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에서 중얼거리다 - 기형도 30주기 시전집
기형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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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 속의 검은 잎>과 <기형도 전집>이 있으나 이 책을 또 샀다. 미발표 시까지 함께 묶은 시집이라고 해서 이참에 다시 읽어 보아도 좋겠다 싶었다. 한번을 다 읽었다. 자꾸만 구절들에 마음이 잡히면서 시간이 걸렸다. 모든 시를 천천히 따라 적어 보고 싶다는 열망 아닌 열망에 빠지기도 했다. 그래서 선택했다. 한 편의 시에서 딱 한 줄만 골라 적어 보자고.

 

신기했다. 각각의 시에서 단 한 줄씩 옮겨 적는데, 적으면서 보니 이대로도 감정이 흐르는 것이 보이는 거다. 도대체 단 한 편의 시도 그냥 넘길 수 없게 만드는 이 힘을 무엇이라고 할 수 있을지(딱 한 편의 시에서 고르지 못했다). 시인은 나를 이렇게 1981년으로, 내 젊은 날로, 온통 스산하고 춥고 쓸쓸한 그 겨울로 사정없이 불러들였다.

 

시인이 소리내어 말하는 시어들이 여럿 있다. 그 중에 내가 뽑는 대표는 다음의 넷이다. 겨울, 눈, 늙음, 어림. 이들 말고도 더 많이 있지만 다 더듬어 보기에는 내 역량이 모자란다. 나는 이 넷만으로도 벅차다. 더욱이 이 네 단어 사이사이로 공기처럼 물처럼 스며들어 고통을 불러일으키는 사회 문제까지 짚다 보면 시를 읽는 것인지 소설을 읽는 것인지 영화를 보는 것인지 그만 현실에 내동댕이쳐진 것인지조차 구별이 되지 않는다.

 

한번 어렸을 시절이었을 텐데, 그 가난하고 슬픈 시절은 어찌 이리도 오래 시인의 곁을 떠나지 않고 있었을까. 한번 늙어 본 적도 없으면서, 주변의 늙은이를 보는 것만으로 어떻게 이렇게 처절한 늙음을 그려낼 수 있는 것일까. 시인의 시에서 은빛으로 빛나기만 하는 태양은 따뜻하게 비춰주는 날이 없는 것 같고, 바람도 구름도 안개까지도 겨울 눈 사이에서만 제 몸짓을 하는 것 같았다. 마치 시인이 살아서 겪은 계절은 겨울만 있기라도 한 것처럼. 그런데 시를 읽고 있는 나는 또 어쩌자고 이런 겨울이 좋아서 못내 그립기만 하단 말인지.

 

198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란에서 당선작을 본 게 이리도 생생한 기억으로 남아 있는데. 그 이후로 안개 낀 날을 맞을 때마다 시인의 당선작을 떠올리지 않은 순간이 없었는데. '빈 집', '질투는 나의 힘', '엄마 걱정'은 국어 수업으로 만나기까지 했는데. 암울하면서도 괴기스럽지 않고, 가난하면서도 누추하지 않고, 절망을 노래하는데도 아름답기만 한 시들.     

 

어쩌면 이런 글들을 쓸 수 있을까. 어쩌다 그 젊은 나이에 생을 마칠 수 있을까. 스스로 질투를 노래하였으나 시인이 더 많은 질투를 받았던 게 아니었을까. 누구도 말해 주지 않는 시인의 짧은 생, 나는 빼앗긴 것마냥 안타깝다.

 

이번이 끝이 아님을 나는 알고 있다. 어느 춥고 쓸쓸한 어느 날, 나는 또 다른 시구를 찾아 이 시집을 뒤적일 것이다. 그때 발견하는 구절들은 내 생의 또 다른 면을 밝혀 줄 것을 믿는다. (y에서 옮김20190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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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극으로 걸어간 산책자
엘링 카게 지음, 김지혜 옮김 / 다른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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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lking one step at a time". 이 책의 제목이다. 이 말이 어떻게 '남극으로 걸어간 산책자'로 바뀌었는지는 모르겠다. 나는 정말 남극에서 산책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줄 알고 빌린 책인데(극한의 남극 산책 이야기로 자극을 받고 싶은 마음에). 남극이 나오기는 한다. 작가가 남극에 가 보기도 했으니. 그러나 주인공은 남극이 아니라 '산책', 즉 '걷기'다. 처음부터 걷기에 주목하고 읽었더라면 책 제목에 속은 듯한 이 낭패감이 없었을 텐데. 


책은 작고 얇은 편에 속하며 한 편 한 편의 길이도 길지 않다. 대개 두 쪽에서 네 쪽 정도? 한 쪽짜리도 다섯 쪽짜리 이상의 글도 있기는 하지만. 읽기에 부담이 전혀 없다는 말이다. 순서대로 읽을 것도 아닌 구성이다. 아무 쪽이나 펼쳐도 걷는 일과 그 일로 느끼고 있거나 품고 있는 작가의 생각과 만날 수 있다.


걷는 데에 이런 좋은 점이 많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기는 하는데 막 새롭지는 않다. 세상에는 걷는 게 좋다는 사람이 아주 많고 그들 중 그 좋은 면을 혼자 간직하고 있기에는 섭섭하다고 책으로 말로 드러내 보여 주는 사람도 아주 많아서 종종 봐 왔던 덕분이다. 이 작가만의 특별한 면이라고 한다면 자신이 사는 곳 주변을 걷다가 북극에, 남극에, 에베레스트까지 가 보았더라는 것이겠다. 아무리 잘 걷는 사람이라도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는 하다.


날이 걷기에 점점 좋아지고 있다. 태풍이 온다고 하는데, 짧은 가을 날씨를 아쉽지 않게 누려야겠다. (y에서 옮김2021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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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시편 - 개정판 ㅣ 민음의 시 52
이문재 지음 / 민음사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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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이라는 말은 참 정답다. 정말 '산책'이라는 것을 하면 시를 쓸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한다. 그냥 돌아다닌다는 말과 산책을 한다는 말 사이에는 야릇한 차이가 있다. 그게 꼭 우리말과 한자말의 차이를 의미한다는 게 아니라 어쩐지 산책을 한다는 말에서는 몸과 마음을 한 길에서 만나게 해 주려는 것 같은 산책하는 사람의 의도적인 느낌을 읽을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산책이라는 것을 해 보고 싶을 때면, 내 몸과 내 마음이 하나로 만나 시가 되고 음악이 되고 영화가 되었으면 하고 꿈을 꿀 때면, 이 시집을 펼치곤 했다. 그러면 이곳에는 이미 산책을 끝낸 한 젊은 남자의 시와 노래들이 제 각각의 음성으로 울리고 있었다. 어느 한적한 시골길을 거닐기도 하다가, 그 길 밖에서 중얼거리기도 하다가, 갑자기 메마른 도시의 어두운 길을 걷기도 하다가, 어느 순간에는 공해에 찌들려 신음하는 지구의 한쪽 아픈 몸을 종일 쓰다듬고 있는 것이다.

그래, 젊은 것이겠지. 이제 시집이 나온 지가 10년 쯤 되었으니 그때 그 젊은 눈으로 바라본 세상은 또 이렇게 아팠을 것이다. 길에서 아픔을 느낄 수 있는 나이는 그리 길지 않은 것이다. 산책하는 시간을 많이 가질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눈을 감고 사는 사람에게나 눈을 뜨고 사는 사람에게나 시간은 똑같이 흘러가고 있을 것이므로. (y에서 옮김20020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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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블린 사람들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07
제임스 조이스 지음, 이종일 옮김 / 민음사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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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으로 나는 먼먼 나라의 도시 하나를 얻는다. 더블린, 가 보고 싶다고 열망하게 되는, 그러나 가게 될 것 같지는 않은, 마음에 드는 도시라고, 좋아하는 도시라고 말하게 될. 갑자기 부자가 된 기분이다. 도시 하나를 얻다니. 더블린을 배경으로 삼은 글을 몇 번 봤다. 호감을 가졌고 이 책으로 굳힌다. 


작가가 쓴 율리시스를 읽어 보려다가 포기하고 대신 잡은 책이다. 더블린이라는 곳은 어떤 곳인가. 1900년대 초를 배경으로 삼은 소설들인데 나는 시공간을 초월하고 읽었다. 지금 여기, 내가 살고 있는 도시의 누추한 모습과 바꿔 놓는다고 해도 전혀 달라질 게 없을 것만 같은 모습이다. 사람도, 집도, 인물 간의 갈등도, 각 인물들이 꿈꾸는 이상향도, 인물들이 지닌 내면의 소박한 편견이나 허물까지도. 우리는 다 똑같은 사람들이라는 자각, 다 조금씩 모자라거나 넘쳐서 스스로를 고생으로 이끌어가는 모습에 불쌍하다가도 괘씸해지고 마는 이중성까지 느끼게 된다. 우리는 나아질 수 없는 존재인 것만 같다는 절망마저 친숙해졌으니. 이미 백 년이나 지났으나 여전한 우리. 


더블린에 대해 인터넷 자료로 찾아보았다. 영국과의 역사, 영국과의 관계, 영국에 대한 아일랜드인들의 애증 등 어딘가 우리네 처지와 비슷한 점이 있다. 약자로 살아남는 법을 익혀야 했을 테니, 국가 차원에서도 험난한 시절을 겪어야 했을 것이다. 게다가 아일랜드 기근은 얼마나 혹독한 사건이었던가. 세상의 일부를 열고 얻는 좋은 방법 하나, 훌륭한 소설을 읽는다는 생각이 단단해졌다. 


책을 읽은 후에 동네를 걸었다. 사람들을 스쳐 지나가고 길고양이를 보고 가게의 간판을 읽고 빈 가게에 허전함을 느꼈다. 어쩐지 모든 풍경이 전과 많이 달라 보였다. 더블린이라는 이름 대신 내가 살고 있는 도시의 이름을 넣고 내가 방금 본 사람들의 이야기를 낱낱이 담는다면 그건 그것대로 작품이 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정말 생각만 한 것이지.   


아무 특별할 것이 없는 보통의 사람들, 경제적으로 힘든 삶을 내내 버티는 사람들, 서로 눈치 보고 서로 미워하면서도 서로를 견디는 사람들, 더 나은 내일이 오지 않을 것 같은데도 오늘을 충실하게 사는 사람들, 하찮은 위선과 부질없는 욕망을 대단한 것으로 여기고 제 삶을 망가뜨리면서도 아닌 척 하면서 허영에 찌들어 있는 사람들. 어쩌자고 나는 이들의 이야기를 하나도 물리치지 못했는지 모르겠다. 내용으로는 내 취향이 전혀 아니었는데. 작가의 글솜씨 때문이라고 할 수밖에 없겠다. 


율리시스는 아직 힘들겠고 젊은 예술가의 초상으로 넘어가 보나 어쩌나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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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본 백석 시집 - 개정판
백석 지음, 고형진 엮음 / 문학동네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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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머리에>에서 엮은이가 말하고 있다. 이 책에 실린 시는 작가가 1935년부터 1948년까지 발표한 시들을 담았다고. 아뿔싸, 나는 참 오래도 오해하고 있었다. 이 오해 때문에 얼마나 많은 것을 놓쳤는지는 이제부터 더 짙은 실망감으로 다가올 것이다. 해방 이후 북쪽에 남았다는 그 이유 하나로 사회주의자(공산주의자)의 성향을 가진 시인이었으리라고, 작품도 그런 영향을 받았으리라고 착각하고 있었다는 것. 자꾸만 색안경을 쓰고 시를 봤더라는 것, 그러니 이 시인의 시를 더 읽어 보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던 것이겠지. 무지가 얼마나 위험한 요소인지 아프게 깨닫는다.


책은 크게 둘로 나뉘어져 있다. 앞쪽에서는 작가의 시가 다시 3부로-이 책을 구하도록 동기가 되어 준 ‘사슴’, ‘함주시초’, ‘흰 바람벽이 있어’-펼쳐져 있고 이 뒤에 이 시들의 원본이 실려 있다. 내가 사투리와 옛말 때문에 읽기 힘들다고 느꼈던 점을 없애 놓은 편집이다.(앞쪽의 시들에는 낱말 풀이도 자세하고 친절하게 나와 있다.) 풀이해 놓은 낱말들이 가끔 공부를 해야 할 듯한 부담과 착각을 불러내기는 했지만 이 조급증만 다스린다면 금방 확인하고 비교해 볼 수 있어 아주 좋을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리고 마지막 부분에 작가와 관련된 전문 자료가 실려 있어 작가나 작가의 시를 좀더 많이 공부하려는 이들에게는 큰 도움이 될 것으로 보였다.


시인의 시를 새로 본다. 내 하찮은 편견과 선입견은 버리고 1935년부터 1948년 사이의 우리 옛 땅과 옛 사람과 옛 삶을 읽는다. 심지어 2부의 ‘함주시초’에는 내가 오랫동안 살았던 남쪽 지방을 작가가 여행하며 쓴 시들이 실려 있다. 낯익은 땅의 이름이 새삼 반갑다. 통영, 창원, 고성, 삼천포. 작가가 살았던 터전인 북쪽 땅의 이름에서 얻었던 낯선 느낌과는 또 다르다. 그래, 그랬지, 그때는 남북으로 한 나라였지, 갈 수만 있다면 북쪽에서 남쪽으로 남쪽에서 북쪽으로 모두 오갈 수 있었겠지. 살아내기 힘들었던 시절이었어도 다 우리의 땅, 우리의 사람들이었겠지. 


시인이 시로 내보이는 장면들이 몇몇으로 구분되어 눈에 들어온다. 땅의 풍경, 집의 풍경, 그 집에 사는 이들의 애틋한 삶의 역사, 사람 가까이에 사는 동물들의 모습, 이곳저곳으로 이어지는 수많은 길의 풍경, 길 위에서도 끊어지지 않는 삶의 풍경, 작가가 좋아하고 그리워하는 이들을 향한 고백과 사랑까지. 소설이 아닌 한 권의 시집만으로도 한 시대를 증명할 수 있는 증거가 된다는 것을 본다. 우리보다 조금 앞선 사람들이 살았던 이야기를 읽는다. 조금도 모자라지 않게 조금도 섭섭하지 않게.


시가 덜 읽히는 시절이라는 생각이 나만의 오해이고 착각이었으면 좋겠다. (y에서 옮김20220602)    


93쪽


  바다


바닷가에 왔드니

바다와 같이 당신이  생각만 나는구려

바다와 같이 당신을 사랑하고만 싶구려


구붓하고 모래톱을 오르면

당신이 앞선 것만 같구려

당신이 뒤선 것만 같구려


그리고 지중지중 물가를 거닐면

당신이 이야기를 하는 것만 같구려

당신이 이야기를 끊은 것만 같구려


바닷가는

개지꽃에 개지 아니 나오고

고기비눌에 하이얀 햇볕만 쇠리쇠리하야

어쩐지 쓸쓸만 하구려 섧기만 하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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