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처럼 붉다 스노우화이트 트릴로지 1
살라 시무카 지음, 최필원 옮김 / 비채 / 2015년 11월
평점 :
절판


용 문신을 한 천재 해커, 비밀정보 조사원이자 깡마른 펑크족, 작고 단단한 몸으로 사적 복수를 가하던 여전사. 스티그 라르손의 <밀레니엄> 시리즈의 가장 큰 매력 중 하나는 바로 여주인공 리스베트 살란데르였다. 너무 많은 것을 경험했기 때문에 나이에 비해 조숙하지만, 내면적으로 충분히 성장하지 못한 부분도 있어 순진한 면도 가지고 있는, 굉장히 이율배반적인, 겉모습과는 정반대의 상반된 부분을 가지고 있는 두 모습의 전무후무한 여성 캐릭터. 바로 그 스티그 라르손이 창조한 히로인 리스베트 살란데르에게 오마주를 바치는 작가, 살라 시무카의 스노우화이트 트릴로지 시리즈를 만났다. 추리, 스릴러 소설은 크게 두 부류이다. 플롯 중심으로 이야기가 진행되는가, 캐릭터 중심으로 이야기가 진행되는가. 이 작품은 명백하게 후자이다. 따라서 플롯은 매우 단순하다. 트릭이나 반전이랄 것도 없고, 인물 관계도가 복잡하지도 않으며, 배배 꼬인 구성도 없어 매우 수월하게 읽힌다. 그러니 다층적인 의미가 숨겨져 있고, 복잡한 플롯에 익숙한 추리 소설 독자라면, 이야기 구조가 너무 쉽고 단순한 거 아닌가 생각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명확한 색깔을 가지고 있는, 매혹적인 캐릭터는 이 작품의 기술적인 아쉬움을 뛰어 넘고도 남는다.

이 작품이 완벽하게 잘 쓰인 소설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모두가 공감할 수밖에 없는 부분이 있다는 말이다. 바로 여주인공 루미키를 자세히 관찰하면, 그 누구라도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을 거라는 거다.

그녀의 부모는 현실과 동떨어진 이름을 딸에게 붙여주었다. 그녀의 머리는 검은색이 아니었고, 피부는 갓 내린 눈처럼 빛나지 않았으며, 입술도 도드라지게 빨갛지 않았다. 세상에 어떤 부모가 딸에게 백설공주란 이름을 붙여준단 말인가? 핀란드어로는 그리 나쁘지 않은 이름, '루미키'이지만 설령 그녀가 그림 동화 속 캐릭터라 해도 이건 옳지 않았다. 그냥 친가 쪽의 이름을 따서 스웨덴식으로 붙였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물론 이름에 걸맞은 외모를 갖추는 건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염색약과 화장품만 있으면 가능하니까. 하지만 굳이 그래야 할 이유가 없었다. 그녀는 거울 속 자신의 모습에 충분히 만족했다. 남들의 의견 따윈 상관없었다.

스티그 라르손의 리스베트 살란데르는 스물넷이었고, 그에 반해 살라 시무카의 루미키 안데르손은 열일곱이다. 모든 문제에 대해 신중히 고찰하는 그녀는 물리학과 철학에서 우수한 성적을 받았다. 급우들의 장난에도 가담하지 않고, 학교 파티에도 참석하지 않는 그녀는 늘 혼자 식사를 하면서도 전혀 외로워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그녀는 남들과 확실히 달랐다. 그런데 마음만 먹으면 남들과 완전히 똑같기도 했다. 그 어떤 범주에도 속하지 않으려 애쓰며, 항상 모든 일에 방관적 입장을 유지했던 것이다. 그저 무난하게 살고 싶으면 어떤 일에도 참견하지 말고, 어떤 상황에도 휘말리지 않고, 그저 투명인간처럼 있는 듯 없는 살기로 결심한 그녀의 이름은 루미키로, 핀란드어로 백설공주를 뜻한다. 하지만 동화 속 주인공과 비슷한 외모를 가지지는 않았고 그녀는 그저 평범한 자신의 모습에 만족했다. 눈에 띄지 않는 것이 그녀 인생 최대의 목표였으니 말이다.

평소와 다를 것 없던 어느 날, 루미키는 자신의 은신처이기도 했던 암실에서 기가 막힌 상황과 맞닥뜨린다. 암실 천장에 무수히 많은 5백 유로 지폐가 걸려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암실 바닥은 불그스름한 갈색 얼룩들로 뒤덮여 있었고, 지폐 모서리에는 적갈색 얼룩이 가득하고, 말라붙은 피 냄새가 풍기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피 묻은 돈 3만 유로를 발견한 그 날 이후, 그녀의 평화롭고 조용했던 생활은 산산이 깨지고 만다.

", 이제 보니 우리 슈퍼 탐정님께서 컴퓨터 천재셨군그래."

투카가 조롱하듯 말했다.

"그래, 사실 난 에르큘 푸아로와 리스베트 살란데르의 사생아야." 루미키가 흔들림 없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리고 카스페르가 과장된 동작으로 비워준 의자에 앉았다.

고등학교를 배경으로 진행되는, 열일곱 소녀가 주인공인 작품이지만, 일반적인 학원 액션물과는 차원이 다르다. 터프하고 총명한 루미키는 순진하고 아무것도 모르는 나약한 십대 소녀가 아니었던 것이다. 오랜 격투기 훈련으로 날렵하고 강한 육체를 지녔고, 자신의 의지대로 마치 다른 사람처럼 연기할 수도 있었으며,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더없이 건조하기만 해 너무도 시크하고, 독립적인 캐릭터였다. 과거의 어떤 상처로 인해 마음을 완전히 닫아버리고, 그 누구에게도 마을 열지 않고, 관계를 맺지 않고 살아가려는 그녀의 모습에서는 여러 모로 리스베트의 그림자가 비치고 있다. 그래서 더 매력적이고, 그래서 더 그녀의 과거가 궁금해질 정도로 말이다. 앞으로 이어질 스노우화이트 트릴로지 시리즈의 다음 이야기 <눈처럼 희다> <흑단처럼 검다>가 손꼽아 기다려질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녀가 마음을 닫아버릴 수밖에 없었던 과거의 그 일, 그리고 가족과의 비밀과 옛 남자친구의 정체까지 숨겨진 이야기들이 어떻게 펼쳐질지 벌써 부터 궁금해진다.

옛날 아주 먼 옛날, 공포를 알게 된 소녀가 살았답니다.

특히나 이 작품에서 매력적인 장면 중의 하나는, 그녀가 피 묻은 돈 3만 유로를 발견한 이후, 어쩌다 보니 국제적인 범죄에 말려들어 조직의 보스가 여는 수상한 파티에 참석하게 되는데, 그곳에 참석하기 위해 변신을 하게 되는 장면이다.

눈처럼 흰 피부.

파운데이션, 파우더, 그녀의 피부색과 일치된 화장품이 잡티를 완벽히 감춰주고, 도자기 인형처럼 매끄러워진 얼굴.

피처럼 붉은 입술.

립 라이너, 립스틱 한 겹. 살짝 닦아내고 또 한 겹. 그리고 붉은 립글로스.

흑단처럼 검은 머리.

단발로 자른 그녀의 앞머리와 한껏 부풀린 뒷머리, 검정색 염색.

그녀의 이름처럼, 완벽하게 백설공주처럼 변신한 그녀가 벌이는 활약은 여느 액션 영화 못지 않게 전개되지만, 이 장면 전에 전개되던 그녀의 너무도 시크하고, 터프한 면들을 보아 왔기에 이 순간은 마치 마법처럼 매혹적이었다. 한때 잔혹동화가 성인들에게 유행처럼 읽혔었는데, 사실 백설공주 이야기도 매우 잔혹한 면을 가지고 있다. 왕비가 손가락을 찔려이 피처럼 붉고 눈처럼 희고 흑단처럼 검은 아이를 원했고, 공주를 죽이고 심장을 가져올 것을 요구하는 새로운 왕비의 스토리까지 말이다. 그러니 북유럽에서 시작되어 전세계인들에게 친숙한 구전동화백설공주이야기를 교묘히 변주한 이 작품이 스릴러의 모습을 띤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백설공주는 그 눈부신 아름다움만큼이나 잔혹한 부분을 가지고 있는 비극이기도 하니 말이다.

누구나 어른이 되는 순간을 마주하게 마련이다. 누군가는 마음 속에서 무언가가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듯한 기분을 맛보기도 하고, 이제 더 이상 스스로가 어리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되기도 하고, 그 동안의 자신과는 완전히 달라진 또 다른 존재가 되어 버렸다는 것을 알아버리기도 한다. 누구나 겪을 수밖에 없지만, 누구든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경험하는 순간이기에, 신비롭고, 매혹적인 순간이기도 하다. 살라 시무카는 바로 우리의 주인공 루미키에게 그런 비밀을 감추어 두고 있다. 자신의 운명은 스스로 결정하겠다며, 아무리 상황이 암담해도 포기를 떠올려본 적이 지금껏 단 한번도 없었던 루미키였기에, 그녀의 숨겨진 과거가 조바심이 나도록 궁금해지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살라 시무카는 매우 영리한 작가이다. 이 작품이 그녀가 처음으로 쓴 장편소설인데도 불구하고, 출간 1년여 만에 48개국에 판권이 팔렸다는 점이 이를 증명하기도 하고 말이다. 이 겨울이 다 가기 전에 다음 시리즈를 어서 빨리 만나보고 싶다. 이 작품은 이 계절과 너무도 잘 어울리는 매혹적인 스릴러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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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평생 누군가와 사랑에 빠진다. 그게 한 사람이든, 여러 사람이든 말이다. 그리고 가장 마지막에 사랑한 사람과 침대를 함께 쓰고, 그를 닮은 아이를 낳고, 평생의 동반자가 된다. 어릴 때 꿈꾸던 환상 속에 그리던 백마 탄 왕자는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내 눈에는 너무도 멋진 사람을 말이다. 하지만 조금만 더 시간이 지나면, 혹은 우리가 나이를 먹게 되면 알게 된다. 누군가를 인생의 동반자로 선택한다는 건 생각보다 매우 어렵고도 두려운 일이라는 걸. 두 사람의 사이가 조금이라도 벌어지지 않도록 끊임없이 애를 써야만 겨우 유지되는 것이 결혼이라는 제도이니 말이다. 매 순간 더 좋아지고, 더 열정적으로 만드는 모든 일이 매우 '당연한 것'이 되도록 최선을 다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많은 것을 포기하고, 더 많은 것을 양보하고, 그리고도 한없이 이해해야만 하니 말이다. 그러니 누가 누군가를 평생에 걸쳐 사랑했다고 한다면 그건 정말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가끔 길을 걷다 손을 잡고 걷는 다정한 노부부를 보면 나도 모르게 얼굴에 미소가 떠오른다. 나도 저렇게 늙어야지. 싶어서 말이다.

 

 

박범신 작가의 <당신>을 읽으면서 두터운 시간을 통과하는 사랑의 깊이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되었다. 일흔여덟의 희옥은 이제 막 죽어 경직이 시작된 남편을 집 마당에 묻는다. 남편이 파킨슨병 진단을 받은 것이 벌써 일 년 전의 일이었다. 치매에 걸린 후 빠르게 예전의 모습을 잃어버렸던 남편 주호백. 파킨슨병과 당뇨와 고혈압은 평생을 아내와 딸을 위해 헌신해온 그의 삶을 전혀 다르게 바꿔 놓는다. 짜증은커녕 평생 동안 아내의 말에 토를 다는 일도 거의 없이 마치 충직한 시종처럼 살아왔던 사람이 화를 내거나, 짜증을 부리고, 험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 등 그녀의 가슴을 철렁 내려앉게 만들곤 했던 것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평생 동안 가슴 속에 다른 남자를 품고, 남편과는 허깨비처럼 살았던 그녀가, 남편의 치매 때문에 일흔이 넘어서야 그를 사랑하게 된다. 치매가 아니었다면, 그가 평생 감추고 억눌러왔던 자신의 본능을 차례차례 그녀에게 드러내 보여주지 않았다면, 죽기 전 절대로 도달하지 못했을 어떤 각성 같은 느낌에 도달했는지도 모르겠다. 사랑이란 가끔 이렇게 말도 안 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누군가를 평생 혼자 바라보고 살았던 이가 죽고 나서야, 그를 한사코 보려 하지 않던 남겨진 이가 스스로도 몰랐던, 가슴 속에 쟁여져 있던 사랑을 뒤늦게 발견하게 되기도 하는 것 말이다.

 

내가 조금 어렸을 때, 그러니까 결혼이라는 것을 하지 않았을 때는 막연히 가족이라는 개념이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그저 주어지는 것 인줄만 알았다. 그런데 수십 년을 완전히 다른 환경에서 살아온 타인과 하나의 가족을 이루고 보니, 그게 아니었다. 매 순간 서로를 배려하고,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가끔은 무조건 희생해야 하지만 대가를 바라지 않고, 같은 곳을 바라보기 위해 수많은 것들을 공유해야 하는, 사실은 엄청난 노력이 바탕이 되어 유지되는 공동체가 바로 가족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결혼은 사랑의 문제가 아닌 책임의 영역이었고, 그렇게 만들어진 아이 또한 절대적인 포기와 희생을 통해서만 견고한 믿음으로 갈 수 있는 존재라는 걸 점점 깨닫게 되면서, 아이러니하게도 남편에 대한 사랑이 더 단단해지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사랑이란 그렇게 성숙해질 수록 더 깊어지는 모양이다. 치매에 걸린 노인의 정신이 먼 과거의 기억으로 달려나가듯이, 이 소설은 현재의 죽음에서 자꾸 과거의 생으로 달려간다. 너무 뒤늦게 사랑을 깨달은 그녀를 위한, 하고픈 말을 다 하지 못한 채 끝이 되어버린 그의 사랑을 위한 진혼곡처럼 말이다.

 

함정임 작가는 <저녁 식사가 끝난 뒤>의 마지막에 실린 작가의 말을 통해 이런 말을 했다. "어느 순간부터, 소설 쓰기란 추모의 형식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을 한다." 라고. 그녀의 이런 마음이 소설 전반에 흐르고 있었던 탓인지, 낯선 곳에서 위안을 받기 위해 여행을 떠나듯이, 나는 소설 속 공간을 통해서 위안을 받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누군가를 추모하는 마음으로 쓰여지는 소설이라면, 누구라도 기꺼이 시간을 내고 싶어지지 않을까. 부부는 어느 날 존 휴스턴 감독의 <죽은 자들>이라는 영화를 보고 P선생과 인연이 있는 지인들을 초대해 저녁식사를 하기로 한다. P선생의 부음 소식을 듣던 날 공교롭게도 그들 부부는 겨울 여행 중으로 한국에 없었기에, 갑자기 날아든 비보에 망연자실했었다. 그렇게 서울에서 두 명, 일산에서 두 명, 양평에서 한 명, 부산에서 한 명, 모두 여섯 명의 손님이 저녁 식사를 위해 모여든다. 저녁 식사가 끝난 뒤, 여자는 남편을 보며 말한다. 그런데 참 신기하다고. 아무도 그날 초대의 목적이었던 P선생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고 말이다. 그날 모여든 이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P선생에 대한 추억은 입 밖에 내지 않았지만, 사실 여자는 P선생이 좋아하는 장어요리를 준비했고, 누군가 부른 노래는 P선생의 애창곡이었으며, 누군가 가져온 들깨강정은 P선생이 자주 드시던 간식거리였으며, 누군가 가져온 박하차는 P선생이 정원에 심었다가 손님이 오면 따서 우려내 주시던 차였다. 이런 식으로 그들은 P선생을 기억하는 정표를 하나씩 준비하는 것으로 선생을 추도했던 것이다.

 

바다 색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는 여섯 시로 일부러 저녁 식사 시간을 잡은 마음이나, 이렇게 각자의 방식으로 누군가를 추도하는 마음이 너무 예쁘고 뭉클했다. 누군가에게 이런 방식으로 기억되는 기분은 어떨까 싶어 부럽기도 했고, 남겨진 이들에게 이렇게 추억되는 거라면 죽음이라는 것이 따뜻한 걸 수도 있겠다 싶기도 했다. 주인공이 지켜봐야 하는 누군가의 죽음, 결혼식 삼일 전에 사라졌다, 십 년 만에 죽어서 돌아온 연인이 남긴 일정에 따라 프랑스 호텔들을 여행하는 이별의 방식, 우연히 만나 가슴에 담아둔 소녀의 죽음을 듣고 히말라야로 향하는 남자의 여행, 모두 그리움과 추억으로 향하는 기차표와도 같았다. 글을 읽는 순간 우리를 그곳으로 데려가기도 하고, 인물들의 감정에 빠지게 만들기도 하니 말이다. 부산, 서울,, 경주, LA, 뉴욕의 맨해튼과 브루클린, 프랑스 남부 지역, 그리고 멕시코.. 이 소실 집에 실린 여덟 편의 이야기들은 각기 다른 장소를 통해 독자들을 마치 여행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게도 만든다. 죽음으로 비롯되는 상실감, 이별 후의 고독, 돌아갈 수 없는 어린 시절의 아련한 기억... 머물고 떠나는 것과 기억하고 잊어버리는 것 사이의 그 어떤 순간. 이상하게도 낯선 곳에서 위안을 받을 때가 있다. 우리가 가끔 가까운 이들에게는 털어놓지 못하는 걸 낯선 이들에게는 편하게 내뱉을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가지면서 사회생활을 접고 가족에게만 집중하는 시간을 어느 정도 보내게 되니, 한 해가 넘어가려는 이 시기의 무게 감이 여느 때와는 상당히 다르다는 걸 느낀다. 아직 그리 많지 않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이제 더 이상 '사회적인 이름'을 갖지 못하게 된 ''에 대한 자의식이 점점 사라지면서, 나이를 먹고, 늙어가는 것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하게 된 것이다. 아직 사회에 남아 있는 나의 동료들은 나를 어떻게 기억할까, 어린 시절 내 친구들 중에 아직 결혼을 하지 않은 그들은 현재의 시간을 어떻게 만들고 있으며, 미래를 어떤 모습으로 꿈꾸고 있을까. 가정주부가 되어 인간관계가 지나치게 단순화되자, 사람들 간의 관계를 유지하고 어떻게든 마음에 드는 방향으로 선 긋기를 하느라 진땀을 뺐던 젊은 시절의 내가 그리워지기까지 한다. 그런 마음은 편혜영 작가의 <선의 법칙>을 읽으면서 더욱 깊어졌다.

 

여러 해 전 나도 극중 윤세오처럼 집밖으로 나가지 않고, 집안에서만 지냈던 시기가 있었다. 물론 그녀처럼 밖에만 나가면 나를 찾으려고 혈안이 된 사람을 만날지도 모른다거나, 사람들이 숨어서 기다리고 있으리라는 망상에 시달린 건 아니었지만, 사람이 꼴도 보기 싫고,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아서 일종의 은둔생활을 보냈었다. 한때 마치 내가 세상의 중심이라도 된 듯 사람들이 내 주변으로 모여들 던 때가 있었다. 이유는 당시에 내가 하던 일 때문이었는데, 그 일로 인해 뭐라도 이득을 얻으려고 하거나, 나를 선망의 대상으로 보았던 이들이 꽤 많았었다. 물론 나도 나 자신의 아우라가 아니라, 내가 하던 일을 통해서 파급되는 것들 때문에 그들이 나에게 그렇게 달려들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그들의 선의처럼 보이는 행동들이 싫지 않았던 것 같다. 시작은 그렇게 사리사욕 때문이었을 지라도 나와 개인적인 친분을 나누게 된 이들은 그래도 결국 인간적인 교류를 하게 되지 않을까 믿고 싶었던 것도 같다. 결과적으로는 모두 나의 착각이었지만 말이다. 내가 그 일을 그만두고 다른 일을 하게 되었을 무렵부터 서서히 그들은 마치 신기루처럼 내 주변에서 하나 둘 사라져버렸다. 그렇게 나를 중심으로 이어져 있던 선들은 여기 저기 끊어지고, 구부러지고, 흐려져 결국 희미한 흔적만 남게 되었다. 하지만 나는 극중 김명국의 말처럼 '사람이란 본래 그럴 리 없는 존재 아닌가' , '사람이라면 상대를 진심으로 대하고 선의를 가졌으며 다른 사람을 위해 양보할 줄 아는' 그런 존재여야 하는 거 아닌가 싶은 마음에 나름의 상처를 받았던 것 같다. 그래서 나는 그들의 흔적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어 한동안 집 바깥으로 나가지 못하고 두문불출 한 뒤에야, 그리하여 조건 없는 인과 관계를 믿지 않게 된 뒤에야, 결국 타인의 선의를 일단 의심부터 하게 된 뒤에야 그 시기를 겨우 견뎌낼 수 있었다.

 

우리는 각자 나름의 방식으로 시간을 경험한다. 여러 해 전의 나를 집밖에 나가지 못하게 할 정도의 상처를 주었던 당시의 그들 중 누군가는 나를 그저 잠시 스쳐 지나가는 선으로 그냥 기억에서 지워버렸을 지도 모르니 말이다. 책을 읽는 행위 역시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이기에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여러 해 전의 내 모습이 떠올라 가슴 한 켠이 먹먹해졌다. 나처럼 바보 같았고, 나처럼 누군가를 맹목적으로 믿었던 미련한 사람이 여기도 있네 싶어 마음이 짠해졌던 것이다. 누군가는 이 작품을 통해 윤세오의 모습에서 자신을 찾아볼 테고, 누군가는 신기정의 동생을 보며 자신의 가족을 떠올릴 수도 있을 테고, 또 다른 누군가는 이수호를 보며 지긋지긋한 자신의 직장을 돌아볼 것이다. 이 작품의 이야기는 죽음에서 시작해 죽음으로 끝이 나는데, 그 사이에 연결되어 있는 수많은 선들의 조합이 매우 흥미롭다. 인물들의 이름과 이름을 연결하고 선으로 이었을 때,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인물이 어디선가 갑자기 튀어 나오기도 하고, 가까워 보이던 이들이 실상은 그다지 관계가 없는 걸로 밝혀지기도 한다. 사실 인간 관계란 대부분 그렇다. 그저 제각각 섬처럼 홀로 존재하다가 어느 시기에 잠깐 서로 연결되었다가, 다시 흩어지기도 한다. 누구와도 관계를 맺지 않고 살아갈 수는 없지만, 그 누구와도 완벽하게 연결되어 살아갈 수도 없다. 그것이 바로 삶의 아이러니이기도 하다.

여러 날에 걸쳐 찾았던 노력이 무색할 만큼 그들 사이에 이어진 선은 희미하다. 결국 이들의 선긋기는 거의 완벽하게 실패한다. 생이란 이렇듯 언제나 우리의 기대를 아무렇지 않게 배반하고는 한다. 위로 아래로, 사방으로 서로 연결되어야 했던 다단계와 관련되어 있는 관계들을 제외하고, 이 작품 속에서 제대로 선을 그을 수 있는 인간 관계는 거의 없다. 현실에서의 우리네 삶도 사실 별반 다를 게 없다. 친구도, 연인도 모조리 팔아야 하는 다단계보다도 더 못한 것이 내가 속해 있는 현실이라는 것이 씁쓸하기만 하다. 그렇게 현실이 더할 나위 없이 불행하고 서글플 때, 우리는 꿈과 현실의 경계에서 고민하게 된다. 바로 김성중 작가의 <국경시장>에서처럼 말이다.

 

 

누구나 인생에서 지워버리고 싶은 순간, 잊어버리고 싶은 기억이 있을 것이다. 매 순간 자신이 너무 자랑스럽고, 빛나서 시간이 지나는 게 아까울 정도로 삶이 퍼펙트 하기만한 사람은 거의 없을 테니 말이다. 되돌아보면 내 삶에서도 그런 순간들이 분명 있었다. 뭘 해도 나쁜 결과만 봐야 했던, 이렇게 계속 좋지 않은 일만 생겨도 되는 걸까 싶었던, 왜 나한테만 이런 시련을 주는 건지 억울하기도 했던 그런 시간들. 당시에는 세상이 전부 끝장나기라도 한 것처럼 절망했었는데, 어느새 지나고 보니 나는 그 순간들을 마치 남의 일이었던 것 마냥 잊어버리고 살고 있었다. 굳이 기억을 지워버리려고 애쓰지는 않았지만, 나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는 잊어버리고 싶었던 시간들이었을 테니 말이다.

 

, 기억을 팔아서 무언가 가치 있는 걸로 바꿔주는 곳이 있다고 생각해보자. 당신은 자신의 기억을 아무런 망설임 없이 없애버리겠는가? 어차피 우리가 생의 모든 순간들을 전부다 기억하면서 살아가는 게 아니니, 그래 몇 가지 기억쯤 없어도 될 것 같긴 하다. 그런데 자신만이 가지고 있던 그 기억들이 점점 사라지고 나면, 남아있는 ''를 온전한 ''로 볼 수 있겠느냔 말이다. 기억이 없다면, 타인과 구분되는 것이 허울뿐일 터인데, 그럼 빈 껍데기처럼 살아가야 하는 건 아닐까. 기억을 팔아서 돈을 마련할 수 있다니, 극중 인물들은 별 생각 없이 자신의 기억을 판다. 보통은 첫 거래에서 출생부터 두세 살까지의 기억을 판다고 하는데, 어차피 생각나지도 않는 기억이니 없어도 별 상관 없겠거니 싶었던 것이다. 그렇게 그들은 하나씩 자신의 기억을 팔아 바꾼 화폐로 시장의 갖가지 물건을 정신 없이 사들이다, 결국 기억을 모조리 팔아 버리고 서로를 알아보지 못하는 지경에 이른다. 기억이 모두 사라진 다면, 과연 그것을 ''라고 규정할 수 있는 것이 뭐가 있을까. 내가 ''가 아니라면, 그렇다면 ''는 어디로 사라진 것이며, 여기 있는 나는 누구란 말인가. 이 책에 실린 많은 이야기들이 환상동화 같은 미스터리하고도 섬뜩한 이야기인데, 너무도 있을 법한 스토리라 잔혹 동화 같지만 그럼에도 어딘지 고개가 끄덕여지는 이상한 기분이 들게 만들었다. 모두 욕망에 사로잡혀 결국 삶을 파멸로 이끄는 이들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이들 작품의 배경이 현실 같으면서도 환상적인, 꿈인 것 같으면서도 묘하게 섬뜩하다는 데 있다. 어디선가 멜로디 인형의 음악이 흘러나올 것 같은 분위기로 가다가 갑자기 잔혹동화의 결말처럼 정신을 번쩍 들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니 김성중 작가의 이야기는 모두 꿈과 현실의 경계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겠다. 몽환적이고 아름답게 느껴지다가도, 어느 순간 번뜩 정신이 들어보면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은 그런 세계 말이다. 그런데 그곳은 묘하게 자꾸만 빠져들고 싶은 세계이기도 하다. 이상하지 않은가. 이야기의 매력이란. 그러니 나는 이 순간에도 소설을 손에서 놓을 수가 없다. 내 인생에 동행하고 싶은 수많은 책들 중에, 올해는 이 네 권의 책이 가장 오래 기억에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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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욱정 PD의 요리인류 키친
KBS 요리인류 키친 이욱정 지음 / 예담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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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요리를 통해 여행을 한다'는 것은 굉장히 매혹적인 경험이다. 해외 여행을 할 때 우리가 대부분 제일 먼저 찾아보는 것은 바로 현지의 맛집이다. 그 나라에서만 먹어볼 수 있는 음식, 오직 그곳에서만 만날 수 있는 특별한 식재료와 조리법, 바로 그런 것들이 여행이 아니면 절대 경험할 수 없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여행을 다녀온 뒤에도 가장 기억에 많이 남는 것 또한 음식의 경험이다. 그러니 요리와 여행은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인 것이다. 요리를 통해 우리가 경험해보지 못했던 낯선 세계로 다가가고, 완전히 다른 곳에 사는 이들과 소통하고 공감하려는 노력을 보여준 요리인류는 참 멋진 프로그램이었다. 

 

 

여행도 좋아하고, 요리도 사랑하는 나에게 <누들로드> <요리인류>를 만들어낸 이욱정 PD는 정말 부러운 대상이다. 2년여에 걸쳐 10개국을 누비며 제작한 <누들로드>, 그리고 요리학교르 코르동 블뢰(Le Cordon bleu)’ 2년 가까이 요리 유학을 다녀온 뒤, 만든 것이 바로 <요리인류>이다. 그리고 두 다큐멘터리를 통해 30여개국의 60여개 레시피가 방송을 통해 선보여졌고, 이 책은 그 중 31개의 레시피를 엄선해 만들어졌다.

 

우리가 매일 만나는 밥상은 작은 우주와 같다. 이 놀라운 발견을 여러분도 '요리'를 통해 체험해봤으면 한다. 사실 이렇게 거창하게 말할 것도 없다. 음식만큼 일상에서 손쉽게 누릴 수 있는 행복이 또 있을까. 요리는 눈으로 보는 것보다 직접 하는 것이 더욱 즐거운 일이다. 요리하는 단순한 행복을, 많은 이들이 누릴 수 있기를 바란다.

 

하나의 레피시가 매일 10분씩 방송되었기에 나도 부담 없이 즐겨보았던 프로그램이기도 한데, 그 방송을 볼 때마다 새삼 이욱정 PD에 대해서 궁금증이 일곤 했었다. 요리 프로그램의 연출이 되기 위해서 2년이나 요리 유학을 다녀온 이력하며, 그러다 PD가 결국 직접 앞치마를 두르고 레시피를 설명하며 요리를 하고 있는데, 그 모습이 너무도 순수하게 행복해 보였으니 말이다. 특히나 방송을 보면서 단순히 요리 과정을 설명해주는 것이 아니라, 직접 세계의 요리 인류들이 보여주는 과정이 있었기에 마치 여행 프로그램처럼 설레이는 기분 마저 들곤 했었다. 그렇게 짧아서 너무 아쉬운 방송들이 모여 한 권의 두툼한 책으로 탄생했다고 하니, 소장 가치는 물론 방송을 보지 못한 이들과도 함께 나눌 수 있을 것 같아 더할 나위 없이 기쁘다.

 

이 책에 소개된 여러 레시피들이 인상적이었지만, 그 중 프랑스 동부에서 자유롭게 키우는 닭들의 에피소드도 그렇고, 7년 동안 미슐랭 가이드의 2스타 평가를 받아온 요리사 디디에 괴퐁의 요리도 참 좋았다. 닭 요리가 도대체 어떤 맛이기에 10만원이 넘는 돈을 주고 사먹는 다는 건지 놀라는 이욱정 PD의 감탄을 시작으로, 코코뱅이라는 요리를 만드는 과정 또한 어렵지 않았지만 특별했다.

"우리는 항상 누군가와 함께, 또는 누군가를 위해서 요리합니다. 그 관계 속에서 얻어지는 기쁨이 제 요리에 담긴 정신이에요. 그래서 저는 늘 요리하는 것이 지구상 가장 행복하고 아름다운 행동이라고 생각해요."

,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요리사가 만드는 음식은 어떤 맛일까. 행복한 마음으로 만드는 요리에는 그만큼의 행복도 담겨 져 있을 것이다. 요리는 만든 사람과 먹는 사람 사이의 교감이기도 하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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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골동품 상점 (무선)
찰스 디킨스 지음, 김미란 옮김 / B612 / 2015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쏟아지는 신간의 홍수 속에서 고전을 '굳이' 찾아 읽기엔 다소 무리가 있다. 매일같이 부지런히 읽어도, 정말 읽고 싶은 책들을 다 볼 수는 없는 것이 짧은 인생이니 말이다. 그래서 내 기억 속에 고전이란 학창 시절에 읽었던 것이 거의 대부분인데, 이상하게도 사회에 나와서도 가끔 찾아보게 되는 고전들이 있다. 바로 영화나 드라마, 혹은 뮤지컬 등의 다른 매체로 만나게 되는 경우이다. 그만큼 시대를 넘어서서 변주될 수 있을 만큼의 힘을 가지고 있는 작품이라는 말인데, 백 여년 전에 쓰인 작품이 지금 만나도 전혀 낡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으니 말이다. 그렇게 대중들에게 친숙한 고전 작가 중에 손꼽히는 작가가 바로 찰스 디킨스이다. <두 도시 이야기>, <위대한 유산>, <크리스마스 캐럴>, <올리버 트위스트> 등 너무도 유명한 작품들을 써낸 거장 찰스 디킨스의 새로운 작품이라니, 지금이라도 국내최초완역으로 만날 수 있다는 점에서 정말 궁금하고 반가웠다.

넬의 심장이 희망과 확신으로 요동쳤다. 배고픔이나 추위, 갈증, 아픔 따위는 생각하지 않았다. 넬은 그저 예전에 누렸던 소박한 즐거움의 회복과 골동품 상점의 우울한 고독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안도감, 타인의 시련에 무관심한 비정한 사람들로부터의 해방감, 할아버지의 건강 회복과 마음의 평온, 그리고 고요하고 행복한 삶만을 떠올렸다. 햇살, 시냇물, 들판, 여름날의 정경이 눈앞에 펼쳐지며 그 찬란한 그림에 어두운 색조는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특히나 이 작품에 대한 당시의 일화가 너무도 유명해서, 무려 '19세기의 해리포터라고 불릴 만큼이었다고 하니 작품의 인기를 짐작하기가 어렵지 않을 것이다. 이 작품은 1840년에 집필되었는데, 당시 신생잡지에 연재되어 당시 사람들이 주인공인 넬을 실존인물로 착각할 정도였다고 한다. 마치 코난 도일의 셜록 홈즈를 대하는 당시의 사람들이 그의 죽음을 다시 바꾸어 살려놓았을 정도로 말이다. 그래서 불쌍한 우리의 주인공 넬을 불행하게 만들지 말라는 편지가 쇄도했고, 그녀가 죽는 분량이 배포되었을 때는 전 영국이 울음바다가 됐다고 한다. 이 작품 역시 영화, 오페라, 연극, 뮤지컬은 물론 TV드라마 등으로 제작됐었고, 올 크리스마스엔 BBC에서 새롭게 제작한 드라마를 선보인다고 하니 정말 시간의 틈을 뚫고 살아있는 작품이라는 생각도 든다.

넬은 '지켜보는 사람도 어떤 보살핌도 없이 혼자인 아이이다. 어머니는 가난하게 살다 먼저 세상을 떠났고, 그녀는 오래되고 진기한 물건들이 가득한 작고 낡은 골동품 상점에서 할아버지와 함께 지내고 있다. 하지만 노인과 소녀는, 거의 쫓겨나다시피 골동품 상점을 떠나게 되고, 이어지는 그들의 여정은 험난하기만 하다. 무려 칠백 페이지가 넘는데, 그들이 골동품 상점을 떠나는 것이 겨우 백여 페이지 정도의 지점이다. 그러니 그 뒤 수많은 페이지 속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란, 사실 어찌 보면 뻔하다. 결코 해피 엔딩이 될 수 없다는 의혹이 점점 짙어질 수밖에 없는, 촘촘히 짜여진 이야기의 모자이크는 페이지를 넘어갈 수록 묵직해진다. 끝이 어떻게 될 거라는 걸 알면서도, 그러니까 이 스토리에 반전 따위가 숨겨져 있지 않을 거라는 걸 알면서도 읽는 걸 멈출 수 없다는 건 이 작품 만의 강력한 힘이다. 사실 요즘 대부분의 신간들은 초반 삼, 사십 페이지에서 결판이 나지 않다. 사실 나는 그 정도 읽었는데도 나를 매혹시키는 점이 없는 작품은 끝까지 읽지 않는다. 시간을 더 투자하는 게 낭비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디킨스의 이 작품은 웬만한 작품 두 권 분량인데도 읽는 걸 미루거나 멈출 수가 없었다.

우리가 인생에서 겪는 모든 일은 그것이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대부분 상대적이다. 만약 지금 넬이 이 소박한 장소의 평화에 그 어느 때보다 강한 인상을 받았다면 그건 지친 발로 여행하며 겪었던 어둡고 힘들었던 과정 때문일 것이고, 그것은 엄숙한 곳에서 자신을 발견하는 깊은 울림과도 같은 것이리라.

......이곳에는 희미한 빛줄기, 돔형 지붕의 침하, 조금씩 허물어지는 벽, 낮게 내려앉은 바닥, 비문의 글이 닳아 없어진 장엄한 무덤, 대리석, , , 나무, 먼지와 같은 폐허의 공통된 상징물들이 모두 존재했다. 잘난 사람과 못난 사람, 소박하게 살았던 사람과 부자로 살았던 사람, 위풍당당한 사람과 볼품없는 사람 이 모든 사람이 이곳에서는 평등했다.

누구 하나 그들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도움의 손길을 건네는 사람도 없는 현실을 오롯하게 몸으로 부딪쳐 겪어 내야 하는 어린 소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를 탓하거나, 자신의 운명을 비관하거나 불행해하지 않는다. '이익이나 손해는 따지지 말고, 운도 시험하지 말고, 그저 할아버지와 함께하려 했던 미래만 떠올려보자'는 넬의 말은 그녀가 어른이 아니기 때문에 더욱 먹먹하다. 그리고 그녀의 삶에 대한 그런 태도와 결단력은 매우 생경하게 느껴지면서도 대견스럽기만 하다. 자신의 앞가림도 제대로 하기 어려운 나이에, 할아버지까지 보살펴야 하는데도, '타인의 조언이나 도움의 손길을 전혀 기대하지 않기'란 쉬운 일이 아니니 말이다. 자신과 할아버지, 두 사람의 생을 떠안고 책임감을 가지려는 넬의 모습은 애처롭고, 마음이 아프기만 하다. 아프다고 말한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다며 아무런 불평도 하지 않고, 점점 몸 상태가 나빠와서 자신이 서서히 죽어 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면서도 두려움이나 걱정 따위는 하지 않는 모습은 나도 모르게 그녀에게 감정 이입해서 제발 좀 영악해지라고 한마디 해주고 싶어질 정도이기도 했다.

어쩌면 이 오래된 작품 속 사람들의 모습과 현대의 우리네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을 지도 모른다. 타인의 슬픔에 무관심하고, 타인의 고통에 무감각한 모습들 말이다. 돈도 없고 빽도 없고, 세상에 기댈 것 하나 없는 사람이 백마 탄 왕자님을 만나 갑자기 부자가 될 확률은 거의 제로에 가깝다는 점에서도 그렇고 말이다. 무려 175년 전의 작품인데, 이렇게나 리얼하게 현실을 투영하고 있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자신의 앞에 닥친 어려움에 쉽게 주저 앉고 마는 나약한 사람들에게, 문제가 생기면 숨거나 피하고만 싶어하는 무력한 사람들에게도 이 작품 속 넬이 시사하는 바가 많을 것 같다. 디킨스가이 책은 당신의 폐를 열어 주고, 당신의 얼굴을 씻어 주고, 당신의 안구를 정화하고, 당신의 치밀어 오르는 화를 잠재울 것이다. 그러니 마음껏 울어도 좋다라고 말한 이유를 알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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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장고를 부탁해 - 베스트 레시피북
JTBC <냉장고를 부탁해> 제작팀 엮음 / 중앙books(중앙북스)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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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요즘은 스타 셰프들이 많아서인지 공중파, 케이블 할 것 없이 요리 프로그램이 우후죽순 생겨나 선택할 수 있는 폭도 넓어졌고, 전문 쉐프들이나 할 법한 레시피를 쉽게 집에서도 따라 할 수 있게 되었다. 한참 '먹방'에 관한 프로그램이 인기를 끌더니, 이제는 '쿡방' 모든 방송사를 휘어 잡고 있다. 바라만 보는 먹방보다는 직접 참여해볼 수 있는 쿡방이 더 즐거운 오락이 된 것이다. 요리와 일상을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이고, 이런 방송들은 집밥 열풍으로 고스란히 이어져 건강한 라이프 스타일의 추구에도 영향을 주고 있다. 거기다 젊고 실력있는 데다 재미있기 까지 한 인기 셰프들도 한 몫을 하고 있다. 바야흐로 대세는 요리하는 남자인 것이다. 오죽하면 '요섹남'이라는 단어까지 생겼겠는가.

 

 

바로 그런 셰프들을 대세로 만든 것에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이 아마도 <냉장고를 부탁해>라는 프로그램이 아닐까 싶다. 나는 이 프로그램이 인기를 이렇게나 끌게 될지 몰랐을 때부터, 어쩌다보니 첫 회부터 오십 회가 넘어선 현재까지 꾸준히 지켜보고 있는 시청자이다. 물론 이 프로그램 외에도 스타 셰프들이 등장하는 요리 프로그램들이 꽤나 많지만, 나는 지금도 여전히 이 프로그램이 최고가 아닌가 싶다. 왜냐하면 이 프로그램은 다른 방송과 달리 '요리를 먹는 대상'이 매우 중요한 포인트이기 때문이다. 내가 요리를 좋아하는 이유 또한 단 한가지이다. 내가 해준 음식을 먹고 기분 좋아할 사람을 떠올리며 요리를 하는 순간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레시피를 줄줄 외워서 자동적으로, 혹은 단순히 끼니를 때워야 해서, 아니면 자신의 화려한 요리 실력을 뽐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 요리를 먹어줄 단 한 사람의 만족감을 위해서 존재하는 셰프라니, 이건 정말 앞으로도 전무후무한 방송이 아닐까 싶다. 물론 그것을 경쟁 구도를 만들어 게임처럼 풀어가고는 있지만, 본질은 변하지 않으니 말이다.

바로 그 <냉장고를 부탁해>의 주옥 같은 레시피를 모은 레시피 북이 출간된다고 해서 손꼽아 기다렸었다. 실제로 방송을 보다 보면 전문 셰프가 하는 어려운 레시피처럼 보이지 않고, 누구나 재료만 있으면 따라 해볼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순간이 종종 있다. 그래서 나도 몇몇 요리들은 실제로 만들어서 먹어 본 적이 있고, 가족들의 좋은 호응도 얻고는 했다. 물론 셰프님들이 한 요리만큼의 멋진 비주얼은 나오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소에 먹는 흔한 요리가 아니라서 그런지 먹는 즐거움을 잔뜩 주었던 시간이었다. 그 중에서 정말 쉽기도 하고, 평범한 주부인 내가 만들어도 맛있어서 여러 번 해 본 요리는 정창욱 셰프의 '괜찮아 목심이야'와 김풍 작가의 '자투리타타'이다.

 

정창욱 셰프의 요리에서보다는 고기 위의 사과, 야채가 너무 듬뿍이어서 비주얼은 좀 그렇지만, 맛은 정말 훌륭했다. 김풍 작가의 자투리타타는 기존에 먹던 프리타타나 오믈렛과 비슷한 듯 하면서도 다른, 정말 중독성있는 맛이었다. 프라이팬에서 천천히 익히는 것이 번거로워 오븐에 구웠더니 비주얼이 상당히 달라지긴 했지만 말이다. 다음에 도전해보고 싶은 레시피는 박준우 기자의 '라벤더 숲'과 미카엘 셰프의 '백 투 더 치킨'이다. 특히 미카엘 셰프의 요리들은 내가 사랑하는 닭을 재료로 독특한 레시피들이 많아 방송을 볼 때마다 도전 욕구를 마구 불러일으키곤 했었다. 그동안 방송을 보면서 이렇게나 멋진 레시피들을 한꺼번에 정리해두면 좋겠다 싶은 순간들이 많았는데, 이렇게 레시피 북이 나오니 소장용으로도 가치가 있을 것 같다. 인기 메뉴 92개의 레시피들이 상세하게 실려 있고, 정확한 조리 분량이라던가, 셰프들의 쿠킹 팁에 방송 비하인드 스토리까지 읽을 거리들도 풍부하다.

 

티비 요리쇼를 보다 보면 엄마가 해준 따뜻한 밥을 먹는 것처럼 마음이 따뜻해졌고, 하루 동안 나를 스트레스 받게 했던 그 모든 순간들이 모조리 사라져버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곤 한다. 나를 괴롭히던 문제들은 내일 생각해도 괜찮을 것 같은 여유로움이 생긴다고 할까. 세상에 먹는 일만큼 중요한 게 또 뭐가 있겠냐 싶다는 생각이 들면, 그 어떤 문제도 더 이상 껴안고 있겠다는 마음이 사라지게 되니 말이다. 요리는 우리를 잠시나마 이곳이 아닌 다른 곳으로 데려가 주곤 한다. 지금 내 상황이 어떤지, 나를 기다리고 있는 문제 거리들이 얼마나 쌓여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내일이 또 오늘 같이 반복될 거라는 거라는 걸 생각하면 얼마나 지루한가. 거기다 오늘도, 내일도 늘 비슷한 반찬에 끼니를 때우기 위한 식사가 된다면 식사 시간이 즐거울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런 당신을 위한 따뜻한 책이 바로 이 책이 아닐까 싶다. 깨끗한 재료들과 정확한 레시피, 그리고 발과 프라이팬과 양념들로 정직한 노동의 시간이 지나고 나면 항상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 요리이다. 그리고 그렇게 뱃속을 따뜻하게 데워줄 요리들은 우리의 허전하고, 외로운 마음마저 만져주곤 한다. 지금 요리하는 남자들에게 푹 빠져 있다면, 당장 내일 뭐 해먹을지 걱정이라면, 매일 똑같은 끼니 때우기에 지쳤다면, 이 책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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