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임 앤 리즌 3호 : 블랙코미디 라임 앤 리즌 3
오산하.이철용.황벼리 지음 / 김영사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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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무대 위에는 작은 핀 조명이 내려온다. 머리 위로 내리꽂히는 조명이 마치 온몸을 수직으로 관통하는 것처럼 보인다.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머리 위에 흰빛을 이고 다닌다. 마이크 앞에 선다. 오늘의 관객은 세 명.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이들의 어리둥절함을 모른 체하고 마이크를 쥐고 입을 연다. 당신의 지옥은 아직 시작하지도 않았다고.                - 오산하, '네버 네버 스마일 라이프' 중에서, p.61


라임 앤 리즌 시리즈 그 세 번째 책이다. 이 시리즈는 소설, 시, 에세이, 희곡, 논픽션, 비평, 만화 등 매호 달리 선별되는 다양한 분야의 저자들이 하나의 장르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 준다. 혼란스러운 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일종의 색안경이자 문화적 충분조건으로 ‘장르Genre’를 설정하고, 이를 입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한 시도를 담고자 한다는 것이 기획의도이다. 1호 디스토피아, 2호 오컬트에 이어 3호는 블랙코미디이다. 


'디스토피아' 편에서는 소설가 예소연의 픽션,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기후변화 연구자인 정수종 교수의 논픽션, 그리고 만화가 약국의 작품을 담았다. '오컬트' 편에서는 사진가 임효진의 포토, 소설가 최추영의 픽션, 비평가 윤아랑의 글을 수록했다. 이번 '블랙코미디' 편에서는 오산하 시인과 이철용 극작가, 황벼리 만화가가 각기 다른 장르와 형식으로 ‘웃음’을 해석하는데 에세이, 희곡, 만화라는 분야로 3인 3색의 블랙코미디를 선보인다. 코미디의 원칙 중 하나는 '보는 사람이 불편하지 않도록 비현실성을 삽입할 것'인데 블랙 코미디는 이를 정면으로 거스른다. 오히려 그 불편함을 노리고 파고 들어 풍자하는 것이 블랙 코미디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웃으면 안 되는데 웃긴 상황이 나오는 것이다. 지극히 현실적이고 냉정한 상황 혹은 현실에 존재할 수 있는 상황 속에서 유머와 풍자를 자아내는 것이 바로 블랙 코미디의 핵심이다. 




유다: 내 생각인데 말야. 부조리극의 인물들이 자신이 부조리극 속에 있다는 사실을 인식할 수 있다면 그건 더 이상 부조리극이 아니야. 부조리를 인식한다는 건 이미 그 부조리를 객관화했다는 의미고, 객관화된 부조리는 더 이상 순수한 부조리가 아니게 되니까.

사탄: 애초에 얘길 꺼냈을 때부터 망한 거네요.

유다: 그렇지. 다 너 때문이다.              - 이철용, '로 파티' 중에서, p.117


오산하 시인의 첫 시집 <첨벙 다음은 파도>를 인상깊게 읽었던 적이 있는데,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자유분방하고도 완전히 새로운 종말 너머의 세계를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이 책에 수록된 에세이도 결코 평범하지 않다. 시인은 사람이 사람을 죽이겠다는 선언이 잇따르고, 재난 문자가 빗발치고, 도처에 부조리가 만연하던 그 때 계엄령을 마주한다. 그리고 현실보다 더한 블랙코미디는 없다는 것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일상 속 미세한 균열들을 포착해낸다. '에세이'의 형식이기 때문에 처음 ‘블랙코미디’에 대해 쓰면 어떻겠냐는 제안을 받았을 때 가장 첫 번째로 든 생각이 무엇이었는지부터 어떤 블랙코미디를 말할 수 있을까에 대한 구상 등 작품을 쓰게 된 배경도 수록되어 있어 흥미로웠다. 


이철용 극작가는 사탄과 유다가 철학적 논쟁을 이어가는 부조리극을 보여준다. 거대한 구덩이가 무대 중앙에 있고, 그 구덩이의 좌측과 우측, 그리고 중앙에 등받이가 긴 의자가 하나씩 놓여 있다. 막이 오르면 좌측에는 유다가 앉아 성경을 읽고 있고, 사탄은 창에 꿰뚫린 채 중앙 의자에 앉아 있다. 미사일처럼 쏘아진 창이 사탄을 꿰뚫고 사탄을 몸째로 의자에 박아둔 충격적인 이미지로 시작되는 오프닝이다. 그렇게 이어지는 두 사람의 대화는 현실의 부조리에 대해서, 연극으로서 부조리극에 대해서 끊임없이 사유하게 만들어 준다. 마지막으로 황벼리 만화가는 독창적인 화풍으로 '속삭이는 귀'에 대한 서늘한 풍자를 그려냈다. 사람을 죽이는 '말'에 대한 풍자가 놀라울 정도로 현실의 그것과 닮아 있는 작품이었다. 세 작품 모두 웃고 싶지만 쉽게 웃을 수 없는, 우스꽝스럽지만 어딘가 슬픈, 그럼 작품들이었다. 누구나 겪었을 법한, 차마 말로 내뱉지 못했던 일상 속의 부조리를 예리하게 포착해내는 방식이 특별해서 더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가장 다채로운 방식'이 궁금하다면, 라임앤리즌 시리즈를 만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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