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톰은 톰과 잤다
손홍규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6월
평점 :
우리 소설에 대한 내 관심을 키우고자 애쓰는 중에 반가운 선물 같은 글을 만났다. 이런 글을 만나면 그동안 왜 몰랐던가 하는 한탄도 크게 일어나지만 이제라도 볼 수 있게 되어 좋구나 하는 마음이 더 크다. 나는 이렇게 또 하나의 세계를 얻는다. 앞서 읽은 산문집에서 기대했던 바가 어긋나지 않았다.
먼저 소설들은 상쾌하지 않았다고 쓴다. 뭔지 애잔해 보이는 인물들인데 희한하게도 주눅들어 있지 않다. 2010년 즈음에 나온 소설들인데, 등장 인물들의 나이가 대체로 젊다. 10년 전, 나는 어떠했던가. 내 주변은 어떠했으며, 당시 우리 사회는 어떤 상태였던가. 그때 나는 지금보다는 젊었겠지만 소설 속 인물만큼 젊은 것은 아니다. 그런데 한 편 한 편 읽어 나갈 때마다 나는 자꾸만 먼먼 과거의 나로 돌아가고 있었다. 아주 젊었던 나, 소설 속 인물들처럼 대학생이었던 나, 비슷하게 가난하고 비슷하게 고단하고 비슷하게 서글펐던 내가 자꾸만 튀어 나오면서 지금의 나와 바꿔 앉는 것이었다.
성가시지 않았다. 억울하지도 않았다. 그냥 그 시절의 내가 좀 애틋했다. 쓰다듬고 안아 주고 싶을 만큼. 그래서 그렇게 했다. 한 편 읽고 끌어 안고 또 한 편 읽고 끌어 안고. 소설의 줄거리는 별로 신경쓰이지 않았다. 전개 과정도 주제까지도 희미하게만 보였다. 문장만 자꾸 도드라졌다. 낯선 우리말 단어들도 쉼 없이 끼어들었다. 나는 문장 하나하나가 드러내는 분위기에 매혹되었던 것 같다. 사전을 먹는 것으로 낱말을 먹고 싶어 했던 소설 속 어느 주인공만큼이나 내가 문장을 통째로 갖고 싶어 한다는 것을 느꼈다. 문학에 대한 청년 시절의 갈망은 인생의 사춘기만큼이나 보편적인 것일까. 어쩌자고 나는, 내 주변인들은, 젊었던 시절 당시 문학이라는 것을 그렇게나 꿈꾸려고 했던 것일까. 지금 와서 보면, 다들 그런 적이 있었던가 시치미만 떼면서.
책이 나온 지 10년이 지났는데, 강산은 별로 변한 것 같지 않고, 사람살이도 별로 변한 것 같지 않다. 역사는 진보하는 게 아니라 순환한다고 적힌 책 속의 말이 예사롭지 않게 남는다. 그때 그 가난했던 문학 청년들은, 지금도 문학을 하고 있을까? 문학을 하고 있기를 바라는 것 자체가 무례한 게 아닐까. 작가가 그려 낸 인물들은 쉬지도 못하고 매번 자신과 싸우다가 지쳐 나자빠지다가 다시 일어나서 비틀거렸는데, 읽기만 하고 있는 나는 미안해서 손이 떨렸다. 그렇게그렇게 밥도 집도 되지 못한 문학을 붙잡고 살아남아야 했던 무수한 문학 청년들에게 진 빚을 나는 어떻게도 살려 낼 수가 없다.
요즘 들어 다른 사람이 아닌 나 자신과의 만남에 정성을 쏟는 시간이 늘고 있다. 내가 나를 잘 보살필 줄도 모르는 사람이 다른 사람과 어떻게 소통을 할 수 있겠는가 싶다. 내가 많이 늦었다는 것을 안다. 이 책 속의 톰처럼, 진작 나도 나와 함께 자기도 했어야 하는데. 나를 잘 만난 다음날에는 내 마음이 한층 너그러워진다는 것을 이제야 알게 되었으니. (y에서 옮김201905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