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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어떻게, 왜 - 우리를 무대로 이끄는 물음들
성수연 지음, 김신중 사진 / 북트리거 / 2025년 12월
평점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수어는 원래 공간 언어인데, 더 이상 공간 언어가 아닌 선형적인 텍스트 형태의 언어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러면 기존에 있었던, 정말 농인들의 언어로 작동했을 때의 수어는 없어지는 거죠. 그래서 저는 전국에 농인들이 있는 곳을 다 찾아다니면서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그 언어들을 번역해서 농인들의 삶과 문화의 가치를 남겨 두고 싶어요. 언어는 시대성을 갖고 있잖아요. 수어는 더욱 그렇거든요. 수어는 당시 그 지역에 살던 사람들이 무엇을 봤느냐에 따라 만들어지는 언어예요. 보지 않았으면 언어가 존재하지 않거든요. 그렇기에 그들의 삶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어요. p.183
정말 '벽돌'처럼 느껴지는 묵직한 책이다. 632페지의 두께와 종이의 질감에 하드커버 양장이라는 커버까지 더해져 잘못 휘두르면 무기가 되고 말 것 같은 엄청난 책이 만들어 졌다. 물론 그만큼 담고 있는 내용도 묵직하다. 이 책은 배우와 연출가, 무대감독, 수어통역사, 관객 등 서로 다른 자리에서 무대를 살아 내는 예술가들의 이야기를 들려 준다.
2021년부터 2024년까지 웹진 <연극in>에 연재되었던 글들을 엮었다. 동시대 창작자들이 무엇에 주목하고, 어떻게 작업하며, 그 일을 왜 하는지 듣고자 하는 마음으로 정한 이름이 '무엇을, 어떻게, 왜'라고 한다. 웹진에 게재되었던 인터뷰들을 정리하며, 2025년 1월 모든 인터뷰이를 다시 만나 짧은 대화를 나눴고 그 또한 이 책에 함께 수록했다. 두 차례의 대화 사이의 시간 큼 생각이 달라진 경우도, 상황이 바뀐 경우도 있을 테니 말이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창작을 둘러싼 각자의 시간이 어떻게 새로 쓰이고 있는지를 포착하고, 예술가의 사유가 어떻게 변화하고 이어지는지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것 같아 인터뷰를 두 차례 수록했다는 점이 매우 흥미로웠다. 2021년부터 2025년이라는 시기 또한 사회적으로 많은 변화가 있었던 시기다. 연극계 미투, 팬데믹, 그리고 계엄과 탄핵까지 그야말로 드라마틱한 사건들이 있었던 시기니 말이다.

'당신이 먹는 것이 당신이다'는 말처럼, 관객이라면 '당신이 보는 것이 당신인가?'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어요. 저는 제 취향이 굉장히 중요한 사람이고 취향이 저를 말해 준다고 생각하는데, 그렇다고 내가 본 공연이 곧 내가 되는 건 아니잖아요. 예를 들어 비건에 관한 공연을 본다고 해서 제가 비건이 되는 건 아니니까요. 보는 것이 저의 전부는 아니지만, 내가 공연을 선택하는 방식이 어느 정도 저를 보여 주는 것도 맞아요. 그래서 저는 취향과 정체성은 다르다고 생각해요. '나는 이 공연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아'와 '이 공연은 내 취향이 아니야'는 분명 다르거든요. p.352
공연이 시작되기 전, 객석 등이 꺼지면서 관객들의 숨죽인 적막과 함께 기분 좋은 긴장감이 온몸을 감싼다. 이윽고 조명이 무대 위를 비추고 지휘자의 손끝에서 흐르는 음악이 극장 안을 채우면서 극이 시작되면, 무대라는 공간에 배우가 등장한다. 나와 무대의 거리는 멀어봐야 얼마 안될텐데, 현실과 판타지 세계의 간극은 그 이상이다. 극이 계속 이어질수록 현실은 점점 저편으로 사라지고, 관객들은 현실과 분리되어 무대 위에 펼쳐진 새로운 세상 속으로 완전히 동화된다. 한때 공연 예술들을 열심히 보러 다녔던 시기가 있다. 연극, 뮤지컬 등을 한 주에 몇 편씩 보고 또 보아도, 늘 새로운 감동과 재미가 있었다.
그래서 기억에 남는 인터뷰이는 관객 대표 배서현씨였다. 그녀는 자신의 SNS에 '관곅'이라는 단어를 자기소개처럼 적어 두었다. 관객과 관계자의 합성어인데, 연극을 누구보다 많이 보는 관객이면서 영미권 희곡을 우리말로 옮기는 번역가이자, 연극 축제의 자원 활동가로 극장 곳곳을 누비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평일에는 연극과 전혀 관련 없는 일을 하고, 주말에는 연극을 세 편씩 보는, '직업 관객을 꿈꾸는 직장인이다. 어떤 배우를 좋아하는지, 최근에 본 공연은 어떤 작품이었는지 등등 평범한 질문들에 대한 일상적인 답변들도 공감하며 읽었던 것 같다. 나도 한때, 그런 관객이었던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책에 수록된 각각의 인터뷰는 질문으로 시작해 질문으로 끝나는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대답 없는 질문들로 마무리되는 인터뷰를 통해 다시 질문이 이어지고, 또 다른 가능성으로 세계가 확장되어 간다는 의미다. 우리는 무엇에 가로막혀서 자유로울 수 없는 걸까? 무엇을 미루고 무엇을 뜸 들이나? 하나의 언어가 완전하게 전달되는 순간을 경험한 적 있어? 너는 무대에서 무엇을 보고 있니? 배우는 뭘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해? 널 가슴 뛰게 하는 건 뭐야? 등등 대답이 없는 질문들을 읽으며 나만의 답을 해보기도 했다. 연극은 이 시대에 무엇을, 어떻게, 왜 해야 하는 것일까? 그에 대한 심도 깊고, 다양한 생각들이 궁금하다면 이 책을 만나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