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묻다 ㅣ 하다 앤솔러지 2
김솔 외 지음 / 열린책들 / 2025년 10월
평점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정서가 저한테 하려던 말은 뭐였을까요?」
옥경 씨가 유나를 빤히 쳐다봤다. 유나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정서를 불러 줬으면 했다. 하지만 옥경 씨는 정서가 누구냐고 되묻지 않았다.
「답으로 사는 게 아니야. 물음이 있어서 사는 거지.」
욕경 씨의 시선이 재봉틀로 돌아갔다. 드르르륵. 드르르륵. 구멍 나고 헤진 드래곤의 날개를 기웠다.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러니까 계속 살아.」 - 김홍, '드래곤 세탁소' 중에서, p.8
유나는 관계가 소원해진 친구 정서와 오랜만에 만날 약속을 한다. 중학교때부터 평생을 알아온 정서는 매일같이 연락하고, 걱정하다, 미워하고, 그러다 처음부터 존재한 적 없었던 것처럼 살기 위해 노력했던 친구였다. 정서는 유나에게 꼭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고 했고, 그들은 예전에 늘 만나던 카페에서 보기로 한다. 하지만 두 사람의 카페는 세탁소로 바뀌어 있었다. 쌀쌀한 바람을 맞으며 유나는 그 앞에서 두 시간을 기다린다. 정서는 오지 않았고, 집에 돌아와 경찰로부터 연락을 받는다. 정서의 차가 가로수를 들이받았다고 했다. 정서는 약속 장소로 오는 길에 교통사고를 당했고, 결국 유나는 정서가 하려던 말이 무엇이었는지 영원히 들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이제 더 이상 유나는 정서를 걱정할 수도 미워할 수도 없게 되고 말았다.
그날부터 잠을 이루지 못하게 된 유나는 불면에 지쳐 밤거리를 쏘다니기 시작한다. 겨울의 막바지였고, 하루하루 날이 풀려 가더니 어느새 봄이 온다. 그날도 유나는 집에 가고 싶은 마음을 뿌리치고 계속 걷다가, 정서와의 마지막 약속 장소에 가보기로 한다. 늦게 도착한 정서가 그곳에서 여전히 유나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정서를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고 싶지 않아 걸음이 빨라졌다. 그렇게 한참을 걸어 드래곤 세탁소 앞에 도착한다. 세탁소는 비어 있었고, 희미한 형광등 불빛이 빼곡히 걸려 있는 옷들을 비추고 있었다. 유나의 목덜미에 찬바람이 쌩 불었고, 죽음을 이불처럼 두른 기분으로 세탁소 문을 연다. 그렇게 다림질을 하던 주인 아줌마와 이야기를 나누고, 커피를 얻어 마신다. 유나는 다음날도 세탁소를 찾아가고, 딱히 할 일이 없다는 그녀에게 주인 아줌마는 세탁소에서 일을 해보지 않겠느냐고 권한다. 여전히 죽은 친구가 자신에게 하지 못한 이야기가 무엇인지 찾기 위해 스스로에게 질문하기를 멈추지 않던 유나는 세탁소의 주인 아줌마와 시간을 보내며 조금씩 몰랐던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는 조금씩 달라지는 새소리를 들으며 질문하지 않는다.
누구의 잘못인지 모른다.
용서하거나 이해할 수 있나?
그는 갑자기 쏟아지는 눈을 맞는다.
살릴 수 없었나?
그는 살아 있는 자신에게 묻는다.
나는 살았다.
묻는다. - 윤해서, '조건' 중에서, p.199
다섯 명의 소설가가 하나의 주제로 함께 글을 쓰는 열린 책들의 '하다 앤솔러지' 두 번째 책이다. 이 시리즈는 우리가 평소 하는 다섯 가지 행동 즉 걷다, 묻다, 보다, 듣다, 안다, 라는 동사를 테마로 진행되고 있다. 그 두 번째 책 <묻다>에는 김솔, 김홍, 박지영, 오한기, 윤해서 작가가 참여했다. 자신만의 색깔이 뚜렷한 다섯 작가의 작품들을 만날 수 있었다. 사뮈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를 새롭게 해석한 <고도를 묻다>라는 작품은 희곡 형식으로 쓰여 있어 아무래도 가독성은 떨어졌지만 매우 흥미로웠다. 작가가 사뮈엘 베케트의 소설이나 연출가 고 임영웅 선생님의 연극에 깊이 감명받아 이 작품을 쓰게 되었다고 하는데, 고도가 누구인지가 아니라 고도가 누구인지에 상관없이 어떻게 끊임없이 묻고 답할 것이냐,에 중점을 두고 풀어 나가는 이야기라 인상적이었다. 딸아이의 방과 후 교실 과제인 공포 동화 쓰기를 하는 소설가 아빠의 이야기를 그린 <방과 후 교실>은 아주 유쾌하게 읽었다. 실제로 오한기 작가가 이 작품을 쓰게 된 계기가 초등학교에 막 입학한 딸이 자신의 작품을 읽고 질문을 하면서였다고 하는데, 아주 재미있게 읽었다.
개인적으로는 다섯 편의 이야기 중에 김홍 작가의 <드래곤 세탁소>가 가장 마음에 들었다. 원래 지으려던 이름이 <세탁소 더 드래곤>이라는 것부터 어딘가 귀엽고도 수상한 세탁소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공간되고, 따뜻한 이야기였다. 세탁소의 이름에 관해서는 김홍 작가가 '뭔가 어긋난 듯한, 나사가 하나 빠진 듯한 가게 이름을 상상'하는 걸 좋아하기 때문에 만들어진 설정이라고 한다. 김홍 작가의 작품은 이번에 만난 것이 처음인데, 다른 작품도 찾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이 시리즈는 반투명한 트레싱지로 옷을 입은 표지가 너무 예쁘고, 책배와 위, 아래에 프린트가 함께 되어 있어 책의 물성이 얼마나 중요한지 고스란히 보여준다. 그래서 시리즈별로 한 권씩 모으기 딱 좋다. 하다 앤솔러지 세 번째 작품 <보다>도 기대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