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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본 백석 시집 - 개정판
백석 지음, 고형진 엮음 / 문학동네 / 2020년 1월
평점 :
<책머리에>에서 엮은이가 말하고 있다. 이 책에 실린 시는 작가가 1935년부터 1948년까지 발표한 시들을 담았다고. 아뿔싸, 나는 참 오래도 오해하고 있었다. 이 오해 때문에 얼마나 많은 것을 놓쳤는지는 이제부터 더 짙은 실망감으로 다가올 것이다. 해방 이후 북쪽에 남았다는 그 이유 하나로 사회주의자(공산주의자)의 성향을 가진 시인이었으리라고, 작품도 그런 영향을 받았으리라고 착각하고 있었다는 것. 자꾸만 색안경을 쓰고 시를 봤더라는 것, 그러니 이 시인의 시를 더 읽어 보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던 것이겠지. 무지가 얼마나 위험한 요소인지 아프게 깨닫는다.
책은 크게 둘로 나뉘어져 있다. 앞쪽에서는 작가의 시가 다시 3부로-이 책을 구하도록 동기가 되어 준 ‘사슴’, ‘함주시초’, ‘흰 바람벽이 있어’-펼쳐져 있고 이 뒤에 이 시들의 원본이 실려 있다. 내가 사투리와 옛말 때문에 읽기 힘들다고 느꼈던 점을 없애 놓은 편집이다.(앞쪽의 시들에는 낱말 풀이도 자세하고 친절하게 나와 있다.) 풀이해 놓은 낱말들이 가끔 공부를 해야 할 듯한 부담과 착각을 불러내기는 했지만 이 조급증만 다스린다면 금방 확인하고 비교해 볼 수 있어 아주 좋을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리고 마지막 부분에 작가와 관련된 전문 자료가 실려 있어 작가나 작가의 시를 좀더 많이 공부하려는 이들에게는 큰 도움이 될 것으로 보였다.
시인의 시를 새로 본다. 내 하찮은 편견과 선입견은 버리고 1935년부터 1948년 사이의 우리 옛 땅과 옛 사람과 옛 삶을 읽는다. 심지어 2부의 ‘함주시초’에는 내가 오랫동안 살았던 남쪽 지방을 작가가 여행하며 쓴 시들이 실려 있다. 낯익은 땅의 이름이 새삼 반갑다. 통영, 창원, 고성, 삼천포. 작가가 살았던 터전인 북쪽 땅의 이름에서 얻었던 낯선 느낌과는 또 다르다. 그래, 그랬지, 그때는 남북으로 한 나라였지, 갈 수만 있다면 북쪽에서 남쪽으로 남쪽에서 북쪽으로 모두 오갈 수 있었겠지. 살아내기 힘들었던 시절이었어도 다 우리의 땅, 우리의 사람들이었겠지.
시인이 시로 내보이는 장면들이 몇몇으로 구분되어 눈에 들어온다. 땅의 풍경, 집의 풍경, 그 집에 사는 이들의 애틋한 삶의 역사, 사람 가까이에 사는 동물들의 모습, 이곳저곳으로 이어지는 수많은 길의 풍경, 길 위에서도 끊어지지 않는 삶의 풍경, 작가가 좋아하고 그리워하는 이들을 향한 고백과 사랑까지. 소설이 아닌 한 권의 시집만으로도 한 시대를 증명할 수 있는 증거가 된다는 것을 본다. 우리보다 조금 앞선 사람들이 살았던 이야기를 읽는다. 조금도 모자라지 않게 조금도 섭섭하지 않게.
시가 덜 읽히는 시절이라는 생각이 나만의 오해이고 착각이었으면 좋겠다. (y에서 옮김20220602)
93쪽
바다
바닷가에 왔드니
바다와 같이 당신이 생각만 나는구려
바다와 같이 당신을 사랑하고만 싶구려
구붓하고 모래톱을 오르면
당신이 앞선 것만 같구려
당신이 뒤선 것만 같구려
그리고 지중지중 물가를 거닐면
당신이 이야기를 하는 것만 같구려
당신이 이야기를 끊은 것만 같구려
바닷가는
개지꽃에 개지 아니 나오고
고기비눌에 하이얀 햇볕만 쇠리쇠리하야
어쩐지 쓸쓸만 하구려 섧기만 하구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