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다는 말은 차마 못했어도 슬로북 Slow Book 3
함정임 지음 / 작가정신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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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엔 그 책이 왜 좋은지 몰랐다. 한 페이지를 읽는 데도 몇 시간씩 고투해야 했고, 시험 때에는 통째로 외워야 했고, 정신을 집중해 낭독을 듣고 또박또박 써내야 했다. 대학 3학년 봄에서 여름까지 소설 전공 강독 수업은 그렇게 지독하게 흘러갔다. 세월이 지난 뒤 다시 그 책을 펼쳐보리라고, 소설을 쓸 때마다 숨을 쉬듯 함께하리라고 그땐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괜찮아?'라는 말만큼 뭉클하고, 먹먹한 표현이 또 있을까. 이는 상대의 마음을 헤아리고, 안위를 걱정하고, 입장을 배려하는 따뜻한 말이다. 누군가 나에게 괜찮냐고 물어올 때, 사실 나는 괜찮지 않은 적이 더 많았다. 내가 누군가에게 괜찮냐고 물어보고 싶을 때, 사실 마음으로 먼저 짐작이 되어 차마 말을 꺼내지 못한 적이 더 많았다. 매주, 매달 사건이 터지고, 가까이에서 멀리에서 재난과 재앙이 닥쳤던 작년, 그리고 올해를 우리는 견뎌왔다. 함정임 작가는 바닷가 서재에서 추모의 마음으로 애도 일기를 쓰듯, 혀끝에 맴돌던 말들을 여름의 안부로 건넨다. 당신의 여름은 괜찮습니까. 라고.

작가는 일주일 중 하루 이틀은 온종일 서재에 머무는데, 그때 창밖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하늘과 바다와 언덕, 그리고 그들 풍경 속을 들고 나는 구름과 새와 배들이라고 한다. 바다가 보이는 달맞이 언덕의 서재에서 글을 쓰는 작가를 상상하니, 글 속에서도 바다 내음이 나는 것 같아 설레인다. 이 책에는 다양한 작가의 사유가 담겨 있는데, '소설가'라는 작가의 일상이 고스란히 보여 굉장히 흥미로웠다. 그녀가 읽었던 책에 대한 소개나, 책 속의 문장들이 옮겨져 있기도 하고, 그녀가 대학에서 가르치는 창작 수업에 대한 이야기도 있으며, 낯선 곳으로 여행을 떠났던 날의 기록들도 담겨 있다. 다양한 장소에서, 전부 다른 사유가 펼쳐지고 있지만, 그 처음과 끝은 모두 글쓰기와 작가라는 존재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진다. '하찮지만 고유한 삶의 편린들'은 수십 년 동안 글쓰기를 직업으로 삼아온 이의 그것이기에 매혹적이다.

현대의 속성은 견고한 것들이 촛농처럼 녹아 내리고, 깃털처럼 부유하는 세계이다. 21세기의 시공간은 더 이상 하나가 아니기에 어떤 것도 고유하지 않다. 세상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신문 지면의 힘은 인터넷 매체 환경에서 산산이 흩어졌다. 오로지 문학만이 덧없음에 맞서 내가 겨우 존재한다는 것을, 세상이 때로 아름답다는 것을 되새겨줄 뿐이다.

이 책은 작가정신의 '슬로북' 시리즈 세 번째 책이다. 백민석의 쿠바 여행 에세이 <아바나의 시민들>, 박상의 본격 음악 에세이 <사랑은 달아서 끈적한 것>에 이어 그 세 번째 시리즈를 읽게 되었다. 속도지상주의 시대에느려질 수 있음의 가능성을 누리면서, 자신만의 속도를 찾아내는 발상의 전환을 꾀할 것을 권하는 것이 '슬로북' 시리즈의 목적이라고 하는데, 느리게 읽는 독서의 진정한 즐거움을 맛볼 수 있게 해준다. 각기 다른 삶의 방식에 대한 이야기들은 낯설기도 하고, 익숙하기도 해서 '마음의 속도'로 읽는 다는 것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만들어 주고 있다.

소설가란 단 한 순간도 쓰지 않으면 사는 데 의미가 없다고 자각한 사람들이라고 한다. 그런데 그것은 작가만의 운명이 아니라고 그녀는 말한다. 모든 인간의 속성이되, 대부분 쓰지 않을 뿐이라고. 왜냐하면 우리는 본능적으로 이야기를 사랑하는 존재, 끊임없이 이야기를 하고 싶고, 듣고 싶은 호모 나랜스들이니 말이다. 그러니 긴긴 여름 끝자락, 폭풍우와 뙤약볕을 견뎌낸 붉은 열매 같은 책들을 통해 충만한 에너지를 얻어 보면 어떨까. 여기서 작가가 소개하고 있는 책들도 좋고, 살면서 읽어 왔던, 혹은 지나쳐 왔던 책들도 좋을 것이다. 내 안에 웅크리고 있는 마음을 들여다보고 보듬어 안아주는 시간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리고 우리가 삶을 살아가면서 필요한지 말해주는 작가의 목소리가 책장을 덮은 뒤에도 귓가에서 들리는 듯한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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