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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는 기쁨에 대하여
한은형 지음 / 인플루엔셜(주) / 2026년 4월
평점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몽글몽글한 유백색의 토란이 냄비 안에서 끓여질 때의 기분이란. 어디 경치 좋은 노천탕에 가서 몸을 담그고 있는 것 같았다. 내가 익어가는 것처럼 기분 좋게 노곤해졌던 것이다. 토란이 나, 내가 토란, 뭐 이런 물아일체의 시간을 가지며 익어가는 토란을 보았다... 몽글몽글하되 절대 뭉글뭉글해지지 않는 그 잔잔한 절도라니. 아아(작게 탄식). 과하지 않은 점성은 보일 듯 안 보일 듯 멋을 부린 멋쟁이 같았고. p.68
맛있는 식사 한 끼를 위해서라면 먼 곳으로 떠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던, 나름 미식가였던 시절이 있었다. 맛집 투어를 다니고, 요리 학원에 다니고, 각종 레시피를 찾아가며 새로운 요리를 만들어 보면서 먹는 기쁨을 제대로 누렸던 시간들이 분명 내게도 있었다. 하지만 사는 게 바쁘다는 핑계로 쉽게 소홀해지는 것이 음식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오늘은 뭘 먹을까? 오늘은 무슨 장을 볼까? 가족들의 끼니는 챙기지만, 정작 혼자 있는 시간에 나 스스로를 위해 음식을 챙기는 것이 가장 귀찮아진 것이다.

그러다보니 적당히 건강하고, 적당히 먹을 만하고, 적당히 배가 부를 수 있는 음식, 그러니까 끼니의 개념으로 일상에 지장을 주지 않을 정도의 음식이면 충분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왜냐하면 먹는 것 말고도 신경써야 하고, 챙겨야 할 것들이 너무 많고, 해야 할 일과 하고 싶은 일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것만으로도 이미 포화 상태였으니 말이다. 그런데 이번에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잊고 있었던 '먹는 기쁨'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되었다. 마치 모노톤의 세계에 알록달록한 색채가 들어오면서 환해지는 듯한 기분이랄까. 먹는 데 진심인 소설가의 느긋한 음식 탐닉기를 따라 가다 보니 이 음식 먹고 싶다부터 이런 음식은 무슨 맛이 날까? 왜 내가 이런 기쁨을 잊고 살았을까. 나도 이런 추억의 음식이 있는데... 등등 책과 대화하며 읽는 듯한 기분이었다.
사실 맛있는 음식을 먹는 시간은 스트레스로부터 벗어나게 해주는 역할도 한다. 음식을 먹다보면 나를 괴롭히던 문제들은 내일 생각해도 괜찮을 것 같은 여유로움이 생긴다고 할까. 세상에 먹는 일만큼 중요한 게 또 뭐가 있겠냐 싶다는 생각이 들면, 그 어떤 문제도 더이상 껴안고 있겠다는 마음이 사라지게 되니 말이다. 그런데 바쁘다는 핑계로 이 중요한 것을 잊고 살았던 것이다.

이쯤에서 내가 좋아하는 대화가 나온다. 먹을 수 없는 음식을 만들던 그 주방장은 이렇게 말한다. 사람들이 마멀레이드샌드위치에 감격하며 먹는 걸 보고는 말이다. "뱃속에서 따뜻하고 가려운 뭔가가 느껴져." 패딩턴이 말한다. "뿌듯함이라고 하는 거예요."
햇빛의 기운으로 충만한 오렌지마멀레이드처럼 그늘이라고는 전혀 없는 영화였다. 비현실적이기 짝이 없는 이런 것들에 마냥 빠져들고 싶은 날이 있다. p.297
한은형 작가는 맛있는 식사 한 끼를 위해서라면 먼 곳으로 떠나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는 미식가로 유명하다. 그래서 음식에 관련된 작품도 썼고, 술에 관한 에세이도 있었다. 페이지를 넘기는 내내 어디선가 맛있는 냄새가 나는 듯한 즐거움을 주는 다정하고, 맛있는 책들이었다. 그래서 이번에 나온 신간도 매우 기대하며 읽었다. 이 책은 작가가 오랫동안 쓰고자 했던 제철 음식과 슬로푸드, 소울푸드에 대한 이야기에, 《조선일보》에 연재했던 '한은형의 상상식당'을 비롯해 여러 지면에 발표해온 글들을 모은 것이다.
미식 서평단으로 책과 함께 스페셜 굿즈 세트도 받았다. 일러스트 엽서 6종 세트, 독서 맛집 한줄평 카드, 그리고 감자칩 일러스트 띠부씰 5종 세트인데 너무 귀엽다. 이 중에 엽서 6종은 책 구매시에도 받을 수 있다. 일러스트 엽서 중에 두 장은 레시피 카드인데, 내가 제일 궁금했던 음식들이 담겨 있어 붙여 두고 언젠가 만들어 보리라 생각하는 중이다.

이 책은 'S'로 시작되는 네 개의 키워드-Season(시즌 푸드), Soul(소울푸드), Slow(슬로푸드), Story(푸드 스토리)-를 따라 음식의 세계를 여행하는 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저자는 인도인 파인다이닝 셰프의 말을 빌려 '5S'에 대해 썼다고 한다. Sweet, Salty, Sour, Spicy, Surprise, 이렇게 서프라이즈까지 있어야 파인다이닝이라고 셰프는 말했다. 저자가 만든 4S에 나머지 'S'를 더한다면 뭘 할 수 있을까 생각해 보았다. 나는 'Smile'을 포함시키고 싶다. 나를 웃게 만드는 음식, 먹으면서 행복하게 만들어 주는 음식, 누구라도 음식을 통해 기분이 좋아졌으면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각자가 자신이 원하는 S를 더하면 그제야 책이 비로소 5S를 갖춘 완전체가 될 거라고 저자는 말한다. 이 책을 읽은 다른 독자들은 어떤 S를 포함시켰을지 궁금해진다.
맛있는 음식이 세상을 잠시나마 괜찮아 보이게 해주고, 누군가의 마음을 얻게 해주기도 하고, 지친 영혼을 치유해주는 힘이 있다는 것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책이라 읽는 내내 힐링이 되는 시간이었다. 가장 궁금했던 음식은 도대체 무슨 맛일지 상상조차 되지 않았던 '씀바귀김밥'과 '레몬국수'다. 대부분의 음식은 이름만 들어도 우리가 아는 맛이다. 그런데 이 두 음식은 조합이 쉽게 상상이 가지 않는 재료들로 이루어져 있어서 정말 궁금했다. 자, 사는 일에도 감칠맛이 돌게 만들어주는 책이 궁금하다면, 생생하게 이 삶을 맛보고 싶은 허기를 느껴보고 싶다면 이 책을 만나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