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미쳐가고 있는 기후과학자입니다 - 기후 붕괴 앞에서 우리가 느끼는 감정들
케이트 마블 지음, 송섬별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25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그러나 여기, 작은 마법이 존재한다. 우리가 받은 저주가 곧 선물이라는 사실이다. 우리가 위험과 종말을 예측하고자 사용하는 모델은 놀라움, 아름다움, 기쁨 역시 보여준다. 눈앞에 펼쳐지는 미래를 보는 것, 세계를 우아한 방정식으로 걸러내 예언과 꼭 닮은 무언가를 발견하는 것은 참 근사한 일이다. 그러나 지구의 미래를 이해하려면, 먼저 지구의 현재를 이해해야 한다. 뜨거운 열대와 차가운 극지대를, 축축한 산등성이를 타고 올라가는 습한 공기를, 더운 날 부드럽게 불어오는 서늘한 바닷바람을. 잠시 가만히 앉아 세계가 그 아름답고도 끔찍한 비밀들을 보여주길 기다려야 한다.               p.26~27


최근의 기후 변화는 경악스러울 정도로 빠른 속도로 일어나고 있다. 지구의 온도가 이 정도로 올라가는 것도, 이렇게 급작스레 변하는 것도 자연스럽지 않다. 적어도 인간이 존재해온 이래로 한 번도 없었던 일이다. 이는 잘못된 것이다. 이것은 상실이 아니라 폭력이다. 이대로 가면 온난화는 계속될 것이고, 해수면 상승은 이어질 것이며 극단적인 기상 현상들을 피할 길이 없어질 것이다. 과학자들은 수십 년간 이러한 현상들을 예측해 왔고, 그렇게 상상한 최악의 공포가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과학자들이 아무리 위기감으로 미래를 예측해도 세상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이 책은 바로 거기서 시작되었다. 


NASA 출신 기후과학자인 저자는 기후 예측 모델을 통해 하루에도 몇 번씩 지구의 재앙적 미래를 시뮬레이션해본다. 매일 세상의 끝을 마주하는 기분으로 기후 변화가 일으킨 복잡한 감정들을 겪어 낸다. 분노와 죄책감, 슬픔과 두려움, 놀라움, 그리고 희망과 사랑의 감정이다. 물론 이런 감정들은 과학자가 느끼기에 적절치 않은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분노에서 사랑까지, 아홉 가지 감정의 스펙트럼을 관찰하고 기록하면서 지금 지구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알려주는 동시에 가장 인간적인 공감을 통해 우리 모두와 지구를 다시 강하게 연결시킨다. 아홉 가지 감정은 경이, 분노, 죄책감, 두려움, 애도, 놀라움, 자부심, 희망, 사랑으로 이 감정들이 각각 하나의 목차가 되어 이야기가 진행된다. 과학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비밀로서의 경이, 기후 변화의 진짜 원인은 우리라는 죄책감, 때 이르게 잃어가는 세계에 대한 애도, 평범한 사람들이 만들어갈 미래에 대한 자부심, 지금껏 아무도 한 적 없는 일을 해야 한다는 희망, 그리고 기후 모델이 말해주지 못하는 것으로 아름다운 자연 앞에서 느끼는 무한한 사랑에 이르기까지 절절한 감정과 과학적 통찰을 동시에 만날 수 있는 책이다. 




쉽지는 않을 것이다. 해피엔딩이라는 보장은 없다. 그러나 더 나은 결말은 가능하다. 많은 이들이 지적한 대로, 우리를 구원하러 올 사람은 없다. 만약 결말에서 우리가 구원받는다면, 그건 결점 많고 한계도 있지만 각자 최선을 다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힘을 합쳐 해낸 공동의 노력 덕분일 것이다. 과거에 환경을 성공적으로 지켜낸 사례 중 지금 우리의 상황과 완벽히 들어맞는 건 하나도 없지만, 그럼에도 과거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희망을 준다. 그 이야기들은 우리가 살고 싶은 세계를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는 걸 알려준다.             p.313


'기후'는 장기간에 걸친 날씨의 평균치이자, 날씨가 일어나는 배경 조건이다. 기후의 변화는 지각 판이 움직이고, 지구가 궤도 속에서 흔들리고, 심해의 해류가 바뀌는 수백만 년이라는 기간에 걸쳐 일어난다. 저자의 말에 따르면 '날씨가 인간이 짧은 생애 동안 경험하는 것이라면, 기후는 신들의 영역'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 기후를 이해하려면 세계를 형성하는 모든 힘을 이해해야 한다. 여기에는 대기뿐 아니라 해양도 포함된다. '기후과학자'들은 수많은 방정식을 바탕으로 작은 세계를 만들고, 견고한 기반 위에 복잡한 구조를 층층이 쌓아간다. 기후과학자들이 미래를 볼 수 있는 이유는 '물리학'이 있기 때문이다. 설명할 수 없을 만큼 근사한 이유로, 우주는 얼음 덩어리로 뒤덮인 산꼭대기에서도, 우주의 허공에서도, 대양의 가장 깊고 어두운 바닥에서도, 그 어떤 맥락에서도 참인 방정식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 방정식을 풀면 비가 왜 내리는지, 바람은 어느 방향으로 부는지, 어째서 지구에 기온이 존재하는지, 그리고 그 기온은 왜 상승하는지 알 수 있게 된다. 기후 모델은 바로 이러한 마법으로 만들어 진다. 


2003년 8월, 프랑스의 여름에 기후 변화로 발생한 최초의 대량 사망 사건이 있었다. 당시 정부는 43도가 넘는 전례 없는 폭염이 예상된다는 우려스러운 보도 자료를 발표했지만, 여름은 원래 더운 거라고 다들 코웃음을 치며 매년 여름과 마찬가지로 긴 여름휴가를 떠났다. 그런데 돌아온 그들을 맞이한 건 끔찍한 사태였다. 푹푹 찌는 아파트에 갇혀 떠날 수도, 휴가를 보내는 가족들에게 연락할 수도 없었던 독거노인들이 해가 진 뒤까지도 이어지는 유례 없는 폭염을 마주한 것이다. 무려 1만 5,000명의 노인들이 고독사했고, 이들의 시신은 누군가 찾아가기를 기다리며 냉장 트럭 속에 쌓여 있었다. 기후 변화로 인해 2003년의 끔찍한 사건이 또다시 발생할 가능성은 두 배 더 높아졌다. 북극의 기온은 지구상 다른 지역보다 훨씬 빠르게 상승하고 있으며, 50년 만에 찾아오던 폭염이 이제는 10년에 한번 꼴로 찾아온다. 게다가 더 길고, 더 뜨겁다. 우리는 사랑하는 세계를 때 이르게 빼앗기는 중이다. 상황이 얼마나 더 나빠질지는 우리에게 달려 있다. 미래는 여전히 인간의 손에 달려 있는 것이다. 저자는 과거의 이야기를 토대로 우리의 미래를 향한 희망을 놓지 않는다. 기후 위기를 다루는 책들을 꽤 읽어 왔지만, 분노와 죄책감과 같은 인간 보편의 감정을 통해 지구온난화 문제를 들여다보는 책은 처음이라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게다가 과학자의 문장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섬세하고 아름다운 문장들로 가득해 매 페이지마다 밑줄을 긋느라 바빴던 책이기도 하다.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그리고 앞으로 살아갈 세상을 제대로 이해하고 싶다면 이 책을 꼭 읽어보길 추천해주고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모든 시간이 나에게 일어나
김나현 지음 / 은행나무 / 2025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그 두 사람은 내가 쓴 이야기를 실제 자기들 인생으로 살아내고 있는 거예요."

그것은 상식적인 생각이 아니었다. 왜 이런 시나리오 따위를 살아내는 건가? 자신의 멀쩡한 삶을 놔두고? 윤 감독은 거장 소리를 듣는 만큼이나 영화에 미쳐 있는 사람일지도 몰랐다. 예술가로서는 천재적이지만 평범한 생활인의 입장에서 보자면 기이한 생각에 시달리는 사람이지 않을까. 자신의 이야기에 갇혀버린? 그 순간, 윤 감독이 놓친 부분이 머릿속에 번쩍였다.             p.118~119


스물셋 나을은 70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오디션에 합격한 신입 배우였다. 제작만 하면 대중의 관심을 끄는 것은 물론 국제 영화제에도 자주 노미네이트되는 거장 감독의 신작에 주연으로 캐스팅된 후 나을은 줄곧 지상에서 한 발 떠 있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누군가 온라인 게시판에 학교폭력 고발 글을 올렸고, 신작의 제작 발표와 공개를 앞두고 민감한 시기였기에 수습을 해야 했다. 도대체 누가 이런 글을 쓴 건지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나던 나을은 십년 전 앵두 머리끈을 하고 자신을 괴롭히던 한 아이를 기억해 낸다. 그리고 그 괴롭힘을 막아주었던 친구 시우를 떠올린다. 


그렇게 이야기는 나을이 열세살이던 시절로 간다. 아빠가 병원에서 일하던 간호사와 바람이 나서 엄마와 이혼을 한 뒤, 추잡한 소문이 동네에 퍼져 이사를 갈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런데 6학년 새 학기가 되고, 나을의 아빠가 의사라는 이유로 이해할 수 없는 괴롭힘이 시작된다. 소문에 의하면 앵두라는 아이의 아빠가 의료 사고 피해자라고 하는데, 그 후 주변에서 부모가 의사인 아이만 마주치면 맹목적으로 괴롭혀왔다고 한다. 그리고 시우라는 전학생이 오고, 곧 앵두의 표적이 나을에게서 시우로 옮겨 간다. 하지만 시우는 나을과는 달리 당당하게 맞서는 아이였다. 엄마가 일을 시작하게 되면서 혼자 있어야 하는 시간에 나을을 돌봐줄 선생님으로 한주 선생님이 집에 오는데, 시우와 함께 였다. 한주 선생님이 시우의 엄마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시우와 나을은 둘도 없는 단짝이 되어간다. 어느 날 학교에서 벌어진 사건 이후로 갑작스럽게 멀어지기 전까지는. 




그 어린 시절의 순수한 호의가 여태껏 자신을 지탱해주는 힘이 되었다고 말했다. 그 우정이 모두 거짓에 토대를 둔 유령 같은 것이었는데도 나을은 그런 우정이라도 영원히 추억하고 싶을 만큼 아름다웠으면 충분히 좋은 것이 아니냐고 했다. 나는 그 따뜻한 말을 수없이 돌이켜보면서 그런 말들이 정말로 내가 들은 것인가, 아니면 내가 바란 것을 그저 마음으로 그려낸 것인가 혼란스러워질 때가 있었다. 그럴 때마다 주먹을 꼭 쥐고서 그것을, 나에게 온 행운을, 내 곁에 남아 있을 운명으로 빋어보고 싶었다.             p.228~229


나을의 과거 이야기를 듣고 난 윤감독은 직접 그를 찾으러 가자는 제안을 한다. "나을 씨, 그 시우란 친구 말이에요. 혹시 내가 만나봐도 될까요?" 아무래도 확인할 게 있다는 감독의 수수께끼 같은 말은 그가 오래 전에 썼던 시나리오와 관련이 있었다. 시우와 한주가 윤감독이 무명 시절 썼다가 도둑맞은 시나리오 속 인물의 서사를 그대로 살고 있었던 것이다. 이한주, 이시우라는 이름부터 모든 것이 나을이 어린 시절 알고 있던 것과 똑같았다. 누군가 쓴 이야기를 실제 자기들 인생으로 살아내고 있다는 게 가능한 일일까. 왜 멀쩡한 자신의 삶을 두고 허구의 이야기를 살아내야 하는 걸까. 대체 그들은 어떤 삶을 살아온 것일까. 


이야기는 나을의 스물셋 현재에서 시작해 나을의 열세살로 갔다가 서른셋의 하영, 마흔셋의 시우를 거치며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오가며 펼쳐진다. 숨겨진 진실이 드러나는 반전을 거듭하며 이야기는 각각의 인물이 살아낸 수많은 세계들을 담담하게 보여준다. 어쩌면 미래의 내가 살았을지도 모를 세계가 무수한 가능성의 우주가 되어 펼쳐지는 것이다. 살면서 내가 선택하지 않았던 삶에 대해 가끔 상상해 보곤 한다. 그때 만약 내가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지금의 이 삶은 없었을 것이다. 대신 다른 삶을 살았을 테고, 나는 얼마쯤 지금과는 다른 모습일 것이다. 물론 정해진 운명같은 게 있다면 어떤 시간을 거치든 도달하는 곳은 비슷할 것이다. 그쪽의 나도, 지금의 나도, 어찌되었든 나 자신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을 테니까. 그럼에도 가끔은 궁금해진다. 내가 다른 역할을 맡아서 살아가는 모습이, 새로운 세계 속에서의 경험이, 그리고 나를 기다리고 있을 또 다른 결말이. 그래서 나는 끊임없이 책을 읽는다. 이야기의 우주를 여행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지 않을까. 이 작품은 바로 그런 이들에게 적극 추천해주고 싶은 다정하고 아름다운 이야기를 보여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묻다 하다 앤솔러지 2
김솔 외 지음 / 열린책들 / 2025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정서가 저한테 하려던 말은 뭐였을까요?」

옥경 씨가 유나를 빤히 쳐다봤다. 유나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정서를 불러 줬으면 했다. 하지만 옥경 씨는 정서가 누구냐고 되묻지 않았다. 

「답으로 사는 게 아니야. 물음이 있어서 사는 거지.」

욕경 씨의 시선이 재봉틀로 돌아갔다. 드르르륵. 드르르륵. 구멍 나고 헤진 드래곤의 날개를 기웠다.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러니까 계속 살아.」               - 김홍, '드래곤 세탁소' 중에서, p.8


유나는 관계가 소원해진 친구 정서와 오랜만에 만날 약속을 한다. 중학교때부터 평생을 알아온 정서는 매일같이 연락하고, 걱정하다, 미워하고, 그러다 처음부터 존재한 적 없었던 것처럼 살기 위해 노력했던 친구였다.  정서는 유나에게 꼭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고 했고, 그들은 예전에 늘 만나던 카페에서 보기로 한다. 하지만 두 사람의 카페는 세탁소로 바뀌어 있었다. 쌀쌀한 바람을 맞으며 유나는 그 앞에서 두 시간을 기다린다. 정서는 오지 않았고, 집에 돌아와 경찰로부터 연락을 받는다. 정서의 차가 가로수를 들이받았다고 했다. 정서는 약속 장소로 오는 길에 교통사고를 당했고, 결국 유나는 정서가 하려던 말이 무엇이었는지 영원히 들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이제 더 이상 유나는 정서를 걱정할 수도 미워할 수도 없게 되고 말았다. 


그날부터 잠을 이루지 못하게 된 유나는 불면에 지쳐 밤거리를 쏘다니기 시작한다. 겨울의 막바지였고, 하루하루 날이 풀려 가더니 어느새 봄이 온다. 그날도 유나는 집에 가고 싶은 마음을 뿌리치고 계속 걷다가, 정서와의 마지막 약속 장소에 가보기로 한다. 늦게 도착한 정서가 그곳에서 여전히 유나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정서를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고 싶지 않아 걸음이 빨라졌다. 그렇게 한참을 걸어 드래곤 세탁소 앞에 도착한다. 세탁소는 비어 있었고, 희미한 형광등 불빛이 빼곡히 걸려 있는 옷들을 비추고 있었다. 유나의 목덜미에 찬바람이 쌩 불었고, 죽음을 이불처럼 두른 기분으로 세탁소 문을 연다. 그렇게 다림질을 하던 주인 아줌마와 이야기를 나누고, 커피를 얻어 마신다. 유나는 다음날도 세탁소를 찾아가고, 딱히 할 일이 없다는 그녀에게 주인 아줌마는 세탁소에서 일을 해보지 않겠느냐고 권한다. 여전히 죽은 친구가 자신에게 하지 못한 이야기가 무엇인지 찾기 위해 스스로에게 질문하기를 멈추지 않던 유나는 세탁소의 주인 아줌마와 시간을 보내며 조금씩 몰랐던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는 조금씩 달라지는 새소리를 들으며 질문하지 않는다.

누구의 잘못인지 모른다.

용서하거나 이해할 수 있나?

그는 갑자기 쏟아지는 눈을 맞는다.

살릴 수 없었나?

그는 살아 있는 자신에게 묻는다.

나는 살았다.

묻는다.                   - 윤해서, '조건' 중에서, p.199


다섯 명의 소설가가 하나의 주제로 함께 글을 쓰는 열린 책들의 '하다 앤솔러지' 두 번째 책이다. 이 시리즈는 우리가 평소 하는 다섯 가지 행동 즉 걷다, 묻다, 보다, 듣다, 안다, 라는 동사를 테마로 진행되고 있다. 그 두 번째 책 <묻다>에는 김솔, 김홍, 박지영, 오한기, 윤해서 작가가 참여했다. 자신만의 색깔이 뚜렷한 다섯 작가의 작품들을 만날 수 있었다. 사뮈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를 새롭게 해석한 <고도를 묻다>라는 작품은 희곡 형식으로 쓰여 있어 아무래도 가독성은 떨어졌지만 매우 흥미로웠다. 작가가 사뮈엘 베케트의 소설이나 연출가 고 임영웅 선생님의 연극에 깊이 감명받아 이 작품을 쓰게 되었다고 하는데, 고도가 누구인지가 아니라 고도가 누구인지에 상관없이 어떻게 끊임없이 묻고 답할 것이냐,에 중점을 두고 풀어 나가는 이야기라 인상적이었다. 딸아이의 방과 후 교실 과제인 공포 동화 쓰기를 하는 소설가 아빠의 이야기를 그린 <방과 후 교실>은 아주 유쾌하게 읽었다. 실제로 오한기 작가가 이 작품을 쓰게 된 계기가 초등학교에 막 입학한 딸이 자신의 작품을 읽고 질문을 하면서였다고 하는데, 아주 재미있게 읽었다. 


개인적으로는 다섯 편의 이야기 중에 김홍 작가의 <드래곤 세탁소>가 가장 마음에 들었다. 원래 지으려던 이름이 <세탁소 더 드래곤>이라는 것부터 어딘가 귀엽고도 수상한 세탁소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공간되고, 따뜻한 이야기였다. 세탁소의 이름에 관해서는 김홍 작가가 '뭔가 어긋난 듯한, 나사가 하나 빠진 듯한 가게 이름을 상상'하는 걸 좋아하기 때문에 만들어진 설정이라고 한다. 김홍 작가의 작품은 이번에 만난 것이 처음인데, 다른 작품도 찾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이 시리즈는 반투명한 트레싱지로 옷을 입은 표지가 너무 예쁘고, 책배와 위, 아래에 프린트가 함께 되어 있어 책의 물성이 얼마나 중요한지 고스란히 보여준다. 그래서 시리즈별로 한 권씩 모으기 딱 좋다. 하다 앤솔러지 세 번째 작품 <보다>도 기대가 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몸이 보내는 마지막 신호들 30 - 중년 이후, 10년 더 건강하게 사는 확실한 방법
최석재 지음 / 21세기북스 / 2025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아침에 일어나면서부터 잠들기 전까지, 우리는 매일 수많은 선택을 합니다. '엘리베이터를 탈까, 계단을 이용할까?', '오늘 저녁은 치킨에 맥주 한잔할까, 건강한 식사를 할까?', '이번 주말에는 운동할까, 아니면 그냥 쉴까?' 이런 작은 선택들이 모여 생활 습관을 형성하고, 결국 나의 심장과 혈관의 미래를 결정합니다.             p.23


대한민국 대표 의료진이 펼치는 흥미로운 지식 체험, ‘인생백세’ 시리즈의 다섯 번째 책이다. 역사, 철학, 과학, 의학, 예술 등 전국 대학 각 분야 최고 교수진의 명강의를 책으로 옮긴 것이 '인생명강' 시리즈라면, '인생백세' 시리즈는 시리즈는 의학 지식들을 엄선해 백세시대를 위한 가장 실용적인 건강교양 콘텐츠를 제공한다. 가정의학과 전문의가 쓴 다이어트 노하우, 영상의학과 전문의가 알려주는 암을 예방하는 건강 습관, 한방재활의학과 전문의가 쓴 자세교정 스트레칭과 운동법, 신경외과 전문의가 알려주는 자율신경 회복 솔루션에 이어 이번에는 응급의학과 전문의가 들려주는 30가지 응급의학 설명서이다. 


우리가 일상에서 당연하게 여기는 음식과 생활습관 중에는 우리 몸에 해를 끼치는 것들이 많다. 저자는 응급의학과 의사로서 잘못된 식습관과 생활 방식이 지속되어 생긴 질환으로 응급실을 찾는 환자들을 매일 만나고 있다고 말한다. 편의점에서 사 먹는 빵과 커피, 급하게 해치우는 패스트푸드, 회식 자리에서의 과도한 고기와 술... 모두 응급실로 향하는 티켓과도 같다. 이 책은 심혈관 질환, 뇌혈관 질환, 만성 대사 질환, 그리고 암까지 점차 늘어 나고 있는 주요 질환들에 대한 원인과 근본적인 해결책을 제시해주고 있다. 이렇게 심각한 질병들의 대부분이 우리의 식습관과 생활습관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은 고칠 수 있는 방법 또한 우리의 일상 속에서 존재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 책은 무엇을 어떻게 실천해야 몸의 악화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는지, 이미 병이 시작된 몸이라 해도 어떻게 정상으로 되돌일 수 있는지에 대해 알려준다. 




우리의 일상적인 선택과 습관이 생각보다 훨씬 빠르게 건강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긴급한 상황이 발생해서 응급실에 오는 환자 중 상당수가 "평소에 건강했는데 갑자기 이렇게 됐어요."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수년, 때로는 수십 년에 걸쳐 조금씩 건강이 나빠지고 몸 곳곳이 변화하고 있었죠. 우리 몸이 조용히 그 변화를 견뎌내고 있었을 뿐입니다.            p.184~185


모든 죽음이 그러하겠지만 가장 허망한 것은 돌연사가 아닐까. 어떤 병의 징조도 없었고, 지병이 있었거나 문제가 있었던 것도 아닌데, 어느 날 갑자기 쓰러져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게 되는 것이니 말이다. 돌연사의 주요 원인은 바로 심혈관 질환이다. 그런데 돌연사가 더 이상 노인들만의 이야기라는 사실, 알고 있는 사람이 많지 않을 것 같다. 혈관 건강을 악화시키는 환경에 너무 많이 노출되어 있기 때문이다. 매일의 사소한 작은 선택들이 심장 질환을 키우고, 혈관을 공격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심혈관 질환만큼이나 무서운 것은 뇌혈관 질환이다. 뇌혈관에 문제가 생기면 크게 두 가지 상황이 발생한다. 혈관이 막히는 뇌경색과 혈관이 터지는 뇌출혈이다. 어느 쪽이든 골든타임을 놓치면 영구적인 장애가 남거나, 최악의 경우 생명을 잃을 수도 있다. 이 책은 이러한 질환의 전조증상과 위험한 신호를 알아차릴 수 있는 방법과, 증상이 생겼을 때의 골든타임에 대해 알려 준다. 


심혈관 질환보다 무려 2.6배나 높은 수치로 사망하는 것이 바로 암이다. 전 세계적으로는 심혈관 질환이 사망 원인 1위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암이 더 많은 생명을 앗아가고 있는 것이 현실이라고 한다. 저자는 암의 주요 원인에 대해서 짚어보고, 암을 부르는 습관과 그 증상에 관해, 그리고 사람들이 암에 관해 오해하는 것들에 대한 진실을 알려 준다. 만성 대사 질환이야말로 생활습관에서 비롯되는 질병이다. 특히나 대사 질환은 초기에 증상이 거의 없기 때문에 더 위험하다. 고혈압, 당뇨병, 고지혈증과 같은 대사 질환은 초기에 뚜렷한 증상이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많은 환자들이 심각한 합병증이 발생한 후에야 비로소 자신의 상태를 알게 된다. 그러니 만성 대사 질환은 우리 몸이 보내는 마지막 경고 신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러한 신호를 무시하고 계속 나쁜 생활습관을 유지한다는 건, 돌이킬 수 없는 심각한 질환들을 내 몸에 만들어 내는 것이다. 우리 몸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피곤하다는 신호, 소화가 안 된다는 신호, 잠이 오지 않는다는 신호... 모두 우리에게 뭔가를 말하고 있다. 이 책을 통해 자신의 몸이 보내는 신호를 제대로 읽어낼 수 있다면, 지금보다 10년 더 건강하게 살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소한 인류
이상희 지음 / 김영사 / 2025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이렇게 부실한 움직임에 인생을 맡겨야 한다니. 인간의 두 발 걷기는 치열한 자연의 삶에 도무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거기다 그다지 빠르지도 않다. 빠르지도 않고 넘어질 위험도 감수해야 하는데 심지어 두 발 걷기 외에 스스로 이동할 뾰족한 방법이 없다. 사실상 두 발 걷기가 인간의 이동을 독점하고 있는 셈이다... 인간에게는 두 발 걷기 외에 이동할 다른 방법이 없다. 하늘을 날지도 못하고, 나무를 타기에도 엄지발가락이 아무런 쓸모가 없다... 맹수가 뒤쫓아 온다면 포기하는 편이 낫다. 아니, 고민할 틈도 없이 순식간에 잡아먹힐 것이다. 자연에서라면 채 하루를 버티지 못할 것 같은 인류 계통은 이런 부실한 두 발 걷기로 수백만 년을 멸종하지 않고 살아왔다.              p.42~43


'대한민국 1호 고인류학자' 이상희 교수의 첫 번째 에세이집이다. 이상희 교수의 <인류의 기원>, <인류의 진화> 모두 인상깊게 읽었었는데, 처음으로 고인류학이 아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고 해서 매우 기대하며 읽었다. 고인류학을 선택하게 된 계기부터 미국에서 교수로 임용되는 과정과 일반 대중을 상대로 글을 쓰게 된 과정까지 여성이자 아시아인, 학자, 아내, 엄마 그리고 한 명의 인간으로서 수없이 다양한 정체성으로 살아온 저자의 모습을 만날 수 있었다. 


고인류학자는 수백만 년 전 인류의 화석화된 뼛조각과 유물을 통해 고인류가 남긴 흔적을 찾고 우리 조상의 삶을 추적하는 일을 한다. 인류의 기원과 진화 역사를 연구하는 고인류학자에게는 1만 년 전의 인류도 너무나 요즘 사람이다. 수백만 년, 적어도 수만 년 전의 인류는 되어야 전문적으로 다루는 분야가 되는 것이다. 작년 4월에 발행된 <사이언스>지의 표지 모델은 50세가 된 루시였다. 물론 여기서 루시는 50세가 아니라 330만 년 된 고인류 화석을 말한다. 화석 발견 50주년을 기념해 고인류 복원의 대가인 존 거치가 만들어낸 이미지는 어딘가 모르게 다른 모습이었다. 세월이 흐르고 학계와 시대의 변화에 맞게 루시도 조금씩 변해갔으니 말이다. 50년이 지나 과학 잡지의 표지를 장식한 루시는 온몸의 털 사이로 크고 작은 근육을 드러내고, 두툼한 젖가슴 대신 탄탄한 가슴근육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으며, 여자인지 남자인지도 불분명하게 묘사되엇다. 이는 수백만 년 전의 인류 조상이 남긴 화석을 보며 성별 고정관념을 덧씌우지 않는 성숙한 단계에 이른 것이라고, 저자는 해석한다. 고고학, 인류학에 관심이 많은 나로서도 비교적 최근의 <루시>와 발견 당시의 <루시> 모습을 찾아 본 적이 있는데, 과학계의 생생한 현모습이자 진화 과정을 볼 수 있는 듯해서 아주 인상깊었던 대목이었다. 




먼저 습관의 힘을 빌렸다. 습관은 시간을 짜낼 수 있는 지름길이다. 무슨 일이든 머리를 거치면 일단 시간이 든다. 기억해서 생각한 다음 행동으로 옮기기보다 머리를 거치지 않고 행동으로 직행하는 쪽이 훨씬 빠르다. 기억으로 할 일을 습관화해서 시간을 모으면 효율성을 높일 수 있다. 매일 똑같은 생활, 똑같은 루틴으로 뇌와 시간을 아껴두면 좀 더 재미난 일 혹은 중요한 일에 두 자원을 쓸 수 있다. 습관화는 그래서 중요하다. 무언가 선택해야 하는 과정을 거치지 않고 자동으로 움직이도록 몸을 길들이면 쓸데없는 일에 시간과 뇌를 낭비하지 않을 수 있다. 나는 매일의 일과를 기록한 끝에 내게 가장 적합한 루틴을 만들어냈다.            p.132


과학으로서의 고인류학에 매료되었다는 저자는 보는 것만으로도 본능적으로 강렬한 감정을 일으키는 인간의 해골에 빠져들었다고 한다. 해골을 객관적인 수치로 환산해 통계학적인 추론 과정을 거치는 지점이 특히 좋아는데, 그 과정에서 해골을 향한 공포심과 혐오감은 사라지고 흥미로운 연구 과제만 남게 된다는 사실이 매력적으로 느껴졌다고 말이다. 재미있는 것은 저자가 극히 소심하고 겁이 많아 별일 아닌 것에도 자주 화들짝 놀라는 성격이라는 거다. 그러니 대학 시절 주검을 처음 마주했을 때의 마음이 어떠했겠는가. 게다가 인체해부학 실습을 들으며 주검과 함께하는 하루가 이어졌을 때는 단연코 인생에서 가장 끔찍한 시간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대학과 대학원을 거치고, 박사 학위 논문 연구를 위해 클리블랜드 자연사박물관에 소장된 수천 점의 인골을 측정하러 매일 일골관에 드나들 때쯤이 되어서야 인골 따위를 아무렇지 않게 보고 생각할 수 있는 과학자가 되었다고 한다. 이런 식으로 저자의 학문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에피소드들이 많아 과학책이 아니라 에세이임에도 불구하고 흥미로운 대목들이 정말 많았다. 


저자는 이 책을 한 개인의 사사로운 이야기라고 시작했지만, 재미있는 것은 일상 속 에피소드들과 생각들이 모두 학자로서의 필터를 통과해 보여진다는 점이다. 병원에서 진료 중에 몽고점을 몰라 걱정하는 의사와의 에피소드를 통해 인종분류학에 대해 이야기하고, 걷다가 자주 넘어지는 자신의 모습을 통해 인류의 계통과 진화에 대해 생각한다. 우정과 사랑의 개념에 대해 사유하며 진화론과 사회생물학을 가져오고, 여성 연구자로서 고인류학이라는 과학을 하는 것의 현실적인 문제에 대해 젠더와 고고학의 개념으로 설명하는 식이다. 그야말로 삶과 학문이 분리되지 않고 하나가 되어 있는 듯한 느낌이랄까. 덕분에 너무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고인류학이라는 자칫 무거울 수 있는 학문에 쉽게 다가갈 수 있게 해주는 동시에, 편견과 오해들을 걷어내면서 학자로서 개척해 온 길을 공감할 수 있게 해주는 친근한 책이다. 거대한 인류로부터 사소한 개인으로의 진화를 느낄 수 있게 해주는 인류학자의 일상 관찰기를 만나보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