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은 부드러워, 마셔 ㅣ 밤은 부드러워, 마셔
한은형 지음 / 을유문화사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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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현상을 뭐라고 해야 할지, 읽고만 있는데도 취하고 취하는데도 정신은 더 말짱해지고 더 읽고 싶어지고 더 상상하고 싶어지고. 내게 부드러운 것은 밤도 술도 아니고 글인 것만 같으니.  


소설가의 글인데 소설보다 산문에 먼저 반한다. 종종 있는 일이다. 산문의 소재이자 주제가 술이라서 더 끌렸다. 나는 술을 좋아하는 것까지는 아닌 것 같고, 잘 마신다고도 할 수 없고, 술에 대해 아는 바도 영 없고, 술에 취하는 분위기는 아주 싫어하고, 술친구도 없고, 자주 가는 술집은 커녕 좋아하는 술안주도 하나 없는데, 왜 나는 술에게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특히 술에 대해 아주 맛있게 써 놓은 글을 만나면 빠져나오지를 못한다. 아니, 빠져나오고 싶지 않다. 이 책의 후속편도 나와 있다는 것을 좀 전에 알았다. 방금 구해 놓았다. 


책은 봄-여름-가을-겨울로 나누어져 있다. 이런 편집의 경우 내가 처한 시기에 맞춰 읽는다. 가을부터, 가을이 오고 있으니까. 글의 시작부터 내 의식을 붙잡는다. 이 흐름은 뭐지? 카프리에서 멈춘다. 나는 카프리를 마시고 싶어진다. 무슨 맛이지? 나는 술맛도 맥주맛도 모르면서 작가가 풀어놓은 서술에 빠져든다. 안 마시면 사는 데에 엄청난 손해를 입을 것만 같다. 다음, 연엽주가 나온다. 구입할 수 없는 술이라는데 인터넷 쇼핑몰에서 찾아본다. 팔고 있다. 한 병에 70000원이다. 흠, 못 사 먹겠군. 간단하게 포기한다. 다음, 아와모리 야구단 일화가 나온다. LG 구단 이야기다. 내가 응원하는 팀이 아니므로 넘긴다. 그리고 커피 맥주. 커피 따로 맥주 따로 마시기만 했는데 섞어서 마실 수 있다니. 올 가을이 끝나기 전에 꼭 만들어 마실 테다.


여름으로 되돌아왔다. 작가는 술 이야기를 늘어 놓았는데 나는 읽고 싶은 책 둘을 얻는다. 약주를 알려주는 토마스 만의 <마의 산>과 6월 16일에 기네스를 마시게 하는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 내년 여름이 오기 전까지 아니 여름이 끝나기 전까지 나는 이 둘을 읽을 수 있기를. 둘 다 분량이 많아서 부담도 되고 기대도 되고. 취하지 않았음에도 취한 기분으로 설렌다.


겨울로 건넜다. 하나 건진다. 무알콜맥주. 나는 무알콜맥주를 무시했는데, 마셔 볼 생각 자체를 해 본 적이 없는데, 작가의 글로 마셔 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나름 성공이다. 내 행동에 변화를 일으키는 독서가 된 것이니. 


봄은, 봄의 글은, 봄의 술 이야기는 싱거웠다. 제일 뒤에 읽어서 다행이다. 먼저 읽고 실망부터 했다면 가을과 여름과 겨울의 이 기막힌 술맛을 눈으로 맛볼 수 없었을 테니. 


당분간 이 작가의 글과 함께 할 예정이다. 




각자의 필드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각자에게 즐거움을 주는 것들과 함께하셨으면 좋겠습니다. - P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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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10-01 10:4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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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10-04 22:4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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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10-09 18:3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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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없는 사람 ㅣ 문학과지성 시인선 512
이영광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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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로서는 낯선 이름의 시인이다. 읽어서 좋을 시들이 세상에는 얼마나 더 많이 있을지. 생각하면 아득해도 또 그래서 좋다. 이 기대만으로도 한참은 살 만하다는 생각이 들 테니까.  


따끔따끔한 구절들이 자꾸 보인다. 따끔하다는 걸 느끼는 스스로가 다행스러웠다가 죄스러웠다가 외면하고 싶다가를 되풀이하다가 끝내 더 깊이 짚어 보게 된다. 어떤 이는 쓰면서 받아들이고 나처럼 어떤 이는 읽으면서 받아들이겠지. 세상은 크고 넓고 환한 듯 보여도 곳곳이 어두침침한 그늘 투성이라는 것, 밝은 곳보다 어두운 곳을 향하는 눈길이 더 급해서 그쪽을 보다가 그곳에 있는 이들과 함께 마음을 다치고 몸을 다치기도 한다는 것을. 시인이 먼저 가서 겪고 노래로 들려주는 이야기를 따끔거린다고 물리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같은 일을 보고도 누구는 스쳐 보내고 누구는 붙잡아서 다시 살펴보도록 한다. 사람마다 이 능력을 발휘하는 분야가 다 다를 것이라 여기면서 내가 못 가진 남의 능력에 감탄하는 일이 자주 생기는데 시를 읽다가 명랑한 감탄보다 우울한 탄식을 떠트리게 하는 적이 많아서 나는 이게 또 슬프다. 우리가 바라는 세상은 우리가 예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멀리 있는 것일까. 마치 우리가 살아서는 만나지 못할 시간을 넘어서는 자리에 있기라도 한 것처럼.  


그때에 이를 때까지 어떤 시인은 계속 아픈 세상과 아픈 사람을 찾아서 만나서 그들의 이야기를 노래로 바꿔 부르고 독자로서 우리는 읽고 들으면서 마음을 열어 두어야 하겠지. 시인의 노래 한 소절처럼 정말 외계인이 지구에 쳐들어왔으면 싶을 정도다. 그 정도 상황이 되어야만 지구인이 싸움을 중단하고 함께 손과 뜻을 모을 수 있다면. 아, 아니다, 설령 그런 일이 일어나더라도 제일 크게 피해를 보는 쪽은 결국 가장 약한 이들이 될 텐데. 


나보다 약하고 어렵고 힘든 처지에 있을 생명체를 생각하도록 해 준 시간이었다. (y에서 옮김20210914)

허기는 아무래도 쓸쓸한 힘,

뭘 바라지 못하는 순간이 좋다 - P11

비 오는 날 찻집에 혼자 앉아 있어봐도

별로 쓸쓸하지도 않다는 것

쓸쓸한 척을 들킬 진짜 쓸쓸이 없다는 것 - P106

당신에게 도달하는 그리움은 없다

그리움은 내게로 온다 - P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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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스커레이드 호텔 ㅣ 매스커레이드 시리즈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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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또는 당신이 갖고 있는 욕망은 무엇인가. 재미있는 물음이기도 하고 낯부끄러워지는 물음이기도 하다. 다른 사람의 욕망을 탐색하는 일에는 필연코 내 욕망과 만나야 할 일이 생기기 때문이다. 이 소설은 추리소설이라고 하지만, 소재도 주제도 만만치 않은 생각할 거리를 던져 준다. 이렇게 나는 이 작가에게 빠져들고 있나 보다. 


시간을 집중시켜 보내기에 딱 적절한 소설이다. 몇 차례 이 작가의 작품을 읽어 본 바로는 앞으로도 실망을 시킬 것 같지는 않다. 이제라도 이 소설가를 알게 된 게 좋고, 아직도 읽을 책이 많이 남아 있어서 그게 더 좋다. 적어도 올해는 심심하지 않을 수 있을 테니까. 


호텔을 배경으로 일어나지 않은 살인을 예방하기 위하여 제 몫을 다하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고 있자니, 어쩐지 우리 현실과는 거리감이 느껴진다. 일본은, 일본 사람들은 실제로도 이 소설 속 사람들처럼 살고 있는 것일까. 호텔리어도 형사도 소설 속 인물들만큼 사명감과 책임감으로 일을 수행하고 있을까. 소설을 소설로 끝내지 못하고, 우리나라의 현실은 어떨까를 궁리하다 보니 좀 서글퍼졌다. 어지간히 못 믿는 상태가 되어 버렸다는 것이, 총체적 불신이라는 우리 사회의 문제점을 한낱 소설로 확인하게 되다니. 


그만큼 인물들이 존경스러울 정도로 그려져 있다는 뜻이다. 호텔리어 나오미도 형사 닛타도 실제 인물이라면 대단히 매력적인 사람들이다. 한번 보기나 했으면 싶을 정도로 철저한 직업 정신을 갖고 있으며, 그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들. 내용은 다를지라도 나도 내 직업에서는 그런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순진한 각오까지 갖도록 해 주는 사람들이라고 할 만큼. 작가가 그만큼 매력적인 사람을 창조해낼 수 있다는 뜻이겠지.   


추리소설을 읽으면서 삶의 교훈을 얻는다는 게 약간 지나친 호감이라고 할지도 모르겠으나 나는 그러고 싶다. 조금 더 기운을 내서 열심히 살고 싶다. 내가 있는 이 자리에서 조금 더 열심히. (y에서 옮김2014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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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게트 : 근 손실은 곧 빵 손실이니까 ㅣ 띵 시리즈 24
정연주 지음 / 세미콜론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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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게트를 먹어 봐야 하나 어쩌나, 고민해 보게 한 글이니까 내 취향이다. 읽는 동안에는 먹고 싶은 생각이 막 들었는데, 다 읽고 나니 스르륵 사라진다. 그 길쭉하고 큰 빵을 내가 어떻게 먹지? 샌드위치도 딱히 좋아하지 않고 잘라서 구워 먹는다고 해도 나로서는 한계가 있을 텐데, 그러면 시간이 흐르고 금방 마를 텐데, 다시 촉촉하게 해 먹는 방법 따위 시도하고 싶지도 않은데, 아, 귀찮은 빵이겠구나, 바게트. 


글은 무척 맛있었으나 내 현실과는 먼 빵이다. 그러면 이렇게 읽고 배부른 느낌만으로 충분하겠다. 프랑스 요리 전문가라는 작가의 글힘에 빠져들었던 시간만으로도. 맛있어 보인다고 다 먹을 수도 없겠고, 막상 먹는 일에는 의욕이 별로 없고, 여러 모로 서운한 체질이다. 


이 책 시리즈를 알게 된 것만도 다행이다. 맛있게 먹는 상상, 배부른 상상, 입맛 생생한 상상, 바게트를 종이봉투에 담아 걸어서 집으로 돌아오는 상상, 싱싱한 야채를 얹어 소스를 뿌리고 먹는 상상, 아, 흐뭇하다. 작가가 나를 충분하게 도와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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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거기는 작고 나의 여기는 커서 우리들은 헤어지는 중입니다 ㅣ 문학과지성 시인선 536
김민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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섭섭하다. 첫마디가 이 말이라 내가 더 섭섭하다. 좋았다고, 마음에 들었다고, 마음을 붙잡는 글귀와 표현이 많았다고 쓸 수 있다면 내가 더 좋으련만. 세상의 모든 글을, 세상의 모든 시를, 내가 다 좋아할 수는 없는 거다, 그런 것이다, 라고 쓰고 나니 섭섭한 마음이 줄어드는 것도 같다.

 

이만큼 섭섭했으면 리뷰를 안 쓰는 것이 도리일 수도 있겠는데, 그건 또 아니다. 뭐라고 적어 놓아야겠다는 생각은 있다. 어쩌면 이 다음에 내 정서가 더 넓어져 지금 받아들이지 못한 것을 그때는 너그럽게 받아안을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아예 저버리고 싶지는 않은 시집, 아예 모른 채 밀치고 싶지는 않은 시인. 그래서 내게 지금 아니라고 여기는 이유 몇 가지는 남겨 두기로 한다.

 

먼저, 긴 호흡. 이걸 읽어내는 게 어렵고 좀 귀찮다. 내 호흡의 길이가 짧은 탓이 주된 이유이겠지만 참고 들여다보게 되지 않는다. 다음은, 다소 거칠게 다룬 시어 몇몇. 나는 아무래도 곱고 아름다운 시어에 자주 반하게 된다. 시든 소설이든, 꼭 그 맥락에서 그 말이 쓰여야 한다고 해도, 굳이 그러해야 한다면 내 쪽에서 안 읽고 안 보는 것으로. 

 

그래도 좋은 건 시인이 이 시집에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뿍 담아 놓고 있다는 점이다. 자신의 방식대로 표현을 한 것이라 내가 다 못 느끼는 것일 뿐, 사람에 대한, 사람을 향한 마음만큼은 알아보겠다. 그래서 내가 기대를 놓지 못하는 것이기도 하고. 내 읽기의 폭이 더 넓어지기를 기다리며. (y에서 옮김20200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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