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사적인 평범 교유서가 산문 시리즈
부희령 지음 / 교유서가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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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도서관은 거짓말로 이루어진 거대한 미로다. 수백 개의 서가들, 그 속에 꽂혀 있는 수백 수천만 권의 책들, 책마다 넘쳐나는 깨알 같은 거짓말들. 사람들은 거짓말을 사랑한다. 거짓말은 지나치게 달콤하고 거짓말은 지나치게 아름답고 거짓말은 지나치게 말끔하고 거짓말은 지나치게 어렵고 거짓말은 지나침에 있어서도 지나치게 뻔뻔해서, 모든 두꺼움이 그렇듯, 어리석음과 추함과 두려움을 가려주기 때문이다.                p.33


부희령 작가의 글은 번역가로서의 작업물들로 먼저 만났었다. 소설 작품은 <구름해석전문가>라는 소설집이 기억에 남는데, 독특한 제목과 시선을 사로잡는 표지 이미지때문에 홀린 듯 선택했던 책이다. 언제나 이곳이 아닌 다른 세계를 꿈꾸고 있는 독자로서 세계를 부유하는 소설 속 인물들이 낯설기도 하면서 어딘가 익숙하게 느껴지기도 했었다. 그리고 오랜만에 산문집으로 만나보게 되었다. 역시나 제목과 표지가 참 좋다고 생각을 하며 읽어 보았다. 


표지에도 보여지는 '파파야'라는 제목의 글이 인상적이었다. 갑자기 비가 쏟아져 유리창을 닫으며 열대의 우기를 떠올린다. 오래전 적도 근처의 나라에서 한동안 머물렀었는데, 그 시절의 쏟아지던 비가 생각났던 것이다. 그곳의 비는 온종일 주룩주룩 내리는 것이 아니라 태양이 오전 내내 뜨겁게 내리쬐다, 늦은 오후 무렵 비가 장렬하게 퍼붓는 식이었다. 세상이 다 잠길 때까지 멈추지 않을 것처럼 쏟아졌던 것이다. 지금은 그곳에 있지 않지만, 선풍기가 돌아가는 방안의 후덥지근한 공기와 유리창 너머로 쏟아지는 비를 바라보며 그 시절 자주 먹던 파파야의 단내가 유령처럼 어른거리기 시작한다. 이 글을 읽으며 잘 익은 파파야의 선홍빛 과육에서 달콤한 향기가 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열대 과일 중에서도 파파야는 이국적인 느낌이 있는데, 태양이 뜨겁게 내리쬐고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고온다습한 지역에서 먹어야 제맛이라 그런 것 같다. 지금은 한겨울이니 파파야를 한입 먹는 상상만으로도 몸이 데워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건 가난하거나 부자이거나, 외롭거나 외롭지 않거나, 바라거나 바라지 않거나, 누구나 언젠가는 보게 될 뒷모습 아닐까. 먼지 쌓인 책들에 둘러싸여 앉아 있다가, 손자들의 끊이지 않는 귀여움에 지쳐갈 즈음, 무거운 카트를 끌고 신호등 앞에서 황급히 걸음을 멈춰야 할 때, 수많은 누군가는 성공이나 실패라는 이름을 벗어버린 반백의 시간과 문득 마주치게 될 것이다. 그런데 할머니, 결국 모두가 겪는 순간이라 생각하면, 이유는 모르지만 조금 위로가 되지 않나요.              p.167


이 책의 글들은 쓰기, 마음, 여행, 가족, 세상, 읽기라는 카테고리로 나뉘어 있다. 다 좋았지만, 개인적으로는 여행 카테고리의 글들이 유독 마음에 남았다. 인도의 아쉬람을 시작으로 슬로베니아, 베네치아의 이국적인 풍경들이 손에 잡힐 듯 그려지는 글들이었다. 여행으로 다녀온 것도 있고, 문화예술위원회의 해외 레지던스 공모에 선정되어 석 달 남짓 머무른 나라도 있었다. 베네치아 여행기의 마지막 글에서 '슬로베니아를 떠나고 나면 베네치아도 류블랴나도 살아 있는 동안 다시 볼 일은 없겠지.' 라는 문장을 읽으며, 그래서 여행일 내가 좋아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나라를 가든 항상 그런 마음이 바탕에 깔려 있는 것 같다. 내가 살아서 여길 다시 올 수 있을까. 아마 없을 것이다. 그러니 이 순간을 눈에, 마음에 꼭꼭 담아 가야지. 세상에는 너무 많은 장소가 있고, 내가 모르는 것들이 있지만, 시간은 한정되어 있고, 어디론가 떠날 수 있는 기회는 몇번 안되니 말이다. 


이 책을 읽으며 '평범'하다는 것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누구나 평범해지고 싶다와 평범하지 않고 싶다 사이에서 고민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평범한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몽상이 되어 가는 것은 나이를 먹고 점점 더 현실과 타협하게 되면서부터 인 것 같다. 하지만 누구나 훌륭한 사람이 될 필요는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어떤 평범은 '세상의 완충지대 같은 것'이라는 사실이 위로가 되어준다는 사실도 알게 된다. 산문은 가장 '사적인' 형태의 글이지만, 그래서 더 공감되고, 마음을 어루만져 주는 지점이 있는 것 같다. '평범하게 살아온 덕분에 더 많은 이들을 이해할 수 있었다'고 말하는, 다정한 작가의 이야기를 지금 만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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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임 앤 리즌 3호 : 블랙코미디 라임 앤 리즌 3
오산하.이철용.황벼리 지음 / 김영사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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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 위에는 작은 핀 조명이 내려온다. 머리 위로 내리꽂히는 조명이 마치 온몸을 수직으로 관통하는 것처럼 보인다.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머리 위에 흰빛을 이고 다닌다. 마이크 앞에 선다. 오늘의 관객은 세 명.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이들의 어리둥절함을 모른 체하고 마이크를 쥐고 입을 연다. 당신의 지옥은 아직 시작하지도 않았다고.                - 오산하, '네버 네버 스마일 라이프' 중에서, p.61


라임 앤 리즌 시리즈 그 세 번째 책이다. 이 시리즈는 소설, 시, 에세이, 희곡, 논픽션, 비평, 만화 등 매호 달리 선별되는 다양한 분야의 저자들이 하나의 장르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 준다. 혼란스러운 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일종의 색안경이자 문화적 충분조건으로 ‘장르Genre’를 설정하고, 이를 입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한 시도를 담고자 한다는 것이 기획의도이다. 1호 디스토피아, 2호 오컬트에 이어 3호는 블랙코미디이다. 


'디스토피아' 편에서는 소설가 예소연의 픽션,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기후변화 연구자인 정수종 교수의 논픽션, 그리고 만화가 약국의 작품을 담았다. '오컬트' 편에서는 사진가 임효진의 포토, 소설가 최추영의 픽션, 비평가 윤아랑의 글을 수록했다. 이번 '블랙코미디' 편에서는 오산하 시인과 이철용 극작가, 황벼리 만화가가 각기 다른 장르와 형식으로 ‘웃음’을 해석하는데 에세이, 희곡, 만화라는 분야로 3인 3색의 블랙코미디를 선보인다. 코미디의 원칙 중 하나는 '보는 사람이 불편하지 않도록 비현실성을 삽입할 것'인데 블랙 코미디는 이를 정면으로 거스른다. 오히려 그 불편함을 노리고 파고 들어 풍자하는 것이 블랙 코미디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웃으면 안 되는데 웃긴 상황이 나오는 것이다. 지극히 현실적이고 냉정한 상황 혹은 현실에 존재할 수 있는 상황 속에서 유머와 풍자를 자아내는 것이 바로 블랙 코미디의 핵심이다. 




유다: 내 생각인데 말야. 부조리극의 인물들이 자신이 부조리극 속에 있다는 사실을 인식할 수 있다면 그건 더 이상 부조리극이 아니야. 부조리를 인식한다는 건 이미 그 부조리를 객관화했다는 의미고, 객관화된 부조리는 더 이상 순수한 부조리가 아니게 되니까.

사탄: 애초에 얘길 꺼냈을 때부터 망한 거네요.

유다: 그렇지. 다 너 때문이다.              - 이철용, '로 파티' 중에서, p.117


오산하 시인의 첫 시집 <첨벙 다음은 파도>를 인상깊게 읽었던 적이 있는데,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자유분방하고도 완전히 새로운 종말 너머의 세계를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이 책에 수록된 에세이도 결코 평범하지 않다. 시인은 사람이 사람을 죽이겠다는 선언이 잇따르고, 재난 문자가 빗발치고, 도처에 부조리가 만연하던 그 때 계엄령을 마주한다. 그리고 현실보다 더한 블랙코미디는 없다는 것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일상 속 미세한 균열들을 포착해낸다. '에세이'의 형식이기 때문에 처음 ‘블랙코미디’에 대해 쓰면 어떻겠냐는 제안을 받았을 때 가장 첫 번째로 든 생각이 무엇이었는지부터 어떤 블랙코미디를 말할 수 있을까에 대한 구상 등 작품을 쓰게 된 배경도 수록되어 있어 흥미로웠다. 


이철용 극작가는 사탄과 유다가 철학적 논쟁을 이어가는 부조리극을 보여준다. 거대한 구덩이가 무대 중앙에 있고, 그 구덩이의 좌측과 우측, 그리고 중앙에 등받이가 긴 의자가 하나씩 놓여 있다. 막이 오르면 좌측에는 유다가 앉아 성경을 읽고 있고, 사탄은 창에 꿰뚫린 채 중앙 의자에 앉아 있다. 미사일처럼 쏘아진 창이 사탄을 꿰뚫고 사탄을 몸째로 의자에 박아둔 충격적인 이미지로 시작되는 오프닝이다. 그렇게 이어지는 두 사람의 대화는 현실의 부조리에 대해서, 연극으로서 부조리극에 대해서 끊임없이 사유하게 만들어 준다. 마지막으로 황벼리 만화가는 독창적인 화풍으로 '속삭이는 귀'에 대한 서늘한 풍자를 그려냈다. 사람을 죽이는 '말'에 대한 풍자가 놀라울 정도로 현실의 그것과 닮아 있는 작품이었다. 세 작품 모두 웃고 싶지만 쉽게 웃을 수 없는, 우스꽝스럽지만 어딘가 슬픈, 그럼 작품들이었다. 누구나 겪었을 법한, 차마 말로 내뱉지 못했던 일상 속의 부조리를 예리하게 포착해내는 방식이 특별해서 더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가장 다채로운 방식'이 궁금하다면, 라임앤리즌 시리즈를 만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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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만과 편견 디어 제인 오스틴 에디션
제인 오스틴 지음, 김선형 옮김 / 엘리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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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당신의 결함은 만인을 싫어하는 경향이군요."

"그리고 당신의 결함은," 받아쳐 말하며 그는 설핏 웃었습니다. "멋대로 만인을 오해하려는 경향이고요."

"어서요, 이제 우리 음악 좀 들어요." ─  미스 빙리가 소리쳤어요. 자기가 끼어들 자리가 없는 대화에 지쳐버린 거죠 ─ 

... 그리고 다아시 씨는, 몇 초쯤 생각을 되짚어보다가, 대화가 끊긴 게 아쉽지는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엘리자베스에게 지나친 관심을 쏟는 건 위험하다고 느끼기 시작했기 때문이지요.             p.108~109


올해 초 '제인 오스틴의 편지함'이라는 뉴스레터를 구독했었다. 김선형 번역가의 글을 통해 거의 일년 내내 제인 오스틴에 대해서, 문학 번역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을 선물받았다. 그리고 그 기획이 시작이 되어 '디어 제인 오스틴 에디션'이라는 책으로 나왔다. 이 시리즈는 제인 오스틴이 태어난 지 정확히 250주년이 되는 2025년 12월 16일을 시작으로, 매년 두 권씩 삼 년에 걸쳐 순차적으로 나올 예정이다. 그리고 두 작품에 대한 번역가의 에세이도 해마다 함께 출간된다. 제인 오스틴의 생일에 맞춰 초판 발행일자를 맞추는 것부터 번역가의 애정 가득한 에세이를 함께 내는 것까지 정말 사랑스러운 기획이다. 


<오만과 편견>은 여러 출판사의 다양한 역자 버전으로 읽어 왔다. 다양한 판본으로 가지고 있지만, 매번 홀린 듯이 데려오게 되는 작품이다. 그리고 19세기 여성의 사랑과 결혼에 대한 이야기가 21세기에도 웃음을 자아내고,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니 감탄하며 읽게 된다. 두 남녀가 첫 만남에서 서로가 가진 편견으로 인해 시작부터 삐걱대고, 결코 가까워질 수 없을 것 같았던 이들의 관계가 발전되는 과정을 그리는 것은 현대의 로코물에서도 여전히 유효한 서사다. 이는 제인 오스틴이 이 작품을 썼던 1813년으로부터 전혀 시간적 거리가 느껴지지 않을 만큼 경이로운 동시대성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소설 기법 또한 매우 현대적이고, 인간과 사회에 대한 통찰력과 속절없이 빠져들게 만드는 이야기의 힘 또한 독보적이다. 




그로서는 대단한 승리를 거둔 셈이지, 하고 엘리자베스는 자주 생각했어요. 불과 넉 달 전 오만방자하게 거절한 청혼인데 이제 와서 기쁘고도 감사하게 받아들이고자 한다니, 이 사실을 알면 얼마나 득의양양할까! 물론 같은 성별 중에서야 누구보다 너그러운 사람이라는 데는, 한 치의 의심도 없었지요. 하나 그도 사람인 이상 승리감을 느끼지 않겠어요. 엘리자베스는 지금에야, 성정과 능력을 감안할 때, 그야말로 정확히 자기와 어울릴 남자라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p.503~504


재산이 많은 미혼 남자가 어떤 마을이든 처음 발을 들여놓게 되면, 마을 사람들은 마땅히 자기 딸이 이 남자를 차지하게 될 거라고 믿는, 그런 시절이었다. 부유하고 명망 있는 가문의 신사 다아시와 빙리가 조용한 시골 마을에 머물게 되면서 베넷 부인 역시 그런 생각을 했다. 그녀의 최대 관심사는 딸들을 시집보내는 것이었고, 기왕이면 딸들이 결혼으로 신분 상승하기를 꿈꿔왔기 때문이다. 베넷가의 둘째 딸 엘리자베스는 대저택 네더필드의 무도회장에서 부유하고 명망 있는 가문의 신사 다아시를 만나게 된다. 하지만 그의 무뚝뚝한 태도에 ‘오만하고 무례한 남자’라는 인상을 받는다. 다아시는 그녀를 '아름답고 매력적이지만 자유분방한 여자'라고 판단한다. 그렇게 첫 만남에서 서로가 가진 편견으로 인해 그들의 만남은 시작부터 삐걱대기 시작하는데, 결코 가까워질 수 없을 것 같았던 두 사람의 관계는 어떻게 될까. 


이 작품의 원제는 '첫인상'이었다. 다아시의 오만과 엘리자베스의 편견이 두 사람의 잘못된 '첫인상'을 만들었고, 그것이 서로의 사랑을 가로막는 장애물 역할을 했다. 로에 대한 오해로 티격태격하던 남녀가 우여곡절 끝에 서로의 진심을 알게 되는 것은 거의 대부분의 로맨틱 코미디물에서 기본적으로 전개되는 플롯일 것이다. 이 작품은 바로 그 플롯을 가장 고전적이고 사랑스러운 모습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 작품은 여러 가지 장르를 통해 수없이 변주되어 왔다. 영화도 텔레비전 시리즈로도 수차례 제작되었고, 속편 형식이나 관점을 바꾸는 등의 각색으로 재탄생하기도 하고, 완전히 장르를 바꾸어져 색다르게 다시 쓰이기도 했다. 게다가 <브리짓 존스의 일기>처럼 현대판 개작으로 탄생하기도 했고, 웬만한 로맨틴 코미디물들이 대부분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에 어느 정도는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제인 오스틴의 작가적 가치를 떠나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일단 재미있다는 것이다. 스토리를 이미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읽을 때마다 재미있는 책이 또 있을까. 촌철살인의 위트와 생기 넘치는 대화들, 현실보다 더 현실 같은 허구의 인물들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다. 자, 제인 오스틴을 읽을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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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삼각 둘이서 4
남순아.백승화 지음 / 열린책들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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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종 업계 연인과 함께 일하게 되었을 때 장점과 단점은 명확하다. 장점은 우리가 함께라는 것이다. 단점은 우리가 함께라는 것이다. 조금 더 자세하게 설명해 보겠다. 아침에 눈을 뜨면 우리는 함께 출근한다. 함께 일하고 함께 쉬고 함께 퇴근한다(〈함께〉라는 말을 이렇게 많이 쓰니 게슈탈트 붕괴가 오는 것 같다). 일을 마치고 집에 왔는데, 직장 동료가 집에 가질 않는다. 그의 집이 우리 집이기 때문에, 우리집이 그의 집이기 때문에. 우리의 스케줄이 똑같기 때문에, 우리는 휴일도 함께다.              p.71


두 사람이 함께 쓰는 열린책들의 에세이 시리즈 '둘이서'의 네 번째 책이다. 싱어송라이터 김사월과 시인 이훤의 <고상하고 천박하게>, 시인 서윤후와 한문학자 최다정의 <우리 같은 방>, 시인 백가경과 문학평론가 황유지의 <관내 여행자-되기>에 이어 네 번째 책은 영화감독 남순아와 영화감독이자 소설가인 백승화의 <이인삼각>이다. 이 시리즈는 독특하게도 네 권 모두 표지의 통일성이 없다. 대신 각각의 책들이 저자에 따라서 완전히 색깔이 달라진다. 하나의 책으로 묶인 두 저자의 케미도 흥미로운데, 이름을 보지 않고 읽으면 누구의 글인지 헷갈릴 만큼 결이 비슷해 각각의 글마다 페이지 하단에 저자 이름이 써 있다. 여러 모로 독특한 시리즈라 매번 챙겨보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두 번째 책인 <우리 같은 방>을 좋아한다. 이 책은 시인 서윤후와 한문학자 최다정이 함께 글을 썼는데, 두 사람은 동갑내기 친구로서, 글을 쓰는 동료 작가로서, 그리고 자신만의 방을 가진 이웃으로서 <방>에 관한 이야기를 사계절이 넘는 시간 동안 공들여 써냈다. 두 사람이 쓴 글을 교차하여 읽어도 좋고, 한문학자의 운치 있는 수필로, 시인의 담백한 에세이로 따로 읽어도 좋았다. 좋아하는 사람 <둘이서> 함께 쓰는 에세이 시리즈 '둘이서'는 라인업이 이미 10권까지 나와 있다. 다 기대가 되지만, 일곱 번째 시리즈에 김혜진, 최진영 작가의 이름이 있어 손꼽아 기다리는 중이다. 두 소설가의 비슷한 점과 다른 점, 서로의 관계에서 빚어내는 케미가 매우 궁금하다. 




비단 친구와의 관계뿐만은 아닐 것이다. 연인 간에도 가족 간에도 그렇다. 우주의 섭리대로 멀어지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잡아당겨야 한다. 관계라는 건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억지스러운 비유라는 걸 안다. 하지만 누군가와 멀어지는 것이 우주의 섭리라고 생각하면 마음이 좀 나아진다. 흔한 안부 연락도 서로를 당기기 위한 중력 같은 거라고 생각하면 더 의미 있고 그럴싸하게 느껴지기도 하고 말이다.                p.217


이번 작품의 두 저자는 영화인 X 영화인 커플이다. 동종 업계인으로서, 함께 살게 된 연인으로서, 전혀 다른 성격을 지닌 타인으로서의 두 사람이 함께 쓴 책이라 더 흥미로웠다. 자신을 키운 건 8할이 허세였다며, 영화감독이 되겠다고 생각한 것도 알 수 없는 질투, 시기, 경쟁심으로 내린 충동적 선언이었다는 남순아 감독. 영화를 그다지 좋아하지도 않았으면서 친구가 영화감독이 되겠다는 말에 어쩌다보니 휩쓸리고 만거다. 그런데 정작 영화를 하면서부터는 섣부르게 허세를 부리지 않게 되었다고. 작업을 할 때마다 매번 자신의 한계를 마주해야 했기 때문이라고 하니, 어쩌면 영화감독이 그의 천직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백승화 감독은 언제나 집에 처박혀 친구도 없이 글만 쓰는 사람이라고 자신을 소개하는데, 현장에서도 늘 영화보다 사람이 힘들었다고 말한다. 영화라는 매체의 특성상 과정 내내 필연적으로 수많은 사람과 지지고 볶으며 만들 수밖에 없다는 것을 감안하면, 그가 영화감독을 하고 있는 것은 정말 아이러니한 일이기도 한 것 같다. 


두 사람이 어떻게, 왜 영화를 시작하게 되었는지, 그들이 영화판에 뛰어들게 된 비화도 재미있었지만, 동종 업계 연인이 하루 24시간 붙어 있을 때 갖게 되는 장단점에 대한 이야기가 특히 흥미진진했다. 영화 촬영현장의 안팎에 대한 이야기도 일반인은 쉽게 알 수 없는 내용들이 많아 인상깊게 읽었다. 두 저자 모두 영화감독이라는 직업을 갖고 있기에 두 사람의 교환일기 같은 이 책은 공동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만든 한 편의 영화처럼 읽히기도 한다. 파트 사이사이로 두 사람이 직접 <인생 영화란 무엇인가>와 <영화 꿈과 새벽의 촬영장>에 대해 대화를 나눈 시나리오가 부록처럼 들어 있기도 하다. 공포 영화 못 보는 감독의 공포 영화와 웃기지 않는 감독의 코미디 영화가 어떻게 탄생했는지 궁금하다면, 동종 업계 연인이 들려주는 공과 사를 알고 싶다면 이 책을 만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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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수정 은행나무 세계문학 에세 21
조너선 프랜즌 지음, 김시현 옮김 / 은행나무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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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아빠는 삶에 만족하나요? 더없이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어요?” 

개리는 좌회전 신호를 기다리며 물었다. 

“개리, 나는 고통받고 있어…….” 

“많은 사람이 고통받죠. 그게 이유라면 좋아요. 그래서 스스로를 안쓰러워하고 싶다면 그것도 좋아요. 하지만 왜 엄마까지 끌어들이죠... “삶에는 그저 견뎌야만 하는 것이 있어.” 

“그런 생각이라면 굳이 왜 사나요? 대체 뭘 기다리는 거예요?” 

“나도 매일 그 질문을 한단다.”                p.258


조너선 프랜즌의 작품들은 <인생 수정>, <순수>, <크로스로드>, <자유> 모두 분량의 압박이 상당한 편이라 매번 읽으려다가 놓쳤던 기억이 있다. 이번에 은행잎 2기 마지막 책이 은행나무세계문학 에세 시리즈 중에 고르는 거라고 해서 고민없이 그의 작품을 골랐다. 


<인생 수정>은 '단절과 해체로 얼룩진 어느 가정의 가족사를 통해 사회 전체의 문제를 투명하게 드러낸 대작'이라고 설명이 되어 있는데, 현대 버전의 디킨스를 보는 듯한 느낌이 드는 작품이었다. 이 작품 역시 800페이지가 넘는 벽돌책이지만, 가독성이 매우 뛰어나다. 대부분의 고전 작품들이 내세우는 빽빽하게 계속 이어지는 이야기의 밀도를 가지고 있음에도 말이다. 파킨슨병에 걸린 남편과 아내, 그리고 세 자녀로 이루어진 한 가족의 이야기는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각자 자신만의 드라마를 보여준다. 아마 21세기 대부분의 가족사가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소통의 단절, 가부장적 독재, 우울증, 현실 도피.. 등 가족의 해체를 고스란히 보여주며 이를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의 모습으로 비춰주는 작품이었다. 




그는 2층에서 아들이나 딸을 품에 안고 앉아 있던 밤들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가 <블랙 뷰티>나 <나니아 연대기>를 읽어주는 동안 아이들은 비누 냄새를 풍기는 축축한 머리를 그의 가슴에 푹 기대곤 했다. 그의 낭랑한 목소리만으로도 아이들은 잠이 들었다. 흉터를 남길 만큼 충격적인 사건이 이 핵가족에게 벌어지지 않은 저녁은 수백, 아니 어쩌면 수천 번은 되었다. 그의 검은 가죽 의자에서 꾸밈없는 친밀감을 누리던 저녁들, 암울한 확실성의 저녁들 사이에 낀 달콤한 불확실성의 저녁들.               p.494


자녀들이 모두 독립해서 집을 나가고, 이제 앨프리드와 이니드 드 사람만 남았다. 앨프리드는 파킨슨병에 걸린 노인이 되었고, 이니드는 그가 무슨 일을 벌일지 5분마다 걱정하며 지내고 있다. 몸이 떨리던 건 많이 나아졌지만, 종종 환각을 보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앨프리드는 자식들에게 가부장적인 집안의 독재자였던 시절의 기억으로 여전히 남아 있다. 이니드는 남편에게 시달리며 1년 내내 크리스마스에 대한 희망으로 자신을 지탱하는 중이다. 큰 아들 개리는 은행 중역이자 세 아이의 아빠지만 가정불화와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다. 둘째인 칩은 <월 스트리트 저널>에 글을 쓰지만, 여전히 현실에 적응하지 못해 도망을 거듭하는 중이다. 막내인 딸 데니즈는 최고급 레스토랑에서 셰프로 활약하고 있지만, 자신의 진정한 욕망을 계속 억누르고 부정하고 있다. 이들 가족들은 앨프리드의 병을 계기 삼아 모이게 되는데, 이니드가 1년 내내 기다렸던 크리스마스 파티는 과연 해피엔딩이 될 수 있을까. 


누구나 살면서 실수를 하고, 잘못을 깨달으며 그것을 고쳐 나가려고 애쓴다. 물론 누군가는 오점투성이의 인생을 내버려둔 채 살아가기도 하지만 말이다. 주변을 둘러 보면 어디서나 만날 수 있을 법 한 램버트 가족의 삶은 사실적인 만큼 공감할 부분들이 많았다. '인생 수정'이라는 제목처럼, 이들은 살아 가며 계속 삶을 '수정'해 나간다. 그 과정이 인생이라는 모습으로 펼쳐지는 것이다. 작가의 가차 없는 풍자와 냉소 속에서도 따뜻함이 묻어나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는 사실 때문일 것이다. 이 작품으로 에세 시리즈를 처음 만나게 되었는데, 작품들을 보니 여타의 고전 문학 시리즈에 비해 조금 특별하게 느껴졌다. 서구 남성 작가 중심의 정전이라는 틀에서 벗어나 서구와 비서구, 남성과 여성, 순수문학과 장르문학 등의 이분법적 경계를 넘나들며 작품들 선정해왔기 때문이다. 찬쉐, 엘리자베스 개스켈, 다와다 요코, 이디스 워튼, 류드밀라 울리츠카야, 저메이카 킨케이드 등 라인업도 매우 휼륭하다. 판형이 작고 디자인이 깔끔해 손에 잡히는 그립감도 좋다. 작가들의 사진을 표지 전면에 내세운 디자인도 예쁘다. 그리고 내년 2월에는 올해 노벨문학상 수상자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의 신간 <죔레가 사라지다>도 출간 예정에 있다고 하니 매우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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