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스크바의 신사
에이모 토울스 지음, 서창렬 옮김 / 현대문학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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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지구상에서 인간이 존재한 곳에서는 언제나 추방당한 사람들이 있었다. 원시 부족에서 가장 앞선 사회에 이르기까지, 같은 구성원들로부터 짐을 꾸려 변경을 넘어가서 다시는 자신이 살던 땅에 발을 들여놓지 말라는 말을 들어야 했던 사람들이 종종 있었다. 어쩌면 그것은 당연한 일일 터였다. 추방은 인간 희극의 제1장에서 하느님이 아담에게 내린 형벌이었다. 그리고 몇 페이지 뒤에서 하느님은 카인에게도 그 벌을 내렸다. 그렇다, 추방은 인류의 탄생만큼이나 오래되었다. 그런데 러시아인들은 국외가 아니라 자국 땅으로 추방하는 개념을 터득한 최초의 민족이었다.

러시아는 한 세대도 안 되는 기간에 세계대전과 내전, 두 번의 기근, 그리고 적색 테러를 겪으며 격변기를 거쳐 오고 있었다. 1922, 서른세 살의 알렉산드르 일리치 로스토프 백작은 내무 인민위원회 소속 긴급 위원회에 출두해 '종신 연금형'을 선고 받게 된다. 그것은 바로 그가 4년 동안 거주해 온 모스크바 메트로폴 호텔 밖으로 나갈 수 없다는 것, 호텔을 벗어나면 바로 총살될 거라는 말이었다. 성 안드레이 훈장 수훈자,, 경마 클럽 회원이고, 사냥의 명인인 백작은 어린 시절부터 방이 스무 개나 되고 집안 일을 해주는 사람이 열 네 명이나 되는 대저택에서 자라온 유서 깊은 집안 출신이었다. 그는 어떤 상황 때문에 전쟁 전에 러시아를 떠나 파리에 있었지만, 혁명 후 로마노프 왕조가 몰락했을 때 다시 고향으로 돌아 왔다. 그리고 이제 그는 메트로폴 호텔 스위트룸에서 허름한 하인용 다락방으로 거처를 옮기고, 귀족으로서 누리던 모든 특혜를 회수당한다. 이제 백작에게 호텔은 감옥이자 세상의 전부가 되어 버린 것이다.

평생을 연금 상태로 지내야 하는 형을 선고 받는 다면 어떨까. 그게 아무리 호화찬란한 호텔이라 할지라도, 그곳에서 주어진 공간이란 9제곱미터 정도에 불과하다면 말이다. 게다가 태어나서 평생을 당연한 듯이 누리던 세련되고 고상한 취향들을 더 이상 유지시킬 수 없는 상황이라면 말이다. 하지만 백작은 우울해하거나, 의기소침해 있지 않고 긍정적인 성격으로 보란 듯이 새 삶에 적응해 나간다. 아홉 살 여자 아이 니나의 친구가 되어 호텔의 이곳 저곳을 누비고 다니며 모험을 하기도 하고, 유명한 여배우의 연인이 되어 그녀와 사랑에 빠지기도 하고, 날마다 새로운 손님과 사건이 끊이지 않는 호텔을 배경으로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아무튼 바로 얼마 전에 호텔 로비에서 잠깐 동안 만난 사람에 관한 첫인상이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줄 수 있겠는가? 아니, 그 누구든 간에 그 사람에 관한 첫인상이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줄 수 있겠는가? 첫인상이라는 것은 단지 하나의 화음이 우리에게 베토벤에 관해 말해줄 수 있는 것, 또는 하나의 붓 터치가 우리에게 보티첼리에 관해 말해줄 수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본질적으로 인간은 너무 변덕스럽고 너무 복잡하고 엄청나게 모순적이어서 우리가 숙고해야 할 뿐만 아니라 거듭 숙고해야 하는 존재다.

에이미 토울스의 첫 작품이었던 <우아한 연인>을 너무 좋아했던 터라, 정말 오랜만에 만나게 되는 그의 두 번째 작품에 굉장히 설레었다. 724페이지라는 두툼함도 기다림에 대한 보상 같은 느낌이었고 말이다. 전작이 세계 대공황의 그림자가 드리운 1938년 미국 뉴욕을 배경으로 했다면, 이번 작품은 20세기 초 볼셰비키 혁명 이후 소비에트 러시아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두 작품 모두 고전 문학을 연상시키는 작품과 분위기가 매혹적이고, 우아함의 극치를 보여주는 등장인물들 역시 사랑에 빠지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우아한 연인>에서 케이트와 팅커가 우연히 식당에서 만나 처음으로 단 둘이서 대화를 나누던 장면은 지금도 내 가슴을 쿵 내려앉게 만든다.

 

<모스크바의 신사>에서도 인상적인 장면들이 많았는데, 특히나 마음에 들었던 순간은 이것이다. 백작이 자신이 지내던 옛 스위트룸을 찾아 갔다 와서는 오후의 차 한잔을 누릴 수 없는 공간이 되지 않는 자신의 새로운 방에 우울해 하다가, 옷장과 벽이 만나는 곳에서 숨겨진 공간을 발견하게 된다. 자신의 방과 똑같은 구조를 지닌 그 방에는 사용하지 않는 침대 틀이 보관되어 있었고, 백작은 방 안의 모든 것을 밖으로 끌어내고 직접 수리를 해서 자신만의 비밀 서재를 만들어 낸다. 그는 그곳을 꾸미기 위해 지하실에 가서 손님이 버리고 간 두꺼운 소설책 중에서 열 권을 챙겨 와 그 중의 한 권을 펼쳐 든다. 그리하여 백작은 통제와 관리와 타인의 의도 아래 존재하는 방 외에 비밀리에 존재하는 자신만의 서재를 갖게 된 것이다. 그것이 상징하는 바가 너무도 뭉클해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백작은 다시 의자에 앉아서 한 발을 커피 탁자 모서리에 올린 채 의자가 뒷다리 두 개로 균형을 잡을 때까지 뒤로 기울인 다음 첫 문장으로 눈을 돌렸다.

 

아홉 살 꼬마 숙녀도 어엿한 어른처럼 대할 수 있고, 나이든 잡역부와 함께 커피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기도 하는, 인간적인 매력이 넘치며 여전히 세련되고 우아한 태도를 잃지 않는 백작은 점차 호텔에서 꼭 필요한 존재가 되어 간다. 이야기의 주요 배경인 모스크바 메트로폴 호텔은크렘린 궁전붉은광장’, ‘볼쇼이 극장과 가까운 곳에 위치한, 실재하는 장소이다. 특권 계층, 사유 재산을 인정하지 않던 시대에 러시아 역사의 중심에 있었던 메트로폴 호텔은 외교의 장소이자 체제의 건재함과 풍요로움을 대외에 선전하는 특별한 목적을 가진 곳이기도 했다. 호텔 바깥에서 일어났던 모든 일들은 실재하는 러시아 역사이지만, 호텔 안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은 에이미 토울스가 상상력으로 그려낸 허구의 이야기이다. 그리고 바로 그 사실과 허구의 경계에서 반짝 반짝 빛나는 마법과도 같은 순간이 만들어 진다.

에이미 토울스는 한 작품의 완성에 4년의 집필과 1년의 독서 시간이 필요하다고 밝힌 적이 있다. 40대 후반의 늦은 나이에 발표한 데뷔작 <우아한 연인> 2011년 작이고, 두 번째 작품인 <모스크바의 신사> 2016년 작이다. 그러니 지금 집필 중인 1950년대 뉴욕을 배경으로 한 소설은 아마도 2020년 이후에나 만나게 될 것 같다. 하지만 기다림의 시간이 전혀 아깝지 않은, 그 시간만큼을 고스란히 보상해 주는 작가이기에 벌써부터 다음 작품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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