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주어 사전 - 보리라고는 보리차밖에 모르는 당신을 위한 최소한의 맥주 교양
리스 에미 지음, 황세정 옮김, 세노오 유키코 감수 / 웅진지식하우스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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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원한 맥주 한 잔이 절실한 요즘 날씨, '보리라고는 보리차밖에 모르는 당신을 위한 최소한의 맥주 교양'이라는 귀여운 부제가 붙어 있는 책을 만났다. 워낙 맥주 종류도 많거니와, 편의점에서 한참 수입 맥주 세일도 하고 있는데도 제대로 아는 맥주라고는 손가락에 꼽을 정도였다. 수입 맥주 네 캔에 만 원, 혹은 여섯 캔에 만 원 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그럼에도 늘 사던 것만, 먹던 것만 사다 보니 아쉽기도 했었다. 그런데 책을 통해서 '맥주어'를 습득할 수 있다면, 조금 더 특별하고 나에게 맞는 맥주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기대가 된다.

이 책은 약간의 맥주 지식만으로 그날그날 기분에 따라 자신에게 맞는 맥주를 마시고 싶은 사람들을 위한 맥주 교양 입문서라고 할 수 있다. 맥주의 역사부터 스타일과 풍미, 페어링, 맥주 공정, 맥주에 관련된 인물과 명언, 세계 유명 브루어리, 브루 펍까지 맥주에 관한 시시콜콜한 맥주어들을 귀여운 일러스트와 함께 읽을 수 있어 흥미롭다. 특히나 사전 형식을 취하고 있어 맥주어 하나하나 가볍게 읽으면서 꼬리에 꼬리를 물다 보면 어느새 맥주어 삼매경에 빠지게 되는 책이기도 하다.

맥주의 풍미를 나타내는 용어, 집에서 맥주를 맛있게 즐기기 위한 방법, 독특한 모양과 각각의 기능이 설명되어 있는 다양한 맥주잔들, 맥주를 사랑한 명사들의 명언들, 칵테일 만드는 방법 등... 맥주를 사랑하는 이들을 위한 유용한 팁들이 가득하다.

맥주는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맥주와 마피아는 어떤 관계일까? 러시아어로건배는 뭐라고 할까? 세상에서 가장 크고 비싼 맥주는? 세상에서 가장 독한 맥주는? 런던에서 맥주 홍수가 일어났다는 건 진실일까, 거짓일까? 스타우트에 어울리는 안주는 무엇일까? 바이젠에 어울리는 샌드위치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필스너를 가장 맛있게 즐길 수 있는 맥주잔은 어느 것일까? 어떻게 해야 맥주를 가장 예쁘게 따를 수 있을까? '맥주어'를 맥주와 관련된 쓸데없지만 알아두면 은근히 유용한 어휘들이라고 소개하고 있지만, 사실 맥주 전문가가 될 생각까진 없는 일반인들에게도 필요한 정보들이 많은 책이었다.

 

개인적으로는 맥주와 지적인 안주의 콜라보레이션이 눈길을 끌었다. 전 세계의 다양한 안주 요리들이 정리되어 있는 항목도 재미있었고, 맥주의 종류에 따라 어울리는 치즈의 조합도 흥미로웠다. 알 듯 말 듯 궁금했던 맥주에 관한 지식들을 쏙쏙 골라서 볼 수 있어서 좋았고, 귀여운 그림들이 가득해서 쉽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이제는 펍이나 편의점에서도 그 수많은 맥주 중에서 그날의 기분이나 컨디션에 따라 골라 마실 수 있을 것 같다. 게다가 맥주에 관련된 이렇게 시시콜콜한 맥주어들 덕분에 좋은 사람들과 함께하는 술자리를 더욱 재미있게 해줄 수도 있을 것 같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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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자기가 들려주는 이야기
톰 행크스 지음, 부희령 옮김 / 책세상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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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타자기였다. 베티는 타자기를 본 적이 한 번도 없음에도 알 수 있었다. 기계는 매우 낡았고, 캐리지가 좌우로 움직이면서 활처럼 휘어진 망치들로 종이를 때려서 글씨를 인쇄했다. 마치 빅토리아 시대에 만들어진 물건처럼 보였다. 폴은 자판을 다섯 번 두드린 다음-클럭 클럭 클럭 클럭 클럭- 타자기 안쪽의 레버에 기름 한 방울을 떨어뜨렸다. 그리고 타자기를 다시 두드렸다.    p.158

배우 지망생인 수는 뉴욕에 온지 7주의 시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침실 하나 딸린 아파트에서 룸메이트들에게 눈치를 받으며 비좁은 거실의 소파에서 지내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 그녀는 알 수가 없었다. 뉴욕에 올 때만 해도 자신의 재능에 대한 믿음과 영원히 잠들지 않는 도시가 약속하는 미래에 대한 기대가 있었지만, 지금 그녀에겐 아무 것도 없었다. 저축은 바닥 났고, 어떤 에이전트에게서도 연락을 받지 못했으며, 그럼에도 끊임없이 이력서를 쓰고, 지하철을 타고 거리를 헤매고 다녔지만, 끔찍한 하루를 보내고 거리에서 큰 소리로 울고 있는 여자를 도와주려 걸음을 멈추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다 이 년 전 뮤지컬 공연 당시 만났던 공연 전문가 밥을 우연히 만나게 된다. 그리고 함께 그의 집으로 가서 그 동안 있었던 모든 것을 털어놓게 된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관현악 연주곡, 달그락거리는 찻주전자 소리, 그리고 우유를 넣은 달콤한 차, 오레오 쿠키 세 개, 그렇게 포근하고 아늑한 거실에서 수는 몇 달 만에 처음으로 숨을 편하게 쉬며 푹신한 의자에 안기듯 등을 기댄다.

이 이야기는 소설집에 실린 이야기 중에 '출연자 명단'이라는 작품이다. 다양한 등장 인물들이 모두 다른 배경 속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전반적인 분위기가 다 이런 느낌이었다. 인간적이고, 뭉클하고, 현실적이면서도 희망을 놓치지 않고, 전반적으로 선의와 믿음을 잃지 않는 인물들이 가득한 따뜻한 이야기들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물론 이야기 자체는 모두 다른 색깔과 분위기를 가지고 있어, 옴니버스 영화라도 보는 듯한 재미가 있었다. 친구 사이였다가 연애를 시작하면서 그녀의 빡빡한 일정을 따라가느라 지쳐 버린 남자의 이야기, 2차세계대전에서 입은 정서적·신체적 상처를 보듬으며 살아가는 재향군인의 이야기, 갑작스럽게 스타덤에 올라 말도 못하게 바쁜 영화 홍보 여행을 하게 된 풋내기 신인 배우의 이야기, 서핑을 하러 해변에 갔다가 아버지의 비밀스러운 사생활을 목격하게 되는 청년의 이야기 등등... 1930년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뉴욕과 라스베이거스, 교외의 주택가, 서퍼들이 모여드는 해변 등을 배경으로 미국인들의 삶을 예리하고 뛰어난 통찰로 그려내고 있다.

 

"아직 임신을 한 것은 아니지만 미래의 제 아이들에게 언젠가는 마음으로 쓴 명상록을 읽게 하고 싶어요. 저는 종이 한 장 한 장에 직접 한 글자씩 타자로 쳐서 쓸 거예요. 그리고 진정한 의식의 흐름을 기록한 종이들을 신발 상자에 잘 넣어둘 거예요. 아이들이 그것을 읽을 수 있을 만큼 자랐을 때 인간의 조건에 대해 깊이 생각해볼 수 있게요!" 그녀는 자신이 고함을 지르고 있음을 깨달았다. "제 아이들은 그 종이들을 뒤적이면서 이렇게 말하겠죠. '그러니까 엄마가 이것을 타자기로 기록하느라 그렇게 딸깍거린 거였구나.' 죄송해요. 제가 고함을 지르고 있군요!"  p.283

이 책의 작가인 톰 행크스는 실제로도 타자기의 열렬한 애호가로 알려져 있다. 평소에 타자기로 글을 써왔고, 1978년부터 세계 각지의 빈티지 타자기를 100개 넘게 수집했으며, 아이패드용 타자기 앱을 출시할 정도로 그의 타자기 사랑은 유명하다. 그렇게 타자기 애호가이자 수집가답게 타자기에 영감을 받아 써 내려간 이 책을 통해 작가로 첫발을 내딛으며 "타자기 자체에 대한 이야기가 아닌, 각기 다른 타자기들로 썼을 법한 다양하고 기발한 이야기"를 선보이겠다고 했는데, 이 책에 실린 17편의 이야기들은 각각 다른 색깔을 지니고 있어 더욱 흥미로웠다.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배우로서 정점을 이미 찍은 그이지만, 그것에 만족하지 않고 시나리오 작가이자 영화감독, 애니메이션 성우, 그리고 제작자로도 활약하고 있다. 그 화려한 커리어에 소설가라는 타이틀까지 거머쥐게 되었으니, 그의 다재다능함은 끝이 어디인지 알 수 없을 것 같다.

사실 '타자기'라는 아이템은 아날로그적인 향수를 불러오는 물건이기도 하지만, '작가'의 상징과도 같은 것이라 대체 어떤 이야기를 만들어냈을 지 매우 궁금했다. 물론 한편으로는 배우가 소설을 써봤자 얼마나 대단한 글을 썼을까 싶은 마음도 살짝 있었던 게 사실인데, 이 소설집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뛰어난 수준이라 읽는 내내 감탄하게 되었다. 배우로서의 섬세한 감수성이 고스란히 담겨 있고, 유쾌하고 재치 넘치는 대목들과, 인간적이고 잔잔한 감동을 자아내는 이야기들도 훌륭했다. 톰 행크스가 배우로서 다양한 영화에 출연하면서 겪었던 경험들이 바탕이 되어 배우들의 이야기도, 우주 여행을 가려는 이야기도, 전쟁에 참전한 군인의 이야기도 그려낼 수 있었을 것이다. 그가 앞으로도 배우로서의 관록을 바탕으로 더 깊이 있는 이야기를 그려내는 작가가 되길, 그의 다음 작품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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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크맨
C. J. 튜더 지음, 이은선 옮김 / 다산책방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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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그리스도 선생도 지적했다시피 우리 가운데 죄가 없는 자가 어디 있겠는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과거에 돌이키고 싶은 일, 후회하는 일을 저지른 적이 있을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실수를 한다. 우리 안에는 선과 악이 공존한다. 어떤 사람이 끔찍한 짓을 한 번 저질렀다고 해서 그가 지금까지 쌓은 선한 업적이 전부 물거품으로 돌아간다고 할 수 있을까? 아니면 어떤 선행으로도 벌충이 되지 않을 만큼 나쁜 일이 있을 수 있을까?  p.211

평화로운 작은 마을 앤더베리의 인적 드문 숲 속에서 한 소녀의 머리가 황갈색 낙역 더미 위에 놓여 있다. 시신의 나머지 부분은 손이 닿지 않는 숲 속의 다른 은밀한 곳에 여기저기 숨겨져 있었고, 누군가 다가와 소녀의 머리를 들고는 분필 조각이 몇 개 들어 있는 배낭 안에 조심스럽게 넣는다. 그렇게 소녀의 머리는 영영 자취를 감추고 만다. 이 끔찍한 사건의 목격자는 열두살 소년들이었다. 그곳의 나무에는 분필로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시신의 나머지 부분이 있는 곳으로 안내하는. 그날 이후 30년이 지난 어느 날, 학교 선생님이 된 마흔 두 살 에디는 초크맨의 표식이 담긴 편지를 받게 된다. 까만 아스팔트와 하얀 분필의 선명한 대조.. 그는 오래 전 기억을 떠올린다. 글씨 없이 막대행맨이 목에 올가미를 두르고 있는 편지와 함께 흰색 분필 조각이 함께 들어 있었다. 그렇게 사건은 다시 시작된다.

이야기는 2016년 현재와 1986년 과거를 끊임없이 교차하면서 진행된다. 30년 전에 살인 사건이 있었고, 에디와 친구들이 시신을 목격했다는 것은 초반에 드러나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일이 벌어진 것인지는 꽤 이야기가 진행될 때까지 알 수 없다. 아직 고향에 남아 있는 에디와 개브, 호포는 여전히 친구로 지내고 있지만 예전만큼의 관계는 아니다. 그리고 오랜 만에 에디를 만나러 온 미키는 자신이 그녀를 살해한 범인이 누구인지 안다는 알 수 없는 소리를 하고는 사라지고, 이후 시신으로 발견된다. 대체 미키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그리고 에디가 악몽을 꾼 다음 날 집에서 하얀색 초크맨 그림이 수십 개 그려져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과연 초크맨이 다시 나타나기 시작한 것일까.

 

어른이 된다는 건 환상이다. 따지고 보면 실제로 어른이 되는 사람이 있을까 싶다. 그냥 키가 커지고 털이 많아질 뿐이다. 나는 나에게 운전면허가 주어졌고 술집에서 술을 마셔도 잡혀가지 않는다는 데 지금도 가끔 놀랄 때가 있다.

어른이라는 허울을 걷으면, 한 해, 두 해가 태연하게 흘러가는 동안 켜켜이 쌓인 경험을 헤치면 까진 무릎으로 코를 흘리며 엄마, 아빠를 찾는..... 그리고 친구를 찾는 어린애가 숨어 있다.   p.260

오래 전 그들이 열두 살 이었던 시절, 에디 먼스터, 뚱뚱이 개브, 메탈 미키, 호포 그리고 니키. 이렇게 다섯 명의 친구가 있었다. 그들은 해마다 강가의 공원에서 열렸던 축제에서 우연히 놀이기구가 부러지는 사고를 목격하게 된다. 에디는 새로 학교에 부임한 선생님 헬로런 씨와 함께 다친 소녀를 도와 영웅이 되고, 댄싱 걸은 기적적으로 목숨을 부지한다. 에디는 이후 숲으로 가는 길에 공원에 있던 헬로런 선생님을 만나고, 취미로 그림을 그리던 그는 어린 시절 분필로 그림을 그렸던 이야기를 해준다. 아이들은 분필로 그림을 그리는 장난에 빠져들어, 친구에게 보내는 비밀 메시지를 주고받게 되고, 이렇게 초크맨이 등장할 때마다 섬뜩한 사건이 벌어지게 된다.

작가의 데뷔작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탄탄한 구성과 예리한 문장, 그리고 독창적인 플롯과 긴장감을 유발시키는 솜씨까지 너무도 완벽한 작품이었다. 사실 과거에 있었던 살인 사건의 목격자들에게 범인처럼 보이는 이의 경고 편지가 도착했다고 하면, 그들이 한 명씩 모두 죽겠구나, 혹은 억울한 누군가가 남겨진 이들에게 복수를 하겠구나, 그것도 아니면 이제부터 연쇄 살인 사건이 이어진다는 경고이겠구나. 싶은 생각부터 바로 머리에 떠오를 것이다. 그런데 이 작품은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를 풀어 나간다. 다섯 명의 친구와 그들의 부모, 이웃과 선생님들을 비롯해 작은 마을에 사는 이들의 관계와 일상을 치밀하게 묘사하면서 드라마를 구축하고, 현재와 과거를 교차시키면서 아주 조금씩 숨겨져 있는 비밀을 풀어내고 있다. 굉장히 치밀하고 긴장감 넘치게, 그러면서도 오싹하고 으스스하게 말이다. 그래서 재미와 공포 면에서 감히 스티븐 킹의 작품과 비교해도 좋을 만큼 머리칼이 쭈뼛 서게 만드는 이야기의 힘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도 든다. 인간의 집착, 욕망, 폭력이 교차하고, 우정과 상실 등 인간의 나약한 마음과 십대들의 성에 대한 호기심을 둘러싼 이야기가 그야말로 빈틈없이 공고하게 만들어져 있고, 그 속에서 어린 시절에의 향수까지 불러일으키는 매력적인 작품이다. 이 작품을 읽기 전에 절대 예단하지 말 것.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을 보여줄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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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걸 비포
JP 덜레이니 지음, 이경아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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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들이라뇨?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그는 나를 보며 순진무구한 아이 같은 미소를 짓는다. ", 그 사람이 말 안 했나요? 당신 전에 살았던 사람들 말이에요. 아무도 영원히 남지는 못했어요. 아시다시피, 그게 바로 핵심이죠."  p.212

 

에마는 얼마 전 집에서 강도를 당했다. 그 기억에서 벗어나고자 남자친구인 사이먼과 함께 새로운 집을 구하는 중이다. 제인은 얼마 전 상사와의 불륜으로 생긴 아이를 사산했다. 상담 치료를 받았지만 효과가 없었고, 직장에는 사직서를 냈다. 아이를 위한 모든 것이 있었던 집을 떠나 새로운 곳으로 이사를 하려고 한다. 그리고 두 여자는 완벽하고 아름다운 집을 발견하게 된다. 바로 원 폴게이트 스트리트! 보는 순간, 세상에! 라는 감탄사부터 나오는 그런 집이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근사해서 보는 순간 숨이 턱 막히는 집이다. 극도의 미니멀리즘으로 인테리어 잡지에서나 나올 법한 그런 집! 하지만 이 집에는건축가가 세입자를 승인해야 한다는 까다로운 조건이 붙어 있다. 기다란 신청서 양식을 작성해 면접을 보고 통과해야만 입주가 가능하다. 그리고 에마와 제인은 그 면접을 통과한다. 각각 과거와 현재에 그들은 같은 집에 살게 된 것이다.

그 곳에는 초인종도, 문손잡이도, 우편함도 없다. 모든 건 앱 하나로 제어할 수 있다. 스마트폰에 있는 디지털 키 혹은 디지털 팔찌로 비밀번호를 해제하고 문을 열 수 있다. 정원과 돌담 쪽으로 난 커다란 창문들에서는 빛이 쏟아져 들어오고, 벽과 바닥은 모두 같은 빛깔의 석재로 시공되어 있으며, 가구는 거의 없이 텅 비어 있다. 문도, 선반도, 사진도, 창틀도, 전기 콘센트도, 조명도, 심지어 전기 스위치조차 없다. 조명부터 샤워기 수온까지 집안 곳곳의 시설이 거주자의 취향을 반영해 자동으로 조절되어 그런 것들이 다 필요가 없는 집인 것이다. 물론 면접에 합격해서 이 집에서 살 수 있게 된 후에도 지켜야 할 규칙과 하지 말아야 할 금지사항들이 가득하다. 러그나 양탄자 금지, 장식품 금지, 책도 금지, 언제 어느 때고 바닥에 물건이 어질러져 있어서는 안 되고, 규칙을 잘 지키고 있는지 정기적으로 점검을 받아야 한다. 각종 금지 조항이 가득한 이백여 개의 규칙을 지켜가며, 정리정돈부터 삶의 방식까지 관여하는 철저한 통제를 받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집에서 살고 싶을 만큼 완벽한 공간인 것이다.

 

나는 변해야 한다. 상황을 명료하게 보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피해자가 아니라.

언젠가 캐럴이 그랬다. 우리가 바꿀 수 있는 사람은 자기 자신밖에 없고 자기 자신을 바꾸는 일조차 믿을 수 없을 만큼 힘든데도, 우리는 정작 남을 바꾸기 위해 가진 에너지를 모두 투자한다고. 이제야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다. 나는 이 엿 같은 일들이 벌어지게 한 사람과는 다른 사람이 될 각오가 선 것 같다.  p.356

굉장히 세련된 방식으로 서스펜스를 만들어 내는 심리 스릴러이다. 이야기는 과거 원 폴게이트 스트리트에 살던 에마와 현재 이 집에 살고 있는 제인의 관점이 번갈아 가며 서술된다. 같은 장소를 배경으로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진행되는 구조는 그 반복 속에서 미묘하게 어긋나는 부분들로 인해 엄청난 긴장감을 만들어 낸다. 제인은 과거 이 집에 살았던 에마의 죽음에 대해 알게 되고, 집주인 에드워드와 관계를 가지며 점점 더 과거의 죽음에 대해 의심을 품게 된다. 에마는 살해된 것일까. 혹은 계단에서 미끄러지는 사고였던 것일까. 죽은 에마를 위해 여전히 이 집에 들러 꽃을 두고 가는 남자는 말한다. 에드워드가먼저 그녀의 마음을 독으로 물들인 후 목숨을 빼앗았다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인은 과거 에마처럼 에드워드에게 점점 더 마음이 끌린다. 그리고 오래 전 죽은 에드워드의 아내와, 과거 에마와 자신이 매우 닮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갈색 머리에 푸른 눈, 매우 창백한 피부, 게다가 서 있는 자세까지 그들은 너무도 닮아 있었다.

에드워드는 과거 에마를 데려갔던 곳에 지금의 제인을 데려가고, 같은 상황에서 같은 대사를 한다. 하지만 외모가 닮은 에마와 제인은 그의 같은 행동과 대사에 전혀 다른 반응과 행동을 보이고, 바로 그런 지점들이 독자로서 우리가 스릴과 재미를 느낄 수 있도록 도와 준다. 제인의 삶에 계속 에마의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결국 제인이 에마의 죽음에 얽힌 비밀을 파헤쳐가는 과정 역시 극의 긴장감을 이끌어 주고 있다. 그렇게 탄탄한 구성과 독특한 설정, 그리고 우아하고 군더더기 없는 문장과 페이지마다 흐르는 묘하게 섹시한 분위기까지.. 이 작품을 읽는 동안 단 한 순간도 다른 생각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몰입하게 만들어 준 이야기였다. 만약 완벽한 집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당신은 어떤 것까지 감수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완벽한 삶에 대한 갈망이 어떻게 극단적인 방식으로 실현될 수 있는 지를 보여주는 기가 막힌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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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민의 겨울 토베 얀손 무민 연작소설 5
토베 얀손 지음, 따루 살미넨 옮김 / 작가정신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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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세상이 겨울잠을 자고 있어. 나만 혼자 잠들지 못하고 이렇게 깨어 있고. 며칠이고 몇 주고 나 혼자 이렇게 걷고 또 걸으며 떠돌아다니다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눈덩이가 되어 버리고 말겠지.’

그때 숲이 끝나고 무민의 발 아래로 새로운 골짜기가 펼쳐졌다. 맞은편으로 외로운 산이 보였다. 남쪽으로 파도처럼 이어지고 있는 산줄기가 이제껏 그렇게 외로워 보인 적이 없었다.   P.25

어린 시절 겨울잠을 자는 동물들에 대한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 굉장히 신기했던 기억이 난다. 이들은 기온이 떨어지면 동면 준비를 시작해서, 다음 해 봄이 되어 기온이 다시 올라가면 겨울잠에서 깨어난다고 하는데.. 어린 마음에 사람도 오랜 시간 동안 겨울잠을 자게 된다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했었다. 바깥에 눈은 소복이 쌓여 있고, 하늘은 까맣고, 길에는 다니는 사람 하나 없는 추운 겨울, 따뜻한 집 안에서 가족들과 함께 바깥 세상과는 완전히 차단된 채 오붓하게 겨울잠을 어떨까 싶었던 거다. 고요한 집 안 가득, 다가올 봄에 대한 설레이는 기대감으로 모두 한 껏 휴식을 취할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겨울잠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세상이 모두 잠들어 있는데, 나 혼자만 겨울잠에서 깨어 버린다면 어떨까.

 

"엄마! 일어나 보세요! 온 세상이 사라져 버렸어요!"

온 세상이 하얗게 변한 한 겨울의 무민 골짜기, 무민 가족은 해마다 11월부터 4월까지 겨울잠을 잤다. 가족들은 모두 전나무 잎을 잔뜩 먹었고, 침대 옆에는 이른 봄에 필요한 여러 가지 물건들이 놓여 있었다. 그런데, 무민들이 처음으로 겨울잠을 자기 시작했을 때부터 이제껏 단 한번도 일어난 적 없는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무민이 겨울잠에서 깨 버렸고, 다시 잠들지 못했던 것이다. 무민은 가족들을 깨우려고 해봤지만, 다들 일어나지 않았다. 시계들은 멈춘 지 오래였고, 따뜻한 어둠 속에서 무민은 끔찍하게도 혼자 내팽개쳐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저 감자를 키우고, 꿈을 꾸면서 평화롭게 살고 싶어 하는 매사 만사태평인 캐릭터 무민은 사실 소심하고 겁 많은 순둥이였다. 그러니 온 세상이 겨울잠을 자고 있는 그 긴 계절을 혼자 어떻게 보내야 할까.

 

집 안에 밤과 침엽수림의 냄새가 들어차자, 무민은 생각했다.

‘나쁘지 않은걸. 가족들도 가끔은 바람을 쐬어야지.’

무민은 계단 쪽으로 나가 흠뻑 젖은 어둠 속을 바라보았다.

무민이 혼잣말했다.

“이제 나는 다 가졌어. 한 해를 온전히 가졌다고. 겨울까지 몽땅 다. 나는 한 해를 모두 겪어 낸 첫 번째 무민이야.”   P.154

이 작품은 토베 얀손이 26년에 걸쳐 출간한무민시리즈 연작소설 여덟 편 중에, 다섯 번째 작품이다. 활기차고 생동감 넘치는 여름과는 상반되는 겨울의 무민 골짜기의 분위기가 낯설기도 하면서, 신비롭기도 하다. 작가가 무민 코믹 스트립을 연재하며 부담을 느끼던 시기인 1957년에 발표한 작품이라 무민의 두려움과 외로움, 책임감을 느끼고 죽음을 경험하는 등 전작보다 심각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 하지만 겨울의 마법을 배워 나가는 무민의 성장기는 놀랍도록 따뜻하다. 사라진 세상에 혼자 버려진 듯한 기분이 든 무민은 집 밖으로 나간다. 그리고 난생 처음 겪게 되는 겨울의 세상과 온 몸으로 부딪치며 조금씩 성장해 간다. 잿빛 어둠이 온 골짜기를 뒤덮고 있었고, 모났던 것은 모두 동글동글해졌으며, 생동감 있는 소리는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 눈을 헤치며 힘겹게 강으로 갔고, 앙상한 가지가 잔뜩 뒤엉킨 재스민 덤불을 보고는 두려움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죽어 버렸어. 내가 잠든 동안 온 세상이 죽어 버렸어.'

아빠의 탈의실에 머물며 꽁꽁 언 바다 밑에서 낚시를 하는 투티키, 눈에 잘 띄지 않고 종잡을 수 없는 이상한 녀석들, 스키를 타고 나타난 헤물렌, 추위를 피해 들이닥친 손님들까지 무민은 다양한 친구들을 만나게 되고... 혹독한 겨울을 헤쳐 나가면서 '누구나 힘든 일은 하나씩 있게 마련이라고. 어쨌든 그렇게 끔찍하지만은 않을지도 모르겠다'고 말이다. 난생처음 눈이 내리는 모습을 보면서 '눈이 이렇게 오는구나. 땅에서 자라는 줄 알았는데'라고 생각하기도 하고, 눈 더미에 풀썩 드러누우면서 이제 겨울도 좋다고 느끼기도 한다. 무민이 눈보라와 씨름하고, 하늘이 초록빛으로 변하는 오로라와 바다에서 어둠을 뚫고 다가온다는 얼음 여왕으로 인해 엄청난 추위를 겪으면서 느끼게 되는 겨울의 풍경들은, 요즘 같은 날씨에 정말 시원한 기분이 들게 한다. 마치 한 여름에 겪게 되는 크리스마스 선물처럼 말이다. 무민이 등장하는 이야기야 언제 읽어도 좋지만, 특히 이 작품은 8월에 읽기에 정말 좋은 작품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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