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무해한 사람
최은영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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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시절을 돌아보는 일은, 뭘까? 좋고 안 좋고를 떠난 일인 것은 분명한데, 어떨 때는 필요하고 어떨 때는 해롭다. 어떨 때는 지난 날의 기억이 새로 살게 하고, 어떨 때는 그 기억 때문에 현재를 살아 내는 게 힘들기도 하다. 그게 어떻게 구별되는지 잘 알 수가 없어서 되풀이하는 걸까? 떠올렸다가 모른 척 했다가.


소설들이 발표된 시기는 2016년에서 2018년이다. 작가가 그려 낸 시기는 그보다 좀 앞선 것으로 보인다. 마치 작가의 더 젊은 시절을 떠올려도 될 것 같은 분위기다. 다만 작가의 현실과 소설의 내용이 겹치나 그렇지 않나를 상상하는 일은 어리석은 짓이다(간혹 이런 독자가 있어서 딱하다 싶지만). 둘을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의 글이라면 그만큼 잘 쓰인 글이라는 증거겠지?


나는 또 편하지 않았다. 우리 작가의 소설을 읽을 때 종종 만나는 마음이다. 처음에는 작가 탓을 했는데, 이런 현상이 반복되다 보니 이제는 내 쪽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닌가 한다. 맞을 것이다. 우리의 문제를 마주치는 일에 내가 불편을 느낀다는 뜻일 테니까. 내놓고 말하기 거북한 이야기, 금방 풀리지 않을 오래된 악습들, 쉽게 납득하지 않고 끝까지 고집을 피우는 속상한 이야기, 좀처럼 이겨 내지 못하고 내내 시달리는 이야기, 이런 이야기들을 다루는 소설에서 자꾸만 눈돌리고만 싶은 내 비겁한 속성 때문에. 


읽기 불편하면 안 읽으면 되는데, 이러면서 나는 또 왜 자꾸 찾아 보곤 하는지. 마치 내가 나를 길들이려고 하는 것 같다. 사회를 품기 어렵다면 소설부터 품어 안을 줄 알아야 한다고 연습처럼 시키는 듯. 어지간히 거듭된 연습이었던가, 이번에는 그래도 거부감이 줄어든 듯하기는 하다. 이 시대의 젊은 사람들은 또 이런 문제로 삶에 흔들리고 있다는 것이지. 나로서는 몰랐거나, 무시했거나, 억눌렀거나, 억지로 받아들였던 것들을 온몸으로 받아 내치면서. 내 젊은 시절에 겪었던 문제가 내 앞 시대의 어른들에게 인정받기 어려웠던 것처럼.  


내게 직접적으로 향하는 게 아닌 악플들에 내 마음이 많이 상하는 요즘이다. 악플을 다는 사람 그 자체가 혐오스러워서 견디기가 어렵다. 이 또한 지금의 우리 시대가 풀어야 할 문제 중의 하나일 텐데, 나는 괜히 우리 소설에서 답을 찾고 싶어진다. 괜찮아지는 기분이 든다. (y에서 옮김20190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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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실로의 여행
폴 오스터 지음, 황보석 옮김 / 열린책들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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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 시작부터 다 읽고 난 지금까지 좀 당황스럽다. 내가 무얼 읽었지? 싶은 마음. 내가 제대로 못 읽었나 싶어 다른 분들의 리뷰를 봤다. '오로지관객'님의 글에서 내 당황의 근거를 보았다. 내가 이 책을 너무 빨리 본 것이다. 다른 책을 먼저 보고 이 책을 열었어야 했는데. 


오래 전 브루클린 풍자극을 보고 기억해 둔 작가의 이름 때문에 구한 이 작가의 책을 대여섯 권 정도 세워 놓고, 하필 이 책을 먼저 들었으니. 섭섭한 선택이었다고 할 수밖에 없겠다. 


작가의 분신으로 보인다는 주인공 노인에 대해서도 제대로 파악이 안 되고 노인에게 나타나는 사람들 중에서도 전혀 파악이 안 되는 글읽기라니. 그럼에도 끝까지 읽으면서 뭔가를 알아내 보겠다고, 작가가 펼쳐 놓은 지적 미스테리 속에서 나도 헤엄쳐 보겠다고 허우적거렸는데, 홀로 웃는다. 


이 작가의 다른 책을 읽게 되면, 그 때 나는 이 책의 내용을, 이 책 속에 나온 인물들의 이름을 과연 기억할 수 있을까? (y에서 옮김2010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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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보다 : 봄 2021 소설 보다
김멜라.나일선.위수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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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따라 읽게 되는 우리 소설 세 편이다. 이번 책에서는 세 번째로 실린 위수정의 작품에 머물렀다. 편하게 읽을 수 있는 글이 아니었으나, 지금 시기에 읽어 보아야 할 글이라는 생각이 든다. 읽는 마음을 거북하게 하는 글인데, 그럴수록 읽어야 하는 글이라는 것을 알고 읽는 마음은 서글프다. 쓰는 이는 얼마나 더 서글프고 고되었을까.


먹고 사는 게 전부인 사람들이 있다. 하루하루, 단 하루라도 내일을 걱정하지 않고 살 수 있다면. 코로나 19는 이 문제를 한층 가깝고 절실하게 던진다. 나만 괜찮은 거리에 물러나 있다고 안심할 수 없는 세상, 그래서도 안 되는 세상, 그럼에도 이 또한 쉽게 외면하게 되는 세상. 약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약한 위치에 있는 많은 생명체들처럼 자신의 생명을 이어 가는 일이 고달프기만 할 것이다. 자칫 놓아버리고 싶을 만큼. 소설은 이런 상황에 놓인 우리 각자를 어디까지 데려다 줄 수 있을까. 서로 만나게 해 줄까?   


김멜라의 글과 나일선의 글은, 내 취향에서 좀 멀리 있다. 읽으려고 애를 쓰다 보면, 굳이 왜? 하는 마음이 드는 때가 온다. 이럴 것까지는 없지 않은가, 하여 읽기를 그만둔다. 작가가 표현하는 문장이나 이야기를 전개하는 방식이 내가 수월하게 읽을 수 있도록 해 주지 않는다고 느낄 때, 내 취향과 작가의 취향을 동등하게 존중하기로 하자 싶다. 세상 모든 글에 다 빠질 수는 없지 않겠는가. 


여름은 아주 멀리 있구나. (y에서 옮김20210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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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 십자가 미스터리 엘러리 퀸 컬렉션 Ellery Queen Collection
엘러리 퀸 지음, 주영아 옮김 / 검은숲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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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리소설에서는 제목이 사건 해결의 요인이 되기도 하고 방해 요소가 되기도 한다. 작가의 의도와 독자의 추리 사이의 대결이라고나 할까. 믿느냐 의심하느냐 하는 것. 이번 글에서는 내가 잘 속았다. 늘 속는 편이기는 하지만, 확실히 잘 속았군 싶은 마음이 들었을 정도로. 


사람의 시체를 T자 형태의 구조물에 매달아 놓는다는 설정, 그것도 한두 번이 아니라 세 번씩이나. 같은 범죄자로 취급하기 딱 좋고 뭔가 이유가 있지 않을까 생각하도록 이끌기 딱 좋고. 범인이라는 입장에서 정말로 이렇게 할 정도로 마음과 기술을 다해 살인을 저지르겠다면 그냥 다른 방향으로 새롭게 살고 말지. 이런 범인이 현실에도 있기는 할 테지만. 


퀸이 저 혼자서 중얼거리며 범인을 찾는 일에 몰두하는 게 마음에 들었다가 안 들었다가 한다. 나로서는 성심성의껏 과정을 챙겨 가며 글을 읽는 것도 아니고 범인을 추측하는 데에 전혀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 편이지만 작가와 대결하는 마음으로 글을 읽는 독자에게는 좀 약오를 듯도 해서다. 독자에게 힌트로 다 가르쳐주지 않았느냐 하는 에피소드에 이르고 보면. 


미국이라는 나라, 전 세계의 곳곳에서 이민을 받아들인 나라. 함께 살기에 쉽지 않을 것 같다는 예상만 해 본다. 같은 인간이라는 말도 이런 경우에는 그다지 쓸모없지 않나. 제 나라 제 민족 제 고향 제 종족을 내세우는 인간의 어떤 면. 이 또한 살아남기 위한 생존 전략에서 나온 방편이었을까. 사람과 사람이 철천지 원수가 되는 배경에는 어떤 욕망이 존재하는 것일까. 


희생자들의 덧없는 처지가 슬프게 느껴졌다. 그들이 그런 대접을 받으려고 생명을 얻었던 것은 아닐 텐데. 소설에서도 현실에서도 약한 쪽은 어쩔 수 없는 것인가,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데. (y에서 옮김2023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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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웰 가는 길
코니 윌리스 지음, 최세진 옮김 / 아작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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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가의 전개 방식을 깜박 잊고 있었나 보다. 초반 부분-프랜시가 로즈웰에 있는 친구를 만나기까지의 과정을 읽는 동안 얼마나 답답하던지 하마터면 포기할 뻔했다. 그 대목을 넘어서고 나니 그때부터 진지함은 진지한 대로, 참신함은 참신한 대로, 두근거림까지 다 얻으며 읽었다. 아무렴, 외계인을 만났는데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  


혼자 있을 때 외계인을 만났다. 이 외계인이 무척 낯설고 무섭지만 나를 구속시키기는 해도 해치려고 하지는 않는다.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소설을 읽는 내내 이 가정을 해 보았다. 우선 어디에 신고를 해야 할지 모르겠고, 신고를 한다고 해도 안 믿어 줄 것이고, 설령 믿어 준다고 한들 외계인을 만난 나를 먼저 격리시킬 것이 뻔하며, 외계인이 아니라 지구인 쪽으로부터 공격을 받을지도 모를 일이다.(영화를 꽤 본 탓인가, 이런 염려가 더 생기는군.) 만났어도 만난 것을 말하지 말아야 하는 게 아닐까? 그래서 거짓말을 보태는 지구인이 한 명 더 늘어나는 일로 그치게 되는 건 아닐까?


외계인이 지구에 왔다고 가정하자. 지구에 올 수 있는 외계인이라면 우주 항해 기술력이 지구인보다 훨씬 뛰어난 종족이다. 빛보다 빠르게 이동하든 차원을 바꿔 오든 생존 모습이 어떠하든 그 모든 면에서. 우리가 싸워서 이길 수는 없다는 뜻이다. 그러니 소통하는 것만이 유일한 해결 방법이다. 왜 왔는지를 알려면. 그리고 어떻게 소통할 수 있을지 방법을 찾아야 할 것이다. 


작가는 이 물음들에 대한 답을 절묘한 상상과 서술로 제안하고 있다. 말도 안 된다고 여겼다가도 곧 이러면 되겠는데 싶을 만큼 가능해 보인다. 외계인에게 처음으로 잡힌 프랜시와 어울리게 되는 인물들 또한 어쩌면 그렇게 딱 맞아 떨어지는 재주들을 갖고 있는지 인물을 창조하는 능력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다양한 사람을 알기도 어렵겠는데. 소설가는 얼마나 많이 알고 있어야 재창조를 할 수 있게 될까? 몰라서는 창조 자체가 안 될 테니 독자인 나는 그저 신기한 기분으로 읽었다. 


외계인과 지구인 사이의 우정 혹은 사랑은 이 소설의 주제이자 교훈이다. 프랜시가 남달리 따뜻한 심성을 가진 사람이라서 낯선 외계인과도 정을 쌓을 수 있었을 것이다. 지구인끼리 이웃끼리 친구끼리 가족끼리도 다 이해해 주지 못하고 사는 우리네 사정을 새삼 돌아보게 하는 소설이다. 다 읽고 나니 흐뭇해진 만큼 씁쓸한 기분이 남는.


소설에 나오는 역마차를 타고 캠핑을 해 보고 싶다는 뜬금없는 생각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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