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없는 세상의 아들들
고혜경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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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인류의 원형적 아버지인 제우스를 돌아보며 '아버지'가 얼마나 절실하면서도 사무치는 단어, 느낌, 이미지인지 새삼 확인한다. 가부장제라는 체제하에서 누구에게나 아버지란 상처와 두려움의 대상이자 동시에 한없는 동경의 대상일 것이다. 나 또한 아버지의 사랑을 받기 위해, 또 아버지의 자랑이 되기 위해 줄곧 매진했다... 지금은 생물학적 아버지보다 원형적 아버지 탐색에 마음을 쏟고 있다. 어떻게 보면, 일생 떠날 수 없는 존재가 아버지인가 보다.             p.67


현대 심리학이 힘, 대화, 공격성, 장애, 이성 같은 추상적 개념들을 발달시켰다면 고대 그리스인은 제우스, 헤르메스, 아레스, 헤파이토스, 아폴론 같은 신들을 탄생시켰다. 신화의 주인공인 신들은 인간 정신을 이루는 여러가지 서로 다른 힘들을 의인화한 것이다. 이대남 현상, 온라인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한 극단적 여성 혐오 문화 확산 등 젊은 남성들의 폭력성과 보수적 가치로의 회귀 속에서 이 책은 남성성의 본질적 힘과 아름다움을 고대 그리스에서 찾는다. 


신화학자 고혜경 교수는 가부장제 아버지를 대표하는 이미지를 가진 제우스, 태어남과 동시에 배신으로 삶을 시작해 상처를 가진 헤파이스토스, 영원한 젊음을 상징하는 아폴론, 샘솟는 위트와 트릭의 소유자 헤르메스, 억압을 깨부수는 해방의 신 디오니소스, 세상의 은밀한 부를 관장하는 하데스까지 그리스 여섯 남신이 보여 주는 남성 원형의 다채로운 맨얼굴을 들여다본다. 정여울 작가는 '이 험난한 사회에서 아들을 어떻게 키워야 할지 막막한 부모는 물론, ‘요즘 남자들’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 답답해하는 모든 세대들'에게 이 책을 권해주고 싶다고 추천사를 썼는데, 읽으면서 매우 공감했다. 실제로 저자 또한 상담실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신음하는 청년들을 자주 만났다고 한다. 물리적으로든 정서적으로든 아버지로부터 벗어나려는 열망으로 가득하지만, 그와 동시에 아버지가 제공해 줄 수 있는 경제적 풍요를 잃게 될까봐 몹시 두려워하는 것이 이 시대 연약한 아들의 아이러니이기도 하니 말이다. 




삶의 궤적을 회상하다 보면 참으로 많은 우연이 현재를 만들어 왔음을 느낀다. 길게 또 짧게 겹친 인연들, '진짜 나'를 알아 가게 해 주는 학교들, 지혜로 영글어진 스승들, 나란히 걷는 친구들, 배움을 요하는 난관들, 죽음이라고밖에 달리 말할 길 없는 암흑의 나날들, 영혼에 자국을 새긴 감동과 아름다움, 그래서 지금 이 자리... 우연처럼 펼쳐졌던 순간들이 서서히 퍼즐처럼 맞추어져 일관된 패턴과 제 모습이 드러나는 듯하다. 지금껏 우연이라 여긴 일들이 헤르메스의 설계라면 이보다 더 한 트릭이 있을까?                 p.209~210


우리네 아버지의 모습을 떠올려 보면 애정을 가지고 자녀를 대하면서도, 동시에 위협적일 때도 있고 파괴적으로 돌변하기도 한다. 폭력이 일상이 된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뉴스 보도에서 본 적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꼭 그런 극단적인 경우가 아니더라도, 밤새 잠 안 자고 우는 아기, 인내심의 한계를 시험하는 사춘기 자녀의 반항 앞에서 우리의 아버지들은 때때로 자기 안의 괴물을 만나게 된다. 자녀는 아버지의 한쪽 면을 다른 쪽 면보다 훨씬 우세하게 경험한다고 한다. 실제로 저자가 수업에서 각자 경험한 아버지의 모습에 대해 물었을 때, 다수가 권위주의, 폭력, 바람, 경제적 무능, 유기, 냉담 같은 부정적인 이미지를 말했다고 한다. 실제 아버지는 어느 한쪽 모습으로만 완전히 치우쳐 있지는 않을 텐데도 말이다. '마땅히 이래야 하는 아버지'는 실제 각자가 경험한 아버지와는 대체로 간극이 크다. 그렇다 보니 파괴적인 아버지는 마치 인간 본성에 어긋나는 존재인 듯 여겨진다. 그러나 아버지 신화의 원형에는 긍정-부정, 창조-파괴, 밝음-어두움 양면이 모두 존재한다.


인간 정신은 본래 단일하지 않고 다중심적이며 다면적이기 때문에, 이를 더욱 세밀하게 들여다볼 수 있는 정교한 시각이 필요하다. 각자의 내면세계는 복잡다단하고, 다채로우니 말이다. 카를 융의 심리학은 원형 이론을 중심으로 발달했는데, 이 원형들의 고향이자 메카가 바로 고대 그리스다. 그리고 심리학적 견지에서 신들은 유용한 개념이자 은유다. 이 책에 소개되는 제우스, 헤파이스토스, 아폴론, 헤르메스, 디오니소스, 하데스 모두 각각의 심리학적 원형으로 볼 수 있다. 혹자는 '그리스 신화는 그 자체로 심리학'이라 단언하기도 하는데, 이 책을 읽으며 정말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간 단편적인 이미지로만 소비되어 온 신들을 새롭게 읽어 내는 과정도 흥미로웠고, 신화의 언어를 통해 현대인의 슬픈 자화상을 돌아보는 과정도 매우 인상적인 책이었다. 신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세상에 작동하는 원형들의 힘을 알아차리고, 보편적 마음 무늬를 찾아 다면적인 나와 우리를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면 좋을 것 같다. 신화와 심리학에 대해 관심이 있다면, 지금 우리가 고대 그리스 신들을 만나야 하는 이유가 궁금하다면 이 책을 추천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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