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세상이 겨울잠을 자고 있어.
나만 혼자 잠들지 못하고 이렇게 깨어 있고. 며칠이고 몇 주고 나 혼자 이렇게 걷고 또 걸으며 떠돌아다니다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눈덩이가 되어 버리고 말겠지.’
그때 숲이 끝나고 무민의 발
아래로 새로운 골짜기가 펼쳐졌다. 맞은편으로 외로운 산이 보였다.
남쪽으로 파도처럼 이어지고 있는 산줄기가 이제껏 그렇게 외로워 보인 적이
없었다. P.25
어린 시절 겨울잠을 자는 동물들에 대한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
굉장히 신기했던 기억이 난다.
이들은 기온이 떨어지면 동면 준비를 시작해서, 다음 해 봄이 되어 기온이 다시 올라가면 겨울잠에서 깨어난다고
하는데.. 어린 마음에 사람도
오랜 시간 동안 겨울잠을 자게 된다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했었다.
바깥에 눈은 소복이 쌓여 있고, 하늘은 까맣고, 길에는 다니는 사람 하나 없는 추운 겨울, 따뜻한 집 안에서 가족들과 함께 바깥 세상과는
완전히 차단된 채 오붓하게 겨울잠을 어떨까 싶었던 거다.
고요한 집 안 가득,
다가올 봄에 대한 설레이는 기대감으로 모두 한 껏 휴식을 취할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겨울잠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세상이 모두 잠들어 있는데, 나 혼자만 겨울잠에서 깨어 버린다면 어떨까.
"엄마! 일어나 보세요! 온 세상이 사라져 버렸어요!"
온 세상이 하얗게 변한 한
겨울의 무민 골짜기, 무민
가족은 해마다 11월부터 4월까지
겨울잠을 잤다. 가족들은 모두
전나무 잎을 잔뜩 먹었고, 침대 옆에는 이른 봄에 필요한 여러 가지 물건들이 놓여 있었다.
그런데,
무민들이 처음으로 겨울잠을 자기 시작했을 때부터 이제껏 단 한번도 일어난 적 없는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무민이 겨울잠에서 깨
버렸고, 다시 잠들지 못했던
것이다. 무민은 가족들을
깨우려고 해봤지만, 다들
일어나지 않았다. 시계들은
멈춘 지 오래였고, 따뜻한
어둠 속에서 무민은 끔찍하게도 혼자 내팽개쳐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저 감자를 키우고,
꿈을 꾸면서 평화롭게 살고 싶어 하는 매사 만사태평인 캐릭터 무민은 사실 소심하고 겁 많은
순둥이였다. 그러니 온 세상이
겨울잠을 자고 있는 그 긴 계절을 혼자 어떻게 보내야 할까.
집 안에 밤과 침엽수림의 냄새가 들어차자,
무민은 생각했다.
‘나쁘지
않은걸. 가족들도 가끔은
바람을 쐬어야지.’
무민은 계단 쪽으로 나가 흠뻑
젖은 어둠 속을 바라보았다.
무민이
혼잣말했다.
“이제 나는 다
가졌어. 한 해를 온전히
가졌다고. 겨울까지 몽땅
다. 나는 한 해를 모두 겪어
낸 첫 번째 무민이야.” P.154
이 작품은 토베 얀손이 26년에 걸쳐 출간한 ‘무민’ 시리즈
연작소설 여덟 편 중에, 다섯
번째 작품이다. 활기차고
생동감 넘치는 여름과는 상반되는 겨울의 무민 골짜기의 분위기가 낯설기도 하면서, 신비롭기도 하다. 작가가 무민 코믹 스트립’을 연재하며 부담을 느끼던 시기인 1957년에 발표한 작품이라 무민의 두려움과
외로움, 책임감을 느끼고
죽음을 경험하는 등 전작보다 심각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
하지만 겨울의 마법을 배워 나가는 무민의 성장기는 놀랍도록 따뜻하다. 사라진 세상에 혼자 버려진 듯한 기분이 든 무민은
집 밖으로 나간다. 그리고
난생 처음 겪게 되는 겨울의 세상과 온 몸으로 부딪치며 조금씩 성장해 간다.
잿빛 어둠이 온 골짜기를 뒤덮고 있었고, 모났던 것은 모두 동글동글해졌으며, 생동감 있는 소리는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 눈을 헤치며 힘겹게
강으로 갔고, 앙상한 가지가
잔뜩 뒤엉킨 재스민 덤불을 보고는 두려움에 사로잡히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