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 게으름뱅이의 모험
모리미 토미히코 지음, 추지나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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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가 절반도 진행되지 않았건만 방석에 파묻혀 잠들어 버린 사람. 그런 인물에게 '주인공'이라 할 자격이 있을까. 그렇게 말씀하시는 분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러분.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배려심이다.

자라, 고와다. 푹 자라.

주인공이니까 노력해야 한다고 대체 누가 정했어?

 

장난 같은 너구리 가면에 시대착오적인 구제고등학교의 검은 망토 차림을 한 괴인이 교토 거리에 나타났다. 그런 이상한 차림을 한 인물이 꾸물거리는 것을 발견한 사람들은 망설임 없이 신고를 했고, 교토 경찰은 근면한 시민의 신고로 불이 난 전화에 시달려야 했다. 그럼에도 겁먹은 시민을 무시하고 괴인은 묵묵히 사람들을 도와주며 활약했고, 괴인이 좋은 놈이라고 알려지자 인기는 거칠 것 없이 올라갔다. 그렇게 교토에 폼포코 가면이 나타나고 일년쯤 지난 뒤에, 이야기가 시작된다. 주인공 고와다는 게으름을 피울 수 있다면 뭐든 할 거라는 식의 사고 방식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업무 시간 의 시간에는 가급적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게으름을 피웠으며, 주말이면 주말이면 밤낮없이 깔아 놓은 기숙사 이부자리에 누워아내가 생기면 하고 싶은 일 목록을 만들고, 기숙사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는 인물이었다. 그런데 어떤 계기로 인해 고와다와 폼포코 가면이 만나게 되었고, 이후 폼포코 가면은 고와다에게 자신의 뒤를 이으라고 다그쳤고, 고와다는 고집스럽게 거절했다. 개인적인 사정으로 더는 이 부업을 계속할 수 없게 되었다는 너구리 괴인과 자신은 게으름을 피우느라 너무 바빠서 그런 일은 할 수 없다는 게으름뱅이 남자의 이상한 실랑이는 계속 되풀이 된다.

게으름 피우느라 바쁘다니,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란 말인가. 취미도 없고 애인도 없는 독신인 데다가 딱히 할 일도 없어 보이는 한가한 사람이 말이다. 고와다 못지 않게 그에게 자신의 뒤를 이으라고 강요하는 너구리 가면 역시 이상하기는 마찬가지다. 그러던 어느 토요일 아침, 교토 기온 축제를 하루 앞둔 전야제의 날이었다. 그저 주말을 빈둥거리며 보내고 싶었을 뿐인 고와다는 본의 아니게 폼포코 가면과 엮여 원치 않는 모험에 발을 디디게 된다. 교토를 둘러싸고 토요일 단 하루에 일어나는 기상천외한 대소동은 이들 두 캐릭터 외에도 매우 개성이 뚜렷하고 독특하기로는 어디에서도 빠지지 않는 인물들이 함께 한다. 세계에서 가장 게으른 탐정 우라모토와 주말에만 조수 아르바이트를 하는 여대성 다마가와는 주말 탐정이지만 미행에 굉장히 미숙하다. 주말의 일정표를 빽빽하게 만들어 하루를 보내야만 안심하는 커플인 고와다의 직장 선배 온다와 그의 애인인 모모키, 무시무시한 풍모에 겁을 먹게 만드는 고와다의 연구소 소장인 고토 소장, 알파카와 판박이인 모 거대 조직의 수령 5대 등... 하나 같이 생생하게 살아 있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그런데 과연 이렇게까지 주인공이 움직이지 않아도 모험이라는 이야기가 성사될 수 있는 걸까 싶기는 하지만 말이다.

 

"조금은 긴장감을 가져, 이 게으른 인간아."

"우리는 인간이기에 앞서 게으름뱅이입니다."

"게으름 피울 여유는 없어."

"인간은 자신이 진실로 추구하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법이죠." 라고 말하면서 고와다는 절벽 끝에서 겨우 버티는 큰 바위를 힘차게 미는 듯한 감촉을 느꼈다.

 

오래 전 모리미 도미히코의 작품을 처음 만나게 된 건 <유정천 가족>이었다. 어딘가 유쾌하면서도 기묘한, 그리고 현실을 넘나드는 매혹적인 판타지와 특유의 이야기꾼다운 문체와 스토리가 인상적인 작품이었던 기억이 난다. 보는 내내 킥킥대며 웃게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책장을 덮기 전에 뭉클하고 짠한 뭔가가 가슴에 남은 것 같은 기분도 들었고 말이다. 주인공이 사람이 아닌 너구리라니. 이 무슨 동화 같은 판타지일까. 싶은 마음이 없었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책장을 한 장 한 장 넘기면서 마치 너구리에게 홀리기라도 한 듯 마법처럼 책 속으로 빠져들어가게 만드는 이야기였다. 사람의 모습으로 변신하는 너구리며, 텐구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며.. 그들의 다소 황당하고 판타지스러운 이야기에 그냥 자연스럽게 동화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번 신작 <거룩한 게으름뱅이의 모험>은 여러 모로 너구리를 소재로 한 <유정천 가족>을 떠올리게 만드는 이야기였다. 세상에 인간, 너구리, 텐구라는 세 존재가 어우러져 살아간다는 다소 황당한 설정만큼, 이번 신작에서 너구리 가면을 쓰고 무리하게 착한 일을 하려는 '폼포코 가면'이라는 정의의 사도 역시 만화처럼 현실감없는 캐릭터였으니 말이다.

 

 

모리미 도미히코만의 어디로 튈지 모르는 상상력은 이 작품에서도 반짝반짝 빛을 발한다. 어딘가 유쾌하면서도 기묘한, 그리고 현실을 넘나드는 매혹적인 판타지와 특유의 이야기꾼다운 모습으로 종횡무진 마구 달려간다고 할까. 기존의 작품들이 현실과 비현실을 넘나드는, 상상력을 넘어서 망상력을 보여주는 이야기들이었다면, 이번 작품에서는 조금 더 현실적인 배경과 캐릭터로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 물론 지금까지 이렇게 게으른 주인공은 만나본 적이 없지만 말이다. 주인공은 매사 적극적이고 능동적이어야만 하나? 탐정이라면 자고로 길을 헤매고 다녀서는 안 되는 걸까? 우리의 영웅이라면, 정의의 사도니까 게으르면 안 되는 걸까? 작가는 말한다. 누구든 졸릴 때는 자야 한다고. 탐정인데 길을 헤매는 모습에 어이없어 할 수도 있지만, 독자들이여 배려심을 가지라고 말이다. 게으름에 능숙한 사람을 동경하여 이 소설을 썼다는 모리미 도키히코는 이 작품을 통해서 게으름뱅이가 활약할 수 있는 전무후무한 세계를 만들어 낸다. 특히나 한국판에서는 특별히 고와다가 활보했던 교토 지도가 수록되어 있다. 이 작품이 교토의 실재 지명과 장소를 배경으로 했기에 가능한 작업이었다고 한다. 언제나 모리미 도미히코의 이야기는 교토를 배경으로 펼쳐지기에, 책을 읽을 때마다 교토로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곤 했는데, 이 작품이야말로 당장 교토에 가고 싶다는 마법을 부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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널 지켜보고 있어 스토리콜렉터 65
마이클 로보텀 지음, 김지선 옮김 / 북로드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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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나는 마니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지만, 마니는 아직 그 사실을 모른다. 나는 그 애의 사진들 가장자리에 절반만 찍힌 존재, 그 애가 고개를 돌릴 때마다 사라지는, 시야 가장자리의 그림자다. 그 애의 감은 눈꺼풀 뒤에서 춤을 추는 유령이자 눈을 깜빡일 때 따라 깜빡이는 어둠이다. 이름 없는 수호자, 팡파르도 없이 등장하는 영웅, 그리고 마니라는 교향곡의 지휘자다. 나는 지켜보는 사람이다.

남편 대니얼이 사라진 뒤 벌써 13개월이 지났다. 그동 안 쥐꼬리만 한 저금과 친구들한테 빌린 돈으로 근근이 살아왔지만, 이제는 돈도, 친구들의 호의도 모두 동났다. 집세는 두 달치나 밀렸고, 그렇다고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갈 처지도 못 된다. 게다가 대니얼에게는 도박으로 날려버린 3만 파운드라는 빚이 있었고, 그의 부채는 고스란히 마니에게 이어진다. 강요에 의한 채무 이행을 위해 마니는 에스코트 일을 시작하게 된다. 그녀는 살아오면서 단 한번도 이런 인생을 상상해보지 못했다. 돈을 위해 다리를 벌리는 것. 돈 많은 사업가들하고 노닥거리며 그들의 매력에 홀딱 반한 척하는 것. 과연 이게 정말 내 인생일까. 마니는 지금도 믿을 수가 없다. 남편의 실종은 그가 죽었다는 증거가 나타나기 전까지 아내에게 참혹한 현실을 부여한다. 마니는 남편의 은행 계좌에 접속할 수도, 남편의 체육관 회원증을 취소할 수도 없고, 그의 신용카드 연회비도 아직 내고 있으며, 자동 이체도 중지할 수 없고, 이혼도, 애도도 할 수 없었다. 남편의 사망 증서 없이는 보험금을 수령할 수도 없는데, 남겨진 두 아이를 지키며 남편이 빌린 돈을 갚아나가야 하는 현실이란 끔찍하기만 하다.

마니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자, 어떻게든 남편의 사망 증서를 받아내 보험금으로 두 아이와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자 한다. 그러던 중 남편의 소지품에서 빨간 앨범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는 마니의 생일을 위해 그녀의 삶을 거쳐온 사람들의 목소리를 담아 선물할 계획이었던 것이다. 그녀는 상담을 받아온 심리학자 조 올로클린과 함께 앨범에 담긴 인터뷰를 보게 되는데, 그 속에서 첫 번째 남자 친구로부터 갑작스러운 증오를 마주하고 당황하게 된다.

 

"나는 네가 죽기를 빌었어. 내 소원이었다고. 그리고 나 혼자만 그런 게 아니야...."

대체 그는 왜 저런 소릴 한 걸까. 마니는 이해할 수가 없다. 이미 18년이나 전에 헤어졌던 남자였는데, 그는 대체 왜 마니에게 자기 인생을 망쳤다고 분노를 표출한 것일까. 그리고 혼란스러운 그녀의 주변에서 의문의 살인 사건들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우리가 잘못된 쪽을 위해 일하고 있는 건 아닌가 싶어 걱정이야."

조가 설명을 기다린다.

"그 여자 주변 사람들은 사라지거나 죽거나 하는 버릇이 있더군. 어쩌면 그 여자가 남편을 죽였을지도 몰라. 어쩌면 퀸도 그 여자가 죽였을지 모르고."

"나는 그렇게 믿지 않아."

"뭔가 구린 냄새가 나."

이 작품은 <용의자>, <산산이 부서진 남자>, <내 것이었던 소녀>, <미안하다고 말해>에 이은 조 올로클린 시리즈 신작이다. 물리적 세계보다는 감정에 관해 더 많은 것을 알고 있고, 어떤 상황을 경험하기보다는 이해하는 편이 더 쉽다고 말하는 뛰어난 심리학자이지만, 파킨슨 병이라는 치명적인 친구를 데리고 사는 남자 조 올로클린. 그는 대다수 사람들보다 이해심이 더 많아, 어떤 사건에서든 더 열심히 들여다보고, 더 관심을 쏟으며 인간의 심리를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어떨 때는 독자 입장에서 보더라도 어쩐지 그의 생각보다는 다른 이들의 견해에 힘을 보태주고 싶을 만큼 무모해 보이지만, 꾸역꾸역 자신의 생각을 밀고 나가는 우직함도 가지고 있다. 평범한 두 아이의 아빠답게 아이들 걱정에 잠을 설치고, 누군가 아이들에게 해를 가하려는 기색만 보여도 달려들 수 있는 과격함도 가지고 있다. 너무 젊은 나이에 찾아온 파킨슨 병이라는 무시무시한 친구에게 시달리면서도 아주 가끔은 그것을 농담으로 표현할 수 있는 여유도 있으며, 하루하루가 생의 마지막 날인 것처럼 살아야 하는 때에도 상처 받은 아이의 마음을 헤아리고 싶고, 누군가를 다치게 한 나쁜 놈을 벌주고 싶어하는 오지랖도 있다. 무엇보다 페이지가 진행될수록 드러나는, 그가 완벽한 인간이 아니라는 점들 때문에 여타의 스릴러 장르에서 쉽게 만나기 어려운 매력적인 캐릭터가 아닌가 싶다.

당신이 보는 것을 믿지 마라. 기만은 거의 대부분의 스릴러에서 이야기가 앞으로 나아가게 만드는 동력을 공급한다. 범죄소설의 전형적인 거짓말뿐 아니라, 매일 벌어지는 일상적 기만 역시 그 공급원이다. 마이클 로보텀은 이 작품에서 초반부터 독자를 솜씨 좋게 꾀어 남편의 실종 이후 참담한 현실에 내던져진 마니라는 인물의 이야기에 공감하게 만든다. 그리고 조 올로클린이라는 심리학자를 통해서 그녀의 의심스러운 과거에 관한 단서들을 촘촘히 짜 넣는다. 거기다 중간 중간 보여지는 범인으로 추측되는 그의 시점에서 들려지는 이야기들을 통해 누군가 그녀를 끊임없이 지켜보고 있었다는 증거들을 축적해 어느 정도 예측 가능한 구성으로 이야기를 이끌어 가다가, 갑작스럽게 방향을 바꾸어 버린다. 독자가 어느 정도 기대할 수 있는 그 모든 것을 넘어선 급작스럽고 잔혹한 결말은 섬뜩하고 오싹하기만 하다. 무엇보다 그 공포란 것이 현실과 현재에 머물러 있다는 점이, 인간이 견딜 수 있는 한계치까지 밀어붙이는 심리적 악몽으로 연결된다. 마이클 로보텀은 마지막 페이지에 이르기까지 독자들을 결코 방심할 수 없도록 포석을 잘 깔아두어, 한 순간도 지루할 틈 없이 이야기에 몰입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불쾌지수가 높아지는 무더운 여름에 읽기에 딱 좋은, 잘 만들어진 영리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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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연 2018-07-12 17: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데... 표지가 좀 ㅠ
 
괜찮다는 말은 차마 못했어도 슬로북 Slow Book 3
함정임 지음 / 작가정신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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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엔 그 책이 왜 좋은지 몰랐다. 한 페이지를 읽는 데도 몇 시간씩 고투해야 했고, 시험 때에는 통째로 외워야 했고, 정신을 집중해 낭독을 듣고 또박또박 써내야 했다. 대학 3학년 봄에서 여름까지 소설 전공 강독 수업은 그렇게 지독하게 흘러갔다. 세월이 지난 뒤 다시 그 책을 펼쳐보리라고, 소설을 쓸 때마다 숨을 쉬듯 함께하리라고 그땐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괜찮아?'라는 말만큼 뭉클하고, 먹먹한 표현이 또 있을까. 이는 상대의 마음을 헤아리고, 안위를 걱정하고, 입장을 배려하는 따뜻한 말이다. 누군가 나에게 괜찮냐고 물어올 때, 사실 나는 괜찮지 않은 적이 더 많았다. 내가 누군가에게 괜찮냐고 물어보고 싶을 때, 사실 마음으로 먼저 짐작이 되어 차마 말을 꺼내지 못한 적이 더 많았다. 매주, 매달 사건이 터지고, 가까이에서 멀리에서 재난과 재앙이 닥쳤던 작년, 그리고 올해를 우리는 견뎌왔다. 함정임 작가는 바닷가 서재에서 추모의 마음으로 애도 일기를 쓰듯, 혀끝에 맴돌던 말들을 여름의 안부로 건넨다. 당신의 여름은 괜찮습니까. 라고.

작가는 일주일 중 하루 이틀은 온종일 서재에 머무는데, 그때 창밖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하늘과 바다와 언덕, 그리고 그들 풍경 속을 들고 나는 구름과 새와 배들이라고 한다. 바다가 보이는 달맞이 언덕의 서재에서 글을 쓰는 작가를 상상하니, 글 속에서도 바다 내음이 나는 것 같아 설레인다. 이 책에는 다양한 작가의 사유가 담겨 있는데, '소설가'라는 작가의 일상이 고스란히 보여 굉장히 흥미로웠다. 그녀가 읽었던 책에 대한 소개나, 책 속의 문장들이 옮겨져 있기도 하고, 그녀가 대학에서 가르치는 창작 수업에 대한 이야기도 있으며, 낯선 곳으로 여행을 떠났던 날의 기록들도 담겨 있다. 다양한 장소에서, 전부 다른 사유가 펼쳐지고 있지만, 그 처음과 끝은 모두 글쓰기와 작가라는 존재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진다. '하찮지만 고유한 삶의 편린들'은 수십 년 동안 글쓰기를 직업으로 삼아온 이의 그것이기에 매혹적이다.

현대의 속성은 견고한 것들이 촛농처럼 녹아 내리고, 깃털처럼 부유하는 세계이다. 21세기의 시공간은 더 이상 하나가 아니기에 어떤 것도 고유하지 않다. 세상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신문 지면의 힘은 인터넷 매체 환경에서 산산이 흩어졌다. 오로지 문학만이 덧없음에 맞서 내가 겨우 존재한다는 것을, 세상이 때로 아름답다는 것을 되새겨줄 뿐이다.

이 책은 작가정신의 '슬로북' 시리즈 세 번째 책이다. 백민석의 쿠바 여행 에세이 <아바나의 시민들>, 박상의 본격 음악 에세이 <사랑은 달아서 끈적한 것>에 이어 그 세 번째 시리즈를 읽게 되었다. 속도지상주의 시대에느려질 수 있음의 가능성을 누리면서, 자신만의 속도를 찾아내는 발상의 전환을 꾀할 것을 권하는 것이 '슬로북' 시리즈의 목적이라고 하는데, 느리게 읽는 독서의 진정한 즐거움을 맛볼 수 있게 해준다. 각기 다른 삶의 방식에 대한 이야기들은 낯설기도 하고, 익숙하기도 해서 '마음의 속도'로 읽는 다는 것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만들어 주고 있다.

소설가란 단 한 순간도 쓰지 않으면 사는 데 의미가 없다고 자각한 사람들이라고 한다. 그런데 그것은 작가만의 운명이 아니라고 그녀는 말한다. 모든 인간의 속성이되, 대부분 쓰지 않을 뿐이라고. 왜냐하면 우리는 본능적으로 이야기를 사랑하는 존재, 끊임없이 이야기를 하고 싶고, 듣고 싶은 호모 나랜스들이니 말이다. 그러니 긴긴 여름 끝자락, 폭풍우와 뙤약볕을 견뎌낸 붉은 열매 같은 책들을 통해 충만한 에너지를 얻어 보면 어떨까. 여기서 작가가 소개하고 있는 책들도 좋고, 살면서 읽어 왔던, 혹은 지나쳐 왔던 책들도 좋을 것이다. 내 안에 웅크리고 있는 마음을 들여다보고 보듬어 안아주는 시간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리고 우리가 삶을 살아가면서 필요한지 말해주는 작가의 목소리가 책장을 덮은 뒤에도 귓가에서 들리는 듯한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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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괴물
스미노 요루 지음, 양윤옥 옮김 / ㈜소미미디어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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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의실로 이동할 때, 여학생들이 야노의 눈앞에서 기운차게 밀어내기 벌칙 가위바위보를 하고 있었다. , 오늘은 여학생 수가 짝수구나. 체육 선생님은 여학생 수가 홀수일 때, 유연체조의 짝 만들기에서 번번이 야노 혼자만 남아버리는 게 단순한 우연이라고 생각하는 걸까. 어른들은 자기들이 중학생이었을 때를 기억하지 못하는 건가.

우리는 어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잔혹한 마음을 지닌 채 살아가고 있다.

 

중학교 3학년 아다치는 어느 날부터 갑자기 밤만 되면 괴물로 변한다. 어느 때는 손가락 끝에서부터, 어느 때는 배꼽에서부터, 그리고 어느 때는 입에서부터, 한밤중에 느닷없이 변화가 시작되는 것이다. 검은 알갱이가 눈물 방울의 모습으로 떨어지기 시작하면서 우글우글 꿈틀거리는 그것이 얼굴을 더고 목에서 가슴, 허리, 손가락까지 흘러가 온몸을 뒤덮어 버린다. 마치 검정 색깔의 숯 검댕이처럼. 처음 크기는 대형견 정도인데, 의지에 따라 검은 알갱이를 흔들면 산처럼 커질 수도 있다. 그 날은 깜빡 잊고 숙제를 사물함 안에 두고 왔던 터라, 괴물이 된 모습으로 늦은 밤에 학교로 향했다. 그런데, 그 곳에서 한 여자애를 만나게 된다. 그녀는 반에서 친구들로부터 왕따인 야노 사쓰키였다. 게다가 무슨 영문인지 야노는 괴물 모습을 한 앗치를 알아 본다. 그리고 아무렇지 않게 그를 대하며, 자신은 '밤의 쉬는 시간'을 갖기 위해 이 시간마다 학교에 온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와 야노 둘만의 밤의 쉬는 시간이 시작된다.

이야기는 앗치가 괴물로 변해 있는 밤의 시간과, 평범한 중학생으로 생활하는 낮의 시간이 교차로 진행된다. 야노는 독특한 말투에 아무리 무시당해도 친구들에게 말을 걸고, 인사를 하는 등 분위기 파악을 잘 못한다. 그래서 반 아이들이 야노를 따돌리고 괴롭히고 무시하는 것이 어쩌면 당연하다고 보일 정도로 말이다. 앗치는 야노에게 호의적인 모습을 보이지는 않지만, 딱히 친구들의 괴롭힘이 옳지 않은 것이라는 생각은 갖고 있다. 다만 야노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들 때문에 어느 정도는 그런 괴롭힘을 당하는 건 자업자득이 아닐까 생각했고, 또 괜히 야노의 편을 들어 친구들 무리에서 소외되고 싶지도 않았기에 그저 방관하는 소년이었다. 그랬던 그의 비밀을 야노가 알아버린 것이다. 다리가 여섯 개, 눈이 여덟 개, 꼬리는 네 개인 모습으로 변해 버리는 밤의 내 모습을 말이다.

 

 

 

교실에는 웃는 얼굴로 인사를 건네주는 친구가 있고 어제의 텔레비전 방송에 대해 열나게 얘기하고 있는 친구가 있고 책상에 엎드려 자는 친구도 있다.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다. 여기에 괴물이 앉아 있는데. 여기에 교활한 내가 앉아 있는데.

진짜 모습 같은 거, 겉으로만 봐서는 알지 못한다.

 

스미노 요루는 학교 문제 중에서도 가장 이야기 속에서 많이 다루어진 '왕따'라는 문제를 조금 독특한 방식으로 풀어내고 있다. 괴물로 변하는 소년과 외톨이 소녀를 만나게 해서, 그들을 바로 친구로 만들어 버리지 않고 서로 다른 대상을 관찰하게 하는 것이다. 앗치는 야노의 말투와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친구들이 따돌린다는 의식도 없이 너무도 당연하게 그녀를 괴롭히는 것을 보며 특별히 그걸 막아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녀는 대부분의 친구들과는 너무도 달랐으니까. 다르다는 것이 꼭 틀리다는 것은 아님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어린 이들에게는 이물을 배제해야 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그 속에 옳지 않은 행동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참가하지는 않지만, 그저 눈에 띄고 싶지 않고, 그저 소외되고 싶지 않아서 친구들에게 억지로 맞춰주는 소년이 있다. 아마 대부분 전자의 경험은 없더라도, 후자의 입장에 있었던 적은 많을 것이다. 그냥 평범하게 살고 싶었을 뿐이라고 스스로 위안삼지만, 사실 그것은 비겁함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극중 야노의 2학년 때 짝꿍이었던 이구치가 토토로를 좋아하는 이유에 대해서 말하는 대목이 인상적이었다. '이상한 것이 이상한 그대로 이상해서 토토로를 정말 좋아한다고' 말이다. 우리는 왜 그렇게 이상한 것은 이상한 것 그대로, 좀 달라 보이는 건 다른 모습 그대로 인정해주고, 좋아해줄 수 없을까. 앗치는 점점 낮과 밤의 경계에 대해서 고민하기 시작한다. 괴물의 모습을 한 나와 인간의 모습을 한 나 중에 어느 쪽이 진짜인가. 흉측한 모습으로 그 누구도 무서울 것 없는 밤의 나와 친구의 소중한 물건을 밟아 부수는 낮의 나 중에 과연 진짜 괴물은 어느 쪽일까. 자신과 다른 존재를 향한 아이들의 악의, 학교라는 공간의 잔인함과 폐쇄성을 판타지를 통해 그려내고 있는 이 작품은 스미노 요루만의 독특한 감성이 더해져 평범한 학원물과는 다른 차별성을 띠고 있다. 왕따와 학급 내 갈등이라는 평범한 소재도 스미노 요루를 만나게 되면 얼마나 달라질 수 있는지 느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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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의 신사
에이모 토울스 지음, 서창렬 옮김 / 현대문학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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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지구상에서 인간이 존재한 곳에서는 언제나 추방당한 사람들이 있었다. 원시 부족에서 가장 앞선 사회에 이르기까지, 같은 구성원들로부터 짐을 꾸려 변경을 넘어가서 다시는 자신이 살던 땅에 발을 들여놓지 말라는 말을 들어야 했던 사람들이 종종 있었다. 어쩌면 그것은 당연한 일일 터였다. 추방은 인간 희극의 제1장에서 하느님이 아담에게 내린 형벌이었다. 그리고 몇 페이지 뒤에서 하느님은 카인에게도 그 벌을 내렸다. 그렇다, 추방은 인류의 탄생만큼이나 오래되었다. 그런데 러시아인들은 국외가 아니라 자국 땅으로 추방하는 개념을 터득한 최초의 민족이었다.

러시아는 한 세대도 안 되는 기간에 세계대전과 내전, 두 번의 기근, 그리고 적색 테러를 겪으며 격변기를 거쳐 오고 있었다. 1922, 서른세 살의 알렉산드르 일리치 로스토프 백작은 내무 인민위원회 소속 긴급 위원회에 출두해 '종신 연금형'을 선고 받게 된다. 그것은 바로 그가 4년 동안 거주해 온 모스크바 메트로폴 호텔 밖으로 나갈 수 없다는 것, 호텔을 벗어나면 바로 총살될 거라는 말이었다. 성 안드레이 훈장 수훈자,, 경마 클럽 회원이고, 사냥의 명인인 백작은 어린 시절부터 방이 스무 개나 되고 집안 일을 해주는 사람이 열 네 명이나 되는 대저택에서 자라온 유서 깊은 집안 출신이었다. 그는 어떤 상황 때문에 전쟁 전에 러시아를 떠나 파리에 있었지만, 혁명 후 로마노프 왕조가 몰락했을 때 다시 고향으로 돌아 왔다. 그리고 이제 그는 메트로폴 호텔 스위트룸에서 허름한 하인용 다락방으로 거처를 옮기고, 귀족으로서 누리던 모든 특혜를 회수당한다. 이제 백작에게 호텔은 감옥이자 세상의 전부가 되어 버린 것이다.

평생을 연금 상태로 지내야 하는 형을 선고 받는 다면 어떨까. 그게 아무리 호화찬란한 호텔이라 할지라도, 그곳에서 주어진 공간이란 9제곱미터 정도에 불과하다면 말이다. 게다가 태어나서 평생을 당연한 듯이 누리던 세련되고 고상한 취향들을 더 이상 유지시킬 수 없는 상황이라면 말이다. 하지만 백작은 우울해하거나, 의기소침해 있지 않고 긍정적인 성격으로 보란 듯이 새 삶에 적응해 나간다. 아홉 살 여자 아이 니나의 친구가 되어 호텔의 이곳 저곳을 누비고 다니며 모험을 하기도 하고, 유명한 여배우의 연인이 되어 그녀와 사랑에 빠지기도 하고, 날마다 새로운 손님과 사건이 끊이지 않는 호텔을 배경으로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아무튼 바로 얼마 전에 호텔 로비에서 잠깐 동안 만난 사람에 관한 첫인상이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줄 수 있겠는가? 아니, 그 누구든 간에 그 사람에 관한 첫인상이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줄 수 있겠는가? 첫인상이라는 것은 단지 하나의 화음이 우리에게 베토벤에 관해 말해줄 수 있는 것, 또는 하나의 붓 터치가 우리에게 보티첼리에 관해 말해줄 수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본질적으로 인간은 너무 변덕스럽고 너무 복잡하고 엄청나게 모순적이어서 우리가 숙고해야 할 뿐만 아니라 거듭 숙고해야 하는 존재다.

에이미 토울스의 첫 작품이었던 <우아한 연인>을 너무 좋아했던 터라, 정말 오랜만에 만나게 되는 그의 두 번째 작품에 굉장히 설레었다. 724페이지라는 두툼함도 기다림에 대한 보상 같은 느낌이었고 말이다. 전작이 세계 대공황의 그림자가 드리운 1938년 미국 뉴욕을 배경으로 했다면, 이번 작품은 20세기 초 볼셰비키 혁명 이후 소비에트 러시아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두 작품 모두 고전 문학을 연상시키는 작품과 분위기가 매혹적이고, 우아함의 극치를 보여주는 등장인물들 역시 사랑에 빠지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우아한 연인>에서 케이트와 팅커가 우연히 식당에서 만나 처음으로 단 둘이서 대화를 나누던 장면은 지금도 내 가슴을 쿵 내려앉게 만든다.

 

<모스크바의 신사>에서도 인상적인 장면들이 많았는데, 특히나 마음에 들었던 순간은 이것이다. 백작이 자신이 지내던 옛 스위트룸을 찾아 갔다 와서는 오후의 차 한잔을 누릴 수 없는 공간이 되지 않는 자신의 새로운 방에 우울해 하다가, 옷장과 벽이 만나는 곳에서 숨겨진 공간을 발견하게 된다. 자신의 방과 똑같은 구조를 지닌 그 방에는 사용하지 않는 침대 틀이 보관되어 있었고, 백작은 방 안의 모든 것을 밖으로 끌어내고 직접 수리를 해서 자신만의 비밀 서재를 만들어 낸다. 그는 그곳을 꾸미기 위해 지하실에 가서 손님이 버리고 간 두꺼운 소설책 중에서 열 권을 챙겨 와 그 중의 한 권을 펼쳐 든다. 그리하여 백작은 통제와 관리와 타인의 의도 아래 존재하는 방 외에 비밀리에 존재하는 자신만의 서재를 갖게 된 것이다. 그것이 상징하는 바가 너무도 뭉클해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백작은 다시 의자에 앉아서 한 발을 커피 탁자 모서리에 올린 채 의자가 뒷다리 두 개로 균형을 잡을 때까지 뒤로 기울인 다음 첫 문장으로 눈을 돌렸다.

 

아홉 살 꼬마 숙녀도 어엿한 어른처럼 대할 수 있고, 나이든 잡역부와 함께 커피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기도 하는, 인간적인 매력이 넘치며 여전히 세련되고 우아한 태도를 잃지 않는 백작은 점차 호텔에서 꼭 필요한 존재가 되어 간다. 이야기의 주요 배경인 모스크바 메트로폴 호텔은크렘린 궁전붉은광장’, ‘볼쇼이 극장과 가까운 곳에 위치한, 실재하는 장소이다. 특권 계층, 사유 재산을 인정하지 않던 시대에 러시아 역사의 중심에 있었던 메트로폴 호텔은 외교의 장소이자 체제의 건재함과 풍요로움을 대외에 선전하는 특별한 목적을 가진 곳이기도 했다. 호텔 바깥에서 일어났던 모든 일들은 실재하는 러시아 역사이지만, 호텔 안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은 에이미 토울스가 상상력으로 그려낸 허구의 이야기이다. 그리고 바로 그 사실과 허구의 경계에서 반짝 반짝 빛나는 마법과도 같은 순간이 만들어 진다.

에이미 토울스는 한 작품의 완성에 4년의 집필과 1년의 독서 시간이 필요하다고 밝힌 적이 있다. 40대 후반의 늦은 나이에 발표한 데뷔작 <우아한 연인> 2011년 작이고, 두 번째 작품인 <모스크바의 신사> 2016년 작이다. 그러니 지금 집필 중인 1950년대 뉴욕을 배경으로 한 소설은 아마도 2020년 이후에나 만나게 될 것 같다. 하지만 기다림의 시간이 전혀 아깝지 않은, 그 시간만큼을 고스란히 보상해 주는 작가이기에 벌써부터 다음 작품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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