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방랑
후지와라 신야 지음, 이윤정 옮김 / 작가정신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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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게해 서쪽에서는 발효되고 썩어가는 것들이 눈가림되고 포장되어 건전하고 행복한 시민들 앞에서 말살된다. 썩은 오렌지 껍질, 돼지 머리, 송장, 광인, 전염병 환자, 만취한 사람, 그 모든 것들은 시민 생활의 큰길에서 격리된다.

여자가 짐승처럼 킁킁대며 몸을 뒤척였다. 영문 모를 냄새의 씨앗들이 꿈틀거린다.

그때 문득 머나먼 이국의 하늘과 한 줄기 피에 관한 기억이 떠올랐다.

이스탄불의 겨울, 바다 냄새에 섞여 코를 찌르는 썩은 냄새가 풍겨오고, 파리한 불빛 속에서 길바닥에 널브러진 양파 껍질이 바닷바람에 떨고 있다. 쿠르드족 쿨리의 성난 목소리, 비웃는 통행인들, 길바닥에는 밑동까지 타 들어간 담배꽁초들이 나뒹굴고 있다. 영하 16도의 찬바람 속에서 담배 한 갑을 사기 위해 50미터씩 줄을 서는 사람들. 나는 터키에 가본 적이 없다. 그런데도 오로지 묘사만으로 그곳의 냄새가 느껴지고, 풍경이 눈 앞에 그려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사실 현지의 삶과 그곳 인간들의 모습을 이렇게나 생생하게 담아낸 여행에세이는 만나본 적이 없다. 그 동안 읽어왔던 여행 에세이들은 모두 뭐였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압도적인 리얼리티가 살아 있는 글과 사진들이 시작부터 눈길을 사로 잡는다.

 

작가이자 사진가, 사상가, 평론가 등 전방위적으로 활동해온 후지와라 신야는 1969년 여름 스물다섯 살 때에 떠난 인도 여행을 시작으로 10여 년간 인도, 티베트, 중근동, 유럽과 미국 등을 방랑했다. 이 책 <동양방랑> <인도방랑>, <티베트방랑>에 이은 동양 여행기’ 3부작의 결정판이다. 이스탄불을 시작으로 지중해 앙카라, 흑해, 시리아, 이란, , 티베트, 치앙마이, 홍콩, 한반도 등에 이르기까지 그가 400일 동안 느끼고, 체험하고, 생각한 모든 풍경들이 이 책 속에 담겨 있다.

 

이 지역에서 우기의 비는 일본의 장맛비처럼 지루하게 내리지 않고 잠깐 퍼붓고 지나간다. 억수같이 쏟아지다가 이내 쨍하게 햇빛이 비친다. 그러면 지하수와 물웅덩이가 세균이 번식하기 딱 좋은 온도로 데워진다. 그 더러운 물을 보고 있으면 세균과 박테리아, 그 밖의 하등생물이 무럭무럭 자라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몇 시간만 지나면 물에서 냄새가 나기 시작한다. 비릿하고 음울하고 불쾌한 냄새다. 그 냄새가 비 온 뒤의 거리에 충만하다.

무엇보다 이 책이 특별한 것은 바로 여행을 묘사하는 방식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가 묘사하는 풍경은 냄새부터 시작해서 길거리에 놓여진 사소한 것들 하나까지 놓치지 않는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현지의 사람들, 그가 만나고, 경험하고, 이야기를 들어온 사람들이야말로 현지의 일상을 고스란히 페이지 위로 불러내고 있다.  특히 낯선 곳의 냄새, 후각에 대한 묘사가 그야말로 인상적이었다. 그는 새로운 세계를 관찰하거나 이해하고 묘사하고자 할 때 후각을 먼저 사용하는데,  굉장히 독특한 경험이었지만 덕분에 낯선 세계가 한번에 와락 다가오는 듯한 느낌이기도 했다. 그렇게 싸구려 호텔 방의 사막 냄새, 콜카타 특유의 정액 냄새, 산양의 날고기 냄새, 코를 찌르는 향신료 냄새, 향냄새와 시큼한 지폐 냄새, 여자 냄새, 거리와 사람을 뒤덮은 인간 세상의 온갖 냄새들의 향연이 이어진다.

그리고 후지와라 신야는 날카로운 언어와 사유를 통해 인간성을 발견하고, 현지의 기후나 지형 같은 환경적 영향을 통해 문명의 특징을 통찰한다. 그의 사진 속에 종종 인물들이 담겨 있곤 하는데, 그들의 표정 너머에서 단순한 일상의 흔적 너머 역사성과 사회성 또한 함께 그려지고 있는 것이다.

 

 

누구나 사람이 살면서 몇 번의 고비를 만나듯이 여행에도 빙점이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세계 여러 곳을 여행했던 그도, 어느 순간 눈이 흐려지고, 혀가 기뻐하지 않고, 귀가 들으려 하지 않고, 코가 냄새 맡지 못하는 단계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래서 인간을 피해 풍경만 보고 다니며, 얼어붙은 채 무의미한 여행을 계속하다, 기사회생의 여행을 나선 것이 바로 이 책의 결과물이다. 그는 400일이라는 긴 여행의 시간 동안 인간을 만나는 것을 과제로 삼았다. 변두리 유곽의 창녀에서 심산에 틀어박힌 스님까지, 눈앞에 나타나는 모든 인간을 인연으로 여기고 소중히 대했더니, 어느 순간 갑자기 얼어붙은 여행이 녹기 시작했다고 한다. 인간의 빙점을 녹이는 것이 바로 인간의 체온이라는 그의 말에 뭉클했다.

 

나도 여행을 워낙 좋아하고, 그에 대한 글을 읽는 걸 좋아해서 관련 에세이들을 꽤 읽어 본 편인데, 후지와라 신야의 여행기를 읽으면서 정말 특별한 경험을 한 느낌이었다. 이런 여행에세이는 그 어디서도 만난 적이 없었으니 말이다. 마치 40년 전 동양의 그곳으로 시간여행을 떠난 듯한 기분도 들었다. 특별한 여행을 경험해보고 싶다면, 이 책을 놓치지 마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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