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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시간이 나에게 일어나
김나현 지음 / 은행나무 / 2025년 10월
평점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그 두 사람은 내가 쓴 이야기를 실제 자기들 인생으로 살아내고 있는 거예요."
그것은 상식적인 생각이 아니었다. 왜 이런 시나리오 따위를 살아내는 건가? 자신의 멀쩡한 삶을 놔두고? 윤 감독은 거장 소리를 듣는 만큼이나 영화에 미쳐 있는 사람일지도 몰랐다. 예술가로서는 천재적이지만 평범한 생활인의 입장에서 보자면 기이한 생각에 시달리는 사람이지 않을까. 자신의 이야기에 갇혀버린? 그 순간, 윤 감독이 놓친 부분이 머릿속에 번쩍였다. p.118~119
스물셋 나을은 70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오디션에 합격한 신입 배우였다. 제작만 하면 대중의 관심을 끄는 것은 물론 국제 영화제에도 자주 노미네이트되는 거장 감독의 신작에 주연으로 캐스팅된 후 나을은 줄곧 지상에서 한 발 떠 있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누군가 온라인 게시판에 학교폭력 고발 글을 올렸고, 신작의 제작 발표와 공개를 앞두고 민감한 시기였기에 수습을 해야 했다. 도대체 누가 이런 글을 쓴 건지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나던 나을은 십년 전 앵두 머리끈을 하고 자신을 괴롭히던 한 아이를 기억해 낸다. 그리고 그 괴롭힘을 막아주었던 친구 시우를 떠올린다.
그렇게 이야기는 나을이 열세살이던 시절로 간다. 아빠가 병원에서 일하던 간호사와 바람이 나서 엄마와 이혼을 한 뒤, 추잡한 소문이 동네에 퍼져 이사를 갈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런데 6학년 새 학기가 되고, 나을의 아빠가 의사라는 이유로 이해할 수 없는 괴롭힘이 시작된다. 소문에 의하면 앵두라는 아이의 아빠가 의료 사고 피해자라고 하는데, 그 후 주변에서 부모가 의사인 아이만 마주치면 맹목적으로 괴롭혀왔다고 한다. 그리고 시우라는 전학생이 오고, 곧 앵두의 표적이 나을에게서 시우로 옮겨 간다. 하지만 시우는 나을과는 달리 당당하게 맞서는 아이였다. 엄마가 일을 시작하게 되면서 혼자 있어야 하는 시간에 나을을 돌봐줄 선생님으로 한주 선생님이 집에 오는데, 시우와 함께 였다. 한주 선생님이 시우의 엄마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시우와 나을은 둘도 없는 단짝이 되어간다. 어느 날 학교에서 벌어진 사건 이후로 갑작스럽게 멀어지기 전까지는.

그 어린 시절의 순수한 호의가 여태껏 자신을 지탱해주는 힘이 되었다고 말했다. 그 우정이 모두 거짓에 토대를 둔 유령 같은 것이었는데도 나을은 그런 우정이라도 영원히 추억하고 싶을 만큼 아름다웠으면 충분히 좋은 것이 아니냐고 했다. 나는 그 따뜻한 말을 수없이 돌이켜보면서 그런 말들이 정말로 내가 들은 것인가, 아니면 내가 바란 것을 그저 마음으로 그려낸 것인가 혼란스러워질 때가 있었다. 그럴 때마다 주먹을 꼭 쥐고서 그것을, 나에게 온 행운을, 내 곁에 남아 있을 운명으로 빋어보고 싶었다. p.228~229
나을의 과거 이야기를 듣고 난 윤감독은 직접 그를 찾으러 가자는 제안을 한다. "나을 씨, 그 시우란 친구 말이에요. 혹시 내가 만나봐도 될까요?" 아무래도 확인할 게 있다는 감독의 수수께끼 같은 말은 그가 오래 전에 썼던 시나리오와 관련이 있었다. 시우와 한주가 윤감독이 무명 시절 썼다가 도둑맞은 시나리오 속 인물의 서사를 그대로 살고 있었던 것이다. 이한주, 이시우라는 이름부터 모든 것이 나을이 어린 시절 알고 있던 것과 똑같았다. 누군가 쓴 이야기를 실제 자기들 인생으로 살아내고 있다는 게 가능한 일일까. 왜 멀쩡한 자신의 삶을 두고 허구의 이야기를 살아내야 하는 걸까. 대체 그들은 어떤 삶을 살아온 것일까.
이야기는 나을의 스물셋 현재에서 시작해 나을의 열세살로 갔다가 서른셋의 하영, 마흔셋의 시우를 거치며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오가며 펼쳐진다. 숨겨진 진실이 드러나는 반전을 거듭하며 이야기는 각각의 인물이 살아낸 수많은 세계들을 담담하게 보여준다. 어쩌면 미래의 내가 살았을지도 모를 세계가 무수한 가능성의 우주가 되어 펼쳐지는 것이다. 살면서 내가 선택하지 않았던 삶에 대해 가끔 상상해 보곤 한다. 그때 만약 내가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지금의 이 삶은 없었을 것이다. 대신 다른 삶을 살았을 테고, 나는 얼마쯤 지금과는 다른 모습일 것이다. 물론 정해진 운명같은 게 있다면 어떤 시간을 거치든 도달하는 곳은 비슷할 것이다. 그쪽의 나도, 지금의 나도, 어찌되었든 나 자신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을 테니까. 그럼에도 가끔은 궁금해진다. 내가 다른 역할을 맡아서 살아가는 모습이, 새로운 세계 속에서의 경험이, 그리고 나를 기다리고 있을 또 다른 결말이. 그래서 나는 끊임없이 책을 읽는다. 이야기의 우주를 여행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지 않을까. 이 작품은 바로 그런 이들에게 적극 추천해주고 싶은 다정하고 아름다운 이야기를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