아닌 것에 대해 이성의 횡포가 더 이상 진행되지 않도록 순수이성을 법정에 세우는 것뿐이다. 이러한 방법으로 이성론과 경험론의 참된 중도가 이 책을 통해 추구되는 것이다.

칸트에 의하면 모든 인식은 경험에서 시작하지만 모든 인식이 경험에 근원을 둔것은 아니라고 한다. 우리는 어떤 선천적 인식을 가지고 있으며 이것이 상식일망정 결코 제외할 수는 없다는 것이 그의 입장이며 그런 상황에서 도대체 어떻게 "선천적(a priori) 종합판단이 가능한가?"하는 것이 바로 이 책의 중심주제의 한 골격을 이룬다고 할 수 있다. 이를 위해 우선 대상을 받아들이는 감수성 즉 감성에 대한 검토로 부터 논의가 진전된다. 감성의 두 형식인 시간과 공간은 근대에 매우 중요시되는 개념이었으므로 칸트 역시 이를 진지하게 검토한다. 그러나 이에 대한 전면적인 검토를 하지만 그는 여기에 대해 그것이 내적 감관의 주관적인 조건 이상이라는 어떤 증거를 발견하지 못한다는 것이 일단 이 부분에 대한 결론인 것으로 생각된다. 다음으로는 인식의 자발성에 해당하는 오성이 오성사용의 규칙인 논리학과 결부되어 체계적인 검토과정을 거친다. 여기서 범주등을 비롯하여 오성과 오성사용의 기본적 원리들이 총 망라되어 검토되어 인식에 관한  피상적인 인식에 머물르고 있는 우리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기에 넉넉할 것 같다. 다음에야 비로소 이성의 월권 행위를 폭로하고 이에 대한 진지한 사유의 시간을 갖는 이성이라는 최고의 인식상태에 대해서 다룬다. 칸트는 초월적인 인식과 관련되어 기만적으로 사용되는 이성의 월권 행위를 이율배반이라는 이름하에 철저하게 단죄하고 경험밖을 벗어난 이성사용에 대해 일정한 제한을 가한다. 이로써 우주나 신 존재 증명에 관한 독단적 견해와 이성의 괘변추리의 문제가 비로소 해결된다. 마지막으로 이제 이성이 우리에게 이 위대한 저작을 통하여 자신이 무엇이고 어떻게 사용되어야 하는지에 관한 스스로의 자기고백을 하였으므로 이제는 우리들이 실천적인 이성사용의 방도를 위한 훈련과정을 제시하는 것도 이 책이 담는 의미있는 항목이라 할 수 있다.

물론 나 역시 이 난해한 책을 다 이해한 것은 아니다. 철학을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로 인해 골치깨나 썩였을 <순수 이성 비판>. 누구나 한 번 읽어보고 인식에서 이성의 참다운 의미를 음미하는 것도 좋은 일로 생각된다. 철학을 전공하는 이들이라면 특히 현대철학을 공부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정독해 볼 것을 권한다. 그러나 잘 되지 않더라도 낙담하지 않기를 바란다. 아마 대한민국에서 이 책의 7할 이상을 이해하는 사람은 기껏해야 한두명 정도일 테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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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지마니까야 1
전재성 지음 / 한국빠알리성전협회 / 200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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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팔리 성전 협회에서 처음으로 팔리 삼장 번역을 시작했다. 이런 저런 말이 있지만 척 읽어보니 역시 누가 무어라해도 팔리의 경전들이 가장 처음 부처님 말씀을 담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런한 중요한 사업을 맞아 매우 아쉬운 점이 있어 혹여 출판업자 선생님들이 나의 이런 글을 읽어볼 까 하여 여기 글을 적는다.

이 책은 번역은 대체로 충실한 편이다. 굳이 말하자면 직역에 가까운 것 같다. 하지만 역시 종교적인 차원의 번역사업이라 조금 아쉬움이 있는 것같다. 이 책이  있는 수많은 관련 주석들과 다른 나라 판본들을 엄청나게 주석으로 올리고 참고 하고 있음에 불구 기존에 길희성의 <인도철학사> 나 라다크리슈난의 <인도철학(사)>를 통해 조금은 비종교적인 측면에서 인도철학을 접해왔던 사람들이 읽기에는 무언가 용어의 통일성이 없는 것 같다. 기왕의 번역이라면 조금은 이제 시작하는 다른 학술적 번역사업의 결과들과도 좀 발마추어 나갔으면 한다. 물론 나도 이분야 잘 모르기에 그냥 느낌만을 말해 본 것이다. 왠지 종교인들 입맛에 맞는 수준에서 끝이라는 식의 번역이 아쉬울 뿐이다.

그것만 빼면 대체로 이러한 번역에 만족하는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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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의 외인구단 1:패배자들
이현세 / 고려원(고려원미디어) / 198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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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의 외인구단>이란 책을 손에 들어 본 것은 아주 오래 전의 일이다. 그 때 나는 아주 길었던 어둠의 터널의 끝에서 나와 겨우 한숨을 돌리고 있었던 그런 시절이었었던 것이다. 초등학교 상급학년이던 그 시절의 나는 오랜 동안의 열등학생으로 지내던 때의 열등감에서 가까스로 벗어나 조금은 우등생의 대열에 들어와 있다고 안도하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우리 담임선생님은 연로한 나이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해외에서 수출이 잘되어서 매우 기쁘다고 특유의 지루한 연설을 했던 것을 기억한다. 그러나 만화가게란 으레 불량한 아이들이나 가는 곳으로 알고 있었던 나는 이 책을 접할 수 없었고 우연히 친구집에 수북히 쌓여있는 만화들 중에 겨우 발견하여 그 중 1권을 손에 잡았던 것이다. 친구가 책을 빌려줄 것 같지는 않았으므로 첫 페이지를 펼쳤을 때 나는 까치가 짝을 바꾸던 때에 짝이 거부감을 느끼지나 않을까 고민하는 모습을 보고 마치 이건 내 얘기가 아닐까하는 착각에 사로잡히었다. 그리고 엄지를 만났다는 부분에서 과연 나에게도 엄지와 같은 짝궁이 있었는가에 이르러서는 애매해지기 시작하였다. 있었던 것도 같고 없었던 것도 같고 그렇지만 왠지 있었으면 좋을 것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하지만 더 읽기도 전에 친구가 나가자고 해서 더 이상 읽기를 지속할 수 없었다.

 그 후로 나는 오랫동안 이 책을 외면해 왔다가 지금에서야 읽어보고 청춘과 사랑의 아름다움이 만들어낸 감상을 다시금 기억해 내고 미소짓고 있음이다. 특히 강한 것은 아름답다는 말과 네가 원하는 일은 뭐든지 할 수 있다는 말은 아직도 내가슴에 울리고 있다. 급우들과의 관계가 좌불안석이었을 까치에게 있어 엄지가 보여준 친절은 차라리 神性에 가깝고 그녀의 말은 하나의 聖典의 가치를 지니게 된다. 까치는 늘 엄지를 향하여 이렇게 말한다.

 "난 네가 기뻐하는 일이라면 뭐든지 한다."

 까치는 이러한 연심을 죽을 때까지 잊지 않겠노라고 다짐을 하고 모든 세속적인 것들을 그를 위해 희생하고자 한다. 그러나 문제는 고등학교 야구선수로서 다시 만난 엄지는 더 이상의 그의 기억 속에 엄지는 아니라는 점에 있는 듯 싶다. 그 때 엄지는 유망한 고교야구선수 마동탁의 여자친구의 지위를 지키고 싶은 마음에서 까치에게 다음과 같은 부탁을 한다.

 "혜성아. 넌 내가 원하는 일은 뭐든 한다고 그랬지. 난 지금 동탁이를 좋아하고 나에게는 그를 좋아하는 수많은 경쟁자가 있어. 부탁인데 난 너의 일로 동탁이를 잃고 싶지 않아. 그러니 이 번에는 네가 동탁이에게 져 주었으면 좋겠어."

인생의 목표를 오직 엄지에게 두고 있었던 까치에게 이것은 아마도 감당키 어려운 운명의 횡포였으리라. 까치는 대학야구 진학을 포기하고 산속에서 혼자만의 야구연습을 계속한다. 엄지. 내가 더 이상 너의 남자로 행복하게 해 줄 수 없지만 이젠 다른 방법으로 너의 행복을 지켜 줄께.

결국 혜성과의 약속도 어겨버리고 동탁과 결혼하는 엄지와 지옥의 재활훈련을 떠나는 까치. 승리지상주의자인 외인구단 감독의 광기아래 까치의 사랑도 하나의 광끼로 변해가는 것을 묵묵히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 반 쯤 미친 까치는 때때로 엄지를 엄지로 인정하지 못하여 그녀의 동생 현지를 엄지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 파국적인 결말은 까치의 실명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두 남자사이의 상처로 정신병원에 있는 엄지의 얼굴을 더듬기까지... 그 순간 까치가 엄지에게서 무엇을 느낄지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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