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없다는 착각 - 시간 압박을 버리고 여유를 되찾는 9가지 심리 법칙
이언 테일러 지음, 최기원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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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시간이 없다"라는 말은 행동을 미루는 궁색한 핑계이자, 실은 허구에 가깝다. 그 말 속에는 우리가 시간을 마음대로 쓸 수 있다는 착각이 스며들어 있다. 그러나 현실은 정반대다. 우리는 시간을 소유한 적이 없다. 우리를 잡고 흔드는 건 오히려 시간이다. 안일한 무감각을 떨쳐내고, 이제는 현실을 마주해야 한다. 피곤한 눈을 비비며 잠을 털어내고, 과테말라 싱글 오리진 커피처럼 또렷하고 진한 현실의 향을 느껴야 한다. 지금 여러분의 삶은 여러분이 아닌, 시간이 주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p.28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하루는 24시간이다. 그런데 왜 항상 시간이 부족하다고 느끼는 걸까. 수면 시간을 줄여 보기도 하고, 새벽 기상에, 시간을 분 단위로 쪼개어 계획을 세워보기도 했지만, 늘 시간이 부족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편이다. 그래서 시간관리에 관한 자기계발서들도 꽤 찾아서 읽어 보았다. 누구에게나 공평한 시간을 물리적으로 늘릴 수 있는 방법이야 당연히 없겠지만, 주어진 시간을 어떻게 활용해서 보내느냐에 따라서 낭비되는 시간을 줄일 수 있는 방법은 있을 테니 말이다. 시간을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시간 관리법만으로는 항상 부족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이 책의 제목을 보자마자 나에게 꼭 필요한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이 없다는 '착각'이라니. 시간을 핑계로 자꾸만 미루고, 포기하는 수많은 이들에게 정신차리라고 호통치는 것 같은 제목 아닌가. 저자는 말한다. 시간이 없다는 말은 행동을 미루는 궁색한 핑계이자, 실은 허구에 가깝다고. 지금의 시간은 우리를 지배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 지배를 끝내고, 시간의 억압과 맞서 싸워, 시간을 다스려야 한다고 말이다. 이 책은 바로 그러한 시간의 폭정으로부터 우리의 모조를 되찾기 위한 선언이라고 그는 말한다. 모조란 기분 좋고 활력이 넘치는 상태를 말한다. 동시에 자신이 소중히 여기는 생활 습관과 행동을 지켜 건강을 유지하고 성장해 나가는 힘이기도 하다. 이 책은 왜 우리가 항상 시간에 쫓기는 것인지, 정작 우리를 옥죄고 있는 건 시간이 아니라, 시간을 바라보는 우리의 태도와 그 시간을 집어삼키는 환경이라고 말한다. 결국 바쁘다는 건 시간이 없어서가 아니라, 시간을 '빼앗기고' 있다는 신호라고 말이다. 



사실 성공은 '가끔 이를 악물고 일어난 하루'보다 '대부분 아무 일 없이 평범하게 일어난 수많은 아침' 위에서 쌓인다. 사람들은 종종 의지력으로 유혹을 이겨낸 순간을 떠올리지만, 그런 에피소드에만 집착하는 것은 핵심을 놓치는 셈이다. 의지력은 때로 유용하게 쓰일 수 있으나, 그것에 반복적으로 혹은 지속적으로 의존하다 보면 결국 결심이 모래처럼 부서지고 만다. 진정한 성취와 지속적인 성공은 의지만을 붙드는 데서 나오지 않는다.                p.85


월 단위로, 주 단위로, 그리고 하루를 매 시간 단위로 쪼개며 살아도 늘 시간이 부족하게만 느껴졌었는데, 이 책을 읽으며 시간을 다루는 인식의 전환이 된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 동안의 수많은 자기계발서들을 읽으며 답답했던 부분, 해소되지 않았던 기분을 완전히 통쾌하게 날려주었다. 시간을 바라보는 방식과 바쁨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고, 삶 전반에서 시간과 관계 맺는 방식을 바꿀 수 있도록 도와준다. 물리적으로 시간을 늘릴 수는 없지만 시간에 대한 인식을 근본적으로 바꿔, 뒤틀린 시간 감각을 바로 잡을 수 있다는 것이다. '정말로 바쁜 것'과 '바쁘다고 느끼는 것'은 다른 얘기다. 문제는 '바쁘다고 느끼는 것', 즉 바쁘다는 감각이다. 그 감각이 마음속 여유를 잠식하고, 의미 있거나 즐거운 일을 누릴 틈을 사라지게 만드는 것이니 말이다. 그러니 시간 부족을 해결하는 진정한 방법은 더 많은 일을 밀어 넣는 것이 아니라, 시간에 쫓기는 그 감각을 덜어내는 거라고 이 책은 말한다. 


매번 일은 바쁘고 시간은 부족하게만 느껴졌다. 아침을 먹는 것도, 점심에 산책을 하는 것도, 운동을 하는 것도. 모두 그냥 주어지는 게 아니라 사수해야 하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왜 이렇게 늘 바쁜 걸까, 매일 바쁘게 달려가는 일상 속에서 나 자신을 제대로 챙기고 있는 걸까, 의문이 들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며 어쩌면 앞으로는 시간을 내 편으로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생긴 것 같다. 시간을 느끼는 심리의 메커니즘을 이해하고, 시간과의 관계를 재설정한다면, 실전에서 완전히 달라질 수 있을 것 같다. 특히나 이 책의 마지막 장에는 ‘시간을 내 편으로 만드는 101가지 규칙’이 정리되어 있어, 실제 현실에서 바로 실천해볼 수 있도록 도와준다. 자, 이 책을 통해 시간 압박을 버리고 여유를 되찾는 방법을 배워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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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없는 세상의 아들들
고혜경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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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인류의 원형적 아버지인 제우스를 돌아보며 '아버지'가 얼마나 절실하면서도 사무치는 단어, 느낌, 이미지인지 새삼 확인한다. 가부장제라는 체제하에서 누구에게나 아버지란 상처와 두려움의 대상이자 동시에 한없는 동경의 대상일 것이다. 나 또한 아버지의 사랑을 받기 위해, 또 아버지의 자랑이 되기 위해 줄곧 매진했다... 지금은 생물학적 아버지보다 원형적 아버지 탐색에 마음을 쏟고 있다. 어떻게 보면, 일생 떠날 수 없는 존재가 아버지인가 보다.             p.67


현대 심리학이 힘, 대화, 공격성, 장애, 이성 같은 추상적 개념들을 발달시켰다면 고대 그리스인은 제우스, 헤르메스, 아레스, 헤파이토스, 아폴론 같은 신들을 탄생시켰다. 신화의 주인공인 신들은 인간 정신을 이루는 여러가지 서로 다른 힘들을 의인화한 것이다. 이대남 현상, 온라인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한 극단적 여성 혐오 문화 확산 등 젊은 남성들의 폭력성과 보수적 가치로의 회귀 속에서 이 책은 남성성의 본질적 힘과 아름다움을 고대 그리스에서 찾는다. 


신화학자 고혜경 교수는 가부장제 아버지를 대표하는 이미지를 가진 제우스, 태어남과 동시에 배신으로 삶을 시작해 상처를 가진 헤파이스토스, 영원한 젊음을 상징하는 아폴론, 샘솟는 위트와 트릭의 소유자 헤르메스, 억압을 깨부수는 해방의 신 디오니소스, 세상의 은밀한 부를 관장하는 하데스까지 그리스 여섯 남신이 보여 주는 남성 원형의 다채로운 맨얼굴을 들여다본다. 정여울 작가는 '이 험난한 사회에서 아들을 어떻게 키워야 할지 막막한 부모는 물론, ‘요즘 남자들’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 답답해하는 모든 세대들'에게 이 책을 권해주고 싶다고 추천사를 썼는데, 읽으면서 매우 공감했다. 실제로 저자 또한 상담실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신음하는 청년들을 자주 만났다고 한다. 물리적으로든 정서적으로든 아버지로부터 벗어나려는 열망으로 가득하지만, 그와 동시에 아버지가 제공해 줄 수 있는 경제적 풍요를 잃게 될까봐 몹시 두려워하는 것이 이 시대 연약한 아들의 아이러니이기도 하니 말이다. 




삶의 궤적을 회상하다 보면 참으로 많은 우연이 현재를 만들어 왔음을 느낀다. 길게 또 짧게 겹친 인연들, '진짜 나'를 알아 가게 해 주는 학교들, 지혜로 영글어진 스승들, 나란히 걷는 친구들, 배움을 요하는 난관들, 죽음이라고밖에 달리 말할 길 없는 암흑의 나날들, 영혼에 자국을 새긴 감동과 아름다움, 그래서 지금 이 자리... 우연처럼 펼쳐졌던 순간들이 서서히 퍼즐처럼 맞추어져 일관된 패턴과 제 모습이 드러나는 듯하다. 지금껏 우연이라 여긴 일들이 헤르메스의 설계라면 이보다 더 한 트릭이 있을까?                 p.209~210


우리네 아버지의 모습을 떠올려 보면 애정을 가지고 자녀를 대하면서도, 동시에 위협적일 때도 있고 파괴적으로 돌변하기도 한다. 폭력이 일상이 된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뉴스 보도에서 본 적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꼭 그런 극단적인 경우가 아니더라도, 밤새 잠 안 자고 우는 아기, 인내심의 한계를 시험하는 사춘기 자녀의 반항 앞에서 우리의 아버지들은 때때로 자기 안의 괴물을 만나게 된다. 자녀는 아버지의 한쪽 면을 다른 쪽 면보다 훨씬 우세하게 경험한다고 한다. 실제로 저자가 수업에서 각자 경험한 아버지의 모습에 대해 물었을 때, 다수가 권위주의, 폭력, 바람, 경제적 무능, 유기, 냉담 같은 부정적인 이미지를 말했다고 한다. 실제 아버지는 어느 한쪽 모습으로만 완전히 치우쳐 있지는 않을 텐데도 말이다. '마땅히 이래야 하는 아버지'는 실제 각자가 경험한 아버지와는 대체로 간극이 크다. 그렇다 보니 파괴적인 아버지는 마치 인간 본성에 어긋나는 존재인 듯 여겨진다. 그러나 아버지 신화의 원형에는 긍정-부정, 창조-파괴, 밝음-어두움 양면이 모두 존재한다.


인간 정신은 본래 단일하지 않고 다중심적이며 다면적이기 때문에, 이를 더욱 세밀하게 들여다볼 수 있는 정교한 시각이 필요하다. 각자의 내면세계는 복잡다단하고, 다채로우니 말이다. 카를 융의 심리학은 원형 이론을 중심으로 발달했는데, 이 원형들의 고향이자 메카가 바로 고대 그리스다. 그리고 심리학적 견지에서 신들은 유용한 개념이자 은유다. 이 책에 소개되는 제우스, 헤파이스토스, 아폴론, 헤르메스, 디오니소스, 하데스 모두 각각의 심리학적 원형으로 볼 수 있다. 혹자는 '그리스 신화는 그 자체로 심리학'이라 단언하기도 하는데, 이 책을 읽으며 정말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간 단편적인 이미지로만 소비되어 온 신들을 새롭게 읽어 내는 과정도 흥미로웠고, 신화의 언어를 통해 현대인의 슬픈 자화상을 돌아보는 과정도 매우 인상적인 책이었다. 신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세상에 작동하는 원형들의 힘을 알아차리고, 보편적 마음 무늬를 찾아 다면적인 나와 우리를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면 좋을 것 같다. 신화와 심리학에 대해 관심이 있다면, 지금 우리가 고대 그리스 신들을 만나야 하는 이유가 궁금하다면 이 책을 추천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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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기울어져 걷지 창비청소년시선 53
김물 지음 / 창비교육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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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상 좀 치우자/책상 구경 좀 하자/참 많은 게 놓여 있구나//

둥둥 떠 있는 책 한 권을 집어 뒤적이다가/모서리가 없어 굴러다니던 작은/고민을 떨어뜨렸어요/휘적휘적 아래를 더듬는 내 손길에/물결치는 책상이 부드러운 몸을 휘어요//

빛이 일렁거리며/내 것들이 함께 반짝여요                - '내 책상' 중에서, p.14~15


시는 학창 시절에 자주 썼던 편지에서, 그 시절을 위로해주던 책과 만화로부터, 이곳 저곳에 붙였던 귀여운 스티커와 어느 소풍날의 기억으로부터 시작될 수도 있다. 놀이터의 빈 그네에 앉아서, 어지러운 책상을 치우다가, 한 발 한 발 언덕을 오르면서, 마트에 수족관을 지켜보다가도 만날 수 있는 것이 시이다. 시인들은 그렇게 일상 속 작은 순간들을 모아 시를 빚어낸다. ‘창비청소년시선’은 청소년도 동시대의 좋은 시를 읽고 즐겨야 한다는 취지로 시작되었다. 그리고 어느 새 쉰세 번째 시집이 나왔다. 


김물 시인은 청소년이라는 과도기적 존재를 헤아리는 따듯한 시선으로 그들의 복잡미묘한 감정의 결을 따라간다. 친구의 휴대전화에 저장되어 있던 내 사진을 보며, 코인 노래방에서 스트레스를 해소하며, 책을 읽으며 마음의 부피가 늘어나는 상상을 한다. 친구와의 관계와 어른이 되어 가면서 겪는 혼란, 미래에 대한 불안 등 청소년들이 공감할 만한 내용들이 섬세하게 담겨 있어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기울어져 걷'는다는 제목부터 청소년들의 불안정한 삶을 보여주는 것 같은 기분이 들게 했다. 아직 무르익지 않았지만, 이미 세상에 대해 알만한 건 다 아는 상태, 몸은 성인처럼 자랐지만 아직 정신은 그만큼 성숙하지 못한 상태가 바로 청소년기이니 말이다. 그래서 감정의 변화가 많고, 정서적으로 불안정한 것이 당연한 시기가 바로 청소년기이기도 하다. 그 속에서 각자의 속도대로 천천히 성장해나갈 수 있도록, 주변의 어른들이 많은 관심과 애정을 보여주어야 하는 것이다. 




거미줄이 거기 있는 줄도 몰랐다/바람 끝에 매달려 빙글빙글 돌고 있는/어떤 것의 날개 조각//

바람 때문에 보이는 것이 있다/게양대에 온몸이 휘감겼다가 풀리기를 반복하는/태극기와 골목 안 바람 빠진 풍선의/소리 없는 걸음걸음//

바람 때문에 알게 되는 것이 있다/앞머리에 덮여 있던 그 애의 이마가/희고 반듯하다는 것을                - '바람은 가려지지 않는다' 중에서, p.105


‘창비청소년시선’은 청소년도 동시대의 좋은 시를 읽고 즐겨야 한다는 취지로 시작되었다. 오랫동안 어린이는 ‘동시’로 시를 향유한 것에 반해, 청소년은 교과서에 실린 정전, 그것도 그들의 삶과 감각에 맞지 않은 어른의 시를 읽어야 했으니 말이다. 그렇게 지난 10년간 ‘창비청소년시선’은 대부분의 시집이 올해의 청소년 도서, 문학나눔 등에 선정되었으며, 2025년부터는 중1 새 교과서에만 7편의 작품이 실리기도 했으니 엄청난 성과다. 다시 또 10년, 20년 이어지며 청소년들을 위한 좋은 시들을 만날 수 있다면 좋을 것 같다. 


창비청소년시선은 지난 40번째 기념 특별 시집인 <도넛을 나누는 기분>으로 처음 만나게 되었다. 황인찬, 박소란, 양안다, 박준, 유희경 등 자신만의 고유하고 개성 넘치는 시 세계를 구축한 20명의 젊은 시인들이 저마다의 10대 시절을 추억하며 쓴 창작 시 60편을 모은 시집이었는데, 시집을 읽으면서 꼭 청소년뿐만 아니라 초심자들이 읽기에도 너무 좋다고 생각했었다. 누구나 청소년기를 거쳐 성인이 되었으니 말이다. 이 시집 시리즈는 표지도 아주 예쁜 편인데, 이번에 만난 <나는 기울어져 걷지>는 빛의 방향에 따라 컬러가 변하는 홀로그램 느낌이라 더욱 예쁘다. 청소년들이 들고 다니면서 읽기에도, 선물로 주기에도 너무 좋을 것 같다. 시가 뭔지 잘 모르겠고, 읽어도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어 어렵게만 느껴졌었다면 청소년 시집부터 만나보면 어떨까. 아직은 시가 낯선 청소년들에게도, 여전히 시가 어려운 어른들에게도 추천해주고 싶은 시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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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는 기쁨에 대하여
한은형 지음 / 인플루엔셜(주)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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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몽글몽글한 유백색의 토란이 냄비 안에서 끓여질 때의 기분이란. 어디 경치 좋은 노천탕에 가서 몸을 담그고 있는 것 같았다. 내가 익어가는 것처럼 기분 좋게 노곤해졌던 것이다. 토란이 나, 내가 토란, 뭐 이런 물아일체의 시간을 가지며 익어가는 토란을 보았다... 몽글몽글하되 절대 뭉글뭉글해지지 않는 그 잔잔한 절도라니. 아아(작게 탄식). 과하지 않은 점성은 보일 듯 안 보일 듯 멋을 부린 멋쟁이 같았고.                p.68


맛있는 식사 한 끼를 위해서라면 먼 곳으로 떠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던, 나름 미식가였던 시절이 있었다. 맛집 투어를 다니고, 요리 학원에 다니고, 각종 레시피를 찾아가며 새로운 요리를 만들어 보면서 먹는 기쁨을 제대로 누렸던 시간들이 분명 내게도 있었다. 하지만 사는 게 바쁘다는 핑계로 쉽게 소홀해지는 것이 음식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오늘은 뭘 먹을까? 오늘은 무슨 장을 볼까? 가족들의 끼니는 챙기지만, 정작 혼자 있는 시간에 나 스스로를 위해 음식을 챙기는 것이 가장 귀찮아진 것이다. 




그러다보니 적당히 건강하고, 적당히 먹을 만하고, 적당히 배가 부를 수 있는 음식, 그러니까 끼니의 개념으로 일상에 지장을 주지 않을 정도의 음식이면 충분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왜냐하면 먹는 것 말고도 신경써야 하고, 챙겨야 할 것들이 너무 많고, 해야 할 일과 하고 싶은 일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것만으로도 이미 포화 상태였으니 말이다. 그런데 이번에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잊고 있었던 '먹는 기쁨'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되었다. 마치 모노톤의 세계에 알록달록한 색채가 들어오면서 환해지는 듯한 기분이랄까. 먹는 데 진심인 소설가의 느긋한 음식 탐닉기를 따라 가다 보니 이 음식 먹고 싶다부터 이런 음식은 무슨 맛이 날까? 왜 내가 이런 기쁨을 잊고 살았을까. 나도 이런 추억의 음식이 있는데... 등등 책과 대화하며 읽는 듯한 기분이었다. 


사실 맛있는 음식을 먹는 시간은 스트레스로부터 벗어나게 해주는 역할도 한다. 음식을 먹다보면 나를 괴롭히던 문제들은 내일 생각해도 괜찮을 것 같은 여유로움이 생긴다고 할까. 세상에 먹는 일만큼 중요한 게 또 뭐가 있겠냐 싶다는 생각이 들면, 그 어떤 문제도 더이상 껴안고 있겠다는 마음이 사라지게 되니 말이다. 그런데 바쁘다는 핑계로 이 중요한 것을 잊고 살았던 것이다. 




이쯤에서 내가 좋아하는 대화가 나온다. 먹을 수 없는 음식을 만들던 그 주방장은 이렇게 말한다. 사람들이 마멀레이드샌드위치에 감격하며 먹는 걸 보고는 말이다. "뱃속에서 따뜻하고 가려운 뭔가가 느껴져." 패딩턴이 말한다. "뿌듯함이라고 하는 거예요." 

햇빛의 기운으로 충만한 오렌지마멀레이드처럼 그늘이라고는 전혀 없는 영화였다. 비현실적이기 짝이 없는 이런 것들에 마냥 빠져들고 싶은 날이 있다.                 p.297


한은형 작가는 맛있는 식사 한 끼를 위해서라면 먼 곳으로 떠나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는 미식가로 유명하다. 그래서 음식에 관련된 작품도 썼고, 술에 관한 에세이도 있었다. 페이지를 넘기는 내내 어디선가 맛있는 냄새가 나는 듯한 즐거움을 주는 다정하고, 맛있는 책들이었다. 그래서 이번에 나온 신간도 매우 기대하며 읽었다. 이 책은 작가가 오랫동안 쓰고자 했던 제철 음식과 슬로푸드, 소울푸드에 대한 이야기에, 《조선일보》에 연재했던 '한은형의 상상식당'을 비롯해 여러 지면에 발표해온 글들을 모은 것이다. 


미식 서평단으로 책과 함께 스페셜 굿즈 세트도 받았다. 일러스트 엽서 6종 세트, 독서 맛집 한줄평 카드, 그리고 감자칩 일러스트 띠부씰 5종 세트인데 너무 귀엽다. 이 중에 엽서 6종은 책 구매시에도 받을 수 있다. 일러스트 엽서 중에 두 장은 레시피 카드인데, 내가 제일 궁금했던 음식들이 담겨 있어 붙여 두고 언젠가 만들어 보리라 생각하는 중이다. 




이 책은 'S'로 시작되는 네 개의 키워드-Season(시즌 푸드), Soul(소울푸드), Slow(슬로푸드), Story(푸드 스토리)-를 따라 음식의 세계를 여행하는 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저자는 인도인 파인다이닝 셰프의 말을 빌려 '5S'에 대해 썼다고 한다. Sweet, Salty, Sour, Spicy, Surprise, 이렇게 서프라이즈까지 있어야 파인다이닝이라고 셰프는 말했다. 저자가 만든 4S에 나머지 'S'를 더한다면 뭘 할 수 있을까 생각해 보았다. 나는 'Smile'을 포함시키고 싶다. 나를 웃게 만드는 음식, 먹으면서 행복하게 만들어 주는 음식, 누구라도 음식을 통해 기분이 좋아졌으면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각자가 자신이 원하는 S를 더하면 그제야 책이 비로소 5S를 갖춘 완전체가 될 거라고 저자는 말한다. 이 책을 읽은 다른 독자들은 어떤 S를 포함시켰을지 궁금해진다. 


맛있는 음식이 세상을 잠시나마 괜찮아 보이게 해주고, 누군가의 마음을 얻게 해주기도 하고, 지친 영혼을 치유해주는 힘이 있다는 것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책이라 읽는 내내 힐링이 되는 시간이었다. 가장 궁금했던 음식은 도대체 무슨 맛일지 상상조차 되지 않았던 '씀바귀김밥'과 '레몬국수'다. 대부분의 음식은 이름만 들어도 우리가 아는 맛이다. 그런데 이 두 음식은 조합이 쉽게 상상이 가지 않는 재료들로 이루어져 있어서 정말 궁금했다. 자, 사는 일에도 감칠맛이 돌게 만들어주는 책이 궁금하다면, 생생하게 이 삶을 맛보고 싶은 허기를 느껴보고 싶다면 이 책을 만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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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의 물리학
게오르기 고스포디노프 지음, 민은영 옮김 / 문학동네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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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종종 내 의지와 상관없이 일어났다. 다른 사람이 아픔을 느끼는 바로 그곳, 그 베인 자리, 그 상처, 염증이 생긴 그 자리에 통로가 생겨 나를 안으로 빨아들이는 것 같았다. 이야기, 특히 가까운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에는 늘 어떤 맹점이나 잠깐의 공백, 약점, 이해할 수 없는 슬픔, 상실했거나 일어난 적도 없는 것에 대한 갈망이 있었고, 그것들이 나를 안으로, 말해지지 않은 것의 어두운 방으로 끌어당겼다. 모든 이야기에는 그런 비밀스러운 방과 통로가 있었다.                p.118~119


<타임 셸터>로 부커상을 수상했던 게오르기 고스포디노프의 대표작이다. 기억과 시간에 대한 독창적인 탐구를 보여주었던 <타임 셸터>가 독특한 구성과 예측할 수 없는 전개로 조금 난해한 편이었다면, 이번에 읽은 <슬픔의 물리학>은 그에 비해 굉장히 잘 읽힌다. 물론 이 작품 역시 선형적인 이야기가 아니며, 자칫 잘못하다가는 미궁에서 길을 잃어버릴 것 같은 전개로 펼쳐지지만 이상하게 가독성은 좋은 편이다. 일반적인 소설의 구조가 아니라 기억이 작동하는 방식대로 흘러가는 서사이기 때문에 여러 인물의 기억들과 역사와 환상의 조각들이 파편적으로 흩어져 있다. 그럼에도 잘 읽히는 이유는 문장이 가진 힘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게오르기 고스포디노프의 문장은 시처럼 아름답지만 모호하지 않고, 날카로운 통찰을 담고 있지만 세심하고 부드럽기 때문이다. 그래서 밑줄을 긋기 시작하면 곧 페이지 가득 빽빽해지고 마는 그런 책이었다. 


책 속에 '독서의 양자물리학에서 비롯된 질문'이 특히 흥미로웠다. 문학에서 관찰자가 없을 때 온갖 경우의 수가 열려 있다고 가정하면 소설의 소립자들 사이에서 어떤 난장이 벌어질지 상상해 보라고. 아무도 그 책을 읽지 않는 동안 표지 안쪽에서는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을까? 상상해보자니 책을 읽을 때보다 더 설레이는 기분이 들었다. 작가는 '고전적인 서사는 사방에서 쏟아지는 가능성을 소거해나가는 것'이라며, '경계를 확정하기 전 세상은 평행한 버전들과 옆길로 가득하다'고 말한다. 불확정성과 불확실성으로 가득한 양자물리학을 문학에 대입해볼 생각은 한번도 하지 못했는데, 이 책을 읽으며 난생 처음으로 양자물리학과 문학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이기도 했다. 말해지지 않은 것과 일어나지 않은 건은 모든 가능성을 품고 있고, 그것이 일어나거나 말해지는 방식의 변이도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렇다면 이 작품의 독특한 구성과 형식이 어떻게 탄생하게 되었는지도 짐작이 될수밖에 없다. '슬픔의 물리학'이라는 인상적인 제목도 그렇고 말이다. 




쓰고, 쓰고, 또 쓰게 하라. 기록하고 보존하게 하라. 노아의 방주처럼 되게 하라. 내가 아니라 이 책을. 오직 책만이 영원하다. 오직 책의 표지만이 파도 위로 떠오르며, 오직 책의 페이지 사이에서 들끓는 생명만이 살아남으리라. 그리고 새로운 땅을 보게 되면 그들은 나아가 번성하리라. 그리하여 글로 쓰인 것은 살과 피를 얻어 온전한 형상으로 살아나리라. '사자'는 사자가 되고, '말'은 말처럼 힝힝거리고, '까마귀'는 시끄럽게 우짖으며 지면에서 날아오르리라...... 미노타우로스는 대낮의 빛으로 걸어나오리라.             p.220~221


이 작품의 화자는 독특한 공감 능력을 가지고 있다. 의사가 병적 공감, 혹은 강박적 공감이라는 희귀한 진단명을 내놓았을 정도로 이것은 병이다.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몰입하게 되면, 호흡이 자동 조절 모드로 넘어가면서 타인의 기억 속으로 완전히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타인의 고통을 함께 느끼고, 그 기억과 경험을 공유한다는 것은 어떤 느낌일까. 화자는 '어떤 이들에게 공감은 고통을 통해 열리는데 내 경우는 슬픔을 통해 열릴 때가 더 많다'고 말한다. 그래서 슬픔의 물리학이 수년 동안 탐구 주제였다는 것이다. 슬픔에는 냄새도 색도 있다는 문장에 밑줄을 그었다. 다양한 색과 냄새가 슬픔을 쉽게 활성화한다는 비유가 와닿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책의 아홉 개 장 중에서 슬픔의 기초 물리학이라는 장을 가장 재미있게 읽었다. 


파편화된 타인의 기억들이 신화와 현실, 과거와 현재가 뒤섞여 끊임없이 방향을 틀고, 갑자기 불쑥 튀어나오는 식으로 책 전체가 하나의 미로를 이루고 있어 정말 흥미진진한 책이었다. 정말 온갖 종류의 이야기들이 여기저기서 눈을 즐겁게 해주었으니 말이다. '우주는 도서관이다'라는 말이 더이상 은유가 아니라고, 이제 우리에게는 새로운 문해력이 필요할 거라는 문장이 있었다. 앞으로 읽어야 할 것들이 얼마나 많을지 상상해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졌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시작도 끝도 없는 도서관의 끝없는 서가들을 보고 있는 듯한 느낌도 들게 했다. 빼곡하게 쌓여진 이야기들의 서가에서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하나씩 이야기들이 튀어나오는 듯한 기분이었으니 말이다. 그러니 그 이야기의 미로 속에서 길을 잃어버리지만 않는다면 대단히 특별한 독서 경험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화자와 함께 이야기의 미궁 속을 천천히 걸으며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수많은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 모든 존재가 되어보는 경험은 어디서도 할 수 없을 테니 말이다. <타임 셸터>가 조금 어렵게 느껴졌다면, 이 작품을 먼저 읽어보길 권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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