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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시내
마리 다리외세크 지음, 최정수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10월
평점 :
품절
책을 받아 들었을 때 마음은 지금 같지 않았습니다. '가시내'라는 단어와 여성의 속옷을 묘사한 이미지(표지 참 예쁘더군요)를 읽고 그저 마음 편안하게 읽으면 되겠군, 생각할 뿐이었습니다. 십대 소녀, 섹스를 이야기하는 소설이라 더더욱 그런 선입견으로부터 이 책을 시작했겠지요. 지금 생각하면 이해 못할 선입견입니다. 도대체 왜 그랬을까요? 그런 단어와 이미지가 그토록 정형화된 것도 아닌데 말이지요. 어쨌든 책을 시작하자마자 (많은 독자가 그러했겠듯)이내 당황했고 '도대체 뭐지?' 하는 의아함이 남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책에 대해 '낯섦'이라고 이름 붙이기로 했습니다.
읽으면서는 그 당황이 좀 사그라졌을까요? 아닙니다. 아무래도 이 책은 끝내 익숙해지기 어려운 모양입니다. 다 읽은 후에도 그러네요. 먼저 형식이 그렇습니다. 소설에서 기대하는 서사라기 보단 아주 단편적인 끼적임에 가까운 기록들이 제멋대로 펼쳐져 있습니다. 어떤 상징으로만 가득한 메모도 있고요, 상상하기 어려운 장면을 포착한 메모도 있습니다. 비유 안에 숨은 것에 대한 의미라도 해석하려고 하다간 이어 등장하는 새로운 이야기에 다시 또 당황하게 마련이고 말이지요.
참 난감한 책이 아닐 수 없습니다.
호수는 간헐 온천과 통하고, 거기서 기다란 미사일 하나가 천천히, 육중하게 맴돌면서 나왔다. -55쪽
참을성을 요구하는 소설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주인공이자 일기장의 주인인 솔랑주가 책을 들여다보는 제게 '읽을 테면 어디 한 번 해봐'하며 일부러 뒤틀고 흔들고 덮어버린 후, 그것도 모자라 암호로 저장해놓은 그런 기분이었어요. 그걸 읽겠다고 두 팔 걷어붙이고 씨름한다 해도 만족하기는 힘들 겁니다. 어느 흔들리는 십대 소녀의 마음을 완전히 이해할 날은 아주 오지 않을 것 같아요. 생각 많은 소녀의 일기장을 들여다본다는 것은 그 내밀함에 호기심이 일기도 하지만 정독을 할 만큼 관심 있지도, 잘 이해 가지도 않는 것이 사실이니까요. 저 역시 분명 그 시기를 지나왔거늘, 이토록 다른 세상의 이야기처럼 느껴지다니요! 좀 충격입니다.
저 자신도 제 마음을 정확히 알지는 못하리란 게 그나마 위안이라면 위안이었겠지요.
형식과 달리 내용이라도 좀 편안했으면 읽기가 수월했을까요? 글쎄요. 십대 소녀의 일기가 불편해봐야 얼마나 불편하겠느냐는 생각을 맨 처음 (저 역시)했습니다만. 이 역시 완벽하게 배신당한 선입견이었습니다.
이제 막 생리를 시작하고 아직까지 어른의 보살핌을 받으면서도 멈출 도리 없이 섹스에 대해 미친 듯이 생각하고 모든 것을 성(性)적으로 대상화하고 마는 구제불능의 주인공과 친구들. 그들은 흔들리고 상처주고 상처 입습니다. 그들은 온통 낯설고 두렵지만 호기심이 넘치고 매순간을 제 인생에 아주 깊게 흔적 남깁니다.
로즈는 말한다. 우리가 어땠는지 잊지 마. 늙은 머저리가 되진 말자고. -34쪽
어쩌면 이 거칠고 날 것 그대로의 모습이 실제와 가장 가까운지도 모릅니다. 기억이란 시간에 퇴색되게 마련이고 퇴색된 기억이란 대개 모서리 다듬어지고 날카로운 것도 무뎌져서 부드럽고 아름답게만 느껴지잖아요. 솔랑주의 일기가 불편하고 불안하게 느껴진다면 그것은 퇴색되어 잃어버린(그리 되찾고 싶지 않았던) 부분을 되찾은 텁텁한 심리 탓이겠지요.
그렇게 생각하면 좀 무섭습니다. 시간 핑계를 댄다 하더라도 저는 결국 나와 다른 세대를 판단적으로 바라보는 인간이라는 뜻이니까요. 그건 제가 피하고 싶었던 모습이기도 합니다. 아. 이 소설 참 다양하게 절 괴롭히는군요.
어린 인간은 성장한 인간과 다른 존재여야 하나요? 순수함, 어리석음, 미숙함, 무지가 그 인간들에게 필수적으로 주어져야 하는 요소인가요? 아니지요. 인간이란 본래 그런 존재고 저들은 그 본래와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인간들이라는 사실. 그 사실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래야 이 소설과 조금 더 가까워질 수 있어요.
폭력적인 성관계와 그것의 의미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그저 미지의 세계를 알고 싶어 하는 마음만 있는 작은 소녀에게 응원의 깃발을 흔들어줄 수는 없겠지만, 비난할 수도 없지요. 그 모든 경험이 그녀를 성장시키고 그녀의 자산이 될 테니까요.
자기 몸으로 본능을 표현하고, 느끼는 것. 그것은 (나탈리가 말했다) 뭐라 말할 수 없을 만큼 귀중한 것이다. 값을 매길 수가 없다. 그것이 바로 진정한 삶이다. -312쪽
한편, 솔랑주를 보고 있으면 롤리타가 떠오릅니다. 단지 비오츠 씨와의 관계 때문만은 분명히 아닙니다. 그럼 뭐지? 무엇 때문인지를 한참 찾았는데요. 그건 바로 그녀의 당돌함과 물러나지 않는 면입니다. 솔랑주는 물러나지 않아요. 아르노는 그녀에게 말을 잘 들어 좋다고 하지만 그건 아르노가 크게 오해하고 있는 겁니다. 솔랑주는 그저 물러나지 않을 뿐이거든요. 끝을 보고 싶습니다. 아르노의 관계에서도, 비오츠 씨와의 관계에서도. 자신의 성장과 성적 충동에서도 그녀는 앞으로 나아가요. 제가 발 딛은 곳이 천국인지 지옥인지 전혀 관심 없다는 듯 그저 발을 내미는 모습이란 참으로 신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역시, 비오츠 씨와의 관계에서 솔랑주도 자유롭지는 않을 거예요. 그를 희롱하며 그를 삶의 나락으로 몰게 되지만 훗날 알게 될 겁니다. 그는 솔랑주의 삶에 엄청난 자리를 차지하는(차지하고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얘야, 내 사랑, 나의 솔랑주, 내 하나뿐인 천사 -287쪽
누구에게나 비밀이 있습니다. 그리고 십대는, 가장 비밀이 많아질 시기입니다. 그 아름다운 시기가 결코 아름답지 않은 이야기로 점철되어 있다고 해서 아름답지 않은 것은 아니지요. 그저 솔랑주가 계속해서 아름다운 이야기를 만들었으면, 하고 응원할 뿐입니다.
우린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통해서만 자신을 규정할 수 있기 때문이야. -14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