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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수정 ㅣ 은행나무 세계문학 에세 21
조너선 프랜즌 지음, 김시현 옮김 / 은행나무 / 2025년 3월
평점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아빠는 삶에 만족하나요? 더없이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어요?”
개리는 좌회전 신호를 기다리며 물었다.
“개리, 나는 고통받고 있어…….”
“많은 사람이 고통받죠. 그게 이유라면 좋아요. 그래서 스스로를 안쓰러워하고 싶다면 그것도 좋아요. 하지만 왜 엄마까지 끌어들이죠... “삶에는 그저 견뎌야만 하는 것이 있어.”
“그런 생각이라면 굳이 왜 사나요? 대체 뭘 기다리는 거예요?”
“나도 매일 그 질문을 한단다.” p.258
조너선 프랜즌의 작품들은 <인생 수정>, <순수>, <크로스로드>, <자유> 모두 분량의 압박이 상당한 편이라 매번 읽으려다가 놓쳤던 기억이 있다. 이번에 은행잎 2기 마지막 책이 은행나무세계문학 에세 시리즈 중에 고르는 거라고 해서 고민없이 그의 작품을 골랐다.
<인생 수정>은 '단절과 해체로 얼룩진 어느 가정의 가족사를 통해 사회 전체의 문제를 투명하게 드러낸 대작'이라고 설명이 되어 있는데, 현대 버전의 디킨스를 보는 듯한 느낌이 드는 작품이었다. 이 작품 역시 800페이지가 넘는 벽돌책이지만, 가독성이 매우 뛰어나다. 대부분의 고전 작품들이 내세우는 빽빽하게 계속 이어지는 이야기의 밀도를 가지고 있음에도 말이다. 파킨슨병에 걸린 남편과 아내, 그리고 세 자녀로 이루어진 한 가족의 이야기는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각자 자신만의 드라마를 보여준다. 아마 21세기 대부분의 가족사가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소통의 단절, 가부장적 독재, 우울증, 현실 도피.. 등 가족의 해체를 고스란히 보여주며 이를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의 모습으로 비춰주는 작품이었다.

그는 2층에서 아들이나 딸을 품에 안고 앉아 있던 밤들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가 <블랙 뷰티>나 <나니아 연대기>를 읽어주는 동안 아이들은 비누 냄새를 풍기는 축축한 머리를 그의 가슴에 푹 기대곤 했다. 그의 낭랑한 목소리만으로도 아이들은 잠이 들었다. 흉터를 남길 만큼 충격적인 사건이 이 핵가족에게 벌어지지 않은 저녁은 수백, 아니 어쩌면 수천 번은 되었다. 그의 검은 가죽 의자에서 꾸밈없는 친밀감을 누리던 저녁들, 암울한 확실성의 저녁들 사이에 낀 달콤한 불확실성의 저녁들. p.494
자녀들이 모두 독립해서 집을 나가고, 이제 앨프리드와 이니드 드 사람만 남았다. 앨프리드는 파킨슨병에 걸린 노인이 되었고, 이니드는 그가 무슨 일을 벌일지 5분마다 걱정하며 지내고 있다. 몸이 떨리던 건 많이 나아졌지만, 종종 환각을 보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앨프리드는 자식들에게 가부장적인 집안의 독재자였던 시절의 기억으로 여전히 남아 있다. 이니드는 남편에게 시달리며 1년 내내 크리스마스에 대한 희망으로 자신을 지탱하는 중이다. 큰 아들 개리는 은행 중역이자 세 아이의 아빠지만 가정불화와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다. 둘째인 칩은 <월 스트리트 저널>에 글을 쓰지만, 여전히 현실에 적응하지 못해 도망을 거듭하는 중이다. 막내인 딸 데니즈는 최고급 레스토랑에서 셰프로 활약하고 있지만, 자신의 진정한 욕망을 계속 억누르고 부정하고 있다. 이들 가족들은 앨프리드의 병을 계기 삼아 모이게 되는데, 이니드가 1년 내내 기다렸던 크리스마스 파티는 과연 해피엔딩이 될 수 있을까.
누구나 살면서 실수를 하고, 잘못을 깨달으며 그것을 고쳐 나가려고 애쓴다. 물론 누군가는 오점투성이의 인생을 내버려둔 채 살아가기도 하지만 말이다. 주변을 둘러 보면 어디서나 만날 수 있을 법 한 램버트 가족의 삶은 사실적인 만큼 공감할 부분들이 많았다. '인생 수정'이라는 제목처럼, 이들은 살아 가며 계속 삶을 '수정'해 나간다. 그 과정이 인생이라는 모습으로 펼쳐지는 것이다. 작가의 가차 없는 풍자와 냉소 속에서도 따뜻함이 묻어나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는 사실 때문일 것이다. 이 작품으로 에세 시리즈를 처음 만나게 되었는데, 작품들을 보니 여타의 고전 문학 시리즈에 비해 조금 특별하게 느껴졌다. 서구 남성 작가 중심의 정전이라는 틀에서 벗어나 서구와 비서구, 남성과 여성, 순수문학과 장르문학 등의 이분법적 경계를 넘나들며 작품들 선정해왔기 때문이다. 찬쉐, 엘리자베스 개스켈, 다와다 요코, 이디스 워튼, 류드밀라 울리츠카야, 저메이카 킨케이드 등 라인업도 매우 휼륭하다. 판형이 작고 디자인이 깔끔해 손에 잡히는 그립감도 좋다. 작가들의 사진을 표지 전면에 내세운 디자인도 예쁘다. 그리고 내년 2월에는 올해 노벨문학상 수상자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의 신간 <죔레가 사라지다>도 출간 예정에 있다고 하니 매우 기대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