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드 뉴욕
이디스 워튼 지음, 정유선 옮김 / 레인보우퍼블릭북스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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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 어머니가 얼버무리고 은근히 암시하다가 체념의 미소와 함께 전해주는 성서 구절, 결혼식의 화려함이 흐릿해지는 가운데 “순종하라”는 당부를 상기시키는 구절이 있었다. 한 주 또는 한 달간 이어지는 화끈거리는 고통과 혼란, 부끄러운 쾌락, 그리고 습관이 되어 어느덧 잠잠해진 당연한 행위, 커다란 흰 침대에서 깊이 잠든 두 사람이 있었다... 그러고는 아기들이 태어났다. "모든 것을 보상"할 것 같았던 아기들은 그런 보상을 주지 않았다. 아기들은 무척 사랑스러웠지만, 사람들은 무엇을 놓쳤고 무엇을 보상받아야 했는지 제대로 알지 못했다.       -'노처녀' 중에서, p.89

 

1921년 여성 최초로 퓰리쳐상을 수상한 이디스 워튼의 단편집으로,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번역본 네 편이 담겨 있는 책이다. 위선과 허위로 가득 찬 당시 뉴욕 사회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세 남녀의 엇갈린 사랑을 보여주었던 <순수의 시대>, 20세기 초 뉴욕 상류사회를 배경으로 신데렐라를 꿈꾸었던 한 여성의 비극적인 삶을 그렸던 <기쁨의 집>, 그리고 최근에는 <기도하는 공작 부인>과 <밤의 승리>라는 고딕 소설 두 편을 통해 이디스 워튼의 작품을 만났다. 이디스 워튼과 호러 문학이라니 다소 낯설기도 했지만, 역시나 고딕 소설에서도 가정이라는 울타리에 사로잡힌 여성한테 결혼 생활이 얼마나 큰 공포가 될 수 있는지를 경고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어 '여성의 이야기'를 너무도 섬세하게 잘 그려내는 것은 여전했다.

 

이번에 만나게 된 소설집에는 <헛된 기대>, <노처녀>, <불꽃>, <새해 첫날>이라는 네 편의 단편 소설이 수록되어 있다. 네 작품 중에서 개인적으로 흥미로웠던 것은 <노처녀>와 <새해 첫날> 이었다. 우선 <노처녀>에서는 옛 뉴욕에서 성실하고 부유한 몇 개의 가문이 세력을 떨치고 있었는데, 주인공이 속해 있는 랄스턴 가문도 그중 하나였다. 델리아 로벨은 스무 살에 제임스 랄스턴과 결혼했고, 스물여섯 살에 제대로 기반을 잡았다.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고 남편에게 후한 용돈을 받았으며 모두가 인정하듯이 가장 멋지고 가장 인기 있는 '젊은 부인' 중 한 명이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델리아는 곧 결혼을 앞두고 있는 사촌 샬롯으로부터 놀라운 소식을 듣게 된다. 처녀인 샬롯이 몰래 낳은 아기를 아동보호소에서 다른 아이들과 함께 기르고 있다는 것, 그래서 자신은 결혼을 하지 않겠다는 이야기였다. 게다가 샬롯은 남자가 아기에 관해 알지도 못하며, 자신은 그를 미워할 수도 사랑할 수도 없다고 말한다. 그리고 아이의 아버지가 누군지 밝혀졌을 때 델리아는 더 충격을 받게 되는데..  이야기는 오랜 세월이 흐른 뒤 샬롯의 딸이 성인이 되고 결혼식을 하루 앞둔 어느 날까지 이어진다.

 

 

그녀는 몇 년의 과부 생활 끝에 남편이 그토록 힘겹게 제공하고 싶어 한 모든 호사를 누릴 만큼 많은 재산을 갖게 되었다. 그것은 유혹의 위험이 다 지나간 뒤에 유혹으로부터 보호받게 되는 기이한 역설이었다. 장담하건대 그녀는 자신의 즐거움을 위한 호사를 누리기 위해 남자에게 손을 내민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녀가 돈 자체를 소중히 여기지는 않았더라도 돈의 위력이 아니었다면 자신의 고독을 달랠 수도 그 고독을 사소한 오락거리로 채우지도 못했을 것이다. 어쩌면 그 위력은 그녀가 알고 있는 것보다 더 대단했을 것이다.    -'새해 첫날' 중에서, p.324

 

<새해 첫날>은 호기심으로 남들의 신파적인 관계에 대해 시시콜콜 떠드는 이야기로 시작된다. “그녀는 항상 행실이 나빴지. 그들은 5번가 호텔에서 만나곤 했어.” 누군지는 알지만 그들에 대해서든 제대로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누군가의 나쁜 행실이나 과거를 폭로하는 것은 사실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일이다. 어머니의 이야기를 듣던 나는 당시 열세 살이었던 그 날의 일을 기억의 한 지점에서 찾아낸다. 새해 첫날, 마침 방학 기간이라 집에 와 있던 나는 가족들과 함께 오찬 식탁에 앉아 평화롭게 식사 중이었다. 그때 하인이 달려 들어와 5번가 호텔에 불이 났다고 말했고, 그들은 길 건너편에서 신년 파티에 참석했던 이들이 혼비백산해서 뛰쳐나오는 모습을 구경한다. 그때 누군가 그녀를 발견한 것이다. 황급히 뛰쳐나오던 여자의 이름은 리지 하젤딘, 그리고 뒤따라 나온 남자는 뉴욕의 미혼 여성이라면 누구나 선망하던 헨리 프레스트였다. 리지가 유부녀였기에 사람들은 두 사람의 만남을 불륜으로 치부하고, 뉴욕의 보수적인 사교계는 오랜 시간 그녀를 배척한다. 나는 여러 해가 지난 뒤 우연한 기회에 그 장면 이전에 일어난 일과 이후에 일어난 일을 알게 되고, 그 속에 숨겨져 있던 진실과 마주하게 된다.

 

이디스 워튼은 뉴욕 상류층 가문에서 태어나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하는데, 그래서 더욱 작품 속에서 당시 상류사회를 상당히 현실감 있게 묘사해 왔다. 이번 작품에서도 마찬가지인데, 상류사회의 부조리함과 위선 등을 비판적 측면에서도 곧잘 묘사하고 있어 읽다 보면 통쾌하기도 하고, 놀랍기도 했던 대목들이 많다. “모든 처녀들이 언니 말처럼 다 참한 건 아니야.”(p.144) 라든지, 사람들은 마흔다섯 살에 용감한 일을 하는 게 스물다섯 살에 하는 것보다 끔찍하게 더 힘들다는 걸 죽어서야 깨닫는다죠.”(p.158), “오래된 과거는 죽은 것으로 여기는 거 말일세. 과거는 죽었어. 지금 우리에게 그런 건 아무 쓸모가 없네."(p.220), “어쩔 수 없지만, 사실이에요. 여자는 아주 쉽게 그럴 수 있어요. 남자들은 종종 그런 사실을 잊더군요. 당신은 나를 사랑에 우는 정부로 여겼고 나는 값비싼 매춘부였을 뿐이에요.”(p.304) 등의 대사에서도 보여지듯이 욕망과 도덕, 이성과 감정, 전통과 변화 사이를 정교하게 그려내고 있다. 이디스 워튼의 전작들을 인상적으로 읽었다면, 이번 작품도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고전들은 딱딱하고 고루하다는 편견과 달리 매우 현대적으로 인간 내면의 깊숙한 곳을 그려내고 있어 지금도 여전히 공감하며 읽을 수 있는 이야기들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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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가 지어낸 모든 세계 - 상처 입은 뇌가 세상을 보는 법
엘리에저 J. 스턴버그 지음, 조성숙 옮김 / 다산사이언스(다산북스)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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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의식은 강력한 이야기꾼이다. 무의식은 렘수면 동안 뇌줄기가 무작위로 내보내는 신호를 연결하고 얼기설기 엮어 기이한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시각장애인의 무의식은 다른 감각까지 동원해 공간 지각을 재구성하고, 심지어는 인간방식의 반향정위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나중에 시력을 잃은 사람들, 특히 일곱 살 이후에 시각 장애인이 된 사람들은 사물이 보인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기억하며 장면을 상상하고 꿈을 꿀 수도 있다. 일곱 살 이후에 시각장애인이 된 사람들은 꿈에서 '진짜로' 앞을 본다.   p.74~75


시각장애인이 꿈속에서 앞을 볼 수 있다면 어떨까? 대부분의 시각장애인들은 사물의 생김새를 기억한다. 안타깝게 실명했을 때 그들은 자신들이 알고 있는 사람이나 물건의 모습을 그대로 기억할 수 있으니까. 그런데 태어날 때부터 양쪽 눈의 시각 신경이 없어서 시각장애인이 되었다면 색깔을 본 적도 없고,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본 적도 없을 것이다. 그런 사람이 꿈 속에서 사방이 온통 모래인 해변에서 멋진 금발의 잘생긴 남자를 만나 사랑에 빠졌다고 한다면, 대체 어떻게 된 걸까? 꿈속의 정신은 어떤 특별한 것이 있기에 시각장애인에게도 시력을 제공하는 걸까?

 

 

노화로 생기는 실명의 흔한 원인인 환반변성으로 시력을 잃은 여든일곱 살 노인은 요즘 집 안에서 사람들을 본다. 지난 주에는 곰 한 마리가 부엌을 어슬렁거렸고, 거실에서 풀을 뜯는 소들도 종종 보았다. 하지만 그는 치매가 아니었고, 찰스보닛증후군의 환각 증상이었다. 이들은 자신이 앞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자신들이 보는 모습이 실제가 아님을 알고 있다. 그렇다면 대체 이런 증상은 왜 생기는 걸까?

 

이 책은 젊은 신경과학자 엘리에저 스턴버그의 세 번째 책으로, 의식과 무의식의 세계를 뇌과학과 의학 지식 위주로 다루고 있다. 학문의 경계를 넘나드는 서술과 뇌과학의 방대한 연구 분야를 한 권에 담으려는 대담한 시도가 실현된 결과물인 이 책은 '뇌의 모든 영역을 한 권에 담고' 있어 더욱 인상적이다.

 

 

우리는 감정을 발산한 순간을 기억한다. 9/11 테러 공격 뉴스를 들었을 때 카푸치노를 마시고 있었다는 사실은 전 세계 거의 모든 사람에게는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지만 장본인은 그렇지 않았다. 그가 세계를 격동시킨 뉴스를 들었을 때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는 그의 인생사에 한 축을 차지했다. 그날 그의 하루에서 스타벅스에 있었던 것은 중요한 요소였던 반면, 세계무역센터가 정확히 몇 시에 공격당했는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p.184

 

30대 초반에 화학 석사 학위를 받고 민간 연구실에서 오랫동안 일하며 경력을 쌓았고, 오래 사귄 여자 친구도 있었던 남자의 일생은 지극히 정상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무언가 상황이 바뀐다. 그는 친구와 가족을 멀리했고, 직장에서 해고당했으며 여자 친구와도 헤어졌다. 그는 공과금을 내지 못했고, 차와 아파트를 유지하지 못했으며, 제대로 챙겨먹지도 못했다. 그는 자신과 자신의 과거사에 대한 기본 정보조차 기억하지 못했지만, 전부 기억하는 것처럼 굴었다. 오늘 날짜를 몰랐고,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자기 이름은 뭔지도 몰랐지만 그는 자신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고, 그걸 감추기 위해 끝도 없이 변명을 늘어놓았다. 대체 그의 기억에 무슨 일이 생긴 것일까?

 

 

이 책은 결핍된 뇌를 통해 고작 1.4킬로그램의 무게로 하루 섭취 열량의 20퍼센트를 독식하는 뇌가 어떻게 한 사람의 세계를 구축하고 지켜내는지를 알아가면서, 신경계 환자들의 특별하고 기묘한 경험담을 통해 우리 뇌의 논리와 패턴에 대해 명쾌하게 이야기해준다. 뇌의 전체 영역과 기능을 함께 살펴보고 최신 뇌 연구 결과까지 두루 다루고 있어, 뇌과학의 모든 것을 살펴볼 수 있는 책이기도 하다.

 

우리는 이 책을 읽으며 인간이 경험하는 가장 신비한 현상은 물론, 아주 일상적으로 내리는 결정의 밑바탕에도 뚜렷한 신경학적 회로가 존재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결정을 내리는 작동방식은 무엇인가? 정신질환은 사고방식에 영향을 미치는가? 우리와 뇌 사이에 벌어지는 상호작용은 무엇이며, 뇌는 어떻게 해서 우리라는 사람을 만들어내는가? 이 책에는 이렇듯 질문이 많다. 그리고 이러한 질문들을 따라가다보면 지각, 습관, 학습, 기억, 언어, 그리고 자아와 정체성의 존재가 지니는 신비에 이르게 된다. 외계인 납치, 거짓 미소 간파, 조현병 환자의 실화에서 몽유병 살인자, 스포츠팬의 뇌, 간지럼의 비밀에 이르기까지 온갖 다양한 사례들을 보여주고 있어 흥미롭게 뇌과학과 신경과학을 접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우리의 마음과 행동을 지배하는 뇌의 법칙이 궁금하다면 이 책을 만나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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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사랑할 때 이야기하지 않는 것들 - 욕망과 결핍, 상처와 치유에 관한 불륜의 심리학
에스터 페렐 지음, 김하현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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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주의 사회는 이상한 모순을 낳는다. 서로 간의 신의가 더욱 필요해지는 동시에 불륜의 매력 또한 더욱 강렬해진다. 감정적으로 파트너에게 크게 의존하는 시대에 외도는 전례 없는 파괴력을 갖는다. 하지만 개인의 성취를 강조하고 더 행복해질 수 있다는 약속으로 사람들을 유혹하는 문화에서 바람 피우고 싶은 충동 또한 전례 없이 커진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그 어느 때보다 바람을 많이 피우면서 그 어느 때보다 가차 없이 불륜을 비난한다.    p.86

 

68세 여성 바버라는 최근 남편을 여의고, 한창 애도하던 중에 남편이 오래 전부터 바람을 피웠다는 증거를 발견한다. 남편은 지역에서 크게 존경 받는 사람이었고, 남편을 기리는 자리에 그녀가 계속 초대를 받고 있었다. 과연 남편의 죽음과 배신으로 이중의 상실을 경험하게 된 그녀는 진실을 밝혀야 할까, 아니면 남편의 이름을 지켜줘야 할까. 37세의 광고대행사 직원 릴리는 10년 가까이 애인이 아내와 이혼하기만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그는 릴리와 만난 후로도 아내와 아이 둘을 더 낳았고, 그녀는 자신의 생식 능력이 하루하루 줄어들고 있음을 느낀다. 그는 그녀의 진정한 사랑일까, 아니면 그저 그녀를 갖고 놀고 있는 것일까.

 

심리치료사이자 작가, 트레이너, 강연자로서 에스터 페렐은 30년 가까이 커플들의 복잡한 사랑과 욕망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지난 10년간은 외도로 고민하는 수많은 사람과 상담을 진행하며 이 주제에 몰두했다. 그녀는 불륜이 오늘날의 사랑에 대해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준다고 말한다. 원하든 원치 않든 외도는 우리 곁에 있다. 외도는 행복한 결혼 생활에서도, 불행한 결혼 생활에서도, 심지어 간통죄로 사형당할 수 있는 상황에서도 발생한다. 그렇다면 왜 사람들은 이런 행동을 하는 걸까. 심지어 행복하게 지내는 커플조차, 바람을 피우는 걸까. 이 책은 불륜의 정확한 의미는 무엇인지, 상대의 부정이 왜 그토록 상처가 되는 것인지, 그것을 예방할 방법이란 게 존재하는 지, 동시에 한 명 이상을 사랑하는 것이 가능한지 등등 금지된 사랑을 다각도로 살펴보고 있다.

 

 

 

외도에는 가슴 아픈 아이러니가 있다. 바로 가장 소중한 것에 반기를 드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흔히 겪는 이 고충은 우리 내면의 실존적 갈등을 보여준다. 우리는 안정감과 소속감을 원하며, 이 2가지 속성은 우리가 한 사람과 깊은 관계를 맺도록 만든다. 하지만 우리는 새로움과 다양성 또한 즐긴다. 정신분석가 스티븐 미첼이 날카롭게 지적했듯이, 우리는 안정을 갈구하는 '동시에' 모험을 갈구한다. 하지만 이 2가지 기본 욕구는 완전히 다른 동기에서 나오며, 한평생 우리를 정반대 방향으로 잡아당긴다.    p.259

 

사람들은 무엇 때문에 그렇게 힘들게 그어 놓은 선 밖으로 걸어 나가는 걸까. 외도는 늘 이기적이고 나약한 행동일까? 어떤 경우에는 외도가 이해 받고 용인될 수도 있을까? 은밀한 사랑은 늘 폭로되어야 하는가? 열정에는 유통기한이 있을까? 등등.. 외도는 관계에 대해 많은 것을 알려 준다. 이러한 질문들은 상당히 불편하지만, 가치관과 인간의 본성, 에로스의 힘에 대해 탐구할 수 있도록 해준다. 사실 바람을 피울 생각이라면 이혼을 하거나, 배우자에게 거짓말할 정도로 삶이 불행하다면 배우자를 떠나거나, 파트너가 바람을 피운다면 당장 변호사를 부르면 되는 거 아닌가. 하지만 사랑은 매우 골치 아프고, 비이성적이고, 어려운 문제이다. 왜냐하면 외도는 '욕망'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누군가 날 욕망해 주기를, 자신이 특별한 존재처럼 느껴지기를, 다른 이의 시선을 받고 그 사람과 연결되기를, 주목의 대상이 되기를 바라는 욕망' 말이다.

 

비밀과 거짓말, 외도와 욕망, 부러움과 질투, 복수와 분노, 이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는 사랑과 관계에 대한 이야기는 누구나 겪을 수 있지만, 누구에게나 쉽지 않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외도를 하고, 배신을 겪지만, 사실 많은 커플들이 그 이후에도 헤어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러한 파괴적인 사건을 겪은 후 우리의 마음은, 관계는, 사랑은 어떤 길을 걷게 되는 걸까? 사랑의 역사만큼이나 유구하고 끈질긴 이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한 적이 없는 나로서는, 두툼한 사백여 페이지를 가득 채우고 있는 이러한 담론들이 매우 흥미로웠다. 게다가 이 책은 매우 도발적인 주제를 다루고 있지만, 불륜이라는 렌즈를 통해 현대 사회와 인간 본성의 그림자 속을 들여다볼 수 있게 하고 있어 진지함과 깊이도 갖추고 있다. 한 번이라도 누군가를 사랑해 본 적이 있다면 공감할 수밖에 없는 책이고, 만약 지금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문제를 겪고 있다면 굉장히 도움이 될만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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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은 알고 있다 - 꽃가루로 진실을 밝히는 여성 식물학자의 사건 일지
퍼트리샤 윌트셔 지음, 김아림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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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컨대 나는 신발에 묻은 미세 입자를 살펴 당신이 어디에 있었는지 알아낼 수 있다. 숲 지대나 정원을 따라 자란 블루벨 꽃가루가 신발에 묻어 있다면, 당신이 어느 길을 따라 집으로 걸어왔는지도 알 수 있다.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과 어디에서 머물렀는지, 어느 들판 한구석에서 기다렸는지, 어느 벽에 기대 연인을 기다렸는지까지 맞혀낼지도 모른다. 혹시 당신이 나와 사체로서 마주하는 불행한 영혼이라면, 피부와 옷에 자라는 균류, 머리카락과 옷, 신발에 묻은 꽃가루와 포자를 조사해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었는지를 당신이 사랑하는 이들에게 말해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p.20~21

 

한 젊은 여성이 발렌타인데이 날 실종되었다. 직장 동료들은 그녀의 행방을 전혀 몰랐고, 남자 친구는 연인을 우상처럼 떠받드는 사람이었다. 그녀가 행방 불명된 지 열 하루가 지난 뒤, 범인은 바로 그녀의 연인이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그는 한동안 결백을 주장했지만, 결국 진실이 밝혀졌고 범행을 자백했다. 문제는 시체를 찾지 못한 것이다. 그는 그녀를 살해한 날 밤 익숙한 장소를 벗어나 최대한 멀리까지 차를 몰고 가다가 적당히 황량한 장소를 발견했고, 정확히 그곳이 어딘지 기억하지 못했다. 경찰은 그때 이 책의 저자인 퍼트리샤 윌트셔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그녀에게 주어진 것은 범인의 청바지와 나이키 운동화 한 켤레, 리복 운동화 한 켤레, 그의 부모 집에서 발견된 정원용 갈퀴 하나였다. 그녀는 연인을 살해한 남자의 운동화와 차량 운전석 매트의 자작나무 꽃가루로 시체가 묻힌 장소를 찾아낸다. 이렇게 법의생태학자는 법의학 분야가 하는 DNA 분석 같은 일과는 다른 일을 한다.

 

개인적으로 범죄 수사와 관련된 장르에 관심이 많은 편이라 법의학 관련 책들을 꽤 많이 봐왔다고 생각했는데, 법의생태학자라는 존재는 이 책을 통해서 처음 알게 되었다. 법의생태학자란 범죄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자연 세계의 한 측면을 해석해 형사들을 돕는 존재이다. 법의생태학자는 망자가 숨을 거둔 날 생겨났을지도 모르는 단서를 찾기 위해 주변 환경을 조사하고, 사체를 발견하지 못한 경우 희생자가 묻힌 위치라든가 사체 유기 장소를 알아내기 위해 자연 세계의 흔적을 찾는 임무를 한다. 그리하여 서로의 주장이 엇갈리는 강간 사건에서 장미 가시에 긁힌 자국과 재킷에 묻은 라임나무 꽃가루로 누가 거짓말을 하는지 밝혀내며, 희생자의 콧속에서 추출한 알갱이로 가해자에게 종신형을 선고 받게 한다.

 

 

법의학적 생태학, 아니면 어떤 종류의 생태학이든 한 가지 매력적인 측면이 있다면 배움이 끝없이 이어진다는 점이다. 모든 표본은 얼마간의 놀라움을 안기며, 슬라이드 보관함에서 현미경으로 직접 관찰하는 단계까지 밀려드는 아드레날린은 항상 흥분을 불러일으킨다. 그에 따라 더 많은 것을 조사하고 싶어 안달이 난다. 보고, 기록하고, 측정하고, 해석해야 할 것이 언제나 더 있다. 자연 세계는 무한해 보인다.    p.354

 

꽃가루로 범죄 수사를 하고 진실을 밝혀내는 식물학자라니 믿기도 어렵고, 상상도 잘 안 되는 일이다. 하지만 이 책에 따르면 포유류와 조류, 어류와 양서류는 물론 조류와 이끼들을 제외하고도 약 40만종의 식물이 있으며, 주기적으로 새로운 종들이 발견되고 있다. 거기다 500만 종이 넘는 균류, 3000만 종이 넘을 곤충과 지구를 공유하는 탓에, 작은 움직임에도 자연의 흔적이 남는 다고 한다. 지리적 풍경과 꽃가루를 비롯한 화분 화석, 균류, 토양에 관한 지식을 통해 그 흔적을 따라갈 수 있다는 거다. 그러니 우리의 모든 행동은 카메라에 찍히는 것 이상으로 세세하게 추적이 가능하다.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세상에는 미신이 너무 많다. 하지만 나는 마법을 부리지 않는다. 이것은 과학이다."

 

생물학에는 절대적인 것이 거의 없는 탓에 모든 것이 확률적이다. 어떤 표본에서 발견되는 다양한 꽃가루와 포자의 종류와 양은 무척 많은 변수에 따라 달라진다. 그러니 이러한 요소들은 언제나 전후 사정과 맥락에 따라 달라지며, 그래서 연구 결과가 잘못되거나 잠재적으로 비난 받을 만한 결론에 도달하기가 아주 쉽다. 이것이 '법의학의 여왕'이라 불리는 퍼트리샤 윌트셔가 70대의 나이에도 은퇴를 거부하며 여전히 자연으로부터 배우고, 관찰하고, 연구하는 이유일 것이다. 이 책은 한 여성의 다이내믹한 인생 여정을 다루는 회고록이자, 자연이 남긴 아주 작은 실마리를 포착해 정의를 구해온 법의생태학자들의 범죄 수사기록이기도 하다. 소설보다 더 흥미롭고, 웬만한 법의학 개론서보다 더 디테일하고, 그 어떤 회고록보다도 드라마틱한 책이다. 법의학에 관심이 많다면, 미스 마플의 실사판을 만나 보고 싶다면, 너무나 가깝지만 눈에 닿지 않았던 미세한 세계의 비밀을 알아보고 싶다면 이 책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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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비틀 킬러 시리즈 2
이사카 고타로 지음, 이영미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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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죽이면 왜 안 되는데?"
왕자는 질문을 해봤다. 비웃거나 농담할 의도는 없었다. 실제로 그 답을 알고 싶었다. 납득할 수 있는 해답을 들려주는 어른을 만나보고 싶었다. 기무라한테서는 대수로운 발언을 들을 수 없을 거라는 짐작도 갔다. 아마도 '사람은 죽여도 되지 않나'라는 자포자기식 의견이 날아오겠지. 그리고 "나랑 내 가족이 죽는 건 참을 수 없지만, 타인이 죽는 건 아무 상관없어"라고 말할 게 틀림없다.    p.58~59

 

왕년에는 킬러였지만 현재는 한낱 알콜 중독자에 불과한 ‘기무라’는 아들의 복수를 위해 도쿄에서 모리오카로 향하는 신칸센 하야테에 오른다. 여섯 살 어린아이를 백화점 옥상에서 떠밀어 중태에 빠뜨린 소년 ‘왕자’를 찾아 뜨거운 맛을 보여주겠다고 다짐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년에게 가까이 다가가자마자 눈앞에서 커다란 불꽃이 튀었고, 눈을 떴을 때는 창가 자리에 묶인 채로 앉혀 있었다. 중학생이지만 너무도 영악한 왕자가 오히려 기무라의 행동을 예측하고 준비하고 있었던 거였다. 한편 콤비 킬러인 '밀감'과 '레몬'은 인질로 잡혔던 보스의 아들을 무사히 구하고 몸값이 든 검은 트렁크를 들고 하야테에 탑승한다. 레몬은 돈이 든 트렁크를 좌석과 반대편인 앞쪽 차량 짐 보관소 선반에 올려두었는데, 트렁크가 감쪽같이 사라져 버린다. 게다가 그들이 사라진 트렁크를 찾아 우왕좌왕하는 사이, 보스의 아들은 누군가에게 살해당하고 만다.

 

같은 시간, '나나오'는 마리아의 지시로 검은 트렁크를 찾아내 도쿄 다음 역인 우에노에서 내릴 예정이었다. 무사히 트렁크를 손에 넣어 플랫폼으로 내려서려고 하는데, 문 앞에 서 있던 남자가 청부업자 늑대라는 걸 알아본다. 얼마 전에 늑대가 초등학생들을 괴롭히는 상황에서 그에게 본때를 보여줬던 터라 원수는 외나무 다리에서 만난 꼴이 된 것이다. 늑대는 나나오를 강제로 가로막고 차 안으로 올라탔고, 기차에서 내리지 못한 채 주먹다짐을 하다 그만 늑대를 죽이고 만다. 자, 그렇게 종착역까지 남은 시간은 단 2시간 30분! 사이코패스 왕자의 잔꾀에 이들은 우연과 필연으로 얽히면서 모두들 의도치 않은 사건에 휘말리게 된다. 과연 밀폐된 기차 안에서 이들 중 누가 끝까지 살아남을 것인가.

 

 

“잘 들어. 살인을 하면 안 된다는 건 살해되고 싶지 않은 녀석들이 만든 규칙일 뿐이야. 자기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주제에 보호받고 싶은 녀석들이 만든 거지. 나한테 묻는다면, 살해되고 싶지 않으면 살해되지 않게 처신하면 된다. 남에게 원한을 사지 않는다거나 신체를 단련한다거나. 방법은 여러 가지야. 너도 그렇게 하는 게 좋을 테고."     p.460~461

 

이사카 고타로의 '킬러 시리즈' 그 두 번째 작품이다. 이 시리즈는 <그래스호퍼>, <마리아비틀>, <악스>로 시리즈 세 번째 작품이 무려 7년 만에 출간되어 작년에 서점대상 최종후보로 선정되기도 했다. 냉혹한 살인청부업자들과 아내의 복수를 꿈꾸는 어수룩한 전직 수학 교사 스즈키의 쫓고 쫓기는 하드보일드 느와르를 그렸던 <그래스호퍼>에 이어 만나게 되는 두 번째 작품은 한 명의 주인공이 아니라 여러 인물이 각자의 시점에서 이야기가 진행된다. 이사카 고타로의 '킬러 시리즈'는 킬러가 등장하는 여타의 추리, 스릴러 장르의 이야기와는 전혀 다르다. 그야말로 이사카 고타로만이 그려낼 수 있는 독특한 캐릭터들이 등장한다. 단어 그대로 너무도 '인간적인' 킬러가 등장하는 작품은 만나본 적이 없으니 말이다. 사실 누군가를 죽이는 일을 직업으로 하고 있는 사람을 '인간적'이라고 설명하는 것부터 아이러니이긴 하지만 말이다.

 

그래서 어느 정도 냉혹한 킬러들의 세계를 그리고 있긴 하지만, 잔인하거나 폭력적이라는 느낌은 별로 들지 않는다. 그저 킬러라는 '직업'을 가진 인물들을 중심으로 사회와 인간이 안고 있는 어둠과 욕망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한 편의 드라마처럼 읽히기 때문에 더욱 흥미롭다. 이사카 고타로 특유의 위트와 유머에서 비롯되는 재미도 여전하고, 전문 킬러가 등장하는 엔터테인먼트 소설로서의 매력도 훌륭하다. 행운과 불행, 우연과 필연, 선과 악이 교차로 진행되는 이야기 속에서 흥미로운 구성을 만들어 내고, 질주하는 기차 안이라는 폐쇄된 공간에의 긴장감이 숨가쁘게 펼쳐지는 이들의 이야기에 더욱 몰입하게 만들어 주고 있다. “왜 사람을 죽이면 안 되는 거죠?” 그에 대한 이사카 고타로의 답이 잔혹한 생존 게임으로 펼쳐진다. 시속 200킬로미터로 달려가며 인간의 폭력과 악의 근원을 탐구하는 ‘이사카 월드’로 당신을 초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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