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증
후카마치 아키오 지음, 양억관 옮김 / 잔(도서출판)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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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말이 안 돼. 그는 뭔가를 향해 중얼거렸다. 이제야 모든 것을 새로이 시작하려는데. 아버지답게 살아가리라 맹세했는데. 자기중심적인 연민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은 잘 안다. 딸이 각성제를 남겨 두고 모습을 감추지 않았더라면 아마 얼굴도 마주하지 않고 평생을 지냈을지도 모른다. 다시 한번 딸을 만나고 싶었다. 아버지다운 모습을 보여 주고 싶었다.

 

후지시마 아키히로는 아내의 불륜 상대를 폭행하고 경찰을 퇴직한 후 경비 회사에 자리를 얻어 일하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헤어진 아내 기리코에게서 연락이 온다. 딸 가나코가 어제 아침 이후로 연락이 되지 않는다며, 집으로 와달라는 거였다. 고등학생인 딸과는 이혼 후 1년 동안 만나지 못했다. 딸의 방에서는 100여개나 되는 각성제 봉지가 발견되는데, 이건 여고생 신분에 잠깐 즐기는 기분으로 소유할 만한 양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들은 경찰에 딸의 실종을 알릴 수가 없었다. 대체 가나코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가나코는 사건에 휘말린 걸까.

또래 여자애들보다 너무 어른스러웠던 가나코. 후지시마와 기리코는 딸에게 남자 친구가 있었던 건지, 아르바이트를 했던 건지, 전혀 알지 못했다. 옷장 안에 값비싼 옷들이 가득했고, 책상 서랍에는 신경과 병원 이름이 적힌 약봉투가 있었는데도, 부모들은 그에 대해 아는 게 없었다. 후지시마는 경비 회사에 휴가를 내고 딸의 친구들을 찾아 만나며 가나코에 대해 알아보기 시작한다. 겉으로 보이기에는 착실하게 학교에 다니고 쉬는 날은 학원에 가며 국립 대학을 목표로 하는 우등생이었던 딸의 모습은, 실상과 전혀 달랐다. 부모들은 자신의 딸에 대해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있었다. 과연 그들이 마주해야 하는 딸의 본 모습은 무엇일까. 그들은 과연 딸을 찾을 수 있을까. 이번에야말로 가나코의 아버지이며, 기리코의 남편으로 살고 싶었던 후지시마는 과연 그의 바램대로 평온한 가정을 찾을 수 있을까.

 

 

“나는…… 난 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

“아냐, 이해할 수 있을 거야. 누구든 사람을 죽여서라도 지키고 싶은 게 있지. 숨기고 싶은 것이 있고. 가족이나 자기 자신. 자존심과 어둠에 감싸인 비밀. 당신도 그렇잖아?”

심장이 크게 뛰기 시작했다. 사키야마의 멍한 눈길이 자신의 혼 저 깊은 곳까지 꿰뚫어 보는 것 같았다.

 

이야기는 가나코가 사라지고 딸을 찾는 아빠 후지시마의 현재와 3년 전 과거 시점이 교차 진행된다. 과거 시점에서 이야기의 주체는 가나코가 아니라 그녀에게 도움을 받게 된 왕따 소년이다. 운동부를 그만뒀다는 이유로 반 친구 모두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소년은 자신을 도와준 가나코를 동경하게 된다. 양쪽 이야기에서 딸인 가나코와 친구인 가나코는 모두 타인에 의해 해석되고, 설명되고, 보여진다. 어떤 모습이 그녀의 실체인지 누구도 제대로 알지 못한다는 얘기다. 후지시마가 만나는 친구들, 선생님, 신경과 의사마저도 가나코에 대해서 자신이 알지 못하는 것들을 알고 있었다. 이 세상에서 딸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은 아버지인 자신이고 싶었는데 말이다.

우리가 누군가에 대해 알고 있다고 믿는 수많은 것들이 진실이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되는 순간이 종종 있다.  특히나 부모, 혹은 형제 혹은 자식에 대해서 얼마나 제대로 알고 있는 걸까 의문을 가지게 되는 순간이란 사실 무시무시하다. 가족이란 세상에서 나와 가장 가까운 위치에 있는 존재이니, 거의 무조건 믿어야 하는 유일한 존재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하지만 부부와 닮은 아이들은 점점 자라면서 낯선 타인처럼 이질적이고 불가해한 존재로 변해가고, 어느 순간 아이는 친근하기도 하고 낯설기도 한 존재가 되어 버리고 만다. 그러니 부모라면 누구나 한번쯤 과연 내가 알고 있는 아이의 모습이, 진짜일까 생각해보게 되는 순간을 맞이하게 된다. 후카마치 아키오의 이 작품에서는 바로 그런 순간 부모에게 악몽이 시작된다. 가장 끔찍하고, 잔인하고, 어두운 방식으로, 그렇게 소설 속 인물들은 이야기가 진행되어 갈수록 내면 깊은 곳에 있는 인간의 본성과 마주하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생각보다 참담하고, 지저분하고, 무시무시하다. 이 이야기를 감당해내려면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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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방랑
후지와라 신야 지음, 이윤정 옮김 / 작가정신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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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게해 서쪽에서는 발효되고 썩어가는 것들이 눈가림되고 포장되어 건전하고 행복한 시민들 앞에서 말살된다. 썩은 오렌지 껍질, 돼지 머리, 송장, 광인, 전염병 환자, 만취한 사람, 그 모든 것들은 시민 생활의 큰길에서 격리된다.

여자가 짐승처럼 킁킁대며 몸을 뒤척였다. 영문 모를 냄새의 씨앗들이 꿈틀거린다.

그때 문득 머나먼 이국의 하늘과 한 줄기 피에 관한 기억이 떠올랐다.

이스탄불의 겨울, 바다 냄새에 섞여 코를 찌르는 썩은 냄새가 풍겨오고, 파리한 불빛 속에서 길바닥에 널브러진 양파 껍질이 바닷바람에 떨고 있다. 쿠르드족 쿨리의 성난 목소리, 비웃는 통행인들, 길바닥에는 밑동까지 타 들어간 담배꽁초들이 나뒹굴고 있다. 영하 16도의 찬바람 속에서 담배 한 갑을 사기 위해 50미터씩 줄을 서는 사람들. 나는 터키에 가본 적이 없다. 그런데도 오로지 묘사만으로 그곳의 냄새가 느껴지고, 풍경이 눈 앞에 그려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사실 현지의 삶과 그곳 인간들의 모습을 이렇게나 생생하게 담아낸 여행에세이는 만나본 적이 없다. 그 동안 읽어왔던 여행 에세이들은 모두 뭐였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압도적인 리얼리티가 살아 있는 글과 사진들이 시작부터 눈길을 사로 잡는다.

 

작가이자 사진가, 사상가, 평론가 등 전방위적으로 활동해온 후지와라 신야는 1969년 여름 스물다섯 살 때에 떠난 인도 여행을 시작으로 10여 년간 인도, 티베트, 중근동, 유럽과 미국 등을 방랑했다. 이 책 <동양방랑> <인도방랑>, <티베트방랑>에 이은 동양 여행기’ 3부작의 결정판이다. 이스탄불을 시작으로 지중해 앙카라, 흑해, 시리아, 이란, , 티베트, 치앙마이, 홍콩, 한반도 등에 이르기까지 그가 400일 동안 느끼고, 체험하고, 생각한 모든 풍경들이 이 책 속에 담겨 있다.

 

이 지역에서 우기의 비는 일본의 장맛비처럼 지루하게 내리지 않고 잠깐 퍼붓고 지나간다. 억수같이 쏟아지다가 이내 쨍하게 햇빛이 비친다. 그러면 지하수와 물웅덩이가 세균이 번식하기 딱 좋은 온도로 데워진다. 그 더러운 물을 보고 있으면 세균과 박테리아, 그 밖의 하등생물이 무럭무럭 자라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몇 시간만 지나면 물에서 냄새가 나기 시작한다. 비릿하고 음울하고 불쾌한 냄새다. 그 냄새가 비 온 뒤의 거리에 충만하다.

무엇보다 이 책이 특별한 것은 바로 여행을 묘사하는 방식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가 묘사하는 풍경은 냄새부터 시작해서 길거리에 놓여진 사소한 것들 하나까지 놓치지 않는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현지의 사람들, 그가 만나고, 경험하고, 이야기를 들어온 사람들이야말로 현지의 일상을 고스란히 페이지 위로 불러내고 있다.  특히 낯선 곳의 냄새, 후각에 대한 묘사가 그야말로 인상적이었다. 그는 새로운 세계를 관찰하거나 이해하고 묘사하고자 할 때 후각을 먼저 사용하는데,  굉장히 독특한 경험이었지만 덕분에 낯선 세계가 한번에 와락 다가오는 듯한 느낌이기도 했다. 그렇게 싸구려 호텔 방의 사막 냄새, 콜카타 특유의 정액 냄새, 산양의 날고기 냄새, 코를 찌르는 향신료 냄새, 향냄새와 시큼한 지폐 냄새, 여자 냄새, 거리와 사람을 뒤덮은 인간 세상의 온갖 냄새들의 향연이 이어진다.

그리고 후지와라 신야는 날카로운 언어와 사유를 통해 인간성을 발견하고, 현지의 기후나 지형 같은 환경적 영향을 통해 문명의 특징을 통찰한다. 그의 사진 속에 종종 인물들이 담겨 있곤 하는데, 그들의 표정 너머에서 단순한 일상의 흔적 너머 역사성과 사회성 또한 함께 그려지고 있는 것이다.

 

 

누구나 사람이 살면서 몇 번의 고비를 만나듯이 여행에도 빙점이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세계 여러 곳을 여행했던 그도, 어느 순간 눈이 흐려지고, 혀가 기뻐하지 않고, 귀가 들으려 하지 않고, 코가 냄새 맡지 못하는 단계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래서 인간을 피해 풍경만 보고 다니며, 얼어붙은 채 무의미한 여행을 계속하다, 기사회생의 여행을 나선 것이 바로 이 책의 결과물이다. 그는 400일이라는 긴 여행의 시간 동안 인간을 만나는 것을 과제로 삼았다. 변두리 유곽의 창녀에서 심산에 틀어박힌 스님까지, 눈앞에 나타나는 모든 인간을 인연으로 여기고 소중히 대했더니, 어느 순간 갑자기 얼어붙은 여행이 녹기 시작했다고 한다. 인간의 빙점을 녹이는 것이 바로 인간의 체온이라는 그의 말에 뭉클했다.

 

나도 여행을 워낙 좋아하고, 그에 대한 글을 읽는 걸 좋아해서 관련 에세이들을 꽤 읽어 본 편인데, 후지와라 신야의 여행기를 읽으면서 정말 특별한 경험을 한 느낌이었다. 이런 여행에세이는 그 어디서도 만난 적이 없었으니 말이다. 마치 40년 전 동양의 그곳으로 시간여행을 떠난 듯한 기분도 들었다. 특별한 여행을 경험해보고 싶다면, 이 책을 놓치지 마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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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번째 책상 서랍 속의 타자기와 회전목마에 관하여 - 세계를 담은 한 권의 책이 있다면
김운하 지음 / 필로소픽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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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엔 세상의 모든 책들이 다 있답니다. 당신이 원하기만 하면, 어떤 분야의 것이건, 어떤 장르에 속하건 모두 찾을 수 있지요. 또 당신이 원하기만 한다면, 아직 쓰이지 않은 책들, 화재로 타버리거나 세월이 갉아먹어 썩어버린 책들, 그리고 책 속에 나오는 허구의 책들까지도 모두 찾을 수 있지요."

세상에 나쁜 책은 없다고 생각한다. 물론 나도 읽다가 너무 지루해서 던져 버린 책도 있고, 말도 안 되는 전개에 짜증 나서 분노했던 책들도 만난 적이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쁜 책에서도 배울 점은 있다고 생각하며, 그런 책을 써야만 했던 작가의 욕망도 어느 정도 이해는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자의 입장에서 평생 아무리 부지런히 책을 읽는다 해도, 읽고 싶은 책들을 전부 읽을 수는 없다는 것을 알기에, 신중하게 책을 고른다. 매일매일 책을 읽어도 세상의 모든 책을 다 읽고 죽을 수는 없다니 얼마나 슬픈가. 그래서 나는 오늘도 부지런히 책을 고르고, 책과 만나고, 그 세계 속을 유영하는 중이다.

그래서 자칭 독서가, 혹은 애서가, 그리고 책중독자들을 비롯한 작가들이 쓴 독서, , 글쓰기와 관련된 책들은 거의 모두 다 읽어 본 편이다. 왜냐하면 평범한 일상 속의 인간관계에서는 나의 책에 대한 애정을 이해하거나 공감할 수 있는 사람은 극히 드문 편이니 말이다. 가끔은 나도 그 말도 안 되는 책에 대한 애정을 공감 받고 싶고, 이해 받고 싶고, 그리고 나보다 더한 애정을 표현하는 이들을 보며 그래도 나는 평범한 편이라고 위안받고 싶다. 이번에 만난 소설가 김운하의 이 작품은 저자의 표현대로 '책과 독서에 대한 애정고백서'이다. 독서의 재미를 발견하고는 자연스럽게 애서가가 되고, 책 중독자가 되었고, 심지어 희귀본 수집가로 나섰다가, 결국은 직접 글을 쓰는 작가가 된 저자의 이력은 그야말로 나 같은 독자들에게는 부러움을 가득 동반하게 한다. 책을 너무도 사랑한 나머지, 직접 새로운 책을 창조할 수 있는 위치까지 이른다면, 더 이상 완벽할 수 없는 결론이 아닐까.

 

 

보르헤스의 서재와 에코의 서재 사이에서 방황하다가 이제는 마침내 확고한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어느 날 불현듯 내가 책무덤 속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집이 사람을 위한 곳이 아니라 책창고로 변해가고 있었다. 그로 인해 내 삶조차 책의 무게만큼이나 무거울 뿐 아니라 그 자체가 내게는 하나의 거대한 부자유, 구속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책으로 만들어진 기가 막히게 매혹적인 표지 이미지처럼, 이 책 속에는 마치 꿈같은 장면이 등장한다. 저자는 어느 날 한 권의 책을 찾기 위해 다락방에 올라가 커다란 종이 박스들 사이를 헤집다가 순간적으로 기우뚱하고 어디론가로 추락한다. 정신이 든 그가 눈을 떴을 때는 천장이 아주 넓고, 벽면에 온통 책이 가득 꽂혀 있는 서재에 있었다. 그리고 서가 위에 고양이 한 마리가 말을 한다. 여기는 '당신이 늘 꿈꾸던 서재'라고. 당신이 원하고 찾기만 한다면 어떤 책이든 모두 찾을 수 있는 그런 곳이라고. 그러니까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상상 속의 책이라도.'

누구나 한 번쯤 상상 속의 서재를 꿈꿔보지 않았을까. 나는 주로 소설 속 이야기에 등장하는 허구의 책들이 궁금한 적이 많았다. 예를 들어 이런 책들이다. 스티븐 킹의 <파인더스 키퍼스>에 등장하는 천재작가 로스스타인의 <러너, 전쟁에 나서다> 같은 책. 극중 로스스타인의 이 작품은 미국 문학사상 <앵무새 죽이기>, <호밀밭의 파수꾼>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고 묘사된다. 스티븐 킹이 이런 분위기의 작품을 실제로 써주시면 어떨까 작품을 읽는 내내 상상하는 것으로 즐거웠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조엘 디케르의 <HQ 해리 쿼버트 사건의 진실>에 등장하는 두 소설가의 작품들도 궁금했다. 이야기 속에서는 미국을 대표하는 지성, 위대한 소설가로 극중 묘사되는 해리 쿼버트가 살해 용의자로 지목되면서 소녀의 유해와 함께 그의 대표작의 타자원고가 발견된다. 그 원고를 직접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그리고 그의 제자이자 미국 문단의 새로운 스타로 떠오른 마커스 골드먼이 스물여덟 살의 나이에 무려 이백만 부나 판 소설도 실제로 읽어보고 싶었고 말이다.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설레인다. 김운하 작가는 상상 속의 저에서 어떤 서재 목록들을 써내려갔을까. 그리고 그 책들을 정말 만날 수 있었을까.

 

책중독자라면 공감할 수밖에 없는 책에 대한 애정 넘치는 에피소드들과, 지독한 애서가가 밝히는 '쾌락주의 독서법' 그리고 사랑하는 작가를 위해 기꺼이 스토커가 되고자 하는 독자들의 마음과 상상 속에서 마법의 타자기가 끊임없이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세계에 이르기까지.. 이 책 속에 등장하는 모든 이야기들이 다 너무도 흥미로웠다. 무엇보다 독서란 이렇게 하는 것이다, 내지는 책이란 이런 것이다.는 식의 잘난 척이 없고, 그저 처음부터 끝까지 책에 대한 지독한 애정을 표하고,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독서와 책과 작가에 대해 사유하게 만드는 책이라 더욱 좋았던 것 같다. 나도 저자처럼 평생토록 오직 책만 읽다 죽을 수 있기를 갈망한다. 당신도 그런 생각을 한번쯤 해 본 적이 있다면, 당장 이 책을 만나 보시길!

*'이 서평은 필로소픽 출판사로부터 책을 무상으로 제공받아 쓴 것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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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그림 엽서북 : 옐로우 에디션 - 마음 가는 대로 상상해 그려보는 손그림 엽서북
공혜진 지음 / 인디고(글담)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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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뚤빼뚤한 점 하나, 선 하나로

누구도 따라 그릴 수 없는 세상에 하나뿐인 그림을 완성할 수 있어요.

마음 가는 대로 즐겁게 그려보세요!

아이와 함께 색칠 공부를 하거나, 그리기 놀이를 하다 보면 가끔 아이의 상상력에 깜짝 놀라곤 한다. 쓱쓱 자기 마음대로 그려 놓고는 그것이 나무도 되고, 물고기도 되고, 음식도 되었기 때문이다. 어른의 눈으로 보기에는 나무는 이래야 하고, 물고기는 이렇게 생겨야 하고, 딱 정해진 틀대로 밖에 생각하지 못하는데 말이다. 아무렇게나 그린 선 하나, 점 하나로 세상에 단 하나뿐인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시기는 아이였을 때밖에 없는 것일까. 싶은 생각이 들었을 때 <손그림 엽서북>이라는 책을 만났다.

뭔가 그려보고 싶지만 타고난 곰손이라서, 그리다 망쳐버릴 것 같아서 그림 그리기를 시작하지 못한 이들을 위한 책이라는데 굉장히 독특했다. 일상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꽃과 식물, 익숙한 물건들을 배경으로, 가벼운 선 긋기를 하는 것만으로 그림을 완성시킬 수 있다. 나뭇잎이 빨간머리 앤의 얼굴이 되기도 하고, 꽃잎이 이티가 되기도 하며, 소라가 음악을 듣는 귀로 재탄생하고, 와인 따개가 부엉이로 만들어지기도 한다.

이 책에는 완성 그림엽서 48장과 같은 배경의 그림 연습용 배경 48장이 함께 수록되어 있다. 저자가 그린 그림을 그대로 따라 해봐도 되고, 내 마음대로 원하는 그림을 그려도 좋다. 판형도 작고 가벼운 책이라 그림 그리기 좋은펜 한 자루만 있다면, 어디든 가지고 다니면서 편하게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것이다.

같은 풍경을 바라보고 있어도

우리 각자가 보고 느끼고 생각하는 것은 다릅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혼잣말을 하고 있었다면

나만의 시선으로 무언가를 바라보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몇 년 전부터 컬러링 북이 서점가에 열풍이었다. 어릴 적 누구나 한번쯤 해봤음 직한 단순 색칠 놀이처럼 보이지만, 성인대상으로 나오다 보니 조금 더 복잡하고, 세밀한 도안들로 다양한 컬러링북이 출간되어 나도 해본 적이 있다. 채색을 하다 보면 이것저것 따지지 않게 되어 오롯이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되는 것이 가장 좋았던 것 같다. 하지만 컬러링 북의 특성 상 채색을 할 수 있는 색연필의 컬러가 다양할 수록 더 좋고, 그걸 굳이 가지고 다니기에는 좀 번거로움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세밀한 그림일수록 생각보다 예쁘고, 완성도 있게 채색이 되지도 않았고 말이다. 하지만 이 책처럼 간단한 손그림을 그리는 거라면, 가지고 다니기도 편하고, 굳이 잘 그려야 한다는 부담감도 덜하고, 무엇보다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는 여지가 있어 더욱 좋은 것 같다.

 

부드러운 연필, 세밀한 표현에 좋은 샤프, 선 굵은 그림을 그리기에 좋은 사인펜 등 다양한 펜으로 그림을 그려보면, 펜에 따라 그림 느낌도 완전히 달라진다. 그리고 내 손으로 완성한 그림들은 엽서로 사용할 수 있도록 떼어낼 수 있다. 내가 그린 그림 엽서라고 말하면서 누군가에게 선물하는 재미도 있을 것 같다.

뭘 그릴까 고민하면서 수록된 배경 이미지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너무 재미있어서, 매일 같이 반복되는 일상, 회사에서, 가정에서 받는 스트레스를 풀길 없는 직장인과 주부들에게 적극 권해주고 싶은 책이다. 특히나 아이가 있다면 그림을 보여주면서 상황을 재미있게 설명해주고 나서 같이 할 수 있어서 더욱 특별한 시간을 만들 수 있을 것 같다. 이 책을 통한 손그림 그리기를 통해서 우리가 잊고 살았던 동심과 순수함을 되찾는 듯한 기분도 들었고, 스트레스 해소뿐만 아니라 일종의 '명상' 효과도 있어 현실을 잠깐 떠나보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취미가 될 것 같다. 마음을 담은 엽서로, 허전한 벽을 채울 멋진 그림으로.. 내 손으로 그린 개성 넘치는 그림이 작품이 될 수 있도록 부지런히 그려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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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 래빗 전집 (양장 스페셜 에디션)
베아트릭스 포터 지음, 윤후남 옮김 / 현대지성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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톰썸과 헝카멍카는 위층으로 올라가 식당을 들여다 보았어요. 그리고는 기뻐서 찍찍 탄성을 질렀지요! 식탁에는 아주 아주 먹음직스러운 근사한 식사가 차려져 있지 않겠어요! 철로 된 숟가락, 납으로 된 나이프와 포크, 그리고 인형 의자 2 -- 얼마나 근사한지!

-'못된 생쥐 두 마리 이야기' 중에서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종류의 토끼 캐릭터들 중에서 아마도 가장 유명한 토끼는 피터 래빗일 것이다. 베아트릭스 포터에 의해 그림동화 속 캐릭터로 탄생한 티퍼 래빗 이야기는 1902년 초판 출간 후 전 세계적으로 무려 2억부 이상이나 판매가 되었다. 피터 래빗과 숲 속 친구들이 엮어가는 소박하고도 아기자기한 이야기들은 전체 23편의 시리즈로 되어 있고, 이번에 만나게 된 전집에서는 본편에 더해 미출간작 4편까지 모두 수록되어 있다.

 

맥그레거 씨네 정원에 숨어들었다가 생각지 못한 모험을 하게 된 개구쟁이 아기 토끼 피터 래빗 이야기. 오래 전부터 읽어 왔고, 너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이야기였는데, 오랜 만에 다시 읽어 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무엇보다 수채화톤의 그림들이 너무 예뻐서, 동물을 좋아하는 아이랑 함께 읽으면 좋겠다 싶었다. 그런데, 첫 번째 피터 래빗 이야기는 서두부터 무시무시하다. 엄마 토끼가 아기 토끼 네 마리에게 말한다. 들판이나 오솔길에서는 놀아도 되지만 맥그레거 아저씨네 정원에는 가면 안 된다고.

 

"아빠가 거기 갔다가 사고를 당했거든. 맥그레거 아저씨가 아빠를 파이로 만들어 버렸지 뭐니."

 

이 대사 옆에 그려져 있는 삽화는 바로 파이 요리가 담긴 그릇을 들고 있는 맥그레거 씨네 가족들의 모습. 어린 시절 피터 래빗 동화책을 읽을 때는 이런 장면에서도 그다지 무섭다고 느끼지 않았었는데, 많은 것을 경험하고 나서 어른이 되고 나니 이 짧은 대사 만으로도 완전히 다른 느낌을 받게 되는 구나 싶었다. 분명 토끼를 비롯해 숲 속 동물들이 옷도 차려 입고, 말도 하며 의인화되어 있는 동화 속 세계지만, 사실 이 이야기는 인간에게 잡아 먹히지 않기 위해 목숨을 걸고 도망쳐야 하는 동물들의 이야기이기도 했던 것이다. 이후에 진행되는 다른 이야기들 속에서도 동물들이 서로를 잡아먹는 약육강식의 세계가 계속 바탕이 되고 있기 때문에, 포터의 동화가 착한 세계만 그리는 여타의 동화들과는 뚜렷한 차별점을 보이는 것이다.

 

상추를 너무 많이 먹으면 "졸음"이 온다고 하죠. 난 상추를 먹어도 졸린 적이 없어요. 하긴 난 토끼가 아니니까. 하지만 플롭시의 아기 토끼들은 상추를 먹으면 졸렸답니다!

-'플롭시의 아기 토끼들 이야기' 중에서

무엇보다 베아트릭스 포터의 그림책이 너무 좋은 이유 중의 하나는 바로 모든 이야기들이 아름다운 전원을 배경으로 펼쳐진다는 것이다. 그녀가 시골에서 자라 다양한 동식물들을 관찰해 왔기도 하고, 자연애호가이자 평생 환경 보호에 헌신한 환경 운동가이기도 한 점이 농장과 지역 풍경이 고스란히 담긴 사랑스러운 삽화들을 그리게 한 배경일 것이다. 피터 래빗이라는 캐릭터가 탄생한 것은 애초에 시작이 가정교사의 5살 배기 아들이 아팠을 때 위로해 주고자 썼던 그림 편지였는데, 단순하고 귀여운 동화이면서도 현실 세계를 반영하고 있어 어른을 위한 동화로도 손색이 없는 것 같다.

 

이번에 양장본으로 새로운 옷을 입은 <피터 래빗 전집> 스페셜 에디션은 적절히 큰 사이즈를 채택하여 그림들을 최대한 크고 예쁘게 담았다. 그리고 각각의 이야기가 시작하기 전에 '이 이야기에 관하여'라고 해서 작품의 탄생 배경과 소개 글이 수록되어 있어 더욱 흥미로웠다. 덕분에 '벤저민 버니 이야기' '피터 래빗 이야기'와 내용이 이어지는 속편이고, 벤저민 버니는 실제로 포터가 집에서 길렀던 애완토끼의 이름이라는 점도 알게 되었다. 그외에도 이야기의 배경 그림을 포터가 언제 스케치해두었는지, 그녀가 특별한 애정을 가졌던 작품은 무엇인지, 처음 출간 당시의 제목과 달라진 작품은 어떤 것인지 등에 대한 사소하면서도 재미있는 내용들이 가득 담겨 있어 본편 이야기만큼이나 재미있다. 그리고 정식 출간된 적이 없는 미출간 작품 네 편은 기존 그녀의 화풍과 굉장히 분위기가 달라서, 더 다양한 화법을 감상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인상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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