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사적인 평범 교유서가 산문 시리즈
부희령 지음 / 교유서가 / 2024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도서관은 거짓말로 이루어진 거대한 미로다. 수백 개의 서가들, 그 속에 꽂혀 있는 수백 수천만 권의 책들, 책마다 넘쳐나는 깨알 같은 거짓말들. 사람들은 거짓말을 사랑한다. 거짓말은 지나치게 달콤하고 거짓말은 지나치게 아름답고 거짓말은 지나치게 말끔하고 거짓말은 지나치게 어렵고 거짓말은 지나침에 있어서도 지나치게 뻔뻔해서, 모든 두꺼움이 그렇듯, 어리석음과 추함과 두려움을 가려주기 때문이다.                p.33


부희령 작가의 글은 번역가로서의 작업물들로 먼저 만났었다. 소설 작품은 <구름해석전문가>라는 소설집이 기억에 남는데, 독특한 제목과 시선을 사로잡는 표지 이미지때문에 홀린 듯 선택했던 책이다. 언제나 이곳이 아닌 다른 세계를 꿈꾸고 있는 독자로서 세계를 부유하는 소설 속 인물들이 낯설기도 하면서 어딘가 익숙하게 느껴지기도 했었다. 그리고 오랜만에 산문집으로 만나보게 되었다. 역시나 제목과 표지가 참 좋다고 생각을 하며 읽어 보았다. 


표지에도 보여지는 '파파야'라는 제목의 글이 인상적이었다. 갑자기 비가 쏟아져 유리창을 닫으며 열대의 우기를 떠올린다. 오래전 적도 근처의 나라에서 한동안 머물렀었는데, 그 시절의 쏟아지던 비가 생각났던 것이다. 그곳의 비는 온종일 주룩주룩 내리는 것이 아니라 태양이 오전 내내 뜨겁게 내리쬐다, 늦은 오후 무렵 비가 장렬하게 퍼붓는 식이었다. 세상이 다 잠길 때까지 멈추지 않을 것처럼 쏟아졌던 것이다. 지금은 그곳에 있지 않지만, 선풍기가 돌아가는 방안의 후덥지근한 공기와 유리창 너머로 쏟아지는 비를 바라보며 그 시절 자주 먹던 파파야의 단내가 유령처럼 어른거리기 시작한다. 이 글을 읽으며 잘 익은 파파야의 선홍빛 과육에서 달콤한 향기가 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열대 과일 중에서도 파파야는 이국적인 느낌이 있는데, 태양이 뜨겁게 내리쬐고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고온다습한 지역에서 먹어야 제맛이라 그런 것 같다. 지금은 한겨울이니 파파야를 한입 먹는 상상만으로도 몸이 데워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건 가난하거나 부자이거나, 외롭거나 외롭지 않거나, 바라거나 바라지 않거나, 누구나 언젠가는 보게 될 뒷모습 아닐까. 먼지 쌓인 책들에 둘러싸여 앉아 있다가, 손자들의 끊이지 않는 귀여움에 지쳐갈 즈음, 무거운 카트를 끌고 신호등 앞에서 황급히 걸음을 멈춰야 할 때, 수많은 누군가는 성공이나 실패라는 이름을 벗어버린 반백의 시간과 문득 마주치게 될 것이다. 그런데 할머니, 결국 모두가 겪는 순간이라 생각하면, 이유는 모르지만 조금 위로가 되지 않나요.              p.167


이 책의 글들은 쓰기, 마음, 여행, 가족, 세상, 읽기라는 카테고리로 나뉘어 있다. 다 좋았지만, 개인적으로는 여행 카테고리의 글들이 유독 마음에 남았다. 인도의 아쉬람을 시작으로 슬로베니아, 베네치아의 이국적인 풍경들이 손에 잡힐 듯 그려지는 글들이었다. 여행으로 다녀온 것도 있고, 문화예술위원회의 해외 레지던스 공모에 선정되어 석 달 남짓 머무른 나라도 있었다. 베네치아 여행기의 마지막 글에서 '슬로베니아를 떠나고 나면 베네치아도 류블랴나도 살아 있는 동안 다시 볼 일은 없겠지.' 라는 문장을 읽으며, 그래서 여행일 내가 좋아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나라를 가든 항상 그런 마음이 바탕에 깔려 있는 것 같다. 내가 살아서 여길 다시 올 수 있을까. 아마 없을 것이다. 그러니 이 순간을 눈에, 마음에 꼭꼭 담아 가야지. 세상에는 너무 많은 장소가 있고, 내가 모르는 것들이 있지만, 시간은 한정되어 있고, 어디론가 떠날 수 있는 기회는 몇번 안되니 말이다. 


이 책을 읽으며 '평범'하다는 것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누구나 평범해지고 싶다와 평범하지 않고 싶다 사이에서 고민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평범한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몽상이 되어 가는 것은 나이를 먹고 점점 더 현실과 타협하게 되면서부터 인 것 같다. 하지만 누구나 훌륭한 사람이 될 필요는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어떤 평범은 '세상의 완충지대 같은 것'이라는 사실이 위로가 되어준다는 사실도 알게 된다. 산문은 가장 '사적인' 형태의 글이지만, 그래서 더 공감되고, 마음을 어루만져 주는 지점이 있는 것 같다. '평범하게 살아온 덕분에 더 많은 이들을 이해할 수 있었다'고 말하는, 다정한 작가의 이야기를 지금 만나보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