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의 물리학
게오르기 고스포디노프 지음, 민은영 옮김 / 문학동네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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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그것은 종종 내 의지와 상관없이 일어났다. 다른 사람이 아픔을 느끼는 바로 그곳, 그 베인 자리, 그 상처, 염증이 생긴 그 자리에 통로가 생겨 나를 안으로 빨아들이는 것 같았다. 이야기, 특히 가까운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에는 늘 어떤 맹점이나 잠깐의 공백, 약점, 이해할 수 없는 슬픔, 상실했거나 일어난 적도 없는 것에 대한 갈망이 있었고, 그것들이 나를 안으로, 말해지지 않은 것의 어두운 방으로 끌어당겼다. 모든 이야기에는 그런 비밀스러운 방과 통로가 있었다.                p.118~119


<타임 셸터>로 부커상을 수상했던 게오르기 고스포디노프의 대표작이다. 기억과 시간에 대한 독창적인 탐구를 보여주었던 <타임 셸터>가 독특한 구성과 예측할 수 없는 전개로 조금 난해한 편이었다면, 이번에 읽은 <슬픔의 물리학>은 그에 비해 굉장히 잘 읽힌다. 물론 이 작품 역시 선형적인 이야기가 아니며, 자칫 잘못하다가는 미궁에서 길을 잃어버릴 것 같은 전개로 펼쳐지지만 이상하게 가독성은 좋은 편이다. 일반적인 소설의 구조가 아니라 기억이 작동하는 방식대로 흘러가는 서사이기 때문에 여러 인물의 기억들과 역사와 환상의 조각들이 파편적으로 흩어져 있다. 그럼에도 잘 읽히는 이유는 문장이 가진 힘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게오르기 고스포디노프의 문장은 시처럼 아름답지만 모호하지 않고, 날카로운 통찰을 담고 있지만 세심하고 부드럽기 때문이다. 그래서 밑줄을 긋기 시작하면 곧 페이지 가득 빽빽해지고 마는 그런 책이었다. 


책 속에 '독서의 양자물리학에서 비롯된 질문'이 특히 흥미로웠다. 문학에서 관찰자가 없을 때 온갖 경우의 수가 열려 있다고 가정하면 소설의 소립자들 사이에서 어떤 난장이 벌어질지 상상해 보라고. 아무도 그 책을 읽지 않는 동안 표지 안쪽에서는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을까? 상상해보자니 책을 읽을 때보다 더 설레이는 기분이 들었다. 작가는 '고전적인 서사는 사방에서 쏟아지는 가능성을 소거해나가는 것'이라며, '경계를 확정하기 전 세상은 평행한 버전들과 옆길로 가득하다'고 말한다. 불확정성과 불확실성으로 가득한 양자물리학을 문학에 대입해볼 생각은 한번도 하지 못했는데, 이 책을 읽으며 난생 처음으로 양자물리학과 문학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이기도 했다. 말해지지 않은 것과 일어나지 않은 건은 모든 가능성을 품고 있고, 그것이 일어나거나 말해지는 방식의 변이도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렇다면 이 작품의 독특한 구성과 형식이 어떻게 탄생하게 되었는지도 짐작이 될수밖에 없다. '슬픔의 물리학'이라는 인상적인 제목도 그렇고 말이다. 




쓰고, 쓰고, 또 쓰게 하라. 기록하고 보존하게 하라. 노아의 방주처럼 되게 하라. 내가 아니라 이 책을. 오직 책만이 영원하다. 오직 책의 표지만이 파도 위로 떠오르며, 오직 책의 페이지 사이에서 들끓는 생명만이 살아남으리라. 그리고 새로운 땅을 보게 되면 그들은 나아가 번성하리라. 그리하여 글로 쓰인 것은 살과 피를 얻어 온전한 형상으로 살아나리라. '사자'는 사자가 되고, '말'은 말처럼 힝힝거리고, '까마귀'는 시끄럽게 우짖으며 지면에서 날아오르리라...... 미노타우로스는 대낮의 빛으로 걸어나오리라.             p.220~221


이 작품의 화자는 독특한 공감 능력을 가지고 있다. 의사가 병적 공감, 혹은 강박적 공감이라는 희귀한 진단명을 내놓았을 정도로 이것은 병이다.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몰입하게 되면, 호흡이 자동 조절 모드로 넘어가면서 타인의 기억 속으로 완전히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타인의 고통을 함께 느끼고, 그 기억과 경험을 공유한다는 것은 어떤 느낌일까. 화자는 '어떤 이들에게 공감은 고통을 통해 열리는데 내 경우는 슬픔을 통해 열릴 때가 더 많다'고 말한다. 그래서 슬픔의 물리학이 수년 동안 탐구 주제였다는 것이다. 슬픔에는 냄새도 색도 있다는 문장에 밑줄을 그었다. 다양한 색과 냄새가 슬픔을 쉽게 활성화한다는 비유가 와닿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책의 아홉 개 장 중에서 슬픔의 기초 물리학이라는 장을 가장 재미있게 읽었다. 


파편화된 타인의 기억들이 신화와 현실, 과거와 현재가 뒤섞여 끊임없이 방향을 틀고, 갑자기 불쑥 튀어나오는 식으로 책 전체가 하나의 미로를 이루고 있어 정말 흥미진진한 책이었다. 정말 온갖 종류의 이야기들이 여기저기서 눈을 즐겁게 해주었으니 말이다. '우주는 도서관이다'라는 말이 더이상 은유가 아니라고, 이제 우리에게는 새로운 문해력이 필요할 거라는 문장이 있었다. 앞으로 읽어야 할 것들이 얼마나 많을지 상상해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졌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시작도 끝도 없는 도서관의 끝없는 서가들을 보고 있는 듯한 느낌도 들게 했다. 빼곡하게 쌓여진 이야기들의 서가에서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하나씩 이야기들이 튀어나오는 듯한 기분이었으니 말이다. 그러니 그 이야기의 미로 속에서 길을 잃어버리지만 않는다면 대단히 특별한 독서 경험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화자와 함께 이야기의 미궁 속을 천천히 걸으며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수많은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 모든 존재가 되어보는 경험은 어디서도 할 수 없을 테니 말이다. <타임 셸터>가 조금 어렵게 느껴졌다면, 이 작품을 먼저 읽어보길 권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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