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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갈라 나를 꺼내기
하미나 지음 / 물결점 / 2025년 11월
평점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때때로 거울이나 카메라가 없던 시기의 인간을 상상하곤 한다. 그때 인간이 눈을 감으면 마음속에 떠오르는 것은 나의 겉모습, 나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 내가 가진 것들이 아니라 저멀리 보이는 산그림자나 바다, 주의 깊게 관찰해 온 나무, 새, 작은 풀잎, 꽃, 또 주변 사람들이 나를 바라보는 표정과 그들의 걸음거리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나는 겪어본 적 없는 시기를 그리워한다. p.27
다른 사람인 척하지 말고 오로지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기가 결코 쉽지 않다는 생각을 자주 하는 요즘이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가장 자연스러운 모습이 가치 있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세상 속에서 펼쳐 보이기란 어쩐지 머뭇거리게 되는 것이다. 취약성을 드러내는 것, 수치심을 이겨내는 것이 어려워서 사람들은 자주 보이지 않는 존재가 되기를 자처한다. 이 책을 읽는 내내 취약성 안에 머물며 온전하고 힘차게 살아가는 것과, 인색하게 굴고 불평하고 두려워하며 삶의 문턱을 온전히 통과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어떻게 하면 더 용감해질 수 있을지, 취약성 안에 어떻게 머무를 것인가에 대해서 말이다.
해파리 북클럽으로 만나게 된 하미나 작가의 <나를 갈라 나를 꺼내기>가 도착했다. 이 책은 저자가 2021년 1월부터 2025년 10월까지 쓴 글을 가려 뽑아 대면케 하고, 충돌시키고, 맞물리게 하여 엮어낸 혼종의 텍스트다. 장르로는 논픽션, 에세이, 시, 희곡, 강연록, 대화록, 회고록을 넘나들고, 주제로는 과학과 비과학, 머리와 몸, 이성과 광기, 빛과 어둠, 실세계와 가공물을 넘나든다. 그렇게 다양한 방식의 글쓰기를 통해 과학과 문학, 개인의 경험과 사회적 서사, 폭력과 윤리와 지구와 동물, 여성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애초 페미니즘 관점에서 과학사를 들여다보는 것으로 기획된 이 책은 저자가 2021년 1월부터 쓰기 시작한 과학 칼럼들이 그 토대로, 차별적이고 적대적인 환경에서 과학에 헌신해 온 여성 과학자들을 조명하는 동시에, 여성에 대한 오해와 차별, 혐오를 조장하는 과학을 비판하며, 지구적 차원에서 모두를 위한 더 나은 과학을 전망하는 글들을 수록하고 있다. 한 저자가 썼다는 공통점 말고는 하나의 책으로 묶여도 되나 싶을 만큼 방대한 사유를 보여주는 책이었다. 쉽게 읽히진 않지만, 시간을 들여 읽고, 또 읽고 싶은 글이었다. 강렬한 제목과 아름다운 표지, 그리고 <미쳐있고 괴상하며 오만하고 똑똑한 여자들>을 쓴 작가에 대한 기대감으로 시작했는데. 전작보다 더 좋았다.

세상을 떠도는 많은 이야기는 객관적인 사실을 말한다고 하지만, 들여다보면 언제나 특정한 관점과 위치성을 가지고 생산된다. 가장 객관적인 사실이라고 여겨지는 과학도 예외가 아니다. 그러나 왜 어떤 이야기는 유독 보편적이고 객관적이며 과학적인 것으로 여겨지고, 어떤 이야기는 개인적이고 사적이며 특수한 것으로 여겨질까? p.304
공감되는 글들이 많았지만, 그 중에서도 '21세기에 여전히 월경하는 몸으로 살아야 한다니 통탄스럽다.'는 문장을 보며 가장 와닿았던 것 같다. 월경 주기가 시작되기 전 후의 몸 상태와 일상생활의 제약 등 그에 대한 경험에 대한 글들을 읽으며 공감하지 않을 여성이 있을까. 또한 왜 여자는 월경의 시작과 함께 그것을 은폐하는 법을 배워야 하는지, 여성의 생식력과 관련된 기술은 왜 임신 및 출산과 연결될 때만 중요해지는 것인지, 과학기술이 이토록 발전한 시대에 어째서 월경과 관련된 기술은 이토록 허접한 것인지... 통탄스러운 마음을 금치 못하는 것은 누구나 마찬가지일테니 말이다. 거기서 더 나아가 월경을 정말로 없애고 싶어졌다는 저자의 경험담에 대한 글도 흥미로웠는데, 매달 피를 흘리지 않아도 되는 삶이라는 산뜻한 상상과 누구도 자신을 임신시킬 수 없게 된다는 사실도 좋았다는 문장을 읽으며 이것이 개인의 내밀한 경험이 아니라 여성 전체의 이야기라는 점을 새삼 깨닫기도 했다. 게다가 왜 가임력은 그렇게까지 보존되어야 할까에 대한 질문 또한 여운처럼 남았다. 작가의 말처럼 우리는 직접 낳은 자식 말고도 지구와 동물들, 가난하고 아픈 사람들 등 돌봐야 할 존재가 많은 세상에 살고 있는데 말이다.
정치, 사회면에 연일 등장하는 기사가 벅차고 누굴 믿는 것이 맞는지 인간관계에 시름이 많아질 때면 바다에 가는 기분으로 과학 책을 읽는다는 대목에 밑줄을 그었다. 그 글을 읽으며 내가 왜 과학 책들을 끊임없이 읽는지, 그리고 그 시간들이 나에게 어떤 의미인지 이해하게 된 듯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과학은 당연하게 여겨온 것에 질문을 던지게 하고, 새로운 관점으로 세상을 해석하게 만들어 준다. 하미나 작가가 글을 쓰는 방식 또한 과학적 태도를 매우 닮았다. 진실을 끝없이 탐구하는 자세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 경계를 넘는 앎에 대한 사유까지 모두 배우고 싶었다. 과학의 목표는 곧 진실에 최대한 가까이 가는 것이고, 진실에 가까운 자연을 만나기 위해서 우리는 정상성의 렌즈를 벗어던져야 한다는 저자의 말에 거듭 동의하며 이 책을 덮었다. 어떤 진실은 기존 세계의 균열 사이로 비치는 또 다른 세계에 들어서야만, 나를 갈라 나를 꺼내야만 만날 수가 있다. 그 진실이 궁금하다면 이 책을 놓치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