빚으로 지은 집 - 가계 부채는 왜 위험한가
아티프 미안 & 아미르 수피 지음, 박기영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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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야말로 '빚 권하는 사회'입니다. 부채 부담은 세대 불문이어서 대학생은 학자금을 대출받고요, 결혼 적령기의 젊은이들은 전세 대출을 받습니다. 그들은 다시 집을 사기 위해 대출을 받게 되지요. 이 대출의 굴레는 중년기, 노년기에도 여전합니다. 국가는 이들을 보호하기는커녕 대출 금리를 점점 낮추고 더 많은 대출을 받으라고 권합니다. 지금이 내 집 마련을 위한 최적의 시기라고 유혹합니다. 하루 커피 한 잔 값이면 자동차를 소유할 수 있다는 광고가 지금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군요. 가용 범위 내에서만 소비하지 않고 점점 더 많은 빚을 내 소비하는 이런 행태 역시, 전혀 낯설지 않아요.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폭죽을 껴안고 내일이 오지 않을 것처럼 파티 하는 꼴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이 파티에 참여한 사람들은 행복하지 않습니다. 폭죽이 위험한 것도 알고요, 할 수만 있다면 폭죽을 넘기고 싶기도 합니다. 다만 어디서부터 어떻게 불을 꺼야하는지 알 수 없을 뿐이지요. 


한참 '하우스 푸어'에 대한 논의가 뜨거웠던 적이 있었죠? 한쪽에서는 집값 상승을 기대하고 과도하게 빚을 내 감당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인 사람들을 손가락질 했고, 한쪽에서는 사회적 책임을 이야기하며 그들의 빚을 구제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말하자면 저는 사람들의 욕심을 탓하는 쪽이었습니다. 집을 투기 대상으로 바라보고 갚을 능력도 안 되면서 부채를 안고 집을 산 사람들에 대해 먼저 잘못을 물어야 하지 않을까? 막연히 그것은 구조적인 문제고 사회가 담당해야 할 부분이 있다, 이런 정도로만 생각했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무책임한 사람들이 빚을 너무 많이 져서 집을 산 결과이므로 그 사람들이 책임을 지도록 해야 한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90쪽 


그런데 말입니다. <빚으로 지은 집>에서 경제는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고 가계 부채 문제는 가계의 문제만이 아니라는 것을 꼼꼼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특히 두 개의 섬 대목이요. 함께 읽어볼까요?  

'한 경제가 채무자 섬과 채권자 섬, 두 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다고(85쪽)' 생각해 봅시다. 이름 그대로 한쪽은 빚이 많고 한쪽은 빚이 전혀 없어요. 두 섬이 '자동차와 이발 서비스 두 가지 상품을 소비(86쪽)'한다고 가정하고요. 이발 서비스는 서로의 섬 간 거래가 자유롭지 않고 자동차는 거래가 자유롭다고 칩니다. 

어느 날 빚이 많은 섬(채무자 섬)의 집값이 폭락한다면, 어떤 상황이 벌어질까요? 자동차 판매와 이발 서비스 수요가 떨어지겠지요? 이발사 임금도 떨어지겠고요. 이들은 임금을 더 주는 자동차 산업에서 일을 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인력 공급이 많아지니 자동차 산업의 임금 수준도 떨어지네요. 그렇게 해서 자동차는 더 싼 가격에 생산, 판매 됩니다. 자, 위의 가정 하나, 자동차는 각 섬 간 거래가 가능하다는 사실을 떠올려봅시다. 빚이 전혀 없는 섬(채권자 섬)에 싼 값의 자동차가 넘어가요. 그에 대응하기 위해 채권자 섬의 자동차 값도 떨어지네요. 그러기 위해서 임금도 떨어뜨리고요. 

경제는 독립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놀랍도록 유기적인 것이 또 경제입니다. 채권자 섬의 임금이 하락한 이유가 채무자 섬의 경제 불황에서 시작했던 것처럼요. 마치 나비효과 같네요. 이런 상황에서 가계 부채를 해당 가계만의 문제로, 그들의 어리석임이나 과도한 욕심으로 치부해도 좋은 걸까요? 

 

더욱이 빚이라는 것은 부의 불평등을 심화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돈 많은 사람들, 고소득층은 저소득층에 비해 월등히 높은 비율의 금융 자산을 가지고 있습니다. 은행의 자산은 곧 그들의 자산이지요. 집값이 떨어졌을 때 친절한 얼굴로 대출을 해주었던 은행들은 냉정한 태도로 돌변해 채무자가 갚지 못하는 대출금 대신 채무자의 자산, 얼마 되지 않는 자산, 거의 유일한 자산을 가져갑니다. 은행은 절대로 손해 보지 않는 구조지요. '저소득층의 부채는 고소득층의 자산(39쪽)'입니다. 사람들이 빚을 질수록 부의 불평등은 심화됩니다. 

 
집값의 폭락은 빚을 지고 있는 가난한 주택 소유자들의 순자산을 허공에 날려 버리면서 부의 불평등을 증폭시켰다. -106쪽 
보험과 비교를 하면 이해가 더 쉽습니다. 보험이 개인의 위험을 더 넓은 조직이 공동으로 준비, 부담하려는 것이라면 빚은 더 넓은 조직이 공동으로 개인의 자산을 위협하는 것이니까요. 


빚은 보험과 정반대로 위험을 증폭시키는 역할을 한다. 빚은 주택 소유와 관련된 위험을 분산시키기는커녕 그 위험을 감당할 능력이 가장 적은 사람들에게 위험을 전가시킨다. -51쪽 


이 책은 미국의 사례를 들어 가계 부채가 위험한 이유와 구조적인 흐름을 살피고 있지만 한국의 사례와 많은 부분 일치합니다. 경제 부양책으로 나온 부동산 정책이 얼마나 위험한지 감이 안 온다, 하는 분들은 이 책을 먼저 읽으셔야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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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빼빼로가 두려워
박생강 지음 / 열린책들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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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비둘기가 무섭습니다. 비슷한 크기와 모습의 다른 새에 대해서도 막연한 불안함이 있어요. 까치나 까마귀 같은. 하지만 가장 무서운 것은 비둘기입니다. 이 공포가 어디서 왔는지에 대해서는... 모르겠어요. 다만 스무 살 즈음에 본 히치콕의 영화 '새'에서 공포의 실체를 엿보긴 했습니다. 저 살집 좋고 두려움 없고 공격적으로만 보이는 생물이 반드시 떼로 달려들어 제 얼굴(특별히 눈 위주로)을 쪼아댈 것 같은 그런 기분. 비명은 자동 발사고요. 가던 길목에 그 새들이 보이면 기꺼이 멀리 돌아가는 길을 택합니다. 돌아간 길에 또 그 새들이 있어 좌절한 경험도 한두 번이 아니지요. 불행히도 이 도시에 비둘기가 너무 많습니다. 그런 탓에 종종 주변에 피해를 주곤 합니다만 그걸 잘 알면서도 또 괴성을 지르고 도망가기 바쁩니다. 이런 저도 괴로워요. 제 뜻과 다른 반사적인 반응이니까요. 공포는 극복해야 할 어떤 것인지 모르지만 아직 제게는 극복할 수 없고, 극복할 수 있을 것 같지 않고, 그저 최대한, 가능한 저 멀리 피하고만 싶은 기피대상일 뿐입니다. 

 

어쩌면 무섭다고 생각하는 마음이 더 무섭게 만들어서 무서움이 점점 증폭되는 것도 같은데... 그것을 심리학에서는 어떻게 바라보고 분석하는지 정확히 모르겠지만요. 공포에 문학적이고 예술적인 면이 있는 건 확실합니다. 다분히 은유적이고 감성적인 영역이잖아요. 공포라는 게. 그래서일까요. 공포의 영역에 자리하는 문학들이 이리도 많은 것은. 

 

진지하게 글문을 열었지만 사실 <나는 빼빼로가 두려워>는 무척 발랄한 소설입니다. 톡톡 튀고 재기가 넘쳐요. 제목과 작가 이름(박'생강'), 그리고 표지와 쨍한 색감까지 힘차게 한 팀을 이룹니다. 게다가 출판사의 전략(?)이었을까요. 정확히 빼빼로가 두려워지는 시기에 빼빼로를 두려워하는 등장인물과 빼빼로를 둘러싼 무수한 이야기들을 늘어놓는 소설을 내놓았으니 말입니다. 

 

한 심리 상담사에게 미모의 고객이 찾아옵니다. 그녀는 자신의 남자친구에게 '빼빼로 포비아'가 있다고 털어놓아요. 상담사는 그 사연(혹은 고객의 외모)에 묘한 매력을 느낍니다. 강한 직업의식을 동원해 그 공포의 원인을 찾아보려 애씁니다. 편의점에 깔린 빼빼로를 관찰하고, 먹어보면서 말이에요. 그러나 당사자가 약속한 상담에 오지 않고, 갑자기 상담사에게 협박 전화를 걸어옵니다. 상황은 급변합니다. 상담사는 두려움을 안고 그를 만나러 갑니다...

 

서울 시내 중심가에 있는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같은 과 선후배 김만철과 최향기는 미지의 카페 사장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에게 비밀이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밝혀지지 않아야 비밀이라지만 이들은 그 비밀을 밝히고 싶습니다. 드디어 카페 사장과 단독으로 만나는 선배 만철. 사장이 데려간 곳에서 그가 본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가벼운 마음으로 소설을 펼쳤다면 곧 당황하고 마는 이야기입니다. 우선 위의 두 이야기가 급작스럽게 게 전환됩니다. 처음 적응한 세계가 만철의 소설이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소설보다 더 황당하고 기이한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처음의 당황은 이어 오는 더 큰 당황에 묻혀버리고 이어 오는 더욱더 큰 당황이 독자를 맞이합니다. 

 

그런데 재미있어요. 두 발로 걷는 개, 첫사랑 누나, 외계인, 인류... 작가는 익숙한 것들을 비틀어 계속해서 낯설게 하고 그 안에 유머를 넣어 이 독특한 소설을 완성했습니다. 비극적이어도 비극적으로 느껴지지 않고 무겁지 않아도 진지한 이야기가 가득한 소설 말이지요. 

 

소설가의 머릿속엔 저울이 있어야 한대요. 그리고 그 저울은 인간에게 이렇게 속삭이죠.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삶은 비극적이지만 그래도 우리가 미리 포기할 만큼 암울한 건 아니다. -178쪽 

 

이제 보니 상반신과 하반신이 두 동강 나 있는 책의 표지 그림이 눈에 띄는군요. 읽을 때는 몰랐는걸요. 이게 어떤 의미인지... 책을 읽어 보면 알게 됩니다. 여러모로 재치 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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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가 인생 최후에 남긴 유서
프리모 레비 지음, 이소영 옮김 / 돌베개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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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모 레비는 더 많이, 더 오랫동안, 더 열심히 읽혀야 하는 작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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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한입 더 - 철학자 편
데이비드 에드먼즈 & 나이절 워버턴 지음, 노승영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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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짝꿍에게 물었습니다. 

"만약 공부를 더 한다면 어떤 걸 해보고 싶어?"

답이 좀 의외였습니다. "철학"이라고 대답하더라고요. 철학이라니. 진짜 그 분야에 관심 있는 사람이 있었군요! 그것도 이렇게 가까이 말입니다. 

그러고 나니 떠오르는 기억이 하나 있습니다. 함께 기차여행을 하던 중이었는데, 저는 기차 진동에 슬슬 졸음이 왔습니다. 자는 것도 아니고 깬 것도 아닌 상태로 꾸벅꾸벅 헤매다가 반쯤 눈을 뜨고 옆을 보았어요. 책을 읽고 있더군요. 그게 무슨 책이었냐면... <순수이성비판서문>(칸트, 책세상). 애인과의 여행길에 그 책을 챙겨온 사람. 난 특이한 사람을 만나고 있군, 생각했었습니다. 하하. 

이제야 책장에 꽂힌 '헤겔'이니 '칸트', '스피노자', '니체', '데리다'(그 외에도 많네요) 등등 철학책들이 눈에 들어옵니다. 저와 독서 취향이 많이 달랐기 때문에 그쪽 책장은 아예 관심 갖지 않았었어요. 그런데, 이제 제게 그 책을 집어들 호기심이 생기게 되었네요. 

 

'쓸모'에 따라 공부하는 세상에 '어떻게 살 것인가',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 하는 질문은 거의 사라졌다고 볼 수 있겠죠. 수사만이 아니라 말 그대로 '인문학의 위기'인 시대니까요. 그러나 조금만 살펴보면 이런 질문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됩니다. 이런 질문이 사라졌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 알게 됩니다. 수능 전날 자살하는 학생, 주민이 던지는 모멸적 언사를 견디지 못하고 분신한 경비 노동자, 주차 문제로 시비가 붙어 자매를 살해한 사건까지. 우리 삶이 좀 더 철학적이었다면, 우리 각자가 근본적인 질문에 대한 답을 찾으려 좀 더 노력했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것 같아요. 

그렇지만 '생각하기(철학하기)'에도 연습이 필요합니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요? 어디 괜찮은 선생님 없나요? 

 

<철학 한입 더> 이 책은 1,500만 다운로드를 기록한 팟캐스트 <철학 한입philosophy bites>에서 방송한 250여 편의 대화 중, 서양 철학을 이끌어 온 위대한 사상가에 대한 대화 27편을 엮었습니다. 익숙한 이름도 많고요(소크라테스, 데카르트, 스피노자, 칸트...), 처음 들어보는 이름(헨리 시지윅, 프랭크 램지, 존 롤스)도 많았습니다(털썩...). 무엇보다 대화체 서술이 한결 이해를 수월하게 합니다. 팟캐스트로 듣는 것보다 이렇게 책으로 읽는 게 훨씬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요. 맞아요. 철학책이 괴로운 이유는 예의 그 딱딱한 단어와 서술 때문이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굉장한 장점을 하나 가지고 있군요. 

 

애초에 책을 맞이하며 세운 제 목표는 책의 서두와 같이 '가장 좋아하는 철학자는 누구입니까?'하는 질문에 답을 찾아보자는 것이었어요. 좋아하는 색, 음식, 음악이 있는 것처럼 '철학자' 한 명 쯤 마음에 담은 목록이 있다면 삶이 참 풍요롭겠구나, 싶었습니다. 전에는 그런 생각 하지 않았었지만요. 해볼 만한 질문과 대답입니다. 


소크라테스, 마키아벨리 등 많은 철학자들이 흥미로웠습니다만 저는 그중에서도 헨리 시지윅에 주목했습니다. 소개한 대담자가 눈길을 끌었거든요. '피터 싱어'. <물에 빠진 아이 구하기>나 <동물 해방>, 최근에 읽은 <이렇게 살아도 괜찮은가>까지 책장에서 익숙하게 만나던 아저씨(!)가 설명하는 철학자라 더 집중해서 읽게 되더군요.  

그는 고전적인 공리주의자 제러미 벤담, 존 스튜어트 밀, 헨리 시지윅 중 시지윅을 가장 위대한 철학자로 꼽습니다. 

 

셋 중에서 의심할 여지 없이 가장 신중하고 철저했습니다. 매우 공정했고, 늘 반대 의견을 감안했으며, 자신의 개념을 항상 분명하고 정확하게 나타냈습니다. -251쪽

흔히 벤담으로 대표되는 공리주의에 대한 인식 밖에 시지윅만이 구축한 영역에 대해 대담자 피터 싱어는 꽤 경도된 것처럼 느껴졌어요. 이런 부분, 

 

요즘 같으면 시지윅은 확고한 환경주의자였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기후 변화에 대처하지 못하는 현실에 진저리를 쳤을 것입니다. 우리가 전 세계 빈곤 문제에 더 주목하기를 바랐을 것이라고도 생각합니다. -258쪽 

이 말은 왠지 '피터 싱어' 자신의 말처럼 들리네요. 그렇죠? 


반면에 어떤 개념은 아무리 읽어도 잘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가령, 스피노자의 '정념'이랄까. 철학에 관심이 많은 짝꿍에서 이것저것 물어 설명을 들어도 글쎄요. 좀처럼 가까워지는 느낌이 아니었습니다. 이건 스피노자가 아니라 저의 한계겠지요. 흑흑. 하지만 좌절하지 않습니다. 사실 본격 철학 공부를 하려는 것도 아니고요. 다만 이 책을 통해 흥미를 갖게 된 철학자들이 생겼다는 것에 의의를 두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데카르트의 <성찰>과 아리스토파네스의 <구름>, 크세노폰의 <회상록> 같은 책들을 다음 읽을 목록으로 꼽아 두었습니다(소크라테스, 플라톤 부분은 참 재미있습니다. 이 챕터라도 읽어보세요). 다행히 집에 책들이 있군요. 스피노자처럼 저를 괴롭히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긴 하지만. 해보겠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이렇게 흥미를 가지는 분야가 한 뼘 더 확장된다고 생각하면 무척 흔쾌한 기분이 듭니다(이 책에 감사를!).  


그리고 이제 몇몇 철학자에 대해 짝꿍이랑 이야기를 나눠볼까 합니다. 

왠지 자신감이 생기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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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시내
마리 다리외세크 지음, 최정수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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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받아 들었을 때 마음은 지금 같지 않았습니다. '가시내'라는 단어와 여성의 속옷을 묘사한 이미지(표지 참 예쁘더군요)를 읽고 그저 마음 편안하게 읽으면 되겠군, 생각할 뿐이었습니다. 십대 소녀, 섹스를 이야기하는 소설이라 더더욱 그런 선입견으로부터 이 책을 시작했겠지요. 지금 생각하면 이해 못할 선입견입니다. 도대체 왜 그랬을까요? 그런 단어와 이미지가 그토록 정형화된 것도 아닌데 말이지요. 어쨌든 책을 시작하자마자 (많은 독자가 그러했겠듯)이내 당황했고 '도대체 뭐지?' 하는 의아함이 남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책에 대해 '낯섦'이라고 이름 붙이기로 했습니다. 

 

읽으면서는 그 당황이 좀 사그라졌을까요? 아닙니다. 아무래도 이 책은 끝내 익숙해지기 어려운 모양입니다. 다 읽은 후에도 그러네요. 먼저 형식이 그렇습니다. 소설에서 기대하는 서사라기 보단 아주 단편적인 끼적임에 가까운 기록들이 제멋대로 펼쳐져 있습니다. 어떤 상징으로만 가득한 메모도 있고요, 상상하기 어려운 장면을 포착한 메모도 있습니다. 비유 안에 숨은 것에 대한 의미라도 해석하려고 하다간 이어 등장하는 새로운 이야기에 다시 또 당황하게 마련이고 말이지요. 

참 난감한 책이 아닐 수 없습니다. 

 

호수는 간헐 온천과 통하고, 거기서 기다란 미사일 하나가 천천히, 육중하게 맴돌면서 나왔다. -55쪽

참을성을 요구하는 소설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주인공이자 일기장의 주인인 솔랑주가 책을 들여다보는 제게 '읽을 테면 어디 한 번 해봐'하며 일부러 뒤틀고 흔들고 덮어버린 후, 그것도 모자라 암호로 저장해놓은 그런 기분이었어요. 그걸 읽겠다고 두 팔 걷어붙이고 씨름한다 해도 만족하기는 힘들 겁니다. 어느 흔들리는 십대 소녀의 마음을 완전히 이해할 날은 아주 오지 않을 것 같아요. 생각 많은 소녀의 일기장을 들여다본다는 것은 그 내밀함에 호기심이 일기도 하지만 정독을 할 만큼 관심 있지도, 잘 이해 가지도 않는 것이 사실이니까요. 저 역시 분명 그 시기를 지나왔거늘, 이토록 다른 세상의 이야기처럼 느껴지다니요! 좀 충격입니다.  

저 자신도 제 마음을 정확히 알지는 못하리란 게 그나마 위안이라면 위안이었겠지요. 

 

형식과 달리 내용이라도 좀 편안했으면 읽기가 수월했을까요? 글쎄요. 십대 소녀의 일기가 불편해봐야 얼마나 불편하겠느냐는 생각을 맨 처음 (저 역시)했습니다만. 이 역시 완벽하게 배신당한 선입견이었습니다. 

이제 막 생리를 시작하고 아직까지 어른의 보살핌을 받으면서도 멈출 도리 없이 섹스에 대해 미친 듯이 생각하고 모든 것을 성(性)적으로 대상화하고 마는 구제불능의 주인공과 친구들. 그들은 흔들리고 상처주고 상처 입습니다. 그들은 온통 낯설고 두렵지만 호기심이 넘치고 매순간을 제 인생에 아주 깊게 흔적 남깁니다. 

 

로즈는 말한다. 우리가 어땠는지 잊지 마. 늙은 머저리가 되진 말자고. -34쪽

어쩌면 이 거칠고 날 것 그대로의 모습이 실제와 가장 가까운지도 모릅니다. 기억이란 시간에 퇴색되게 마련이고 퇴색된 기억이란 대개 모서리 다듬어지고 날카로운 것도 무뎌져서 부드럽고 아름답게만 느껴지잖아요. 솔랑주의 일기가 불편하고 불안하게 느껴진다면 그것은 퇴색되어 잃어버린(그리 되찾고 싶지 않았던) 부분을 되찾은 텁텁한 심리 탓이겠지요. 

그렇게 생각하면 좀 무섭습니다. 시간 핑계를 댄다 하더라도 저는 결국 나와 다른 세대를 판단적으로 바라보는 인간이라는 뜻이니까요. 그건 제가 피하고 싶었던 모습이기도 합니다. 아. 이 소설 참 다양하게 절 괴롭히는군요.  

 

어린 인간은 성장한 인간과 다른 존재여야 하나요? 순수함, 어리석음, 미숙함, 무지가 그 인간들에게 필수적으로 주어져야 하는 요소인가요? 아니지요. 인간이란 본래 그런 존재고 저들은 그 본래와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인간들이라는 사실. 그 사실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래야 이 소설과 조금 더 가까워질 수 있어요. 

폭력적인 성관계와 그것의 의미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그저 미지의 세계를 알고 싶어 하는 마음만 있는 작은 소녀에게 응원의 깃발을 흔들어줄 수는 없겠지만, 비난할 수도 없지요. 그 모든 경험이 그녀를 성장시키고 그녀의 자산이 될 테니까요. 

 

자기 몸으로 본능을 표현하고, 느끼는 것. 그것은 (나탈리가 말했다) 뭐라 말할 수 없을 만큼 귀중한 것이다. 값을 매길 수가 없다. 그것이 바로 진정한 삶이다. -312쪽

한편, 솔랑주를 보고 있으면 롤리타가 떠오릅니다. 단지 비오츠 씨와의 관계 때문만은 분명히 아닙니다. 그럼 뭐지? 무엇 때문인지를 한참 찾았는데요. 그건 바로 그녀의 당돌함과 물러나지 않는 면입니다. 솔랑주는 물러나지 않아요. 아르노는 그녀에게 말을 잘 들어 좋다고 하지만 그건 아르노가 크게 오해하고 있는 겁니다. 솔랑주는 그저 물러나지 않을 뿐이거든요. 끝을 보고 싶습니다. 아르노의 관계에서도, 비오츠 씨와의 관계에서도. 자신의 성장과 성적 충동에서도 그녀는 앞으로 나아가요. 제가 발 딛은 곳이 천국인지 지옥인지 전혀 관심 없다는 듯 그저 발을 내미는 모습이란 참으로 신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역시, 비오츠 씨와의 관계에서 솔랑주도 자유롭지는 않을 거예요. 그를 희롱하며 그를 삶의 나락으로 몰게 되지만 훗날 알게 될 겁니다. 그는 솔랑주의 삶에 엄청난 자리를 차지하는(차지하고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얘야, 내 사랑, 나의 솔랑주, 내 하나뿐인 천사 -287쪽

 

누구에게나 비밀이 있습니다. 그리고 십대는, 가장 비밀이 많아질 시기입니다. 그 아름다운 시기가 결코 아름답지 않은 이야기로 점철되어 있다고 해서 아름답지 않은 것은 아니지요. 그저 솔랑주가 계속해서 아름다운 이야기를 만들었으면, 하고 응원할 뿐입니다. 

 

 

우린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통해서만 자신을 규정할 수 있기 때문이야. -14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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