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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앉는 프랜시스
마쓰이에 마사시 지음, 김춘미 옮김 / 비채 / 2025년 8월
평점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추상화 같은 무대장치가 스르르 위로 올라가자 완전히 다른 그림이 나타난 것 같았다. 세밀하게 그린 구상화. 가즈히코는 안개를 먹고 사는 것도 아니고, 세상을 등진 은둔자도 아닌 것이다. 때로는 작업복을 입고 일할지도 모르는 가즈히코의 배경에 보이는 그림은 어딘지 칙칙한 색조였다. 비가 오는 날의 광경을 그린 것같이 탁하고 가라앉은 색조의 그림. 녹슨 철의 쇳내가 풍겨온다. p.75~76
홋카이도의 작은 마을에서 우연히 만난 남자와 여자의 평범한 듯 그렇지 않은 연애 이야기를 그린 마쓰이에 마사시의 신작이다.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 <우아한지 어떤지 모르는>, <우리는 모두 집으로 돌아간다> 모두 너무 좋았기에, 이번 작품 역시 두근거리며 읽었다. 마쓰이에 마사시는 평범한 일상의 풍경들을 담담하게 그려내지만, 기가 막힌 직유와 비유를 들어가며 표현하는 묘사들과 정확하고 통찰력 있는 문장들로 인해 잔잔한 감동을 안겨주는 작가이다. 이번 작품 역시 어떤 극적인 사건 진행도 없지만, 특유의 섬세한 문장과 리듬감있는 묘사가 평범한 서사를 근사한 풍경화처럼 만들어주는 작품이었다.
삼십대 중반의 게이코는 도쿄의 직장을 그만두고 어린 시절 잠깐 살았던 작은 마을 안치나이에서 우편배달부 일을 시작한다. 비정규직인데다 도쿄에서 받았던 월급에 비해 터무니없이 작지만, 시골의 자연 속에서, 그날그날 끝나는 일을 하고 싶었기 때문에 만족하며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잔잔한 일상이 계속되고, 우연히 알게 된 한 남자와 가까워진다. 작은 수력발전소를 관리하며 소리를 채집하는 취미를 가진 그와의 연애는 갑작스럽게 시작되지만, 어느 정도 경험이 있는 삼십대의 연애라 그런지 쉽게 익숙해지고 편해진다. 하지만 두 사람의 관계는 설명이 될 것 같기도 하고 되지 않을 것 같기도 한 모호함의 가운데서 계속되다가 어느 순간 서로 못 본 척하거나 아무렇지도 않은 척 억눌러온 것이 둑이 무너진 듯 흘러 넘치며 변화를 마주하게 된다. 과연 두 사람의 관계는 계속 이어질 수 있을까.

가즈히코와의 관계는 끝나지 않고 이어지고 있었다. 왜 이어지는지 진지하게 생각하려고 하면 게이코는 늘 스위치를 켠 것처럼 똑같은 행동을 반복한다. 자기 집에서는 물론, 가즈히코네 집에서도 부엌에 서서 요리를 만드는 것이다. 부엌칼을 쓰고 불을 쓰고 기름을 쓰는 것은 눈앞의 식자재에 커다란 변화를 주는 일이다. 식자재는 원래의 형태를 바꾸고 새로운 냄새를 풍긴다... 주말마다 만나는 관계를 그만둬야 할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게이코의 바깥쪽에도 안쪽에도 있었다. p.157
멀리서 볼 때는 아름답더라도, 가까이에서 보면 그렇지 못한 경우가 더 많은 것이 아마도 연애가 아닐까. 기쁘고 즐거웠던 순간들만큼이나, 되돌리고 싶은 실수와 후회되는 순간들과 어쩔 수 없이 구차해져야 했던 시간들을 쌓아 가면서 두 사람은 앞으로 나아간다. 이 작품 속 게이코와 가즈히코와의 관계도 항상 즐겁고 설렐 수만은 없다. 과거를 묻는 게이코에게 가즈히코는 왜 지금까지 살아왔던 모든 것을 일일이 전부 생각해내서 하나도 남김없이 말해야 하느냐고, 그저 지금 여기에 존재하는 서로가 서로에게 전부여서는 안되냐고 묻는다. 하지만 게이코는 지금 이 순간이 갑자기 여기에 나타난 것은 아니기 때문에 지금까지의 일도 다 알고 싶다고, 지금이라는 것은 경험과 기억 위에 차곡차곡 쌓여서 만들어진 거라고 말한다. 완전히 다른 시간 속에서 살아온 두 남녀가 삼십대가 되어서 만났기 때문에 부딪힐 일이 없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지 않을까. 현실 속 우리의 연애처럼 말이다.
마쓰이에 마사시가 포착해내는 것은 바로 그러한 슬픔과 기쁨과 아픔들이다. 그는 이 작품 속에서 담담하게 그려내는 일상 속에 숨겨진 미묘한 감정들을 세심하게 포착해 오감을 깨우는 어른의 연애를 보여준다. 서사를 완성시켜주는 것은 구름의 움직임과 물의 흐름, 무성한 가지가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 흩날리는 눈, 그리고 푸른 하늘의 농도와 벌레 울음소리, 햇살의 강렬함이다. 덕분에 작가가 구축해낸 가상의 도시가 손에 잡힐 듯 생생하게 느껴졌다. 극중 게이코가 가즈히코와 음악을 처음 들었을 때 가장 놀랐던 것이 그가 모은 음을 듣고 있으면 정말로 눈앞에 그것이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거였다. 해달 무리가 파도 소리를 배경으로 조개를 깨는 음, 토스카나 지방의 작은 언덕 위에 있는 교회 종의 음, 땅울림을 내면서 분화하는 아이슬란드의 화산음 등... 다양한 소리들이 눈을 감고 듣고 있으면 각각의 리얼한 광경이 냄새와 습도, 기온과 바람, 진동까지 수반하면서 눈앞에 떠올랐던 것이다. 이는 마쓰이에 마사시의 소설을 읽고 있는 독자인 나에게도 고스란히 체감되는 묘사였다. 가을을 기다리는 여름의 끝자락에서 읽기 딱 좋은 작품이다. 짧은 분량임에도 긴 여운을 남겨주는 이 아름다운 작품을 만나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