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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가 지어낸 모든 세계 - 상처 입은 뇌가 세상을 보는 법
엘리에저 J. 스턴버그 지음, 조성숙 옮김 / 다산사이언스(다산북스) / 2019년 12월
평점 :
무의식은 강력한 이야기꾼이다. 무의식은 렘수면 동안 뇌줄기가 무작위로 내보내는 신호를 연결하고 얼기설기 엮어 기이한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시각장애인의 무의식은 다른 감각까지 동원해 공간 지각을 재구성하고, 심지어는 인간방식의 반향정위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나중에 시력을 잃은 사람들, 특히 일곱 살 이후에 시각 장애인이 된 사람들은 사물이 보인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기억하며 장면을 상상하고 꿈을 꿀 수도 있다. 일곱 살 이후에 시각장애인이 된 사람들은 꿈에서 '진짜로' 앞을 본다. p.74~75
시각장애인이 꿈속에서 앞을 볼 수 있다면 어떨까? 대부분의 시각장애인들은 사물의 생김새를 기억한다. 안타깝게 실명했을 때 그들은 자신들이 알고 있는 사람이나 물건의 모습을 그대로 기억할 수 있으니까. 그런데 태어날 때부터 양쪽 눈의 시각 신경이 없어서 시각장애인이 되었다면 색깔을 본 적도 없고,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본 적도 없을 것이다. 그런 사람이 꿈 속에서 사방이 온통 모래인 해변에서 멋진 금발의 잘생긴 남자를 만나 사랑에 빠졌다고 한다면, 대체 어떻게 된 걸까? 꿈속의 정신은 어떤 특별한 것이 있기에 시각장애인에게도 시력을 제공하는 걸까?
노화로 생기는 실명의 흔한 원인인 환반변성으로 시력을 잃은 여든일곱 살 노인은 요즘 집 안에서 사람들을 본다. 지난 주에는 곰 한 마리가 부엌을 어슬렁거렸고, 거실에서 풀을 뜯는 소들도 종종 보았다. 하지만 그는 치매가 아니었고, 찰스보닛증후군의 환각 증상이었다. 이들은 자신이 앞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자신들이 보는 모습이 실제가 아님을 알고 있다. 그렇다면 대체 이런 증상은 왜 생기는 걸까?
이 책은 젊은 신경과학자 엘리에저 스턴버그의 세 번째 책으로, 의식과 무의식의 세계를 뇌과학과 의학 지식 위주로 다루고 있다. 학문의 경계를 넘나드는 서술과 뇌과학의 방대한 연구 분야를 한 권에 담으려는 대담한 시도가 실현된 결과물인 이 책은 '뇌의 모든 영역을 한 권에 담고' 있어 더욱 인상적이다.
우리는 감정을 발산한 순간을 기억한다. 9/11 테러 공격 뉴스를 들었을 때 카푸치노를 마시고 있었다는 사실은 전 세계 거의 모든 사람에게는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지만 장본인은 그렇지 않았다. 그가 세계를 격동시킨 뉴스를 들었을 때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는 그의 인생사에 한 축을 차지했다. 그날 그의 하루에서 스타벅스에 있었던 것은 중요한 요소였던 반면, 세계무역센터가 정확히 몇 시에 공격당했는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p.184
30대 초반에 화학 석사 학위를 받고 민간 연구실에서 오랫동안 일하며 경력을 쌓았고, 오래 사귄 여자 친구도 있었던 남자의 일생은 지극히 정상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무언가 상황이 바뀐다. 그는 친구와 가족을 멀리했고, 직장에서 해고당했으며 여자 친구와도 헤어졌다. 그는 공과금을 내지 못했고, 차와 아파트를 유지하지 못했으며, 제대로 챙겨먹지도 못했다. 그는 자신과 자신의 과거사에 대한 기본 정보조차 기억하지 못했지만, 전부 기억하는 것처럼 굴었다. 오늘 날짜를 몰랐고,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자기 이름은 뭔지도 몰랐지만 그는 자신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고, 그걸 감추기 위해 끝도 없이 변명을 늘어놓았다. 대체 그의 기억에 무슨 일이 생긴 것일까?
이 책은 결핍된 뇌를 통해 고작 1.4킬로그램의 무게로 하루 섭취 열량의 20퍼센트를 독식하는 뇌가 어떻게 한 사람의 세계를 구축하고 지켜내는지를 알아가면서, 신경계 환자들의 특별하고 기묘한 경험담을 통해 우리 뇌의 논리와 패턴에 대해 명쾌하게 이야기해준다. 뇌의 전체 영역과 기능을 함께 살펴보고 최신 뇌 연구 결과까지 두루 다루고 있어, 뇌과학의 모든 것을 살펴볼 수 있는 책이기도 하다.
우리는 이 책을 읽으며 인간이 경험하는 가장 신비한 현상은 물론, 아주 일상적으로 내리는 결정의 밑바탕에도 뚜렷한 신경학적 회로가 존재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결정을 내리는 작동방식은 무엇인가? 정신질환은 사고방식에 영향을 미치는가? 우리와 뇌 사이에 벌어지는 상호작용은 무엇이며, 뇌는 어떻게 해서 우리라는 사람을 만들어내는가? 이 책에는 이렇듯 질문이 많다. 그리고 이러한 질문들을 따라가다보면 지각, 습관, 학습, 기억, 언어, 그리고 자아와 정체성의 존재가 지니는 신비에 이르게 된다. 외계인 납치, 거짓 미소 간파, 조현병 환자의 실화에서 몽유병 살인자, 스포츠팬의 뇌, 간지럼의 비밀에 이르기까지 온갖 다양한 사례들을 보여주고 있어 흥미롭게 뇌과학과 신경과학을 접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우리의 마음과 행동을 지배하는 뇌의 법칙이 궁금하다면 이 책을 만나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