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비 이야기
기시 유스케 지음, 이선희 옮김 / 비채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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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하지만 세상에는 모르는 편이 행복한 일도 있다네. 다음에 일어난 일을 알게 되면 오히려 괴로울지도 몰라."

"전 어떻게 되든 상관없어요. 반드시 진실을 알고 싶어요." 나오는 고집을 부렸다.

"그럼 할 수 없지."

그는 어쩔 수 없이 다음 시로 나아갔다.               - '5월의 어둠' 중에서, P.75


은퇴한 노교사 사쿠타 노부오는 사람을 싫어하는 경향이 환갑 무렵부터 심해져 홀로 지내는 시간이 거의 대부분이다. 남들과 관계를 맺는 것이 귀찮았기에 다른 사람과 말할 기회 자체가 줄어들다보니 혼잣말이 많아지고 있는 요즘이다. 그런데, 투둑투둑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한 그날에는, 옛 제자가 수십 년 만에 그를 찾아 온다. 반가운 마음에 평소보다 들뜬 기분으로 그녀를 맞이한다. 나오는 오빠가 지난 달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며, 그 이유를 알아보고자 집에 스무 권쯤 있던 시집을 가지고 왔다. 하이쿠 속에 담긴 오빠의 마지막 심경을 선생님이라면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두 사람은 단어 하나, 문장 하나를 살펴보며 시 속에 담긴 의미를 찾아가기 시작한다. 하지만 사쿠타에게는 치매 징후가 점점 심해지고 있었고, 그날은 비교적 정신이 또렷한 날이었지만 시를 해석하며 기억이 잘 나지 않는 순간들이 이어진다. 


사쿠타는 사라지는 기억과 싸우며 진실에 도달할 수 있을까. 게다가 나오의 이야기를 들으며 사쿠타는 조바심이 나고, 이상한 추측을 하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했다가, 기묘한 의혹이 솟구치기도 한다. 유명한 정신과 의사가 애인이라면 왜 오빠의 하이쿠 해석에 관해 그와 상의하지 않았을까, 자신에게 치매 증상이 있다는 걸 미리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찾아온 이유는 뭘까... 그런 온갖 생각을 하며 하이쿠 해석에 이어진다. 하이쿠는 본래 한 편 한 편이 독립되어 있는데,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서는 열세 편을 한 연으로 해석할 필요가 있어 한꺼번에 읽기도 하고, 어떤 심정으로 이 시를 썼을 지 작가의 마음 속으로 파고 들어가는 듯한 스릴 넘치는 감각을 느껴보기도 한다. 시에 담긴 의미들을 더듬어가는 과정 제차도 흥미로웠지만, 조금씩 의심이 들게 하는 순간들이 이야기에 더 몰입하게 만들어 주었다. 이야기는 곳곳에 포석처럼 깔아 두었던 복선들을 차곡차곡 회수하며 후반부에 이르러 충격적인 반전을 보여준다. 과연 그 시집 속 진실은 무엇일까. 




이것이 여우비란 것이리라. 무언가에 홀린 심정이지만, 어차피 계속 상대의 손바닥 위에 있다. 이제 와서 신경 써봤자 소용없으리라.

요시타케는 유혹하듯 나무 사이를 날아가는 검은 나비를 정신없이 쫓아갔다. 돌연 날씨가 우중충해졌다. 어? 드디어 구름이 나온 걸까? 그렇게 생각하고 하늘을 올려다보니, 음침한 둥근 그림자가 태양을 잠식해가는 참이었다.

아아, 이건 개기일식이다. 이윽고 세계는 한밤중처럼 캄캄해질 것이다.             - '보쿠토 기담' 중에서, P.224


'비' 시리즈는 일본 설화문학의 진수로 꼽히는 에도시대의 고전 <우게쓰 이야기>에서 모티프를 가져왔다. <우게쓰 이야기>는 아홉 가지 초자연적 이야기의 모음집으로 미조구치 겐지 감독의 동명 영화로도 유명하다. 기시 유스케는 이 작품에 영감을 받아 데뷔작 <13번째 인격 ISOLA>를 쓰기도 했는데, 그 너머에 있는 이야기를 '비'를 주제로 해 두 권의 소설집을 쓰겠다고 마음먹는다. 그렇게 2009년부터 쓰기 시작한 글들을 2022년이 되어서 마무리하고 출간된 것이다. 그렇게 기시 유스케가 '비'를 주제로 쓴 암흑 기담집인 <가을비 이야기>에 이어 두 번째 작품인 <여름비 이야기>가 드디어 나왔다. 


<가을비 이야기>에서는 운명에 절망하고, 일상에서 초자연적인 현상과 마주하는 등 현실 속에서 마주할 수 있는 공포 그 자체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네 편의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었다. 이번에 나온 <여름비 이야기>에서는 비가 내리는 스산한 날씨를 배경으로 인간 근원의 감정을 건드리는 오싹한 세 편의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다. 각각의 이야기들은 하이쿠, 곤충, 버섯이라는 소재로 펼쳐지는데, 때로는 가랑비처럼 조금씩 스며들고, 혹은 장마비처럼 줄기차게 쏟아져 흠뻑 젖게 만드는 다양한 매력을 보여주고 있다. 장마철의 높은 습도와 눅눅한 공기처럼 이야기를 따라 가다 보면 어느 순간 그 분위기에 흠뻑 젖어 드는 이야기들이었다. 기시 유스케는 초자연적인 존재보다 인간과 인간이 품은 악의야말로 지독히 현실적인 최고의 공포라는 것을 보여준다. <검은 집>이라는 작품으로 최고의 호러소설 작가로 자리매김했던 기시 유스케는 이후 SF 소설, 추리, 미스터리 소설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들을 선보여왔는데, 9년 만에 호러 작품을 내놓은 것이 바로 이 시리즈였다. 그가 만들어 내는 다차원의 공포를 좋아했다면 이번 작품을 놓치지 말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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