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자의 고백
미키 아키코 지음, 문지원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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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이것은 아내에게 농락당한 한 남자의 이야기입니다. 이 진술서를 읽는 분은 부디 어리석은 저를 꾸짖어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저와 아내 중 누가 진실을 말하고 있는지 냉정하게 판단해 주셨으면 합니다. 저는 아내와 아들을 죽이지 않았지만 저 자신을 옹호할 마음은 없습니다. 무능하고 무기력한 아버지라서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딸과 아들을 구하지 못했다는 비난은 달게 받겠습니다.          p.75


야마나시현 호쿠토시 XX마을의 산속에 있는 한 별장에서 추락 사건이 발생한다. 별장 주인인 모토무라 히로키의 아내와 아들이 약 13미터 아래 바닥에 추락해 현장에서 사망한 채 발견되었다. 당시 히로키는 1층 거실에서 쉬고 있다가 쿵 하는 큰 소리를 듣고 2층으로 올라갔고, 베란다 아래에 떨어져 있는 두 사람을 발견한 것이다. 하지만 경찰은 다음 날 히로키를 아내와 아들을 죽인 살인 혐의로 체포한다. 이유는 아내인 미즈카가 사망하기 직전에 한 잡지 편집자에게 메일로 보낸 '수기'가 공개되었기 때문이다. 그 수기에는 '남편이 아내와 아들을 죽이려고 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미즈카는 만약 아들과 자신이 살해당하게 되면, 이 수기를 공개해 아들과 자신의 억울함을 풀어달라고 요청했다. 그리고 얼마 뒤, 아들 도모키가 죽기 전 할머니에게 보낸 메일이 공개된다. 그 메일에는 아빠와 엄마가 자신을 죽이려고 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충격적인 두 사람의 고발에 이어 남겨진 자의 변명이 피고인의 진술서로 이어진다. 그는 아내가 아들과 자신을 죽이려고 했다고 주장한다. 누가 들어도 궁지에 몰린 어리석은 남자의 비참한 변명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애초에 아내의 수기와 아들의 메일 내용이 사실인지 아닌지 판단할 방법조차 없기에 사건의 시작부터 모든 진실을 자신의 입으로 직접 말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이다. 죽은 자들의 고발은 진위 여부가 불분명한 일방적인 증언이고, 피의자는 그 전제 자체를 의심하며 자신의 입장에서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이야기는 피고인의 변호사가 사건을 둘러싼 증인들의 진술을 수집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그래서 시종일관 이 작품은 등장인물의 주장과 증언으로만 이어진다. 피해자의 고발문과 피고인의 진술서와 사건 관계자들의 증언으로만 서사가 진행되기에 더욱 긴장감 넘치는 작품이었다. 누구의 말이 진실인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과연 이 중에 거짓말을 하고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 사건 관계자 여덟 명이 저마다 다른 증언을 하고 있기에, 사건의 진상은 분명 그 속에 있을 것이다. 과연 누구의 말이 거짓인가.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같은 일을 겪은 두 사람이 정반대의 사실을 말하면서 제삼자의 판단을 구한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재판이란 참 이상합니다. 피해자와 가해자. 진실은 정작 본인들이 가장 잘 알고 있음에도 아무것도 모르는 판사에게 결론을 지어달라고 맡기는 셈입니다. 어느 한 사람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 진실을 말하는 사람은 과연 누구일까? 판사는 아무것도 모르기에 신중하게 고민하고 숙고하겠죠. 사실은 두 사람 모두 거짓을 말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형사 재판에 무승부는 없습니다. 어느 쪽이 승자가 되든 반드시 판결이 나옵니다.           p.297


미키 아키코는 줄곧 변호사로 활동하다 60세에 은퇴하고 평소 즐겨 읽던 미스터리를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국내에는 <기만의 살의>, <귀축의 집>에 이어 <패자의 고백>이 세 번째로 소개되는 작품이다. <기만의 살의>는 본격 미스터리의 진수를 보여줬었고, <귀축의 집>에서는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벌어지는 숨 막히는 참상을 놀라운 반전과 함께 보여줬었다. 이번에 만난 <패자의 고백>은 별장 추락 사건 이후 관계자들의 '고백'만으로 이야기를 풀어 나가는 미스터리로 역시나 대반전이 인상적인 작품이었다. 사건을 진행하기 위한 증언들이 계속 이어지고 있음에도 정작 재판 장면이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도 흥미로웠다. 


과연 이것은 아내에게 농락당한 한 남자의 이야기일까, 아니면 아내와 아들을 살해한 파렴치한 범인이 결백을 주장하려는 이야기일까. 작품이 중반을 넘어설 때까지 독자들이 진상을 추리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작가가 작품 곳곳에 복선을 배치했으니, 뭔가 이상한 느낌이나 위화감을 느끼더라도 전체 사건의 진상을 알아보기란 어려울 것이다. 누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인지 알아차리려면 어느 정도 멀리 떨어진 시점이 필요한데, 알다시피 이 작품에는 대화나 지문이 전혀 없이 각자의 입장에서 이어지는 증언만 있으니 말이다. 그리고 바로 그 점이 이 작품의 가장 큰 매력이기도 하다. 미즈카의 수기는 거짓말로 점철된 허구인 것일까. 어린 도모키가 자신의 동생을 죽였다는 것은 사실일까. 진실을 말하는 사람은 남편일까, 아내일까. 누가 가해자이고 누가 피해자인 것일까. 살인사건의 핵심은 피해자가 죽었기 때문에 피해자가 직접 증언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는 목격자가 존재하지 않는 이상, 범행 당시 상황을 아는 사람은 범인밖에 없다는 뜻이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는 죽은 자가 목소리를 내고 있다. 자, 과연 거짓말을 하는 사람은 누구일까. 사건의 진상은 무엇일까. 끝까지 예측할 수 없는 이 흥미진진한 미스터리를 만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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