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삼각 둘이서 4
남순아.백승화 지음 / 열린책들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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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동종 업계 연인과 함께 일하게 되었을 때 장점과 단점은 명확하다. 장점은 우리가 함께라는 것이다. 단점은 우리가 함께라는 것이다. 조금 더 자세하게 설명해 보겠다. 아침에 눈을 뜨면 우리는 함께 출근한다. 함께 일하고 함께 쉬고 함께 퇴근한다(〈함께〉라는 말을 이렇게 많이 쓰니 게슈탈트 붕괴가 오는 것 같다). 일을 마치고 집에 왔는데, 직장 동료가 집에 가질 않는다. 그의 집이 우리 집이기 때문에, 우리집이 그의 집이기 때문에. 우리의 스케줄이 똑같기 때문에, 우리는 휴일도 함께다.              p.71


두 사람이 함께 쓰는 열린책들의 에세이 시리즈 '둘이서'의 네 번째 책이다. 싱어송라이터 김사월과 시인 이훤의 <고상하고 천박하게>, 시인 서윤후와 한문학자 최다정의 <우리 같은 방>, 시인 백가경과 문학평론가 황유지의 <관내 여행자-되기>에 이어 네 번째 책은 영화감독 남순아와 영화감독이자 소설가인 백승화의 <이인삼각>이다. 이 시리즈는 독특하게도 네 권 모두 표지의 통일성이 없다. 대신 각각의 책들이 저자에 따라서 완전히 색깔이 달라진다. 하나의 책으로 묶인 두 저자의 케미도 흥미로운데, 이름을 보지 않고 읽으면 누구의 글인지 헷갈릴 만큼 결이 비슷해 각각의 글마다 페이지 하단에 저자 이름이 써 있다. 여러 모로 독특한 시리즈라 매번 챙겨보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두 번째 책인 <우리 같은 방>을 좋아한다. 이 책은 시인 서윤후와 한문학자 최다정이 함께 글을 썼는데, 두 사람은 동갑내기 친구로서, 글을 쓰는 동료 작가로서, 그리고 자신만의 방을 가진 이웃으로서 <방>에 관한 이야기를 사계절이 넘는 시간 동안 공들여 써냈다. 두 사람이 쓴 글을 교차하여 읽어도 좋고, 한문학자의 운치 있는 수필로, 시인의 담백한 에세이로 따로 읽어도 좋았다. 좋아하는 사람 <둘이서> 함께 쓰는 에세이 시리즈 '둘이서'는 라인업이 이미 10권까지 나와 있다. 다 기대가 되지만, 일곱 번째 시리즈에 김혜진, 최진영 작가의 이름이 있어 손꼽아 기다리는 중이다. 두 소설가의 비슷한 점과 다른 점, 서로의 관계에서 빚어내는 케미가 매우 궁금하다. 




비단 친구와의 관계뿐만은 아닐 것이다. 연인 간에도 가족 간에도 그렇다. 우주의 섭리대로 멀어지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잡아당겨야 한다. 관계라는 건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억지스러운 비유라는 걸 안다. 하지만 누군가와 멀어지는 것이 우주의 섭리라고 생각하면 마음이 좀 나아진다. 흔한 안부 연락도 서로를 당기기 위한 중력 같은 거라고 생각하면 더 의미 있고 그럴싸하게 느껴지기도 하고 말이다.                p.217


이번 작품의 두 저자는 영화인 X 영화인 커플이다. 동종 업계인으로서, 함께 살게 된 연인으로서, 전혀 다른 성격을 지닌 타인으로서의 두 사람이 함께 쓴 책이라 더 흥미로웠다. 자신을 키운 건 8할이 허세였다며, 영화감독이 되겠다고 생각한 것도 알 수 없는 질투, 시기, 경쟁심으로 내린 충동적 선언이었다는 남순아 감독. 영화를 그다지 좋아하지도 않았으면서 친구가 영화감독이 되겠다는 말에 어쩌다보니 휩쓸리고 만거다. 그런데 정작 영화를 하면서부터는 섣부르게 허세를 부리지 않게 되었다고. 작업을 할 때마다 매번 자신의 한계를 마주해야 했기 때문이라고 하니, 어쩌면 영화감독이 그의 천직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백승화 감독은 언제나 집에 처박혀 친구도 없이 글만 쓰는 사람이라고 자신을 소개하는데, 현장에서도 늘 영화보다 사람이 힘들었다고 말한다. 영화라는 매체의 특성상 과정 내내 필연적으로 수많은 사람과 지지고 볶으며 만들 수밖에 없다는 것을 감안하면, 그가 영화감독을 하고 있는 것은 정말 아이러니한 일이기도 한 것 같다. 


두 사람이 어떻게, 왜 영화를 시작하게 되었는지, 그들이 영화판에 뛰어들게 된 비화도 재미있었지만, 동종 업계 연인이 하루 24시간 붙어 있을 때 갖게 되는 장단점에 대한 이야기가 특히 흥미진진했다. 영화 촬영현장의 안팎에 대한 이야기도 일반인은 쉽게 알 수 없는 내용들이 많아 인상깊게 읽었다. 두 저자 모두 영화감독이라는 직업을 갖고 있기에 두 사람의 교환일기 같은 이 책은 공동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만든 한 편의 영화처럼 읽히기도 한다. 파트 사이사이로 두 사람이 직접 <인생 영화란 무엇인가>와 <영화 꿈과 새벽의 촬영장>에 대해 대화를 나눈 시나리오가 부록처럼 들어 있기도 하다. 공포 영화 못 보는 감독의 공포 영화와 웃기지 않는 감독의 코미디 영화가 어떻게 탄생했는지 궁금하다면, 동종 업계 연인이 들려주는 공과 사를 알고 싶다면 이 책을 만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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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수정 은행나무 세계문학 에세 21
조너선 프랜즌 지음, 김시현 옮김 / 은행나무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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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는 삶에 만족하나요? 더없이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어요?” 

개리는 좌회전 신호를 기다리며 물었다. 

“개리, 나는 고통받고 있어…….” 

“많은 사람이 고통받죠. 그게 이유라면 좋아요. 그래서 스스로를 안쓰러워하고 싶다면 그것도 좋아요. 하지만 왜 엄마까지 끌어들이죠... “삶에는 그저 견뎌야만 하는 것이 있어.” 

“그런 생각이라면 굳이 왜 사나요? 대체 뭘 기다리는 거예요?” 

“나도 매일 그 질문을 한단다.”                p.258


조너선 프랜즌의 작품들은 <인생 수정>, <순수>, <크로스로드>, <자유> 모두 분량의 압박이 상당한 편이라 매번 읽으려다가 놓쳤던 기억이 있다. 이번에 은행잎 2기 마지막 책이 은행나무세계문학 에세 시리즈 중에 고르는 거라고 해서 고민없이 그의 작품을 골랐다. 


<인생 수정>은 '단절과 해체로 얼룩진 어느 가정의 가족사를 통해 사회 전체의 문제를 투명하게 드러낸 대작'이라고 설명이 되어 있는데, 현대 버전의 디킨스를 보는 듯한 느낌이 드는 작품이었다. 이 작품 역시 800페이지가 넘는 벽돌책이지만, 가독성이 매우 뛰어나다. 대부분의 고전 작품들이 내세우는 빽빽하게 계속 이어지는 이야기의 밀도를 가지고 있음에도 말이다. 파킨슨병에 걸린 남편과 아내, 그리고 세 자녀로 이루어진 한 가족의 이야기는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각자 자신만의 드라마를 보여준다. 아마 21세기 대부분의 가족사가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소통의 단절, 가부장적 독재, 우울증, 현실 도피.. 등 가족의 해체를 고스란히 보여주며 이를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의 모습으로 비춰주는 작품이었다. 




그는 2층에서 아들이나 딸을 품에 안고 앉아 있던 밤들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가 <블랙 뷰티>나 <나니아 연대기>를 읽어주는 동안 아이들은 비누 냄새를 풍기는 축축한 머리를 그의 가슴에 푹 기대곤 했다. 그의 낭랑한 목소리만으로도 아이들은 잠이 들었다. 흉터를 남길 만큼 충격적인 사건이 이 핵가족에게 벌어지지 않은 저녁은 수백, 아니 어쩌면 수천 번은 되었다. 그의 검은 가죽 의자에서 꾸밈없는 친밀감을 누리던 저녁들, 암울한 확실성의 저녁들 사이에 낀 달콤한 불확실성의 저녁들.               p.494


자녀들이 모두 독립해서 집을 나가고, 이제 앨프리드와 이니드 드 사람만 남았다. 앨프리드는 파킨슨병에 걸린 노인이 되었고, 이니드는 그가 무슨 일을 벌일지 5분마다 걱정하며 지내고 있다. 몸이 떨리던 건 많이 나아졌지만, 종종 환각을 보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앨프리드는 자식들에게 가부장적인 집안의 독재자였던 시절의 기억으로 여전히 남아 있다. 이니드는 남편에게 시달리며 1년 내내 크리스마스에 대한 희망으로 자신을 지탱하는 중이다. 큰 아들 개리는 은행 중역이자 세 아이의 아빠지만 가정불화와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다. 둘째인 칩은 <월 스트리트 저널>에 글을 쓰지만, 여전히 현실에 적응하지 못해 도망을 거듭하는 중이다. 막내인 딸 데니즈는 최고급 레스토랑에서 셰프로 활약하고 있지만, 자신의 진정한 욕망을 계속 억누르고 부정하고 있다. 이들 가족들은 앨프리드의 병을 계기 삼아 모이게 되는데, 이니드가 1년 내내 기다렸던 크리스마스 파티는 과연 해피엔딩이 될 수 있을까. 


누구나 살면서 실수를 하고, 잘못을 깨달으며 그것을 고쳐 나가려고 애쓴다. 물론 누군가는 오점투성이의 인생을 내버려둔 채 살아가기도 하지만 말이다. 주변을 둘러 보면 어디서나 만날 수 있을 법 한 램버트 가족의 삶은 사실적인 만큼 공감할 부분들이 많았다. '인생 수정'이라는 제목처럼, 이들은 살아 가며 계속 삶을 '수정'해 나간다. 그 과정이 인생이라는 모습으로 펼쳐지는 것이다. 작가의 가차 없는 풍자와 냉소 속에서도 따뜻함이 묻어나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는 사실 때문일 것이다. 이 작품으로 에세 시리즈를 처음 만나게 되었는데, 작품들을 보니 여타의 고전 문학 시리즈에 비해 조금 특별하게 느껴졌다. 서구 남성 작가 중심의 정전이라는 틀에서 벗어나 서구와 비서구, 남성과 여성, 순수문학과 장르문학 등의 이분법적 경계를 넘나들며 작품들 선정해왔기 때문이다. 찬쉐, 엘리자베스 개스켈, 다와다 요코, 이디스 워튼, 류드밀라 울리츠카야, 저메이카 킨케이드 등 라인업도 매우 휼륭하다. 판형이 작고 디자인이 깔끔해 손에 잡히는 그립감도 좋다. 작가들의 사진을 표지 전면에 내세운 디자인도 예쁘다. 그리고 내년 2월에는 올해 노벨문학상 수상자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의 신간 <죔레가 사라지다>도 출간 예정에 있다고 하니 매우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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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어떻게, 왜 - 우리를 무대로 이끄는 물음들
성수연 지음, 김신중 사진 / 북트리거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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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어는 원래 공간 언어인데, 더 이상 공간 언어가 아닌 선형적인 텍스트 형태의 언어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러면 기존에 있었던, 정말 농인들의 언어로 작동했을 때의 수어는 없어지는 거죠. 그래서 저는 전국에 농인들이 있는 곳을 다 찾아다니면서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그 언어들을 번역해서 농인들의 삶과 문화의 가치를 남겨 두고 싶어요. 언어는 시대성을 갖고 있잖아요. 수어는 더욱 그렇거든요. 수어는 당시 그 지역에 살던 사람들이 무엇을 봤느냐에 따라 만들어지는 언어예요. 보지 않았으면 언어가 존재하지 않거든요. 그렇기에 그들의 삶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어요.              p.183


정말 '벽돌'처럼 느껴지는 묵직한 책이다. 632페지의 두께와 종이의 질감에 하드커버 양장이라는 커버까지 더해져 잘못 휘두르면 무기가 되고 말 것 같은 엄청난 책이 만들어 졌다. 물론 그만큼 담고 있는 내용도 묵직하다. 이 책은 배우와 연출가, 무대감독, 수어통역사, 관객 등 서로 다른 자리에서 무대를 살아 내는 예술가들의 이야기를 들려 준다. 


2021년부터 2024년까지 웹진 <연극in>에 연재되었던 글들을 엮었다. 동시대 창작자들이 무엇에 주목하고, 어떻게 작업하며, 그 일을 왜 하는지 듣고자 하는 마음으로 정한 이름이 '무엇을, 어떻게, 왜'라고 한다. 웹진에 게재되었던 인터뷰들을 정리하며, 2025년 1월 모든 인터뷰이를 다시 만나 짧은 대화를 나눴고 그 또한 이 책에 함께 수록했다. 두 차례의 대화 사이의 시간 큼 생각이 달라진 경우도, 상황이 바뀐 경우도 있을 테니 말이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창작을 둘러싼 각자의 시간이 어떻게 새로 쓰이고 있는지를 포착하고, 예술가의 사유가 어떻게 변화하고 이어지는지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것 같아 인터뷰를 두 차례 수록했다는 점이 매우 흥미로웠다. 2021년부터 2025년이라는 시기 또한 사회적으로 많은 변화가 있었던 시기다. 연극계 미투, 팬데믹, 그리고 계엄과 탄핵까지 그야말로 드라마틱한 사건들이 있었던 시기니 말이다. 




'당신이 먹는 것이 당신이다'는 말처럼, 관객이라면 '당신이 보는 것이 당신인가?'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어요. 저는 제 취향이 굉장히 중요한 사람이고 취향이 저를 말해 준다고 생각하는데, 그렇다고 내가 본 공연이 곧 내가 되는 건 아니잖아요. 예를 들어 비건에 관한 공연을 본다고 해서 제가 비건이 되는 건 아니니까요. 보는 것이 저의 전부는 아니지만, 내가 공연을 선택하는 방식이 어느 정도 저를 보여 주는 것도 맞아요. 그래서 저는 취향과 정체성은 다르다고 생각해요. '나는 이 공연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아'와 '이 공연은 내 취향이 아니야'는 분명 다르거든요.             p.352


공연이 시작되기 전, 객석 등이 꺼지면서 관객들의 숨죽인 적막과 함께 기분 좋은 긴장감이 온몸을 감싼다. 이윽고 조명이 무대 위를 비추고 지휘자의 손끝에서 흐르는 음악이 극장 안을 채우면서 극이 시작되면, 무대라는 공간에 배우가 등장한다. 나와 무대의 거리는 멀어봐야 얼마 안될텐데, 현실과 판타지 세계의 간극은 그 이상이다. 극이 계속 이어질수록 현실은 점점 저편으로 사라지고, 관객들은 현실과 분리되어 무대 위에 펼쳐진 새로운 세상 속으로 완전히 동화된다. 한때 공연 예술들을 열심히 보러 다녔던 시기가 있다. 연극, 뮤지컬 등을 한 주에 몇 편씩 보고 또 보아도, 늘 새로운 감동과 재미가 있었다. 


그래서 기억에 남는 인터뷰이는 관객 대표 배서현씨였다. 그녀는 자신의 SNS에 '관곅'이라는 단어를 자기소개처럼 적어 두었다. 관객과 관계자의 합성어인데, 연극을 누구보다 많이 보는 관객이면서 영미권 희곡을 우리말로 옮기는 번역가이자, 연극 축제의 자원 활동가로 극장 곳곳을 누비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평일에는 연극과 전혀 관련 없는 일을 하고, 주말에는 연극을 세 편씩 보는, '직업 관객을 꿈꾸는 직장인이다. 어떤 배우를 좋아하는지, 최근에 본 공연은 어떤 작품이었는지 등등 평범한 질문들에 대한 일상적인 답변들도 공감하며 읽었던 것 같다. 나도 한때, 그런 관객이었던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책에 수록된 각각의 인터뷰는 질문으로 시작해 질문으로 끝나는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대답 없는 질문들로 마무리되는 인터뷰를 통해 다시 질문이 이어지고, 또 다른 가능성으로 세계가 확장되어 간다는 의미다. 우리는 무엇에 가로막혀서 자유로울 수 없는 걸까? 무엇을 미루고 무엇을 뜸 들이나? 하나의 언어가 완전하게 전달되는 순간을 경험한 적 있어? 너는 무대에서 무엇을 보고 있니? 배우는 뭘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해? 널 가슴 뛰게 하는 건 뭐야? 등등 대답이 없는 질문들을 읽으며 나만의 답을 해보기도 했다. 연극은 이 시대에 무엇을, 어떻게, 왜 해야 하는 것일까? 그에 대한 심도 깊고, 다양한 생각들이 궁금하다면 이 책을 만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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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갈라 나를 꺼내기
하미나 지음 / 물결점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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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때로 거울이나 카메라가 없던 시기의 인간을 상상하곤 한다. 그때 인간이 눈을 감으면 마음속에 떠오르는 것은 나의 겉모습, 나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 내가 가진 것들이 아니라 저멀리 보이는 산그림자나 바다, 주의 깊게 관찰해 온 나무, 새, 작은 풀잎, 꽃, 또 주변 사람들이 나를 바라보는 표정과 그들의 걸음거리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나는 겪어본 적 없는 시기를 그리워한다.            p.27


다른 사람인 척하지 말고 오로지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기가 결코 쉽지 않다는 생각을 자주 하는 요즘이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가장 자연스러운 모습이 가치 있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세상 속에서 펼쳐 보이기란 어쩐지 머뭇거리게 되는 것이다. 취약성을 드러내는 것, 수치심을 이겨내는 것이 어려워서 사람들은 자주 보이지 않는 존재가 되기를 자처한다. 이 책을 읽는 내내 취약성 안에 머물며 온전하고 힘차게 살아가는 것과, 인색하게 굴고 불평하고 두려워하며 삶의 문턱을 온전히 통과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어떻게 하면 더 용감해질 수 있을지, 취약성 안에 어떻게 머무를 것인가에 대해서 말이다. 


해파리 북클럽으로 만나게 된 하미나 작가의 <나를 갈라 나를 꺼내기>가 도착했다. 이 책은 저자가 2021년 1월부터 2025년 10월까지 쓴 글을 가려 뽑아 대면케 하고, 충돌시키고, 맞물리게 하여 엮어낸 혼종의 텍스트다. 장르로는 논픽션, 에세이, 시, 희곡, 강연록, 대화록, 회고록을 넘나들고, 주제로는 과학과 비과학, 머리와 몸, 이성과 광기, 빛과 어둠, 실세계와 가공물을 넘나든다. 그렇게 다양한 방식의 글쓰기를 통해 과학과 문학, 개인의 경험과 사회적 서사, 폭력과 윤리와 지구와 동물, 여성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애초 페미니즘 관점에서 과학사를 들여다보는 것으로 기획된 이 책은 저자가 2021년 1월부터 쓰기 시작한 과학 칼럼들이 그 토대로, 차별적이고 적대적인 환경에서 과학에 헌신해 온 여성 과학자들을 조명하는 동시에, 여성에 대한 오해와 차별, 혐오를 조장하는 과학을 비판하며, 지구적 차원에서 모두를 위한 더 나은 과학을 전망하는 글들을 수록하고 있다. 한 저자가 썼다는 공통점 말고는 하나의 책으로 묶여도 되나 싶을 만큼 방대한 사유를 보여주는 책이었다. 쉽게 읽히진 않지만, 시간을 들여 읽고, 또 읽고 싶은 글이었다. 강렬한 제목과 아름다운 표지, 그리고 <미쳐있고 괴상하며 오만하고 똑똑한 여자들>을 쓴 작가에 대한 기대감으로 시작했는데. 전작보다 더 좋았다. 




세상을 떠도는 많은 이야기는 객관적인 사실을 말한다고 하지만, 들여다보면 언제나 특정한 관점과 위치성을 가지고 생산된다. 가장 객관적인 사실이라고 여겨지는 과학도 예외가 아니다. 그러나 왜 어떤 이야기는 유독 보편적이고 객관적이며 과학적인 것으로 여겨지고, 어떤 이야기는 개인적이고 사적이며 특수한 것으로 여겨질까?               p.304


공감되는 글들이 많았지만, 그 중에서도 '21세기에 여전히 월경하는 몸으로 살아야 한다니 통탄스럽다.'는 문장을 보며 가장 와닿았던 것 같다. 월경 주기가 시작되기 전 후의 몸 상태와 일상생활의 제약 등 그에 대한 경험에 대한 글들을 읽으며 공감하지 않을 여성이 있을까. 또한 왜 여자는 월경의 시작과 함께 그것을 은폐하는 법을 배워야 하는지, 여성의 생식력과 관련된 기술은 왜 임신 및 출산과 연결될 때만 중요해지는 것인지, 과학기술이 이토록 발전한 시대에 어째서 월경과 관련된 기술은 이토록 허접한 것인지... 통탄스러운 마음을 금치 못하는 것은 누구나 마찬가지일테니 말이다. 거기서 더 나아가 월경을 정말로 없애고 싶어졌다는 저자의 경험담에 대한 글도 흥미로웠는데, 매달 피를 흘리지 않아도 되는 삶이라는 산뜻한 상상과 누구도 자신을 임신시킬 수 없게 된다는 사실도 좋았다는 문장을 읽으며 이것이 개인의 내밀한 경험이 아니라 여성 전체의 이야기라는 점을 새삼 깨닫기도 했다. 게다가 왜 가임력은 그렇게까지 보존되어야 할까에 대한 질문 또한 여운처럼 남았다. 작가의 말처럼 우리는 직접 낳은 자식 말고도 지구와 동물들, 가난하고 아픈 사람들 등 돌봐야 할 존재가 많은 세상에 살고 있는데 말이다. 


정치, 사회면에 연일 등장하는 기사가 벅차고 누굴 믿는 것이 맞는지 인간관계에 시름이 많아질 때면 바다에 가는 기분으로 과학 책을 읽는다는 대목에 밑줄을 그었다. 그 글을 읽으며 내가 왜 과학 책들을 끊임없이 읽는지, 그리고 그 시간들이 나에게 어떤 의미인지 이해하게 된 듯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과학은 당연하게 여겨온 것에 질문을 던지게 하고, 새로운 관점으로 세상을 해석하게 만들어 준다. 하미나 작가가 글을 쓰는 방식 또한 과학적 태도를 매우 닮았다. 진실을 끝없이 탐구하는 자세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 경계를 넘는 앎에 대한 사유까지 모두 배우고 싶었다. 과학의 목표는 곧 진실에 최대한 가까이 가는 것이고, 진실에 가까운 자연을 만나기 위해서 우리는 정상성의 렌즈를 벗어던져야 한다는 저자의 말에 거듭 동의하며 이 책을 덮었다. 어떤 진실은 기존 세계의 균열 사이로 비치는 또 다른 세계에 들어서야만, 나를 갈라 나를 꺼내야만 만날 수가 있다. 그 진실이 궁금하다면 이 책을 놓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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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색 미술관 - 화가들이 사랑한 자연, 그 치유의 풍경
강민지 지음 / 아트북스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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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그림 역시 루소의 다른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색종이를 오려 붙인 듯한 평면적인 표현에 공간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림이 공개된 대는 외젠 들라크루아나 앙리 마티스 같은 당대의 화가들이 아프리카를 여행하며 그곳의 자연 풍경과 원시미술에서 영감을 얻어 그림을 그렸던지라 이국적인 분위기와 루소만의 개성이 물씬 풍기는 신비롭고 감각적인 그림에 많은 사람이 호평을 보냈어요. 시대적 상황이 잘 맞아떨어졌던 것이죠.            p.49


<파란색 미술관>에 이어 '색으로 보는 미술관' 그 두 번째 책이 나왔다. 이번에는 초록빛 자연의 싱그러움을 선사하는 <초록색 미술관>이다. 초록색은 마음을 평온하게 하고, 기분이 좋아지는 긍정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경우가 많다. 피곤할 때마다 초록의 숲을 그리워하게 되는 유전자가 사람의 본성에 내재한다는 연구도 있고, 자연의 색인 초록색이 정서적 안정을 찾는 데 도움을 준다고 여겨지기도 한다. 이 책은 16세기부터 20세기까지 아름다운 초록 풍경을 담은 그림 15점을 중심으로 화가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캔버스 가득 채운 푸르고 울창한 수풀이 보기만 해도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주고, 그 자체로 치유가 되는 그림을 그린 카미유 피사로, 자신만의 독특한 시각과 방법을 가지고 꿈꿔온 세상을 표현했던 앙리 루소, 붓으로 선을 긋거나 색을 채워 무언가를 그려내는 것이 아니라 물감을 수많은 점으로 찍어내며 완성하는 점묘법을 창시한 조르주 쇠라, 끝없는 시행착오를 통해 미술사의 방향을 바꾸어놓았다는 평가를 받는 폴 세잔, 세상의 시름과 근심을 내려놓고 자연의 온기를 화폭에 담아낸 구스타프 클림트 등 예술가들의 삶을 들여다보며 초록빛 예술을 향한 그들의 여정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책이었다. 익히 잘 알고 있는 작품들도 있었고, 조금은 낯선 그림들도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단연코 인상적이었던 것은 클림트가 아터제호수에서 그린 풍경화들이었다. 클림트하면 바로 떠오르는 황금빛 작품들 못지않게 소박한 자연의 풍경이 보여주는 초록빛 색채가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세상의 모든 생명은 온기를 받아야 살아납니다. 시든 식물에 물과 햇빛을 주면 다시 싹이 트듯, 상처받은 사람도 관심과 배려를 받으면 삶의 의지를 되찾습니다. 인간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따뜻한 마음을 지닌 사람은 대체로 배려심과 이해심이 깊으며, 조건 없는 도움을 아끼지 않기에 그와의 관계는 오래 지속됩니다. 19세기 프랑스 인상주의 화가들에게도 그런 따뜻한 마음을 지닌 친구가 있었습니다.                p.285


'자연=초록색'이라는 공식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초록색은 자연을 연상케 하는 동시에 생명, 휴식, 풍요, 에너지, 희망, 행운 등 긍정적인 의미들을 듬뿍 담고 있기도 하다. 실제로 책상 위에 화분 하나를 놓아두는 것만으로 스트레스가 줄어들고, 나무를 만지는 것은 마음을 진정시키는 효과가 있으며, 맨손으로 정원일을 하면 건강에 도움이 된다고 한다. 식물, 자연의 초록이 우리에게 끼치는 영향이란 생각보다 매우 크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서양에서는 12세기부터 초록색이 악마의 색으로 여겨지며 사탄 혹은 악마를 그릴 때 초록색을 주로 사용해 표현했다는 사실이다. 초록색이 자연의 색으로 인식되기 시작한 것은 18세기 후반인 낭만주의시대에 이르러서였다고 하니, 초록색에 대해 긍정과 부정, 두 가지 감정을 갖는다는 것의 의미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된다. 


클림트가 남긴 40여 점의 풍경화에는 사람의 모습이 등장하지 않는다. 광활하거나 소박한 자연의 풍경만이 있을 뿐이다. 사실 클림트는 모국에서 매서운 비평과 비난에 부딪히며 상처를 입었고, 결국 빈예술가협회를 탈퇴하게 된다. 내성적이고 사람들과 어울리기보다 거리를 두었던 클림트가 비평가들과 사회에서 받은 압박감은 상상 이상이었을 것이다. 그런 그가 매년 여름 위안과 안식을 얻기 위해 빈을 떠나 몇 달씩 머물렀던 곳이 바로 고즈넉한 아터제호수이다. 그는 그곳에서 하루 세 번씩 그림을 그렸다고 전해진다. 그러한 배경을 알고 나서 보게 되는 그의 풍경화들은 자연이 선사하는 평온과 넉넉함 그 이상의 것을 느끼게 해주었다. 살다보면 누구나 잠시 쉬어가야 하는 순간을 마주하게 된다. 그럴 때 자연의 청량하고 순수한 멋을 간직한 초록색 그림을 바라보라고 이 책은 권해준다. 초록이 고단함과 공허함을 안아줄 안식의 공간이 되어 주고, 삶의 어려움을 들어줄 포근한 친구가 되어줄테니 말이다. 잔잔한 평온과 휴식이 필요한 당신에게, <초록색 미술관>을 소개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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