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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중한 사람
이승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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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랐던 세계를 발견한다는 건 굉장한 일입니다. 처음 향 좋은 커피를 마셨을 때, 좀처럼 산이 보이지 않는 들판 앞에 섰을 때, 열 권 쯤 되는 대하소설을 끝냈을 때, 그리고 처음 만나는 작가가 엄청나게 좋을 때. 행복이란 자고로 사소한 곳에 있는 법이라지만 저는 어쩐지 아직도 굉장한 일이 늘 기대되고 새로운 것에 열광합니다. 그래서일까요. <신중한 사람>을 읽는 내내, 이승우라는 작가에 대해 생각하는 내내 저는 열광했습니다. 기뻤습니다. 새로운 작가를 또 찾았다는 사실에 말이죠. 그런 면에서 꿈이라는 건 쉽게 만족하거나 포기할 일이 아니겠네요(갑자기?!). 


살다보면 이렇게 명백하게 열광하는 순간도 있지만 대개는 무색무취의, 잔잔한 상태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지속됩니다. 심심하다 싶을 정도로 말이죠. 그런데 궁금합니다. 그런 순간 순간들을 그냥 한 바구니에 몰아놓고 '잔잔한 상태'라 명명할 수 있는 걸까? 

철학자의 심정으로 시간을 지켜봅니다. 이 흥미로운 시간이란 개념은 끝없이 갑니다. 멈추지 않습니다. 방금 전과 지금은 그 전과 방금 전이 되어버립니다. 지금은 계속해서 다가오는 잠시 후입니다. 이런 것을 그저 '지금'이라고 묶어도 될까? 좀 더 생각을 해봅니다. 가령, 잠자는 순간. 우리는 꼴가닥 잠이 들기도 하고 서서히 잠이 들기도 합니다. 얕게 잠들어 금방 깨기도 하거니와 다시 깊은 숙면에 빠지기도 하지요. 그런데 이 모든 것을 우리는 쉬이 '잔다'는 단순한 말로 설명해버립니다. 저는 언젠가 이런 거친 분류가 굉장한 폭력을 내포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대단히 폭력적이죠. 그것은. 우리는 매순간의 다름이나 각자가 자리한 지점의 미묘한 차이도 예리하게 인식해야 합니다. 그래야 비로소 다름에 대해 진정으로 이해하고 다름을 좀 더 쉽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될 테니까요.

 

짐작컨대 작가는 그러한 태만의 폭력성을 지극히 잘 알고 있었던 게 분명합니다. 사건을 대충 뭉뚱그려 그리는 것이 게으름을 넘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알고 진작에 경계해왔던 게 아닐까요. 저는 작품 곳곳에서 그걸 느낄 수 있었습니다. 중언부언 하는 것 같지만 실은 누구보다 성실한 태도로 화자가 하는 생각의 미세한 갈래들을 아주 가늘게 나누어 짧은 찰나를 보여주고, 찰나에서 또다른 찰나로 이동하는 모양을 보여주니 말입니다.

 

그는 그녀를 신뢰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왜 그녀가 한 그 말만은 붙들려 하는지, 때때로 그 말에 유별난 신뢰를 보내고 싶어 하는지 똑떨어지게 설명할 수 없었다. - <딥 오리진>, 163쪽


그래서 『신중한 사람』에 실린 이승우의 작품들은 한없이 편하게 읽을 수도, 한없이 어렵게 읽을 수도 있는 기이한 작품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단순한 사건 같지만 결코 단순하지 않은 전개와 독백, 사소한 이야기지만 결코 사소하지 않은 작가의 포착이 아주 흥미롭습니다. 

때로 한 편의 부조리극을 떠올리게도 하지만요, 뭐 거기까지 갈 필요도 없이 그저 작가의 이 지독하고 일관된 성실함에 반하고 말았습니다. 


치솟는 울화를 신중한 성격의 Y는 표현하지 않았다. 신중한 자는 저지르거나 부수거나 걷어차지 못한다. 신중한 자는 보수주의자여서가 아니라 신중하기 때문에 현상을 유지하며 산다. 현상이 유지할 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현상을 유지하지 않으려 할 때 생길 수 있는 시끄러움을 피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현상을 받아들이고, 그 때문에 때때로 비겁해진다. - <신중한 사람>, 46~47쪽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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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의미의 축제]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무의미의 축제
밀란 쿤데라 지음, 방미경 옮김 / 민음사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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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이 책은 어째서 이토록 짧은가...!

모르긴 몰라도 적지 않은 분들이 책을 덮으며 저와 같은 생각을 했으리라 확신합니다. 이 확신에 찬 예감은 비단 이 책이 '쿤데라'의 책이기 때문일 뿐 아니라 좀 더 많은, 좀 더 계속되는 농담과 이야기를 원하게 되는 책읽기라는 점이 크게 한몫 했다고 생각합니다. 등장인물들, 재기 넘치는 인물들이 우리에게 더 많은 농담과 '무의미'한 생각을 늘어놓았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한없이 목마른 사막의 동물 같은 심정에서 책은 참으로 달콤하고 갈증나게 하는 애증의 소설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특별히 두 등장인물에 대해 쓰고 싶습니다. 알랭. 그리고 다르델로.

 

알랭은 어머니와 배꼽에 대해 생각합니다. 태초부터 대를 이어 자라나는 거대한 나무에 대해 생각합니다. 사과쟁이로 태어날 수밖에 없었던 자신의 운명에 대해 생각합니다. 살인자(알려지지 않은)와 어깨를 부딪히고도 일방적으로 사과하고 말았던 자신에 대해 생각합니다. 그는 사과해야 하는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고 계속해서 사과하려고 합니다.

 

맞아. 사과하지 말아야 해. 하지만 그래도 나는 사람들이 모두 빠짐없이, 쓸데없이, 지나치게, 괜히, 서로 사과하는 세상, 사과로 서로를 뒤덮어 버리는 세상이 더 좋을 것 같아. - 58쪽

알랭의 태도는 어쩐지 소심해 보이기도 하고 우울해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저는 알랭이 사색적이고 겸손하고 다정하며 깊은 공감을 느낄 수 있는 아주 매력적인 인물이라고 생각합니다. 알랭의 사소한 것에 대한 중대한 고민, 또는 중대한 것에 대한 사소한 고민은 과연 '무의미의 축제'라 할 수 있겠지요.  

 

그리고 다르델로. 자신도 모르게 제가 암에 걸렸다고 거짓말 해버리는 등장인물. 저는 이 다르델로가 참 흥미롭습니다. '무엇 때문인지는 몰라도 상상의 암이 그를 즐겁게 했(19~20쪽)'습니다. 거짓말 한 자신이 부끄러운 것은 아니지만 '그는 웃었고, 좋은 기분을 만끽했(20쪽)'지요.

 

자기 거짓말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생각을 하다 보나 이상하게도 그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 19쪽

이 장면에 <무의미의 축제>를 관통하는 상징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무의미. 습관적으로 '의미'를 찾고 '의미 없음'을 경멸하는 분위기가 분명 우리에게 있지요. 그래서 밀란 쿤데라가 설파하는 '무의미'가 생경하기까지 한데요. 그러나 작가의 '무의미'는 단지 무(無)가 아닙니다. 본질에 대한 깊은 성찰, 본의 아니게 주어진(!) 삶에 대한 적확한 태도를 고민한 데서 나온 것입니다. 자신의 삶이 끝났다고 거짓말을 해놓고 웃고 좋은 기분을 느끼는 다르델로에게서 저는 이 삶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 조금 힌트를 얻은 것 같습니다.

 

<무의미의 축제><농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등에서 이어온 작가의 독특함과 큰 틀에서 연결됩니다. 작가가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간에 말이죠. 그에게 농담은 큰 화두입니다. 소설 <농담>에서 주인공 루드빅이 던진 농담 한 마디는 그의 인생을 통째로 흔들어버려요. 농담이 나비효과처럼 여러 의도를 뒤집습니다. <무의미의 축제>에서 작가는 다시 특유의 농담을 독자 앞에 내던졌습니다. 농담을 불안해하는 사람들에게 무의미를 사랑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의미에 몰두하는 우리가 과연 작가의 말을 따라 무의미를 사랑할 수 있을까요?

 

85세의 노작가가 전혀 힘을 잃지 않고 이런 소설을 써냈다는 사실이 놀랍고 기쁩니다. 철학적이고 유려하고 경쾌한 문장들이 참으로 반갑습니다. 여러 곳에서 이 책에 대해 그의 마지막 작품이 될 가능성을 이야기하지만 열혈 독자인 저는 여전히 다음 작품을 기대합니다. 그의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강한 믿음으로 말이죠.

 

 

 

보잘것 없는 것의 가치를 그 사람은 전혀 몰랐고 지금도 몰라. - 25쪽

 

우리는 이제 이 세상을 뒤엎을 수도 없고, 개조할 수도 없고, 한심하게 굴러가는 걸 막을 도리도 없다는 걸 오래전에 깨달았어. 저항할 수 있는 길은 딱 하나, 세상을 진지하게 대하지 않는 것뿐이지. - 96쪽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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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주목 신간 작성 후 본 글에 먼댓글 남겨 주세요.

흔한 책이 흔하지 않아서, '책을 읽는다'고 하면 신기하다거나 대단하다 혹은 대체 책이 왜 재미있느냐는 질문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조금 머뭇거리게 돼요. 질문자가 즐기는 영화나 팝송, 대중가요 대신 내게는 책일 뿐이니까요. 특히 이제 추천하려고 하는 책들은 모두 독자로 하여금 피를 끓게 하고 완전히 몰입하게 하고 흥분하게 만들죠. 이런 것을, 다른 분야에 열광하는 것과 굳이 다른 층위에 놓을 필요가 있는지 잘 모르겠어요. 그래도 강조하고 권유하고 싶은 책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너무나 많아요. 축복인지 저주인지 도통 알 수가 없군요. 어쨌든, 출간 소식만으로 흥분하게 하는 작품들! 기쁜 마음으로 소개합니다.  

 

 

 

'교고쿠 나츠히코'를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 언젠가부터 타인을 가늠할 때 반드시 떠올리게 되는 기준입니다. 그만큼 제겐 중요한 작가고 그래서 이 작가의 신작에 흥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처음 이 작가를 만났을 때의 강렬함이란, 다시 생각해도 엄청나요. <망량의 상자>와 <우부메의 여름>에서 작가는 독자를 깜짝 놀래키기 위해 얼마나 많은 정보들을 숨겨놓고 뒤집어놓고 가까스로 펼쳐 보였는지 모릅니다. 바로 그(!) '교고쿠도' 시리즈의 새 작품이 나왔으니 그것이 바로 <무당거미의 이치>! 으아아!!!

이거... 정말 소중하다는 말밖에 할말이 업습니다. >.<///

 

 

 

 

어느 해엔가 고전을 독파하겠다고 세계문학전집 시리즈 목록을 펼쳐놓고 읽을 책을 고르며 신났던 적이 있습니다. 꽤 읽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새로운 책이 나오는 걸 보면 정말이지 좌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좌절감 속에는 생경함에 대한 설렘이 꽤(많이) 포함되어 있어 그리 나쁜 감정만도 아닙니다. 바로 이것이 책의 매력 아닐까요. 다른 시대, 다른 공간에 있는 작가와 직접 대면하는 것.

에밀 졸라의 <제르미날>은 그래서 단연 꼽아두어야 할 목록입니다. 작가의 장례식에 광부 대표단이 '제르미날!'을 연호했다는 소개가 무척이나 눈에 띄는군요.

 

 

 

 

 

저는 미야베 미유키를 아직도 읽지 않고 있는 사람입니다만, 제가 앞서 '교고쿠'와 '에밀 졸라'에 열광했듯이 이 미미여사에게 열광하는 많은 사람들을 주변에 두고 있는 상황에서 더 이상 이 작가를 외면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마침 <피리술사>가 굉장히 호평 받고 있으니 이 책으로 '미야베 미유키 월드'에 입성해 보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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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 드 모파상]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기 드 모파상 - 비곗덩어리 외 62편 현대문학 세계문학 단편선 9
기 드 모파상 지음, 최정수 옮김 / 현대문학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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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 작가의 단편선(앤솔로지도 비슷하고요...)에 몇 번이고 실패한 경험이 있는 저는, 이 책 <기 드 모파상> 역시 '소장용' 책으로나마 욕심이 났을 뿐 작품 하나하나에 매료되리란 기대는 애초에 하지 않았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무리 대가라 하더라도 모두가 완전하지 않은 인간이고, 생각보다 만족스럽지 않은 작품이 도리어 대가를 만든 밑거름이었다고 생각한다면, 기대에 못 미치는 작품들 앞에서 '그럴 수도 있지...' 하고 약간 서글픈 심정으로 수긍하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저는 그저 독자 한 사람에 불과하고 기대하고 고대하던 유명 작가의 단편선에 실린 작품들이 어느 하나 빠짐없이 특별한 영감을 주었으면 하고 바랐기 때문에 그렇지 않은 단편선들에 실망하고 심지어 원망스럽게 느끼기까지 했더랬습니다.

이렇게 구구절절 저의 실망담을 서술하는 이유는!

<기 드 모파상> 만큼은 그렇지 않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어서입니다. 강조하고 싶습니다. 이 책. 진짜 좋습니다!

 

모파상은 우리에게 <여자의 일생>이나 <벨아미>로도 잘 알려져 있지만 '근대 단편소설의 창시자'라는 수식어를 갖고 있을 만큼 탁월한 단편소설을 썼고 또한 많은 단편소설을 남겼지요. 10년 동안 300여 편의 단편과 6편의 장편, 시집과 기행문까지 남겼다면 알만 합니다. 그 열정과 힘은 어디서 나왔을까요. (잘 알려진 바와 같이)방탕한 생활로 지낸 와중에도 말입니다. 작가의 사생활은 논외로 합니다. 시간과 공간을 건너고 건넌 이 자리에 앉은 독자인 저는 그저 이런 작품들을 만난 것이 기쁘기 그지없을 따름입니다. <기 드 모파상>에 실린 60편이 넘는 단편들로 모파상의 단편을 모두 말할 순 없겠지만 저로서는 놀랍도록 만족스런 책읽기였다고 또다시 강조하고 싶네요.

 

책 소개에도 있듯이, 단편은 크게 몇 가지 범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전쟁을 다룬 이야기('비곗덩어리', '미친 여자', '발터 슈나프스의 모험' 등)부터 파리의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목걸이', '승마', '크리스마스 만찬' 등), 시골 사람들의 이야기('어느 농장 아가씨 이야기', '오르탕스 여왕', '술통' 등)처럼 말이지요. 그 중에서 제가 특히 매력을 느낀 단편들은 다름 아닌 '사랑'을 다룬 이야기들이었습니다.

모파상은 '마드무아젤 페를'처럼 도무지 속을 알 수 없는 사람들의 애정사를 폭로하기도 하고, '행복'처럼 모두가 꿈꾸는 진정하고 변하지 않는 사랑을 이야기하기도 하고, '의자 고치는 여자'처럼 미련하리만치 순정적인 짝사랑의 가련함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짧은 이야기들이지만 인간과 사랑이라는 미묘한 감정에 대한 모파상의 예민한 감상을 엿볼 수 있는 작품들이라 아주 마음에 들어요.

 

그 중, '달빛'은 짧은 작품이지만 꽤 강렬한 인상을 남깁니다. 사랑에 대해, 흔들림이나 환상에 대해 이야기하는 작가의 재치가 무척이나 공감 됐거든요.

 

언니, 우리는 사람을 사랑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사랑을 사랑하는 경우가 자주 있어. 그리고 그날 밤 언니의 진정한 애인은 달빛이었던 것 같아. - 213쪽, '달빛' 

또한 모파상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비곗덩어리'는 누구에게나 추천하고 싶을 만큼 좋은 작품입니다(만일, 아직 모파상을 모르거나 모파상에 관심이 없는 주변인이 있다면, 그래서 그에게 딱 한 편만 소개해야 한다면 저는 이 단편을 추천하겠습니다). 평범하지 않은 상황, 위급한 상황 앞에서 인간의 이기심과 잔인함이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무척이나 흥미롭게 그렸습니다. 점잖은 사람이나 저속한 사람이나 그 순간에는 모두 똑같이 이기적이고 냉정해져요. 정작 존경 받아야 할 사려 깊고 선한 사람이 그들의 이익을 위해 희생당합니다. 그리고 이토록 불합리한 말,

 

그녀에게는 그런 일이 그다지 중요한 일도 아니지 않은가! - 41쪽, '비곗덩어리'

따위의 말을 내뱉기도 하죠.

 

모파상의 작품들은 '과연 보석처럼 빛난다'고 생각합니다. 작가의 섬세함과 명쾌함이 어떤 갈증을 해소해주는 느낌이었달까요. 그만큼 멋진 책이어서 책을 덮은 후에도 계속해서 책을 들춰보고 있습니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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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인간]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투명인간
성석제 지음 / 창비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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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문제해결의 연속(칼 포퍼)'이라는데 과연 그렇습니다. 산다는 게 흡사 장애물 달리기 같아서 연달아 다가오는 문제들을 힘겹게 뛰어넘어 드디어 끝났나 싶어도 어찌된 게 쉴 틈도 주지 않고 다음 장애물이 나타납니다. 아무리 '그런 게 삶'이라지만 해도 너무하다 싶을 때가 있습니다. 살면서 느끼는 평화와 안정감은 찰나에 불과하고 장애물은 늘, 지겹도록, 끈질기게 우리를 따라다닙니다. 서글픈 인생입니다.

 

그런 인생들이 뒤섞이고 얽혀 있는 곳. 예민하고 치열하고 욕망이 넘치는 이 세상. 긍정하려야 차마 긍정하기가 어려운 이 죽일 놈의 세상. 그곳에 사람들이 있습니다. 욕을 하면서도 사람들은 살아갑니다. 결혼을 하고 자식을 낳고 그 자식들에게 별다를 것 없는 세상을 물려주면서 말이지요.

어쩔 수 없겠지요. 이게 세상이라면. 인간 본성이 그런 것이라면.

 

그러나 한 번 생각해 볼 일입니다. 정말로, 인간이라는 동물이 이기적이고 악하게 생겨먹은 것인가. 세상은 본디 이렇게만 생겨먹어야 하는가. 다른 세상은 불가능한가.

저의 질문은 여기에서 시작합니다.

 

한 가족이 있습니다. 독립운동에 관련돼 패가망신을 한 할아버지의 자손들, 그들의 시골생활, 딸들과 아들들의 뭉쳐지지 않는 각자의 삶이 생생하게 펼쳐집니다. 마을의 자랑이 되는 큰형도, 아버지(할아버지)에 대한 반발감에 그와 전혀 다른 삶을 택하는 상농사꾼 아들(아버지)도, 다른 형제를 위해 희생하는 형제들도 모두가 너무나 친숙합니다. 그들은 무척이나 친숙하고 돌아보면 바로 만질 수 있을 것처럼 가까워서 그들이 가지는 감정, 슬픔, 삶의 애환이 고스란히 내 것, 내 부모의 것으로 느껴지기까지 합니다. 그 사실이 좀처럼 받아들여지지 않기도 하고 또한 너무도 쉽게 수긍이 가 혼란스럽기도 합니다.

결국, 이들의 이야기는 다름 아닌 우리의 이야기이며 이들의 삶이 곧 우리의 삶이라는 깨달음을 얻게 되지요(이 지점에서 소설이 무척이나 빛납니다).

 

그리고 만수가 있습니다. 너무도 사랑스러워 안타까운 그 사람, 만수.

제가 앞서 한 질문, '인간은 과연 악한 존재인가'에 대해 만수는 조용히 아니라고 합니다. 그는 제게 적극적으로 인간 본성을 해명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아주 천천히, 다정하게 세상에 이런 사람이 있다고, 이런 선의가 있어 세상이 여기까지 왔다고, 좌절하지 말고 포기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참... 눈물 나게 반가운 존재입니다.

 

이렇게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고 식구들 건강하고 하루하루 나 무사히 일 끝나고 하면 그게 고맙고 행복한 거죠. 도저히 참을 수 없을 것 같을 때에도 가만히 참고 좀 기다리다보면 훨씬 나아져요. 세상은 늘 변하거든. 인생의 답은 해피엔딩이 아니지만 말이죠, - 367쪽

만수의 말이 마음을 크게 움직여 저는 이내 울컥합니다. 냉소적인 눈을 하고 팔짱을 끼고 앉아서 세상 돌아가는 꼴을 탓하던 저는 이토록 진심으로 선의에서 우러난 다정한 만수의 말이 참으로 놀랍고 반갑고 부끄럽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렇죠. 그렇고말고요. 고맙고 행복한 거죠. 좀 기다리면 나아지는 거죠. 세상은. 지금 우리가 당연하게 누리는 것들이 돌이켜보면 누군가의 피와 맞바꾼 엄청나게 소중한 가치들이라는 것을, 잊으면 안 되죠. 아무리 세상에 대해 냉소해도, 무작정 해피엔딩을 기대할 수는 없어도 역사를 부정할 수는 없잖아요. 만수가 아니었음 깜박 잊어버리고 말았을 소중한 사실을 자꾸만 매만집니다. 닳고 닳도록 매만지고 잊지 말자고 다짐합니다. 저는 그렇게 몇 번이고 만수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습니다.

만수는 그런 제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별로 상관도 않고서 이 세상에 만연한 위악을 위로하고 자신이 평생을 잃지 않고 가꿔온 진심으로 세상을 살아갑니다. 끝까지, 최선을 다해서, 아주 착하게.

 

우리는 어쩌면 이런 얘기를 누군가로부터 꼭 듣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희망을 확인하고 그렇게 위로받고 다시 세상을 살 힘을 얻고 싶었는지도요.

그리고 마침내 그들이 사는 어느 평화로운 마을을 희망하게 됩니다.

 

이 세상 어딘가에는 투명인간들만 모여 사는 평화로운 마을이 있을지도 모른다. - 367쪽

그리고 만수처럼, 착하고 우직한 사람들의 행운을 빌게 돼요.

 

언젠가는 돼지저금통의 황금 돼지처럼 부유하고 걱정 없이 살게 되기를, 착한 너는 꼭 그렇게 복을 받으리라. 나는 남몰래 손을 모았다. - 55쪽

 

오랜만에 찡하고 따뜻하고 서글픈 소설을 읽었습니다. 그것이 참 기뻐 이 여름이 아무리 무더워도 짜증나지 않았습니다. 더 착해지고 싶고 조금이나마 세상을 긍정하고 싶었으니까요. 세상에 흩날리는 슬픔과 고통스런 소식을 잠깐이라도 견딜 수 있었으니까요.

 

이런 소설이야말로 우리 삶을 다만 조금이라도 빛나고 편안하게 해주는 소중한 예술이니까요.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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