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은 알고 있다 - 꽃가루로 진실을 밝히는 여성 식물학자의 사건 일지
퍼트리샤 윌트셔 지음, 김아림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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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컨대 나는 신발에 묻은 미세 입자를 살펴 당신이 어디에 있었는지 알아낼 수 있다. 숲 지대나 정원을 따라 자란 블루벨 꽃가루가 신발에 묻어 있다면, 당신이 어느 길을 따라 집으로 걸어왔는지도 알 수 있다.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과 어디에서 머물렀는지, 어느 들판 한구석에서 기다렸는지, 어느 벽에 기대 연인을 기다렸는지까지 맞혀낼지도 모른다. 혹시 당신이 나와 사체로서 마주하는 불행한 영혼이라면, 피부와 옷에 자라는 균류, 머리카락과 옷, 신발에 묻은 꽃가루와 포자를 조사해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었는지를 당신이 사랑하는 이들에게 말해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p.20~21

 

한 젊은 여성이 발렌타인데이 날 실종되었다. 직장 동료들은 그녀의 행방을 전혀 몰랐고, 남자 친구는 연인을 우상처럼 떠받드는 사람이었다. 그녀가 행방 불명된 지 열 하루가 지난 뒤, 범인은 바로 그녀의 연인이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그는 한동안 결백을 주장했지만, 결국 진실이 밝혀졌고 범행을 자백했다. 문제는 시체를 찾지 못한 것이다. 그는 그녀를 살해한 날 밤 익숙한 장소를 벗어나 최대한 멀리까지 차를 몰고 가다가 적당히 황량한 장소를 발견했고, 정확히 그곳이 어딘지 기억하지 못했다. 경찰은 그때 이 책의 저자인 퍼트리샤 윌트셔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그녀에게 주어진 것은 범인의 청바지와 나이키 운동화 한 켤레, 리복 운동화 한 켤레, 그의 부모 집에서 발견된 정원용 갈퀴 하나였다. 그녀는 연인을 살해한 남자의 운동화와 차량 운전석 매트의 자작나무 꽃가루로 시체가 묻힌 장소를 찾아낸다. 이렇게 법의생태학자는 법의학 분야가 하는 DNA 분석 같은 일과는 다른 일을 한다.

 

개인적으로 범죄 수사와 관련된 장르에 관심이 많은 편이라 법의학 관련 책들을 꽤 많이 봐왔다고 생각했는데, 법의생태학자라는 존재는 이 책을 통해서 처음 알게 되었다. 법의생태학자란 범죄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자연 세계의 한 측면을 해석해 형사들을 돕는 존재이다. 법의생태학자는 망자가 숨을 거둔 날 생겨났을지도 모르는 단서를 찾기 위해 주변 환경을 조사하고, 사체를 발견하지 못한 경우 희생자가 묻힌 위치라든가 사체 유기 장소를 알아내기 위해 자연 세계의 흔적을 찾는 임무를 한다. 그리하여 서로의 주장이 엇갈리는 강간 사건에서 장미 가시에 긁힌 자국과 재킷에 묻은 라임나무 꽃가루로 누가 거짓말을 하는지 밝혀내며, 희생자의 콧속에서 추출한 알갱이로 가해자에게 종신형을 선고 받게 한다.

 

 

법의학적 생태학, 아니면 어떤 종류의 생태학이든 한 가지 매력적인 측면이 있다면 배움이 끝없이 이어진다는 점이다. 모든 표본은 얼마간의 놀라움을 안기며, 슬라이드 보관함에서 현미경으로 직접 관찰하는 단계까지 밀려드는 아드레날린은 항상 흥분을 불러일으킨다. 그에 따라 더 많은 것을 조사하고 싶어 안달이 난다. 보고, 기록하고, 측정하고, 해석해야 할 것이 언제나 더 있다. 자연 세계는 무한해 보인다.    p.354

 

꽃가루로 범죄 수사를 하고 진실을 밝혀내는 식물학자라니 믿기도 어렵고, 상상도 잘 안 되는 일이다. 하지만 이 책에 따르면 포유류와 조류, 어류와 양서류는 물론 조류와 이끼들을 제외하고도 약 40만종의 식물이 있으며, 주기적으로 새로운 종들이 발견되고 있다. 거기다 500만 종이 넘는 균류, 3000만 종이 넘을 곤충과 지구를 공유하는 탓에, 작은 움직임에도 자연의 흔적이 남는 다고 한다. 지리적 풍경과 꽃가루를 비롯한 화분 화석, 균류, 토양에 관한 지식을 통해 그 흔적을 따라갈 수 있다는 거다. 그러니 우리의 모든 행동은 카메라에 찍히는 것 이상으로 세세하게 추적이 가능하다.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세상에는 미신이 너무 많다. 하지만 나는 마법을 부리지 않는다. 이것은 과학이다."

 

생물학에는 절대적인 것이 거의 없는 탓에 모든 것이 확률적이다. 어떤 표본에서 발견되는 다양한 꽃가루와 포자의 종류와 양은 무척 많은 변수에 따라 달라진다. 그러니 이러한 요소들은 언제나 전후 사정과 맥락에 따라 달라지며, 그래서 연구 결과가 잘못되거나 잠재적으로 비난 받을 만한 결론에 도달하기가 아주 쉽다. 이것이 '법의학의 여왕'이라 불리는 퍼트리샤 윌트셔가 70대의 나이에도 은퇴를 거부하며 여전히 자연으로부터 배우고, 관찰하고, 연구하는 이유일 것이다. 이 책은 한 여성의 다이내믹한 인생 여정을 다루는 회고록이자, 자연이 남긴 아주 작은 실마리를 포착해 정의를 구해온 법의생태학자들의 범죄 수사기록이기도 하다. 소설보다 더 흥미롭고, 웬만한 법의학 개론서보다 더 디테일하고, 그 어떤 회고록보다도 드라마틱한 책이다. 법의학에 관심이 많다면, 미스 마플의 실사판을 만나 보고 싶다면, 너무나 가깝지만 눈에 닿지 않았던 미세한 세계의 비밀을 알아보고 싶다면 이 책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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