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소비 생활
가제노타미 지음, 정지영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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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돈을 쓰지 않고 지내는 것은 근력 운동과 같다. 가끔 생각났을 때만 하면 충분하지 않고, 매일 조금씩 꾸준히 해야 좋은 습관이 생긴다. 오지에 살지 않는 한, 요즘 시대를 사는 사람은 대부분 돈을 조금 내면 즐거움을 얻을 수 있고 불편도 해소할 수 있다. 상당히 돈을 쓰기 쉬운 상황에 놓여 있는 셈이다. 어떻게 생각해도 바로 돈을 쓰는 편이 쉽다. 그렇다고 해서 일일이 절약을 의식하면서 사는 것은 힘들기 때문에 앞으로 소개하는 방식처럼 돈을 쓰지 않을 방법을 일상에 녹여두면 여유롭게 생활할 수 있다.                 p.88~89


월급은 늘어나지 않는데, 물가는 높아만 가고, 카드값은 줄지 않고, 필요한 소비는 많아진다. 누구나 그렇지 않을까. 매달 생활비며 식비 등 고정 지출비를 제외하고, 일정 금액을 저축하며, 과소비는 하지 않겠다고 마음 먹지만 모아 놓은 돈은 많지 않고, 월급은 카드값으로 다 빠져 나가고, 늘 돈이 부족하기만 하다. 딱 그런 사람들을 위한 책이 나왔다. 이름하여 '저소비 생활'! 기존의 통념과 다른 절약 방식으로 화제를 모아 출간 후 아마존 재팬 베스트셀러에 오르기도 했던 화제의 책이다. 




저자인 가제노타미는 돈과 생활 이야기를 주로 다루는 라이프 스타일 유튜버이다. 갖은 시행착오를 겪고 현재 월세 포함 한 달 생활비 70만 원 이하의 생활에 도달했다고 하는데, 가능한 걸까? 도쿄 도심에서 살면서 생활비가 70만원이라니... 너무 궁금해졌다. 어떻게 해야 생활비를 줄이면서도 자기 나름대로 만족하며 살 수 있을까? 저자는 말한다. 하고 싶은 일을 참기보다 불필요한 물건을 짊어진 생활이나 소비 흐름을 제자리로 되돌린다고 생각하면, 자연스레 생활이 간소화되고 돈이 이전보다 필요 없어진다고. 그래서 이 책은 돈의 사용과 관리 방법, 의식주와 관련된 생활 습관과 사고방식까지 저자가 스스로 만족스러운 상태를 추구하며 온갖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얻어낸 저소비 생활 방식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려 준다. 




사람의 의식은 참으로 신기해서 이미 가진 게 많다고 생각하며 주위를 둘러보면 많다고 느껴지고, 없다고 생각하면 없다고 느껴진다. 그렇다면 자신이 만족하는 쪽을 선택해야 마음도 가벼워지고, 불필요한 일도 줄어든다... 이미 가지고 있고, 이미 갖추고 있음을 의식하면 초조함이나 불안함을 느낄 때 신기하게도 마음이 안정된다... 처방은 단 하나다. 나는 이미 많은 것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을 바꾸면 된다. 이미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습관만 있어도 낭비가 줄어들어 자신의 페이스를 지키며 생활할 수 있다.                p.244~245


'보복 저축'이라는 말을 들어본 적 있을 것이다. 이는 해외여행, 명품, 외식에 지갑을 열던 '보복 소비'의 반대 개념으로, 생활필수품 이외에는 거의 소비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극단적 소비 절제 현상이 MZ세대 사이에서 특히 관심을 끌고 내 집 마련 꿈을 이뤄줄 유일한 수단으로 삼고 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외식비가 급등하는 등 고물가로 인해 '짠물 소비'가 확산되고 있어, 편의점 마감세일 등이 인기라는 보도도 있었다. 절약에 관련된 키워드는 세대를 불문하고 관심이 뜨겁지만, 문제는 실천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실제 자신의 월 생활비를 고정비와 변동비로 나누어 항목별로 보여준다. 생활비를 먼저 정하고, 그 이외의 금액은 모두 저축하는 방식으로 했더니, 생활비 낭비가 상당히 줄어들었다는 것이다. 수입대비 돈을 어떻게 나눌 것인지부터 소비를 줄이는 도구까지 현실적이고, 구체적으로 알려준다. 



돈, 의식주, 생각이라는 카테고리로 구성해 각각의 항목들을 어떻게 소비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잘 정리된 책이었다. 특히나 '저소비 생활'이 극단적인 절약이나 물건을 줄이는 미니멀리즘과는 다르게, '있는 그대로의 나'로 돌아가는 작업'이라는 저자의 말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회사원으로 일할 때는 맞지 않는 일을 계속하기 위해 돈을 들여 보충해야 할 일이 많았다면, 회사를 그만 두고 지금의 생활에서는 그렇지 않았다는 거다. 자신에게 맞는 일을 하는 것이 자가발전 시스템을 설치하는 것과도 같다고, 자가소비 시스템으로 생활과 내면이 채워지면 누가 무엇을 해주기를 바라지 않으므로 추가 서비스 요금이 필요하지 않게 되고, 자연스럽게 생활비가 줄어든다는 거다.


행복을 느끼는 것은 돈을 쓰는 행위나 돈 자체가 아니라 결국 내가 어떻게 느끼느냐에 달려 있다는 저자의 말에 공감한다. 아무리 절약해도 힘이 들다면 행복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내가 무엇에 행복을 느끼고, 평소 어떤 것에 초점을 맞추면 좋을지 의식하기 시작하면 불필요한 소비도 줄어들고, 저소비 생활도 더 충실해진다고 말이다. 자, 총 조회 수 2,400만 화제의 절약법이 궁금하다면, 의미 없이 쓰고 후회하는 소비 패턴에서 벗어나고 싶다면, 소비가 줄면 행복도 줄어들지 않을까 걱정한다면 이 책을 만나보자. 더 건강하고, 여유롭게, 저비용 고만족 생활을 할 수 있게 도와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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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와 친구가 되고 싶은 오로르
더글라스 케네디 지음, 조안 스파르 그림, 조동섭 옮김 / 밝은세상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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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엄마 아빠는 내가 소리 내서 말하지 않아도 괜찮대. 그렇지만 다른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은 남다른 사람을 보면 불편하다고 말해. 자기들이 생각하는 '정상'의 개념에 맞지 않는 걸 보는 게 싫은 거야. 그런데 '정상'이라는 건 존재하지 않아. 집단에서 벗어나지 않으려고, 특별해 보이는 걸 억누르려고 '정상'이라는 개념을 스스로한테 강요하는 것뿐이야. 이제 백여 년 전 걸작을 너한테 보여 줄게. 그 당시에는 아무도 이해하지 못한 그림이야."               p.47


11살 오로르는 신비한 힘을 가진 아이다. 사람들의 눈을 보면 하고 싶은 말과 생각하는 것을 읽어낼 수 있다. 하지만 사람들은 오로르가 장애를 가지고 있다고, 자폐아라고 부른다. 오로르는 소리내어 말을 하는 대신 태블릿에 글을 써서 말한다. 학교에 가는 대신 조지안느 선생님과 공부하고, 선생님이 제안한 태블릿으로 말하는 법을 배우는 데 1년도 넘게 걸렸다. 지금은 아빠보다도 빠르게 타자를 칠 수 있고, 다른 사람들과 의사 소통하는 데 전혀 문제가 없다.  오로르가 가지고 있는 마음을 읽는 힘에 대해서는 알고 있는 사람이 아주 적다. 엄마와 아빠, 세살 많은 언니도 모른다. 조지안느 선생님과 주베 형사님만 알고 있다. 이 특별한 능력 덕분에 오로르는 주베 형사의 부관이 되기로 하는데, 이번 작품에서 사건을 해결하는 데 아주 큰 활약을 하게 된다. 


<모두와 친구가 되고 싶은 오로르>에서는 오로르가 드디어 학교에 가게 되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진짜 학교에 다니는 건 처음 경험해 보는 일이라 오로르는 신이 난다. 하지만 친구들은 오로르가 아는 게 많다고 잘난 체 한다고, 왜 그렇게 유별나느냐고 생각한다. 남들과 다르게 세상을 보고, 다른 사람들처럼 입으로 소리 내서 말하지 못하는 것을 아이들은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다. 하지만 오로르는 남들과 다른 건 멋진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신은 슬픈 일도 화낼 일도 없다고 생각한다. 전편에서 루시 언니의 실종 사건을 통해 만난 주베 형사의 부탁으로 오로르는 용의자 심문에 참여하게 된다. 열아홉 살 소녀가 아주 심한 범죄를 저지른 혐의로 체포되었는데, 뭔가 숨기는 게 있는 것 같은데 말을 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로르의 역할은 델핀의 생각을 읽고 진실을 밝히는 데 도움을 주는 거였다. 하지만 오로르는 보다 깊숙이 사건 해결에 참여하게 되고, 매우 위험한 상황 처하게 되기도 하지만, 정말 용감하고 씩씩하게 자신의 역할을 해낸다. 




"오로르, 인생은 아주 거대한 이야기야. 우리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어."

그렇지만 곧 끝나겠지. 그래서 나는 조금 슬펐다. 물론 나는 선생님의 말이 무슨 뜻인지 잘 알고 있다. 한 사람의 인생이라는 이야기는 그 사람의 삶에 들어오고 나가는 사람들로 이루어진다. 그리고 하루아침에 모든 게 달라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자신에게 벌어지는 모든 일이, 모든 모험이, 자기 인생이라는 거대한 이야기의 일부분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래서...... 

다음 모험으로!                  p.298


더클라스 케네디는 자폐 스펙트럼 안에 있는 자신의 아들을 생각하며, 이 작품을 시작했다고 말한다. 다섯 살 때 아들은 병원에서 평범한 삶을 살 가능성이 없다는 진단을 받았지만, 성인이 된 지금 런던 대학교 석사 학위를 따고 사진가로 완전히 독립된 삶을 살고 있다고 한다. 그는 아들을 보며 다름은 틀린 게 아니라고 생각했고, 덕분에 이렇게 사랑스러운 작품이 만들어졌다. 장애로 규정된 인물을 만들고 싶지 않았기에, 자신의 다름을 전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멋지게 활용할 줄 아는 주인공, 오로르가 탄생한 것이다. 오로르는 세상에 없는, 너무도 용기있고, 긍정적이며, 밝은 햇살처럼 반짝거리는 캐릭터이다. 


대다수의 사람들과 다른 사람이 있으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따돌리고 괴롭혀도 된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다. 아주 끔찍한 생각이다.  사람들은 새로운 걸 두려워할 때가 많다. 세상을 새로운 방식으로 보는 사람의 눈에 자신들이 어떻게 비칠지 두렵기 때문에, 누가 세상을 다른 눈으로 보거나 그냥 좀 남다르면, 불편하다고 느낀다. 그런 사람들에게 오로르는 세상 무해한 얼굴로, 진실을 말한다. 우리 각자가 다른 건 당연한 거라고, 그러니 내가 남들과 다른 것도 전혀 이상한 게 아니라고 말이다. 오로르의 주변 사람들은 각자 자신의 상황 속에서 고민과 슬픔을 갖고 있다. 오로르는 다른 사람의 눈을 통해 생각을 읽을 줄 아는 능력을 통해 그들 곁에서 위로가 되어주고, 나서서 문제가 해결되도록 도와주기도 한다. 너무도 순수하고, 현명한 시선으로 말이다. 오로르의 시점으로 진행되는 이야기이기에 아이들이 읽기에도 좋지만, 사실 동심을 잃어 버린 어른들에게 더 추천해주고 싶은 책이다. 이번에 오로르 시리즈의 두 번째 이야기 <모두와 친구가 되고 싶은 오로르>가 새 옷을 입고 나왔다. 이 시리즈는 국내에 세 권 출간되었는데, <마음을 읽는 아이 오로르>가 첫 번째, 그리고 <뉴욕의 영웅이 된 오로르>가 세 번째 작품이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작품이 예쁜 리커버가 나왔으니, 곧 세 번째 이야기도 새로운 표지로 나올 것 같아 기대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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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자의 고백
미키 아키코 지음, 문지원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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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이것은 아내에게 농락당한 한 남자의 이야기입니다. 이 진술서를 읽는 분은 부디 어리석은 저를 꾸짖어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저와 아내 중 누가 진실을 말하고 있는지 냉정하게 판단해 주셨으면 합니다. 저는 아내와 아들을 죽이지 않았지만 저 자신을 옹호할 마음은 없습니다. 무능하고 무기력한 아버지라서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딸과 아들을 구하지 못했다는 비난은 달게 받겠습니다.          p.75


야마나시현 호쿠토시 XX마을의 산속에 있는 한 별장에서 추락 사건이 발생한다. 별장 주인인 모토무라 히로키의 아내와 아들이 약 13미터 아래 바닥에 추락해 현장에서 사망한 채 발견되었다. 당시 히로키는 1층 거실에서 쉬고 있다가 쿵 하는 큰 소리를 듣고 2층으로 올라갔고, 베란다 아래에 떨어져 있는 두 사람을 발견한 것이다. 하지만 경찰은 다음 날 히로키를 아내와 아들을 죽인 살인 혐의로 체포한다. 이유는 아내인 미즈카가 사망하기 직전에 한 잡지 편집자에게 메일로 보낸 '수기'가 공개되었기 때문이다. 그 수기에는 '남편이 아내와 아들을 죽이려고 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미즈카는 만약 아들과 자신이 살해당하게 되면, 이 수기를 공개해 아들과 자신의 억울함을 풀어달라고 요청했다. 그리고 얼마 뒤, 아들 도모키가 죽기 전 할머니에게 보낸 메일이 공개된다. 그 메일에는 아빠와 엄마가 자신을 죽이려고 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충격적인 두 사람의 고발에 이어 남겨진 자의 변명이 피고인의 진술서로 이어진다. 그는 아내가 아들과 자신을 죽이려고 했다고 주장한다. 누가 들어도 궁지에 몰린 어리석은 남자의 비참한 변명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애초에 아내의 수기와 아들의 메일 내용이 사실인지 아닌지 판단할 방법조차 없기에 사건의 시작부터 모든 진실을 자신의 입으로 직접 말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이다. 죽은 자들의 고발은 진위 여부가 불분명한 일방적인 증언이고, 피의자는 그 전제 자체를 의심하며 자신의 입장에서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이야기는 피고인의 변호사가 사건을 둘러싼 증인들의 진술을 수집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그래서 시종일관 이 작품은 등장인물의 주장과 증언으로만 이어진다. 피해자의 고발문과 피고인의 진술서와 사건 관계자들의 증언으로만 서사가 진행되기에 더욱 긴장감 넘치는 작품이었다. 누구의 말이 진실인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과연 이 중에 거짓말을 하고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 사건 관계자 여덟 명이 저마다 다른 증언을 하고 있기에, 사건의 진상은 분명 그 속에 있을 것이다. 과연 누구의 말이 거짓인가.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같은 일을 겪은 두 사람이 정반대의 사실을 말하면서 제삼자의 판단을 구한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재판이란 참 이상합니다. 피해자와 가해자. 진실은 정작 본인들이 가장 잘 알고 있음에도 아무것도 모르는 판사에게 결론을 지어달라고 맡기는 셈입니다. 어느 한 사람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 진실을 말하는 사람은 과연 누구일까? 판사는 아무것도 모르기에 신중하게 고민하고 숙고하겠죠. 사실은 두 사람 모두 거짓을 말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형사 재판에 무승부는 없습니다. 어느 쪽이 승자가 되든 반드시 판결이 나옵니다.           p.297


미키 아키코는 줄곧 변호사로 활동하다 60세에 은퇴하고 평소 즐겨 읽던 미스터리를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국내에는 <기만의 살의>, <귀축의 집>에 이어 <패자의 고백>이 세 번째로 소개되는 작품이다. <기만의 살의>는 본격 미스터리의 진수를 보여줬었고, <귀축의 집>에서는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벌어지는 숨 막히는 참상을 놀라운 반전과 함께 보여줬었다. 이번에 만난 <패자의 고백>은 별장 추락 사건 이후 관계자들의 '고백'만으로 이야기를 풀어 나가는 미스터리로 역시나 대반전이 인상적인 작품이었다. 사건을 진행하기 위한 증언들이 계속 이어지고 있음에도 정작 재판 장면이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도 흥미로웠다. 


과연 이것은 아내에게 농락당한 한 남자의 이야기일까, 아니면 아내와 아들을 살해한 파렴치한 범인이 결백을 주장하려는 이야기일까. 작품이 중반을 넘어설 때까지 독자들이 진상을 추리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작가가 작품 곳곳에 복선을 배치했으니, 뭔가 이상한 느낌이나 위화감을 느끼더라도 전체 사건의 진상을 알아보기란 어려울 것이다. 누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인지 알아차리려면 어느 정도 멀리 떨어진 시점이 필요한데, 알다시피 이 작품에는 대화나 지문이 전혀 없이 각자의 입장에서 이어지는 증언만 있으니 말이다. 그리고 바로 그 점이 이 작품의 가장 큰 매력이기도 하다. 미즈카의 수기는 거짓말로 점철된 허구인 것일까. 어린 도모키가 자신의 동생을 죽였다는 것은 사실일까. 진실을 말하는 사람은 남편일까, 아내일까. 누가 가해자이고 누가 피해자인 것일까. 살인사건의 핵심은 피해자가 죽었기 때문에 피해자가 직접 증언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는 목격자가 존재하지 않는 이상, 범행 당시 상황을 아는 사람은 범인밖에 없다는 뜻이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는 죽은 자가 목소리를 내고 있다. 자, 과연 거짓말을 하는 사람은 누구일까. 사건의 진상은 무엇일까. 끝까지 예측할 수 없는 이 흥미진진한 미스터리를 만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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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어 올리버
올리버 색스.수전 배리 지음, 김하현 옮김 / 부키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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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평소 책을 읽을 때, 손에 연필을 쥐고 여백에 메모나 느낌표 같은 표시를 남기는 식으로 저자와 끊임없이 대화를 나눈다. 나는 색스의 책들이 마음에 꼭 들었고, 시력이 변하기 시작한 이후로 머릿속에서 줄기차게 그와 대화를 했다. 그러다 보니 살아 있는 올리버 색스와 나누는 대화가 종이 위에서 나누던 대화와 사뭇 다를까 걱정스러웠다. 알고 보니 거만하고 우쭐대는 사람이면 어떡하지? 그러나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색스 박사는 수줍어하며 쭈뼛댔고 호기심이 많았다.             p.42


이 책은 올리버 색스와 수전 배리, 두 신경 과학자가 10년간 150통이 넘는 편지를 주고받으며 우정을 나눈 것을 기록한 서간집이자 남겨진 이가 먼저 떠난 이를 추억하며 써 내려간 회고록이다. 수전은 마흔여덟 살까지 사시에 입체맹이었기에 오로지 한쪽 눈으로만 세상을 바라보며 살았다. 그러다 성인이 되어 몇 달간 시력 훈련을 받은 끝에 입체의 깊이를 볼 수 있게 되며 납작한 세상이 아니라 3차원의 세상을 보게 된 것이다. 그녀 앞에 새로운 세상이 펼쳐졌고, 그 놀라운 변화를 일지에 기록하기 시작한다. 


시각의 변화는 엄청났다. 이제 수전에게 세상은 더 둥글고, 더 넓고, 더 깊고, 더 질감이 살아 있고, 더 세밀했다. 사물의 가장자리가 전처럼 흐릿하지 않고 또렷하고 명료했으며, 모든 것이 더 선명해졌다. 전과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수전은 어린아이 같은 환희를 만끽한다. 하지만 평생을 사시로 살다가 마흔여덟 살의 나이에 입체시를 얻었다는 이야기는 시각 발달에 '결정적 시기'가 있다는 반세기간의 연구 결과를 뒤집는 것이었다. 그동안의 연구들에 따르면 입체시는 오직 유아기에만 발달할 수 있었다. 수전은 생물학 및 신경과학 교수로서 이러한 연구들을 잘 알고 있었고, 실제로 자신이 3차원을 보고 있다고 스스로 납득하는 데만도 수개월이 걸렸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들을 어떻게 납득시킬 수 있을까. 색스 박사와 편지를 나누는 과정은 이렇게 수전의 시력에 일어난 변화가 얼마나 새롭고 경이로운지에 대해 타인을 이해시키는 과정이기도 했다. 또한 수전은 영원히 '납작한' 세상에서 살아야 한다는 운명을 이미 오래전에 어느 정도 '받아들인' 사람들에게 자신의 사례가 희망이 되어주길 바랐다. 




대화를 나누던 중 내가 편두통을 겪었을 때 올리버의 책 <편두통>을 읽었다고 말했다. 그때 나는 머리가 너무 지끈거려서 통증을 가라앉히려고 냉동 블루베리 봉지를 머리에 얹었다. 블루베리가 녹기 시작하면서 책이 파랗게 물든 모습이 책의 주제를 잘 보여 주는 듯했다. 이 말을 듣고 올리버는 자신이 욕조에 들어가서 책 읽는 것을 좋아한다고 했다. 한번은 욕조에서 브라이언 그린의 <엘러건트 유니버스>를 읽다가 책을 물에 빠뜨리고 말았는데, 나중에 그린을 만났을 때 물에 쫄딱 젖었던 그 책에 사인을 받았다고 한다!             p.187~188


두 사람의 편지가 시작되었을 때 신경생물학과 교수인 수전은 50대였고, 유명한 신경학자이자 베스트셀러 작가였던 올리버는 70대였다. 만년의 우정은 꽤 긴 시간 이어졌고, 마지막 편지는 올리버가 세상을 떠나기 3주 전에 주고받은 것이었다. 아이러니한 것은 두 사람의 우정이 싹트고 얼마 뒤, 올리버가 안구 흑색종을 진단받고 점점 시력을 잃기 시작했다는 거였다. 수전에게 완전히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동안, 올리버는 익숙하던 자신의 세계를 상실해가고 있었다. 그럼에도 두 사람은 지적 교류를 멈추지 않는다. 수전은 올리버가 자신이 얻은 입체시를 잃어 갈 뿐만 아니라 시각적으로 왜곡되고 뒤틀린 세상에서 살아야 한다는 것이 슬펐고, 뭔가 해야겠다고 생각한다. 두 사람 모두 회복의 힘을 굳게 믿었기에, 올리버는 투병 중에도 다정함을 잃지 않았고, 수전은 갑각류 봉제 인형을 선물하거나 음악을 찾아내는 식으로 그를 위로할 아이디어를 떠올린다. 한쪽 눈으로 세상을 헤쳐 나가는 능력을 향상시킬 수 있는 훈련 도구를 커다란 상자에 한가득 담아서 보내기도 했다. 


자연계에 존재하는 다양한 감각에 대해, 세상을 다르게 바라보는 법에 대해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 자체도 흥미진진했지만, 색스 박사의 상징이기도 한 갑오징어 그림이 그려진 편지지에 쓴 편지 원문부터 그가 친필로 쓴 편지들까지 수록되어 있어 더 좋았다. 올리버의 첫사랑은 원소와 주기율표였는데, 심지어 사람들의 나이도 원자 번호로 세곤 했다. 올리버가 곧 74세가 되는 그해의 원소가 텅스텐이면, 자신의 텅스텐 생일이라고 말하곤 했으니 말이다. 올리버의 집은 부엌을 포함한 모든 방에 책꽂이가 늘어서 있고 선반마다 책 주제를 나타내는 카드가 놓여 있었다. 그는 분야를 가리지 않고 책을 읽어 치우는 다독가였는데, 이는 그가 병을 얻어 시력이 점점 나빠졌을 때도 계속 되었다. 심지어 그는 마지막 즈음까지 연구하고, 자신의 책을 집필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20년이라는 나이 차를 훌쩍 뛰어 넘는 두 사람의 우정과 과학과 의학에 대한 사유까지 가슴 뭉클한 책이었다. 올리버 색스의 책을 좋아했던 독자라면, 꼭 놓치지 말고 읽어보길 권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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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앉는 프랜시스
마쓰이에 마사시 지음, 김춘미 옮김 / 비채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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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상화 같은 무대장치가 스르르 위로 올라가자 완전히 다른 그림이 나타난 것 같았다. 세밀하게 그린 구상화. 가즈히코는 안개를 먹고 사는 것도 아니고, 세상을 등진 은둔자도 아닌 것이다. 때로는 작업복을 입고 일할지도 모르는 가즈히코의 배경에 보이는 그림은 어딘지 칙칙한 색조였다. 비가 오는 날의 광경을 그린 것같이 탁하고 가라앉은 색조의 그림. 녹슨 철의 쇳내가 풍겨온다.            p.75~76


홋카이도의 작은 마을에서 우연히 만난 남자와 여자의 평범한 듯 그렇지 않은 연애 이야기를 그린 마쓰이에 마사시의 신작이다.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 <우아한지 어떤지 모르는>, <우리는 모두 집으로 돌아간다> 모두 너무 좋았기에, 이번 작품 역시 두근거리며 읽었다. 마쓰이에 마사시는 평범한 일상의 풍경들을 담담하게 그려내지만, 기가 막힌 직유와 비유를 들어가며 표현하는 묘사들과 정확하고 통찰력 있는 문장들로 인해 잔잔한 감동을 안겨주는 작가이다. 이번 작품 역시 어떤 극적인 사건 진행도 없지만, 특유의 섬세한 문장과 리듬감있는 묘사가 평범한 서사를 근사한 풍경화처럼 만들어주는 작품이었다. 


삼십대 중반의 게이코는 도쿄의 직장을 그만두고 어린 시절 잠깐 살았던 작은 마을 안치나이에서 우편배달부 일을 시작한다. 비정규직인데다 도쿄에서 받았던 월급에 비해 터무니없이 작지만, 시골의 자연 속에서, 그날그날 끝나는 일을 하고 싶었기 때문에 만족하며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잔잔한 일상이 계속되고, 우연히 알게 된 한 남자와 가까워진다. 작은 수력발전소를 관리하며 소리를 채집하는 취미를 가진 그와의 연애는 갑작스럽게 시작되지만, 어느 정도 경험이 있는 삼십대의 연애라 그런지 쉽게 익숙해지고 편해진다. 하지만 두 사람의 관계는 설명이 될 것 같기도 하고 되지 않을 것 같기도 한 모호함의 가운데서 계속되다가 어느 순간 서로 못 본 척하거나 아무렇지도 않은 척 억눌러온 것이 둑이 무너진 듯 흘러 넘치며 변화를 마주하게 된다. 과연 두 사람의 관계는 계속 이어질 수 있을까. 




가즈히코와의 관계는 끝나지 않고 이어지고 있었다. 왜 이어지는지 진지하게 생각하려고 하면 게이코는 늘 스위치를 켠 것처럼 똑같은 행동을 반복한다. 자기 집에서는 물론, 가즈히코네 집에서도 부엌에 서서 요리를 만드는 것이다. 부엌칼을 쓰고 불을 쓰고 기름을 쓰는 것은 눈앞의 식자재에 커다란 변화를 주는 일이다. 식자재는 원래의 형태를 바꾸고 새로운 냄새를 풍긴다... 주말마다 만나는 관계를 그만둬야 할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게이코의 바깥쪽에도 안쪽에도 있었다.              p.157


멀리서 볼 때는 아름답더라도, 가까이에서 보면 그렇지 못한 경우가 더 많은 것이 아마도 연애가 아닐까. 기쁘고 즐거웠던 순간들만큼이나, 되돌리고 싶은 실수와 후회되는 순간들과 어쩔 수 없이 구차해져야 했던 시간들을 쌓아 가면서 두 사람은 앞으로 나아간다. 이 작품 속 게이코와 가즈히코와의 관계도 항상 즐겁고 설렐 수만은 없다. 과거를 묻는 게이코에게 가즈히코는 왜 지금까지 살아왔던 모든 것을 일일이 전부 생각해내서 하나도 남김없이 말해야 하느냐고, 그저 지금 여기에 존재하는 서로가 서로에게 전부여서는 안되냐고 묻는다. 하지만 게이코는 지금 이 순간이 갑자기 여기에 나타난 것은 아니기 때문에 지금까지의 일도 다 알고 싶다고, 지금이라는 것은 경험과 기억 위에 차곡차곡 쌓여서 만들어진 거라고 말한다. 완전히 다른 시간 속에서 살아온 두 남녀가 삼십대가 되어서 만났기 때문에 부딪힐 일이 없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지 않을까. 현실 속 우리의 연애처럼 말이다. 


마쓰이에 마사시가 포착해내는 것은 바로 그러한 슬픔과 기쁨과 아픔들이다. 그는 이 작품 속에서 담담하게 그려내는 일상 속에 숨겨진 미묘한 감정들을 세심하게 포착해 오감을 깨우는 어른의 연애를 보여준다. 서사를 완성시켜주는 것은 구름의 움직임과 물의 흐름, 무성한 가지가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 흩날리는 눈, 그리고 푸른 하늘의 농도와 벌레 울음소리, 햇살의 강렬함이다. 덕분에 작가가 구축해낸 가상의 도시가 손에 잡힐 듯 생생하게 느껴졌다. 극중 게이코가 가즈히코와 음악을 처음 들었을 때 가장 놀랐던 것이 그가 모은 음을 듣고 있으면 정말로 눈앞에 그것이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거였다. 해달 무리가 파도 소리를 배경으로 조개를 깨는 음, 토스카나 지방의 작은 언덕 위에 있는 교회 종의 음, 땅울림을 내면서 분화하는 아이슬란드의 화산음 등... 다양한 소리들이 눈을 감고 듣고 있으면 각각의 리얼한 광경이 냄새와 습도, 기온과 바람, 진동까지 수반하면서 눈앞에 떠올랐던 것이다. 이는 마쓰이에 마사시의 소설을 읽고 있는 독자인 나에게도 고스란히 체감되는 묘사였다. 가을을 기다리는 여름의 끝자락에서 읽기 딱 좋은 작품이다. 짧은 분량임에도 긴 여운을 남겨주는 이 아름다운 작품을 만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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