펠리시아의 여정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95
윌리엄 트레버 지음, 박찬원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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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같으면 그러하지 않았을, 나 같아도 그러했을, 수없이 이어지는 선택의 순간들에 내린 결정과 행동의 소용돌이. 펠리시아가 끌고 가는 소설 속 여정은 내내 나를 어지럽히고 괴롭히고 안달나게 했다. 그럼에도 글에서 눈을 떼지 못하게 하는, 책을 손에서 놓지 못하게 하는 건 순전히 작가의 글이 품고 있는 매력 때문이었으리라고 생각한다. 그게 아니라면 내가 이 책을 이토록 천천히 끈질기게 읽어낸 이유를 모르겠다.


예전에 한창 열심히 본 미국 범죄수사 드라마인 크리미널마인드의 장면들이 소설의 장면과 겹치면서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드라마의 배경은 미국이고 소설의 배경은 영국이며, 비슷한 범죄나 위험한 일은 세상의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을 것인데, 내가 살고 있는 이 땅에서도 볼 수 있을 만한 일이라 더 마음을 놓을 수 없었으리라. 저러면 안 되는데, 저래서는 안 되는데, 온통 안 되는데, 안 되는데 읊으면서도 눈을 떼지 못하고 뒤따라가는 펠리시아의 여정. 이런 여행, 내가 참 싫어하는 건데. 이렇게 하여 펠리시아라는 이름은 이제 나에게 특별한 고유명사로 기억될 것 같다.


소설 문체는 줄곧 현재형으로 이어진다. 갑작스럽고 커다란 충격을 주는 사건들이 일어나는 게 아닌데도 긴장감이 떠나지 않는다. 뭔 일이 생길 것 같기는 한데 도대체 언제 어느 순간에? 게다가 얼마나 정밀하고 촘촘하게 인물들의 행동을 그려 놓았던지 눈앞에서 보고 있는 것만 같다. 거리를, 집을, 카페를, 자동차 안을... 등등. 아니, 눈으로 보는 것보다 훨씬 더 인상적인 순간들로 찍히고 기억으로 남는다. 조금도 지루하지 않게, 어느 한 대목도 허술하지 않게.  


힐디치가 펠리시아에게 늘어 놓는 거짓말은 참으로 감탄스럽다. 이만한 거짓말이라면, 이렇게성실하고 치밀한 거짓말이라면, 그리고 행동마저 그러하다면, 이에 속아 넘어가지 않는 이가 얼마나 될까? 나는 괜찮을까? 상상만 해도 아찔해지는데. 살면서 정녕 힐디치 같은 사람만큼은 만나지 말아야 하는 건데, 겉으로는 지극히 평범하게 굴면서 나쁜 속을 감추는 힐디치들이 우리 주변에 또 얼마나 많이 흩어져 있을 것인지. 


사람은 정말 착할까? 아니면 잠깐만 착했다가 다시 착하지 않은 쪽으로 돌아서서 오래 머무는 것일까? 좋은 소설을 읽었는데 읽은 마음의 뒤는 내내 어지럽기만 하구나. (y에서 옮김20210703)  


YES24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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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언제 노래가 되지 문학과지성 시인선 542
허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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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 시를 읽는다. 따스한 봄볕처럼 시도 따스한 온기로 마냥 다가와 준다면 좋겠지만, 대부분의 시는 늘 봄이 아니다. 아니, 내가 봄을 못 보는 것일 수도 있겠다. 여전히 춥고 시리다. 막 보낸, 추운 겨울에 시달렸던 기억에서 못 벗어난 듯. 


온전한 한 편 대신 여러 구절을 옮겼다. 옮기면서 잠깐씩 머물렀다. 내가 스쳐 지나가는 구절과 기어이 머무는 구절을 구분하면서 새삼 보았다. 나는 많이 살고 싶어하는구나. 나는 제대로 살고 싶어하는구나. 나는 정녕 괜찮아지고 싶어하는구나. 그게 어떤 모습인지는 제대로 말도 할 수 없으면서. 


그래도 아닌 건 안다.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것이나 이렇게 바꾸면 안 된다는 것이나. 다행이다. 아닌 게 어떤 것인지를 아는 것만으로도 안심이 된다. 나서서 누군가를 구하지는 못하더라도 나서서 누군가를 해치지는 않을 것임을, 이 조그마한 소원을 품는 일마저 힘에 겨운 시절이다.   


시집 안에 가까이 들어선 죽음의 소식들이 낯설지 않다. 무섭지도 않다. 그래, 그러려니, 익숙하고도 안타까운 목숨은 언제나 내 삶을 긴장시킨다. 그러니 고마운 마음으로 확인하면서 살아야 한다. 


이 시집은 많이 고달팠다.  (y에서 옮김20210408)

차에 시동을 끄고 자판기 앞에 서면
살고 싶어진다 - P14

이 거리에서 이런저런 생들은
지구의 가장자리로 이미 충분하다 - P15

늙고 좋은 놈을 본 적이 없었다
사람들은 젊었을 때만 좋았다 - P17

내일을 기다리는 사람은 생각보다 많지 않아
당신은 모르지
내일에도 얼마나 많은 종류가 있는지 - P39

가끔 기도는 할게. 그대의 슬픈 내력이 그대의 생을 엄습하지 않기를. 나보다 그대가 덜 불운하기를, 그대 기록 속에 내가 없기를. - P41

이제 내 삶을 뒤흔들지 않은 것들에게 붙여줄 이름이 없다. 내게 와서 나를 흔들지 않은 것들은 모두 무명이다. 나를 흔들지 않은 것들을 위해선 노래하지 않겠다. 적어도 이 생엔. - P71

당신은 이 숲 어딘가에서
저 사선으로 내리꽂는 차가운 빗살무늬로 서 있겠지요.
빗금처럼 서 있겠지요. - P81

생각해보면
너무 많은 바람, 너무 많은 빗물
이런 게 다 우리를 힘들게 했지 - P89

눈물이란 그런 것이다
무한 속으로 사라지는 한 컷
누구나 흘리는
대책 없는 생의 밀도 - P102

그대 살아 있으라 죽지 말고 살아 있으라
피라도 살아 있으라 - P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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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간식은 뭐로 하지 - 달달해서 좋은 만남
마스다 미리 지음, 권남희 옮김 / 반니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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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제목에서 평화로움을 느낀다. 고민이 이런 일이라면 고민 자체에서 행복을 느낄 수 있겠다 싶을 정도다. 밥도 아니고 주식도 아니고 간식이 고민이라면. 세상사 온갖 어려움이나 고난을 피해 달달하고 맛있는 간식을 찾아 다닐 수만 있다면 나도 기꺼이 이 대열에 끼고 싶다. 

2016년부터 2021년까지 작가가 쓴 산문을 모아 놓은 책이다. 작가 특유의 간결하고 귀여운 그림들이 살짝 곁들여져 있다. 오로지 간식에 대해서만 궁리하며 이리저리 찾아서 맛있게 먹었다고 말하는 글들이다. 지극히 가볍고 사소하게 여겨지는데도 글에서 생활에서 매력을 느낀다. 진지하게 따라 해 보고 싶을 만큼. 간식을 거의 먹지 않는 나로서도.

어쩌다 아주 가끔 달달한 것을 먹고 싶을 때가 있기는 하다. 그렇다고 해서 애써 찾아 나서는 일은 없는데, 작가는 자신이 써야 할 글과 그려야 할 그림을 위해서라도 나가서 먹고 있는 모양이다. 먹고 쓰고 그리고 발표하고 책으로 만들고 다시 먹으러 나가고. 삶이다. 이렇게 사는 사람도 있고 이렇게 사는 사람의 이야기를 보는 독자인 나도 있고. 누군가의 먹는 이야기를 읽는 것만으로도 충분해지는. 

괜히 간식 하나를 챙겨 먹을까 하다가도 뭘 먹는 게 좋을지 모르겠다. 간식도 자주 먹는 사람이라야 맛있는 것을 골라 먹게 되나 보다. (y에서 옮김2024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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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온 뒤
윌리엄 트레버 지음, 정영목 옮김 / 한겨레출판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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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읽고 있는 동안에는 잘 느껴지지 않는다. 글이 얼마나 근사한지, 글 속 세상이 얼마나 현실과 닮아 있는지를. 너무도 익숙하고 친근한 탓에 자칫 지루한 듯 싶어지다가 이게 바로 우리가 사는 모습이라는 것을 새삼 깨닫고 난 뒤에 다시 글로 향하면, 그때 맡는 글의 향기, 삶의 향기가 더더욱 짙어지고 있음을. 


내가 남의 생에 뭐라고 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런데 왜 자꾸만 뭐라고 하고 싶어진단 말인가. 그게 소설이든 현실이든. 내 것의 삶에 열중하기에도 벅찬 노릇인데, 나와는 다르게 사는 게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일 텐데. 사람이 온통 착하기만 하지도 악하기만 하지도 않고, 늘 지혜로운 것도 늘 멍청한 것도 아니며, 순간순간의 선택과 결정에 따라 그 사람 고유의 생이 지어진다는 것을 안다. 알고는 있는데 자꾸만 잊게 된다. 그리고는 남에게 무심코 내 입장을 들이댄다. 나라면 그러지 않았으리라고, 또는 나라면 그랬으리라고, 그러면서 나처럼 하지 않는다고 간섭하고 비난하고 경멸하고 외면한다. 그것도 자주. 다른 사람들이나 공동체 사회에 해를 끼치는 나쁜 짓을 하는 이들에 대한 대응을 말하는 게 아니다. 특별한 잘못을 저지르는 게 아니라 그저 다른 선택, 다른 모습의 삶을 구할 뿐인데도 내가 가지 않는 길로 향한다고 그런 태도를 보이다니. 나는 아직 멀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더욱 절실히 느낀다.  


모두 12편의 소설이 담겨 있다. 여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조금씩 허물어진 구석을 제 삶에 품고 살고 있다. 누가 누구를 나무랄 수 있을 것인가. 그러지 말라고, 그래서는 안 된다고, 그렇게 말하는 것과 내 안의 마음은 서로 같은 농도가 아님을 알고 있는데. 그렇다면 이 소설들은 무엇인가. 어쩌자는 것일까. 삶에 답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답이 없어서 답답한 심정이 고스란히 솟는다. 원래 이렇게 암담하고 아득한 것이었던가. 사는 일이라는 게. 


50년을 넘겨 살고 있는 인물들의 입을 통해 전하는 작가의 메시지가 슬프기만 하다. 50년을 살았대도, 다 알고 있는 것처럼 여겼어도, 모르는 건 여전히 모르는 것이다. 그저 살고 있어야 할 뿐,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건가 싶다. (y에서 옮김2021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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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의 끝
윌리엄 트레버 지음, 민은영 옮김 / 한겨레출판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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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이 있다는 건, 끝을 내야 한다는 건, 끝을 봐야 한다는 건, 그게 어떤 형태의 끝이든 위로가 되기도 하고 포기가 되기도 할 것 같다. 내게 위로가 되어 주는 게 남들에게는 포기처럼 보일 수도 있을 테고 내가 포기한 것에 사정을 다 모르는 남들이 위로를 해 줄 수도 있을 것 같고. 끝은, 아무려나, 이래저래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원하든 원하지 않았든.


이 작가의 글, 읽기 참 좋다. 나쁜 사람이 나오지 않는 소설이라는 것, 나쁜(잔인한) 사람이 나오지 않아도 나쁜(끔찍한) 상황이 벌어지지 않아도 지겹기 짝이 없는 갈등이 전개되지 않아도 소설이 된다는 걸 알겠다. 다들 착하고, 착해 보이고, 성실하고, 제 할 일 다 하고, 특별히 누군가를 시기하거나 질투하거나 모함을 하지 않는데도 긴장된 상황은 일어난다. 누군가 다치거나 누군가를 해치는 식의 위험한 긴장이 아니라 이 다음에 이 사람들에게 어떤 일이 벌어지려고 이러나 하는 정도의 궁금증과 호기심 같은.   


작가가 묘사하는 방식에 점점 더 빠져들게 된 것도 내가 이 작가의 글을 좋아하는 이유다. 천천히, 하나하나 빠짐없이, 보이는 풍경은 보이는 대로, 생각하는 바는 생각하는 대로, 등장인물 중 어느 한 사람 놓치는 일 없이 다 보여 주는 서술방식, 어느 한 대목 지겹지 않다는 게 놀랍다. 천천히 말해 주는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아 접었던 소설이 얼마나 많은데, 차이가 무엇인지 이건 좀더 궁리해 보기로 하고. 


아일랜드라는 곳이 괜히 우리나라의 어느 섬처럼 그리워지려고 한다. 마음만 먹으면 가 볼 수 있을 것 같은 곳으로. 우리네 사는 모습과 전혀 다르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마치 우리의 이웃이나 우리 자신과 같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이전에 가 본 적 있는 익숙한 땅인 것처럼. (y에서 옮김20210730)  


강한 스포일러 하나,  



 



-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가 떠오르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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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7-01 18:3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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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7-02 13:5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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