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기가 들려주는 이야기
톰 행크스 지음, 부희령 옮김 / 책세상 / 2018년 8월
평점 :
절판


그것은 타자기였다. 베티는 타자기를 본 적이 한 번도 없음에도 알 수 있었다. 기계는 매우 낡았고, 캐리지가 좌우로 움직이면서 활처럼 휘어진 망치들로 종이를 때려서 글씨를 인쇄했다. 마치 빅토리아 시대에 만들어진 물건처럼 보였다. 폴은 자판을 다섯 번 두드린 다음-클럭 클럭 클럭 클럭 클럭- 타자기 안쪽의 레버에 기름 한 방울을 떨어뜨렸다. 그리고 타자기를 다시 두드렸다.    p.158

배우 지망생인 수는 뉴욕에 온지 7주의 시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침실 하나 딸린 아파트에서 룸메이트들에게 눈치를 받으며 비좁은 거실의 소파에서 지내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 그녀는 알 수가 없었다. 뉴욕에 올 때만 해도 자신의 재능에 대한 믿음과 영원히 잠들지 않는 도시가 약속하는 미래에 대한 기대가 있었지만, 지금 그녀에겐 아무 것도 없었다. 저축은 바닥 났고, 어떤 에이전트에게서도 연락을 받지 못했으며, 그럼에도 끊임없이 이력서를 쓰고, 지하철을 타고 거리를 헤매고 다녔지만, 끔찍한 하루를 보내고 거리에서 큰 소리로 울고 있는 여자를 도와주려 걸음을 멈추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다 이 년 전 뮤지컬 공연 당시 만났던 공연 전문가 밥을 우연히 만나게 된다. 그리고 함께 그의 집으로 가서 그 동안 있었던 모든 것을 털어놓게 된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관현악 연주곡, 달그락거리는 찻주전자 소리, 그리고 우유를 넣은 달콤한 차, 오레오 쿠키 세 개, 그렇게 포근하고 아늑한 거실에서 수는 몇 달 만에 처음으로 숨을 편하게 쉬며 푹신한 의자에 안기듯 등을 기댄다.

이 이야기는 소설집에 실린 이야기 중에 '출연자 명단'이라는 작품이다. 다양한 등장 인물들이 모두 다른 배경 속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전반적인 분위기가 다 이런 느낌이었다. 인간적이고, 뭉클하고, 현실적이면서도 희망을 놓치지 않고, 전반적으로 선의와 믿음을 잃지 않는 인물들이 가득한 따뜻한 이야기들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물론 이야기 자체는 모두 다른 색깔과 분위기를 가지고 있어, 옴니버스 영화라도 보는 듯한 재미가 있었다. 친구 사이였다가 연애를 시작하면서 그녀의 빡빡한 일정을 따라가느라 지쳐 버린 남자의 이야기, 2차세계대전에서 입은 정서적·신체적 상처를 보듬으며 살아가는 재향군인의 이야기, 갑작스럽게 스타덤에 올라 말도 못하게 바쁜 영화 홍보 여행을 하게 된 풋내기 신인 배우의 이야기, 서핑을 하러 해변에 갔다가 아버지의 비밀스러운 사생활을 목격하게 되는 청년의 이야기 등등... 1930년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뉴욕과 라스베이거스, 교외의 주택가, 서퍼들이 모여드는 해변 등을 배경으로 미국인들의 삶을 예리하고 뛰어난 통찰로 그려내고 있다.

 

"아직 임신을 한 것은 아니지만 미래의 제 아이들에게 언젠가는 마음으로 쓴 명상록을 읽게 하고 싶어요. 저는 종이 한 장 한 장에 직접 한 글자씩 타자로 쳐서 쓸 거예요. 그리고 진정한 의식의 흐름을 기록한 종이들을 신발 상자에 잘 넣어둘 거예요. 아이들이 그것을 읽을 수 있을 만큼 자랐을 때 인간의 조건에 대해 깊이 생각해볼 수 있게요!" 그녀는 자신이 고함을 지르고 있음을 깨달았다. "제 아이들은 그 종이들을 뒤적이면서 이렇게 말하겠죠. '그러니까 엄마가 이것을 타자기로 기록하느라 그렇게 딸깍거린 거였구나.' 죄송해요. 제가 고함을 지르고 있군요!"  p.283

이 책의 작가인 톰 행크스는 실제로도 타자기의 열렬한 애호가로 알려져 있다. 평소에 타자기로 글을 써왔고, 1978년부터 세계 각지의 빈티지 타자기를 100개 넘게 수집했으며, 아이패드용 타자기 앱을 출시할 정도로 그의 타자기 사랑은 유명하다. 그렇게 타자기 애호가이자 수집가답게 타자기에 영감을 받아 써 내려간 이 책을 통해 작가로 첫발을 내딛으며 "타자기 자체에 대한 이야기가 아닌, 각기 다른 타자기들로 썼을 법한 다양하고 기발한 이야기"를 선보이겠다고 했는데, 이 책에 실린 17편의 이야기들은 각각 다른 색깔을 지니고 있어 더욱 흥미로웠다.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배우로서 정점을 이미 찍은 그이지만, 그것에 만족하지 않고 시나리오 작가이자 영화감독, 애니메이션 성우, 그리고 제작자로도 활약하고 있다. 그 화려한 커리어에 소설가라는 타이틀까지 거머쥐게 되었으니, 그의 다재다능함은 끝이 어디인지 알 수 없을 것 같다.

사실 '타자기'라는 아이템은 아날로그적인 향수를 불러오는 물건이기도 하지만, '작가'의 상징과도 같은 것이라 대체 어떤 이야기를 만들어냈을 지 매우 궁금했다. 물론 한편으로는 배우가 소설을 써봤자 얼마나 대단한 글을 썼을까 싶은 마음도 살짝 있었던 게 사실인데, 이 소설집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뛰어난 수준이라 읽는 내내 감탄하게 되었다. 배우로서의 섬세한 감수성이 고스란히 담겨 있고, 유쾌하고 재치 넘치는 대목들과, 인간적이고 잔잔한 감동을 자아내는 이야기들도 훌륭했다. 톰 행크스가 배우로서 다양한 영화에 출연하면서 겪었던 경험들이 바탕이 되어 배우들의 이야기도, 우주 여행을 가려는 이야기도, 전쟁에 참전한 군인의 이야기도 그려낼 수 있었을 것이다. 그가 앞으로도 배우로서의 관록을 바탕으로 더 깊이 있는 이야기를 그려내는 작가가 되길, 그의 다음 작품을 기대해 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