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 오브 도어즈
개러스 브라운 지음, 심연희 옮김 / 문학수첩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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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이 세상은 끔찍하고 비정해. 난 정말......싫어. 하지만 책이야말로 내가 항상 갈 수 있는 곳이었어. 어렸을 때도,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도. 나는 현실보다 책 속 세상이 좋아."

"무슨 마음인지 알겠어. 인생은 정말 짜증 나지."

..."그런데 이제 이게 생긴 거야. 이 책을 왜 나한테 줬는지는 모르겠지만, 생겼다고. 그리고 웨버 씨는 좋은 분이었어. 책을 좋아하시는 분이었지. 그래서 난 이 책이 나쁜 거라고 생각하고 싶지 않아...."

               p.133


캐시는 뉴욕 어퍼 이스트사이드에 있는 서점인 켈너북스에서 일을 한다. 6년 전 뉴욕에 처음 왔을 때부터 지금껏 일해온 그곳을 캐시는 사랑했다. 책이 가득 꽂힌 서가와 탁자, 부드럽게 흘러나오는 배경 음악과 높다란 천장에 달린 조명의 밝고 아늑한 분위기로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친숙함이 훅 느껴지는 편안한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커다란 창문 바깥으로 보이는 밤거리엔 희뿌연 빛 사이로 먼지 같은 눈송이가 흩날리다 점점 커지고 있었다. 늦은 시각이라 남아 있는 손님은 서점의 단골인 웨버 씨뿐이었다. 웨버 시는 부드러운 말씨에 늘 값비싸 보이는 옷을 단정하게 차려입은 신사로 늘 즐겨 앉는 중앙 탁자에 자리를 잡고 책을 읽고는 했다. 




갑작스럽게 웨버 씨가 서점에서 돌아가신 뒤, 캐시는 그가 자신에게 남긴 책을 한 권 받게 된다. 갈색 가죽 표지가 달린 자그마한 책이었는데, 알아볼 수 없는 언어로 된 글이 진한 잉크로 온통 쓰여 있었다. 책의 첫 장을 열자 '이건 문의 책이다. 손에 들고 있으면 어느 문이든 모든 문이 된다.'는 문구가 보였다. 그리고 웨버 씨의 필체로 친절하게 대해준 보답으로 캐시에게 이 책을 선물로 주겠다는 메시지가 있었다. 선물에 놀라고 감동한 캐시는 책을 집으로 가져가고, 함께 살던 친구 이지와 함께 책을 살펴보다 책이 가진 특별한 힘을 발견하게 된다. 그 책은 어떤 문이든 가고 싶은 곳의 입구로 바꿔주는 힘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책을 든 채로 가고 싶은 장소를 떠올리며 문을 열면 그곳이 눈앞에 펼쳐졌다. 이지와 함께 과거에 여행했던 베네치아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문을 열었는데, 빗물에 반짝이는 베네치아의 거리가 나타난 것이다. 분명 뉴욕의 집에 있었는데, 문 너머로 베네치아가 펼쳐지다니 대체 어떻게 된 걸까. 




이 모든 것들을 달리 어디에 보관할 수 있을까? 책 말고 다른 곳이 있을까? 삶의 모든 기쁨과 즐거움을 찾을 수 있는 책 말고는 대체 이 모든 감정을 어디에 가둘 수 있단 말인가? 그래서 캐시는 이 책들을, 이 특별한 책들을 만들었다. 아무 데도 아니면서 또 모든 곳이기도 한 이곳에서 책이 탄생하였다. 책 하나하나마다 캐시의 기억과 감정으로, 현실의 파편으로 만들어졌다. 그녀는 이 책들을 세상으로 던져서 현실과 시간 속에 흩어놓았다.             p.451


한 권의 책을 통해 우리는 어디든 갈 수 있다. 몸은 방구석에 앉아 있지만, 책 속 이야기를 마음만은 세계 어디든 갈 수 있는 비유로서 말이다. 그런데 실제로 책을 통해 원하는 시공간으로 이동할 수 있다면 어떨까. 책이 문이 되어 내가 원하는 시간과 장소로 갈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정말 환상적인 모험이 되지 않을까. 개러스 브라운의 데뷔작인 이 작품은 책을 통해 다른 세계로 향하는 문을 열게 되면서 벌어지는 스릴 넘치는 모험 이야기를 보여준다. 각기 다른 목적으로 책을 차지하려는 책 사냥꾼의 추적을 피해서 평범한 서점 직원이었던 캐시는 무사할 수 있을까. 



이 작품에는 캐시가 가지고 있는 '문의 책' 외에도 다양한 마법 책들이 등장한다. 몸을 숨긴 채로 다닐 수 있게 해주는 '그림자의 책', 필요할 때마다 사람들이 자신을 잊게 해주는 '기억의 책', 운이 좋게 해주는 '행운의 책', 그리고 속도의 책, 안개의 책, 파괴의 책, 절망의 책들이 있었다. 누군가는 이 특별한 책들을 이용해 뭔가를 파괴하고, 나쁘게 만들었고, 또 누군가는 그들로부터 도망을 다녔다. 분명한 것은 캐시가 '문의 책' 덕분에 자신도 모르게 위험에 내몰리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런 캐시 앞에 비밀 도서관 사서 드러먼드 폭스가 나타나고, 그녀를 돕기 위해 친구와 동료들이 모여든다. 


자신이 원하는 힘을 얻기 위해서라면 기꺼이 살인을 저지르는 위험하고 무자비한 사람들에게 쫓기며, 캐시는 여러 사건들을 겪는다. 다양한 등장인물들의 등장과 마법의 힘을 지닌 책들이 하나둘 밝혀지면서 이야기는 더욱 속도감있게 전개된다. 이야기는 '문의 책'이 장소 뿐만 아니라 시간도 넘나들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점점 더 클라이막스를 향해 달려간다. 후반부의 엄청난 결말에 도달하기까지 거의 육백여 페이지에 달하는 분량을 순식간에 읽을 수 있는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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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오브 도어즈
개러스 브라운 지음, 심연희 옮김 / 문학수첩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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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권의 책을 통해 우리는 어디든 갈 수 있다는 것을 현실화시켜 보여주는 판타지 스릴러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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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목욕탕 파란 이야기 24
정유소영 지음, 모루토리 그림 / 위즈덤하우스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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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해도 후회, 안 해도 후회. 사는 게 온통 후회투성이란다. 너도 나가서 살면 금방 때투성이가 돼서 이곳에 기어들어 올걸."

탕에 몸을 담근 손님들이 너나없이 키득키득 웃었다. 용 직원은 한방 먹은 얼굴로 밀키를 째려봤다. 밀키는 모른 척하며 내게 어서 들어오라고 손짓했다.

"온도가 아주 딱 좋아. 너도 좋아할 거야."            p.36


은하는 아빠와 함께 동물과 사람이 함께 TV, 라는 뜻의 '동사함TV' 유튜브를 운영하고 있다. 직접 유기묘인 밀키를 구조해 키우고 있기도 하다. 은하는 반친구들도 모두 알 정도로 나름 인기 있는 유튜버인데, 댓글들을 살피다가 아지천사라는 아이디로 쓴 뾰족하게 날이 선 댓글을 보자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해 버린다. 아지천사는 툭하면 악플을 달고 시비를 거는 구독자였다. 



은하는 어느 날 같은 반 친구인 강하진이 아지천사라고 의심하게 되고, 증거를 찾기 위해 휴대폰을 훔쳐보다 들키고 만다. 사실 강하진은 악플러가 아니라 은하를 응원하는 열렬한 팬이었다. 게다가 하필 그 장면을 누군가 영상으로 찍어서 올리는 바람에 은하는 친구를 의심하고 휴대폰까지 훔쳐본 '나쁜 아이'로 낙인찍히고 만다. 친구들 뿐만 아니라 수많은 구독자들에게 비난을 받게 되자, 은하는 모든 걸 다시 되돌리고만 싶다. 심지어 악의적으로 편집한 영상까지 돌아다니기 시작하자, 은하는 그냥 이대로 사라져 버리고 싶다고 생각한다. 그 영상만 본다면, 자신은 세상에서 가장 나쁜 아이처럼 보였다. 겉으로는 착한 척하고 뒤로는 못된 짓만 골라 하는 위선자. 사실이 아니라는 걸, 실수였을 뿐이라는 걸 밝히고 싶지만 방법이 없다. 어떻게 해야 할까. 




"이번 주, 네 몫의 초대권은 없어. 라면 사 먹는다고 행운을 당겨썼잖아."

"행운을 또 당겨쓰면 안 돼요? 제 행운을 한 개, 아니 열 개 드릴게요. 제발요. 저는 꼭 그때밀이를 받아야 해요. 고민지가 저 때문에......"

사장님이 혀를 차며 말했다.

"왜 아이들은 맨날 그때로 돌아가려고만 하는지 모르겠어. 어차피 그때로 돌아가 봤자 또 후회할 일이 생길 텐데."          p.81


여기 초대권을 받아야만 입장할 수 있는 목욕탕이 있다. 영업시간은 매주 목요일, 해질 녘부터 동틀 때까지이다. 안내하는 개를 따라가면 되는데, 어른은 입장할 수 없다. 이곳에는 후회되는 그때를 깨닫게 해 주는 '아이씨탕', 후회되는 그 순간을 말끔히 씻어 주는 '그맘때탕, 후회되는 과거로 되돌려주는 '그때밀이', 후회의 기억과 맞서 싸우는 '싸우나' 등 현실의 목욕탕에는 없는 것들로 가득하다. 


그때로 돌아갈 수 있는 기회는 평생 세 번뿐, 그리고 과거로 돌아가면 미래도 그만큼 줄어든다. 하지만 아쉽고 되돌리고 싶은 순간이 있다면, 다시는 후회하고 싶지 않다면, 누구나 그때로 돌아가 바꿀 수 있는 기회를 잡고 싶지 않을까. 하지만 원하는 대로 모든 일을 바로잡을 수 있을까? 바라던 대로 다시 후회할 일을 반복하지 않을 수 있을까? 




이 책은 후회하는 마음을 ‘때’로 표현하고, 그 ‘때’를 벗겨 내는 목욕탕을 배경으로 한 판타지 동화이다. 누구나 살면서 실수를 하고, 그로 인해 후회를 하게 된다. 그냥 이대로 사라져 버리고 싶다고, 그때로 다시 돌아갈 수만 있다면, 모든 걸 되돌리고 싶다고 생각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세상에 완벽한 사람이란 없다. 실수하고, 잘못하고, 후회하면서 배워 나가는 게 인생이기도 하니 말이다. 사람들은 실수를 실패의 증거라고 생각하지만, 사람은 후회할 일을 많이 할수록 더 현명해지게 마련이다. 실수하며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배워 가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 실수만 없었다면 행복해졌을 거라 여기며 괴로워하지 말고, 실수를 통해 더 잘할 수 있게 배우고 성장하면 되는 거다. 


이 작품 속 주인공은 그때목욕탕을 통해 친구 사이의 오해와 갈등을 풀고, 상처를 마주하며 조금씩 회복해 가는 기회를 얻는다. 아이들의 시선으로 후회를 통해 한 걸음 더 성장하는 법을 알려주는 것이다. 후회가 성장의 디딤돌이 되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아이들에게 추천해주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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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 수업 - 오늘의 시민을 위한 칸트 입문 강독 내 인생에 지혜를 더하는 시간, 인생명강 시리즈 36
김선욱 지음 / 21세기북스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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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어쩌면 칸트를 공부하는 일은 마치 빨간 약을 먹고 난 뒤의 세계를 탐구하는 것과 같다. 세계가 실제로 어떤 모습인지, 그리고 그 세계를 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깊이 살펴보는 일이기 때문이다. 칸트 철학이 어렵게 느껴지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그의 철학을 이해하면, 우리가 기존에 받아들이던 세계가 사실은 매트릭스처럼 구성된 것이며, 우리가 보는 현실이 진짜 세계처럼 생각된 것임을 깨닫게 된다.              p.65


대한민국 대표 교수진이 펼치는 흥미로운 지식 체험, ‘인생명강’ 시리즈의 서른여섯 번째 책이다. 이 시리즈는 역사, 철학, 과학, 의학, 예술 등 전국 대학 각 분야 최고 교수진의 명강의를 책으로 옮겨 다양한 분야의 지식 콘텐츠를 만날 수 있도록 했다. 이번에 나온 책은 2024년 칸트 탄생 300주년을 맞아 숭실대 철학과 김선욱 교수가 진행한 네 번의 온라인 강연을 바탕으로 기획되었다.


칸트는 많은 책을 출간했고 많은 글을 남겼다. 그의 저작을 모아 출판한 '아카데미판' 전집은 총 29권에 이른다. 저자는 칸트의 저작 가운데서도 특히 중요하게 평가되는 '비판기' 저작물에 집중한다. 이 책은 칸트의 3대 비판서 <순수이성비판>, <실천이성비판>, <판단력비판>을 통해 칸트의 철학을 오늘의 삶에 연결한다. 김선욱 교수는 한나 아렌트 연구의 권위자로 유명한데, 자신이 칸트 철학을 전문적으로 연구한 학자가 아니기에 오히려 철학을 전공하지 않은 대중들에게 도움이 될 수도 있겠다는 기대로 칸트 강의를 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렇게 칸트의 인식론을 시작으로 칸트 철학의 핵심인 도덕철학을 탐구하고, 인간 존엄에 관한 칸트의 사상을 살펴보며 미학과 정치철학의 관점에서 21세기의 철학적 맥락을 짚어 본다. 그리고 강연에는 없었던 5부를 덧붙여 칸트의 사상이 현대 정치철학의 한 주제인 세계시민주의 논의에서 어떻게 살아 움직이는지로 확장시킨다. 




우리가 칸트를 다시 공부하는 이유는 인간 존엄과 보편성이라는 철학적 기획이 오늘날에도 유효한 사유의 가능성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단순히 사고하는 존재가 아니라, 서로를 이해하고 공감하며 소통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존재다. 그러나 이 능력이 실제로 작동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물음이 남는다. 지젝이 언급한 사례처럼, 때로는 피상적인 예의 하나가 인간다움을 일깨우기도 한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것인 이념이나 도덕성 이전에, 타인을 향한 가장 기본적인 존중과 거리감일 수 있다.              p.179~180


영화 <매트릭스>에서 모피어스는 네오에게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보는 세계는 궁극적인 실재가 아니다." 모피어스는 네오에게 빨간 약과 파란 약을 보여주면서 빨간 약을 먹으면 실재를 알게 되지만, 진리를 아는 일은 고통을 수반한다고 말한다. 반면 편안한 삶을 이어가고 싶다면 파란 약을 선택하라면서, 둘 중 어느 쪽을 선택할 것인지 묻는다. 우리가 인식하는 현실이 허상이라는 것은 빨간 약을 먹어야 비로소 진짜를 마주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칸트는 실재를 두 종류로 구분한다. 하나는 현상적 실재, 즉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세계다. 다른 하나는 본체적 실재, 즉 우리의 지각 너머에 있는 그 자체의 세계다. 칸트의 선험 철학은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세계는 단지 현상적 실재일 뿐이며, 본체적 실재는 우리가 직접적으로 인식할 수 없다고 말한다. 저자는 칸트의 철학을 매트릭스 속 세계를 비유하며 설명해주는데 덕분에 이해하기도 쉬웠고, 더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칸트의 문제의식은 '좋은 삶이 항상 옳은 삶일 수 있는가?'라는 데에 있다. 즉, 좋음과 옳음이 반드시 일치하진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오랜 시간을 지나 현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도 같은 고민으로 연결된다. 사회 속에서 개인의 행복을 추구하는 삶은 종종 '그것이 옳은가?'라는 질문의 도전을 받는다. 좋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과연 그것이 옳은 일일까에 대한 고민을 해볼 필요가 있다. 나를 행복하게 하는 것에 집중해야 하지만, 내 행동이 옳은 것이 되게 하는 기준을 찾아야 할 것이다. 칸트의 시대는 계몽의 시대였다. 계몽된 인간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민주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오늘은 과연 이미 계몽된 시대에 도달했을까, 아니면 여전히 계몽을 향해 나아가는 중일까. 혹은 계몽의 가능성을 품은 채 그 길을 걸어가고 있는 중일까. 칸트의 철학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이유가 궁금하다면, 칸트 탄생 300주년 기념 강연을 책 한 권으로 만나보고 싶다면 이 책을 놓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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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신 연못의 작은 시체
가지 다쓰오 지음, 이연승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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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살해당했다고요?"

"네."

혼조는 놀란 듯이 얼떨떨한 얼굴로 한동안 침묵했다. 그러다 조금 빠르게 다시 입을 열었다. 어딘가 조급해 보이기도 했다.

"모르겠네요...... 도무지 무슨 말인지......"

"조금 전 혼조 씨는 동생의 죽음에 뭔가 거짓이 있는 것 같다고 느꼈다고 하셨습니다만."    

"아, 그건 전혀 다른 의미로 한 말이었습니다."             p.73


간토 대학 공학부 건축 학과 교수인 도모이치는 최근에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장례를 치뤘다. 그런데 어머니는 돌아가시기 전에 '동생이 살해당했다'는 말을 남겼다. 23년 전 초등학교 3학년이던 동생은 전쟁 중 학동 소개로 지바현의 깊은 산골 마을에 보내졌었다. 그곳에 간 지 석 달쯤 됐을 무렵, 갑자기 학교에서 동생이 익사했다는 연락을 받았고 여태 그렇게 사고사로만 알고 있었다. 당시 소개지 아동을 불러다가 대접해 주는 행사가 있었는데, 그 초대를 받아 간 집 근처 연못에서 발을 헛디뎌 빠졌다고만 들었을 뿐 구체적인 정황까지는 알지 못했다. 그런데 어머니가 남기신 말 때문에 의문이 들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돌아가시기 직전에 정신이 혼미해져서 하신 말씀일 수도 있었지만, 동생의 죽음을 조사하는 행위 자체가 죽은 동생을 위한 작은 위령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싶어 진실을 찾아 보기로 한다. 


그렇게 도모이치는 강의 일정을 바꿔 가면서 동생의 소개지였던 지바 쪽으로 조사를 위해 떠난다. 전쟁 후 지방의 부잣집들은 대부분 몰락의 길을 걸었던 것처럼 동생이 초대를 받았던 다에미 가도 지금은 마을에서 이미 사라진 상태였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당주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건이 일어났고, 결국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어머니라는 분도 도망치듯 마을을 떠나 행방불명이 되었다고 하니 말이다. 다에미가를 둘러싼 기묘하고 복잡한 이야기도 많이 있었다. 선조들의 약탈로 목숨을 잃은 자들의 저주라든가, 쉽게 지워지지 않는 도적의 피, 그리고 근친혼이 잦았던 점 등이 얽혀 대대로 평범하지 않은 사람들이 태어난다거나 으스스한 이야기들이 있었다. 다에미 가에 있던 연못에도 찝찝한 전설 같은 것이 전해 내려왔다고 한다. 용신 연못이라는 이름부터 사당에 용이 산다는 전설에서 유래된 것이었다. 그리고 용이 산 제물을 원한다는 이야기도 있었는데, 과연 도모이치는 이십 년도 지난 동생의 죽음에 얽힌 진실을 밝혀낼 수 있을까. 




"그렇다고 살인까지 한다는 건 좀 비약 아닌가? 사람이 그렇게 쉽게 살의를 품을 수 있어?"

“살면서 단 한 번도 살의를 느끼지 못한 사람은 없다고 봐.

오히려 때때로 살의를 품는 인간이 정상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데 왜 대부분 실제로 사람을 죽이지 않는 거지?”

“살의를 품는 것과 실제 행동에 옮기는 건 분명한 경계가 있으니까. 대부분 그 선까지 가면 거의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서게 돼.”            p.272


깊은 산골 마을에서 조사를 하는 과정은 결코 만만치 않았다. 도모이치는 등 뒤에서 인기척을 느끼거나, 자신이 남긴 발자국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선명하게 남아 있는 또 다른 발자국을 발견한다. 그리고 어디를 가든 누군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감각을 끊임없이 받게 된다. 작고 폐쇄된 마을이라 사람들의 은밀한 눈과 귀, 입이 거미줄처럼 얽혀 있는 듯했다. 누군가 자신을 감시하고 미행을 한다면, 동생의 죽음에 그토록 들키고 싶지 않은 무언가가 숨겨져 있다는 뜻이 아닐까 도모이치는 생각한다. 급기야 자신이 머물고 있던 방을 누군가 엉망으로 만들어 놓았는데, 여행 가방을 뒤지며 찾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러다 도모이치는 누군가의 습격으로 인해 머리에 타격을 입고 그대로 정신을 잃고 만다. 대체 도모이치의 동생의 죽음에는 어떠한 비밀이 숨겨져 있는 걸까?


이 작품은 마니아들 사이에서 '복선의 신'이자 '전설'로 끊임없이 회자되며 40여 년 만에 부활한 본격 미스터리이다. 가지 다쓰오의 작품은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것인데, 이 작품은 1979년에 발표된 작품이다. 일본 현지에서도 한동안 절판 상태였다가 2022년에 복간되었고, 이번에 국내에도 출간된 것이다. 작품이 복간되면서 범인 설정, 메인 트릭, 대담한 미스디렉션, 치밀한 복선까지 본격 미스터리로서 완벽한 작품이라며 극찬한 미쓰다 신조가 해설을 썼다.  미스다 신조는 해설을 쓰기 위해 이 작품을 43년 만에 다시 읽었다고 하는데, 여전히 가지 다쓰오의 진면목을 발견할 수 있는 작품이었다고 말한다. 동생의 죽음에 얽힌 전반부의 미스터리만 하더라도 상당히 흡입력있는 전개를 보여주고 있는데, 중반 이후로 넘어서면 과거가 아니라 현재에서 벌어지는 생각지도 못했던 사건들이 시작된다. 곳곳에 치밀한 복선과 트릭이 설치되어 있는 것으로 유명한 작품이라, 처음 읽기 시작했을 때부터 복선이 될 만한 부분에 별도로 표시를 하면서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후반부에 드러나는 진실은 그야말로 놀라웠다. 추리, 미스터리 분야의 책들을 꽤 읽어 왔기에 반전도, 범인도 쉽게 짐작하는 편이라고 자부했는데, 이 작품만은 예외로 둬야 할 것 같다. 그만큼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전개가 탄탄한 서사로 진행되기에, 아마 대부분의 독자들이 결말에 이르렀을 때 비슷한 표정을 짓게 되지 않을까. 작가에게 제대로 당했구나, 싶을 테니 말이다. 폭풍 같은 복선 회수에 전율하게 되는, 전설의 미스터리가 궁금하다면 이 작품을 놓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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