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처럼 붉다 스노우화이트 트릴로지 1
살라 시무카 지음, 최필원 옮김 / 비채 / 2015년 11월
평점 :
절판


용 문신을 한 천재 해커, 비밀정보 조사원이자 깡마른 펑크족, 작고 단단한 몸으로 사적 복수를 가하던 여전사. 스티그 라르손의 <밀레니엄> 시리즈의 가장 큰 매력 중 하나는 바로 여주인공 리스베트 살란데르였다. 너무 많은 것을 경험했기 때문에 나이에 비해 조숙하지만, 내면적으로 충분히 성장하지 못한 부분도 있어 순진한 면도 가지고 있는, 굉장히 이율배반적인, 겉모습과는 정반대의 상반된 부분을 가지고 있는 두 모습의 전무후무한 여성 캐릭터. 바로 그 스티그 라르손이 창조한 히로인 리스베트 살란데르에게 오마주를 바치는 작가, 살라 시무카의 스노우화이트 트릴로지 시리즈를 만났다. 추리, 스릴러 소설은 크게 두 부류이다. 플롯 중심으로 이야기가 진행되는가, 캐릭터 중심으로 이야기가 진행되는가. 이 작품은 명백하게 후자이다. 따라서 플롯은 매우 단순하다. 트릭이나 반전이랄 것도 없고, 인물 관계도가 복잡하지도 않으며, 배배 꼬인 구성도 없어 매우 수월하게 읽힌다. 그러니 다층적인 의미가 숨겨져 있고, 복잡한 플롯에 익숙한 추리 소설 독자라면, 이야기 구조가 너무 쉽고 단순한 거 아닌가 생각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명확한 색깔을 가지고 있는, 매혹적인 캐릭터는 이 작품의 기술적인 아쉬움을 뛰어 넘고도 남는다.

이 작품이 완벽하게 잘 쓰인 소설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모두가 공감할 수밖에 없는 부분이 있다는 말이다. 바로 여주인공 루미키를 자세히 관찰하면, 그 누구라도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을 거라는 거다.

그녀의 부모는 현실과 동떨어진 이름을 딸에게 붙여주었다. 그녀의 머리는 검은색이 아니었고, 피부는 갓 내린 눈처럼 빛나지 않았으며, 입술도 도드라지게 빨갛지 않았다. 세상에 어떤 부모가 딸에게 백설공주란 이름을 붙여준단 말인가? 핀란드어로는 그리 나쁘지 않은 이름, '루미키'이지만 설령 그녀가 그림 동화 속 캐릭터라 해도 이건 옳지 않았다. 그냥 친가 쪽의 이름을 따서 스웨덴식으로 붙였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물론 이름에 걸맞은 외모를 갖추는 건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염색약과 화장품만 있으면 가능하니까. 하지만 굳이 그래야 할 이유가 없었다. 그녀는 거울 속 자신의 모습에 충분히 만족했다. 남들의 의견 따윈 상관없었다.

스티그 라르손의 리스베트 살란데르는 스물넷이었고, 그에 반해 살라 시무카의 루미키 안데르손은 열일곱이다. 모든 문제에 대해 신중히 고찰하는 그녀는 물리학과 철학에서 우수한 성적을 받았다. 급우들의 장난에도 가담하지 않고, 학교 파티에도 참석하지 않는 그녀는 늘 혼자 식사를 하면서도 전혀 외로워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그녀는 남들과 확실히 달랐다. 그런데 마음만 먹으면 남들과 완전히 똑같기도 했다. 그 어떤 범주에도 속하지 않으려 애쓰며, 항상 모든 일에 방관적 입장을 유지했던 것이다. 그저 무난하게 살고 싶으면 어떤 일에도 참견하지 말고, 어떤 상황에도 휘말리지 않고, 그저 투명인간처럼 있는 듯 없는 살기로 결심한 그녀의 이름은 루미키로, 핀란드어로 백설공주를 뜻한다. 하지만 동화 속 주인공과 비슷한 외모를 가지지는 않았고 그녀는 그저 평범한 자신의 모습에 만족했다. 눈에 띄지 않는 것이 그녀 인생 최대의 목표였으니 말이다.

평소와 다를 것 없던 어느 날, 루미키는 자신의 은신처이기도 했던 암실에서 기가 막힌 상황과 맞닥뜨린다. 암실 천장에 무수히 많은 5백 유로 지폐가 걸려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암실 바닥은 불그스름한 갈색 얼룩들로 뒤덮여 있었고, 지폐 모서리에는 적갈색 얼룩이 가득하고, 말라붙은 피 냄새가 풍기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피 묻은 돈 3만 유로를 발견한 그 날 이후, 그녀의 평화롭고 조용했던 생활은 산산이 깨지고 만다.

", 이제 보니 우리 슈퍼 탐정님께서 컴퓨터 천재셨군그래."

투카가 조롱하듯 말했다.

"그래, 사실 난 에르큘 푸아로와 리스베트 살란데르의 사생아야." 루미키가 흔들림 없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리고 카스페르가 과장된 동작으로 비워준 의자에 앉았다.

고등학교를 배경으로 진행되는, 열일곱 소녀가 주인공인 작품이지만, 일반적인 학원 액션물과는 차원이 다르다. 터프하고 총명한 루미키는 순진하고 아무것도 모르는 나약한 십대 소녀가 아니었던 것이다. 오랜 격투기 훈련으로 날렵하고 강한 육체를 지녔고, 자신의 의지대로 마치 다른 사람처럼 연기할 수도 있었으며,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더없이 건조하기만 해 너무도 시크하고, 독립적인 캐릭터였다. 과거의 어떤 상처로 인해 마음을 완전히 닫아버리고, 그 누구에게도 마을 열지 않고, 관계를 맺지 않고 살아가려는 그녀의 모습에서는 여러 모로 리스베트의 그림자가 비치고 있다. 그래서 더 매력적이고, 그래서 더 그녀의 과거가 궁금해질 정도로 말이다. 앞으로 이어질 스노우화이트 트릴로지 시리즈의 다음 이야기 <눈처럼 희다> <흑단처럼 검다>가 손꼽아 기다려질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녀가 마음을 닫아버릴 수밖에 없었던 과거의 그 일, 그리고 가족과의 비밀과 옛 남자친구의 정체까지 숨겨진 이야기들이 어떻게 펼쳐질지 벌써 부터 궁금해진다.

옛날 아주 먼 옛날, 공포를 알게 된 소녀가 살았답니다.

특히나 이 작품에서 매력적인 장면 중의 하나는, 그녀가 피 묻은 돈 3만 유로를 발견한 이후, 어쩌다 보니 국제적인 범죄에 말려들어 조직의 보스가 여는 수상한 파티에 참석하게 되는데, 그곳에 참석하기 위해 변신을 하게 되는 장면이다.

눈처럼 흰 피부.

파운데이션, 파우더, 그녀의 피부색과 일치된 화장품이 잡티를 완벽히 감춰주고, 도자기 인형처럼 매끄러워진 얼굴.

피처럼 붉은 입술.

립 라이너, 립스틱 한 겹. 살짝 닦아내고 또 한 겹. 그리고 붉은 립글로스.

흑단처럼 검은 머리.

단발로 자른 그녀의 앞머리와 한껏 부풀린 뒷머리, 검정색 염색.

그녀의 이름처럼, 완벽하게 백설공주처럼 변신한 그녀가 벌이는 활약은 여느 액션 영화 못지 않게 전개되지만, 이 장면 전에 전개되던 그녀의 너무도 시크하고, 터프한 면들을 보아 왔기에 이 순간은 마치 마법처럼 매혹적이었다. 한때 잔혹동화가 성인들에게 유행처럼 읽혔었는데, 사실 백설공주 이야기도 매우 잔혹한 면을 가지고 있다. 왕비가 손가락을 찔려이 피처럼 붉고 눈처럼 희고 흑단처럼 검은 아이를 원했고, 공주를 죽이고 심장을 가져올 것을 요구하는 새로운 왕비의 스토리까지 말이다. 그러니 북유럽에서 시작되어 전세계인들에게 친숙한 구전동화백설공주이야기를 교묘히 변주한 이 작품이 스릴러의 모습을 띤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백설공주는 그 눈부신 아름다움만큼이나 잔혹한 부분을 가지고 있는 비극이기도 하니 말이다.

누구나 어른이 되는 순간을 마주하게 마련이다. 누군가는 마음 속에서 무언가가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듯한 기분을 맛보기도 하고, 이제 더 이상 스스로가 어리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되기도 하고, 그 동안의 자신과는 완전히 달라진 또 다른 존재가 되어 버렸다는 것을 알아버리기도 한다. 누구나 겪을 수밖에 없지만, 누구든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경험하는 순간이기에, 신비롭고, 매혹적인 순간이기도 하다. 살라 시무카는 바로 우리의 주인공 루미키에게 그런 비밀을 감추어 두고 있다. 자신의 운명은 스스로 결정하겠다며, 아무리 상황이 암담해도 포기를 떠올려본 적이 지금껏 단 한번도 없었던 루미키였기에, 그녀의 숨겨진 과거가 조바심이 나도록 궁금해지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살라 시무카는 매우 영리한 작가이다. 이 작품이 그녀가 처음으로 쓴 장편소설인데도 불구하고, 출간 1년여 만에 48개국에 판권이 팔렸다는 점이 이를 증명하기도 하고 말이다. 이 겨울이 다 가기 전에 다음 시리즈를 어서 빨리 만나보고 싶다. 이 작품은 이 계절과 너무도 잘 어울리는 매혹적인 스릴러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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