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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한입 더 - 철학자 편
데이비드 에드먼즈 & 나이절 워버턴 지음, 노승영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10월
평점 :
절판
언젠가 짝꿍에게 물었습니다.
"만약 공부를 더 한다면 어떤 걸 해보고 싶어?"
답이 좀 의외였습니다. "철학"이라고 대답하더라고요. 철학이라니. 진짜 그 분야에 관심 있는 사람이 있었군요! 그것도 이렇게 가까이 말입니다.
그러고 나니 떠오르는 기억이 하나 있습니다. 함께 기차여행을 하던 중이었는데, 저는 기차 진동에 슬슬 졸음이 왔습니다. 자는 것도 아니고 깬 것도 아닌 상태로 꾸벅꾸벅 헤매다가 반쯤 눈을 뜨고 옆을 보았어요. 책을 읽고 있더군요. 그게 무슨 책이었냐면... <순수이성비판서문>(칸트, 책세상). 애인과의 여행길에 그 책을 챙겨온 사람. 난 특이한 사람을 만나고 있군, 생각했었습니다. 하하.
이제야 책장에 꽂힌 '헤겔'이니 '칸트', '스피노자', '니체', '데리다'(그 외에도 많네요) 등등 철학책들이 눈에 들어옵니다. 저와 독서 취향이 많이 달랐기 때문에 그쪽 책장은 아예 관심 갖지 않았었어요. 그런데, 이제 제게 그 책을 집어들 호기심이 생기게 되었네요.
'쓸모'에 따라 공부하는 세상에 '어떻게 살 것인가',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 하는 질문은 거의 사라졌다고 볼 수 있겠죠. 수사만이 아니라 말 그대로 '인문학의 위기'인 시대니까요. 그러나 조금만 살펴보면 이런 질문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됩니다. 이런 질문이 사라졌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 알게 됩니다. 수능 전날 자살하는 학생, 주민이 던지는 모멸적 언사를 견디지 못하고 분신한 경비 노동자, 주차 문제로 시비가 붙어 자매를 살해한 사건까지. 우리 삶이 좀 더 철학적이었다면, 우리 각자가 근본적인 질문에 대한 답을 찾으려 좀 더 노력했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것 같아요.
그렇지만 '생각하기(철학하기)'에도 연습이 필요합니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요? 어디 괜찮은 선생님 없나요?
<철학 한입 더> 이 책은 1,500만 다운로드를 기록한 팟캐스트 <철학 한입philosophy bites>에서 방송한 250여 편의 대화 중, 서양 철학을 이끌어 온 위대한 사상가에 대한 대화 27편을 엮었습니다. 익숙한 이름도 많고요(소크라테스, 데카르트, 스피노자, 칸트...), 처음 들어보는 이름(헨리 시지윅, 프랭크 램지, 존 롤스)도 많았습니다(털썩...). 무엇보다 대화체 서술이 한결 이해를 수월하게 합니다. 팟캐스트로 듣는 것보다 이렇게 책으로 읽는 게 훨씬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요. 맞아요. 철학책이 괴로운 이유는 예의 그 딱딱한 단어와 서술 때문이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굉장한 장점을 하나 가지고 있군요.
애초에 책을 맞이하며 세운 제 목표는 책의 서두와 같이 '가장 좋아하는 철학자는 누구입니까?'하는 질문에 답을 찾아보자는 것이었어요. 좋아하는 색, 음식, 음악이 있는 것처럼 '철학자' 한 명 쯤 마음에 담은 목록이 있다면 삶이 참 풍요롭겠구나, 싶었습니다. 전에는 그런 생각 하지 않았었지만요. 해볼 만한 질문과 대답입니다.
소크라테스, 마키아벨리 등 많은 철학자들이 흥미로웠습니다만 저는 그중에서도 헨리 시지윅에 주목했습니다. 소개한 대담자가 눈길을 끌었거든요. '피터 싱어'. <물에 빠진 아이 구하기>나 <동물 해방>, 최근에 읽은 <이렇게 살아도 괜찮은가>까지 책장에서 익숙하게 만나던 아저씨(!)가 설명하는 철학자라 더 집중해서 읽게 되더군요.
그는 고전적인 공리주의자 제러미 벤담, 존 스튜어트 밀, 헨리 시지윅 중 시지윅을 가장 위대한 철학자로 꼽습니다.
셋 중에서 의심할 여지 없이 가장 신중하고 철저했습니다. 매우 공정했고, 늘 반대 의견을 감안했으며, 자신의 개념을 항상 분명하고 정확하게 나타냈습니다. -251쪽
흔히 벤담으로 대표되는 공리주의에 대한 인식 밖에 시지윅만이 구축한 영역에 대해 대담자 피터 싱어는 꽤 경도된 것처럼 느껴졌어요. 이런 부분,
요즘 같으면 시지윅은 확고한 환경주의자였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기후 변화에 대처하지 못하는 현실에 진저리를 쳤을 것입니다. 우리가 전 세계 빈곤 문제에 더 주목하기를 바랐을 것이라고도 생각합니다. -258쪽
이 말은 왠지 '피터 싱어' 자신의 말처럼 들리네요. 그렇죠?
반면에 어떤 개념은 아무리 읽어도 잘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가령, 스피노자의 '정념'이랄까. 철학에 관심이 많은 짝꿍에서 이것저것 물어 설명을 들어도 글쎄요. 좀처럼 가까워지는 느낌이 아니었습니다. 이건 스피노자가 아니라 저의 한계겠지요. 흑흑. 하지만 좌절하지 않습니다. 사실 본격 철학 공부를 하려는 것도 아니고요. 다만 이 책을 통해 흥미를 갖게 된 철학자들이 생겼다는 것에 의의를 두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데카르트의 <성찰>과 아리스토파네스의 <구름>, 크세노폰의 <회상록> 같은 책들을 다음 읽을 목록으로 꼽아 두었습니다(소크라테스, 플라톤 부분은 참 재미있습니다. 이 챕터라도 읽어보세요). 다행히 집에 책들이 있군요. 스피노자처럼 저를 괴롭히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긴 하지만. 해보겠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이렇게 흥미를 가지는 분야가 한 뼘 더 확장된다고 생각하면 무척 흔쾌한 기분이 듭니다(이 책에 감사를!).
그리고 이제 몇몇 철학자에 대해 짝꿍이랑 이야기를 나눠볼까 합니다.
왠지 자신감이 생기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