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룩이 번져 영화가 되었습니다
송경원 지음 / 바다출판사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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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는 일, 소설을 읽는 일, 그리고 이것에 대해 글을 쓰는 일과 이것에 대한 글을 읽는 일. 내가 서 있는 지점을 짚어 본다. 어떤 것은 가깝고 어떤 것은 멀고. 나의 관심과 나의 취향과 나의 집착과 나의 사명에 의해 거리가 줄어들었다가 늘어났다가 한다. 나는 보고 읽고 쓰는 이 모든 과정이 좋다. 내가 가진 본성 중 하나라고 생각해 본다.

영화를 좋아하지만 즐겨 보는 쪽이 아니다. 들여다보고 있고 싶지 않은 주제 의식이나 눈으로 보고 싶지 않은 장면이나 듣기 싫은 말이나 굳이 안 보고 싶은 배우를 거르다 보면 내가 볼 수 있는 영화가 별로 없다. 하루에 한 곳에서 세 편의 영화를 보는 게 퇴직 후의 꿈이라고 말하기도 했는데 포기 상태다. 시간이 장소가 문제가 아니라 영화 자체가 없다. 내 취향의 영화 세 편을 같은 날 같은 곳에서 상영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는 헛되었다. 

그렇다면 나는 영화를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나? 싫어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좋아하는 영화만 좋아한다. 그렇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마는. 그래서 본 영화를 보고 또 보는 일도 흔하다. 같은 감동을 다시, 몰랐던 자각을 새로 얻는 경우가 많다. 아무리 여러 번 보았어도. 이만하면 내 건망증은 나의 특기가 될지도 모르겠다. 보았는데 또 보아도 또 새롭고 재미있다면. 

정작 영화를 보지는 않으면서 영화에 대한 글을 읽는 일은 좋아한다. 내가 본 영화를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 내가 안 본 영화를 어떤 말로 이끌어들이려고 하는지, 작가는 얼마나 잘 보는 사람인지, 얼마나 잘 쓰는 사람인지, 이런 궁금증을 해결하는 과정이 심심하지가 않다. 하루에 세 편의 영화는 못 보더라도 세 편 이상의 영화에 대한 글을 읽을 수 있기도 하고. 

필사할 대목을 찾아가면서 읽었다. 어쩌면 나는 영화를 읽은 것이 아니라 작가를 읽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필사한 내용을 다시 읽어 보니 영화는 안 보이고 작가만 보였으니까. 마치 영화 안을 떠돌아다니는 작가를 찾아 다닌 것처럼. 영화는 어떤 것이라도 상관없이 그 영화를 작가가 어떤 눈으로 보고 어떻게 생각을 가다듬었는지 그게 보고 싶었던 것처럼. 

이 책을 내게 선물한 벗은 이 책을 통해 내가 궁금해질 영화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이 점도 잊지 않은 채 글을 읽었다. 나는 어떤 영화를 궁금하게 여기고 마침내 보고 싶어 하게 되려나? 

책에 언급되는 영화 중 내가 본 영화 - 헤어질 결심, 탑 건 : 매버릭,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 인셉션, 인터스텔라, 라라랜드,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하울의 움직이는 성, 괴물

쓰고 보니 정말 몇 안 되는구나 싶다. 영화 내용도 모르면서 나는 잘도 글을 읽은 셈이다. 답답하다거나 막막한 느낌은 없었으니 그런가 보다 하고 읽으면 또 그렇게 된다. 그러면서 궁금해지는 영화가 있었어야 하는데, 이게 아쉽다, 붙잡지 못했다, 널리 알려진 제목의 영화조차도.

영화에 대한 내 기준이 확실해서 궁금증이 일지 않았던 것 같다. 세상의 크고 작은 문제나 고민이나 현상을 다루는 영화를 찾지 않는다. 영화를 보면서 조금이라도 심각해지는 것은 딱 질색이니까. 오락, 즐거움, 환상, 도피, 망각... 정도로 충분하니까. 단순하고 또 단순해지도록, 영화를 보는 나는. 

대신에 나는 글을 읽었으니 만족한다. 영화를 보고 얼마나 아름다운 생각을 할 수 있는지, 얼마나 아름다운 글을 쓸 수도 있는지를 알았다. 영화보다 글에 더 가까운 입장에 나는 서 있지만 영화 예술도 꼭 살아 남아야 한다고, 영화를 글로 쓰는 작가도 꼭 있어야 한다고, 간절히 바란다. (y에서 옮김20250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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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8-09 22:1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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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8-10 09:0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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