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마음은 설명되지 않는다 - 우울증 걸린 런던 정신과 의사의 마음 소생 일지
벤지 워터하우스 지음, 김희정 옮김 / 어크로스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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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정신의학에서는 어떤 것에도 100퍼센트 확신을 할 수 없다는 사실이 나를 불안하게 한다. 정신과 의사는 항상 회색 구름 속에서 일을 할 수밖에 없다. 그러다가 가끔 사이키델릭한 광기의 색이 주변을 밝히곤 한다. 정신 질환 사례는 같은 것이 하나도 없다. 우울증이라는 진단을 내리기에 충분한 증상만 해도 수천 가지 조합이 존재한다. 데이미언의 '비전형적인 증상'은 이상하지만, 따지고 보면 이상한 것을 전문으로 하는 게 우리 직업 아닌가?             p.176~177


영국 NHS 정신과 의사 벤지 워터하우스는 어느 날 병원에 가서 항우울제를 처방받는다. 처방전에는 '플루옥세틴 20밀리그램 1일 1회 복용'이라고 쓰여 있었다. 자신이 날마다 환자들에게 처방하는 바로 그 약이다. 극적으로 사회적 환경을 변화시킬 힘이 없는 상황에서 전천후, 다목적으로 쓰는 정신의학계의 아스피린 같은 약이다. 대체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사람들의 마음을 치료하는 정신과 의사가 어쩌다 우울증에 걸린 걸까. 이 책은 벤지 워터하우스가 영국의 공공 의료 기관 NHS의 정신과 의사로 일한 10년을 담은 회고록이다. 


날마다 수백 명의 정신과 의사가 런던 동서남북 전역에서 정신이 아픈 사람들을 돌본다. 하지만 밤이 되면 달라진다. 영국 수도의 세 자치구에 사는 백만 명이 넘는 인구를 커버하는 관할 구역에서 밤 근무를 하는 의사는 다섯 명뿐이다. 저자는 그날 당직 근무를 서던 중이었다. 새벽 4시, 무선호출기가 울린다. 저자는 호출기에 뜬 번호를 전화기 다이얼에 찍는다. 환자를 하나 보내겠다는 응급실 수간호사의 연락이었는데, '35세, '자살 다리'에서 뛰어내림'이라는 정보를 가진 환자였다. 운 좋게 가시덤불에 떨어져 얕은 자상을 입고 성형외과에서 처치 후, 손목 골절은 정형외과에서 치료했고, 이제 정신과 차례라는 거였다. 문제는 NHS 번호를 확인했더니 이름이 떴고, 자신이 아는 이름이었다는 거다. 저자는 자신의 환자가 자살 미수로 응급실에 실려 왔다는 사실을 깨닫고, 자신이 의사로서 아무것도 해주지 못했다는 자괴감과 무력감에 시달리게 된다. 정신과 수련의로 일한 지 2년 만의 일이었다. 그는 결국 우울증을 진단받는다. 




"조지프, 정신 질환이 감염병처럼 옮는 병이 아니라는 건 나도 알아요. 하지만 뭔가를 흡수하는 건 맞는 것 같아요. 혈관 외과에서 일할 때는 근무가 끝나고 나면 매일 수술복을 빨았어요. 썩은 생선 냄새가 났거든요. 소화기 내과에서 일할 때는 냄새가 어땠을지 짐작하시겠죠. 하지만 정신과에서는 공기 중에 사람들의 고통이 떠다녀요. 그런 고통은 세탁기에 옷을 빤다고 사라지지 않고 늘 따라다녀요."

조지프는 내 말에 대해 잠시 생각해본다. "어쩌면 고통을 일부 흡수하는 게 다른 사람을 돕는 대가일지도 모르겠군요." 그가 말한다.             p.359


이 책은 현대 정신의학의 진단 체계부터 다양한 정신 질환을 앓는 환자들의 에피소드와 스스로 우울증을 앓으면서 겪게 된 내밀한 고통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 그는 자신이 날마다 환자에게 처방하던 약을 처방받고 나서야 마음의 고통이란 뇌의 신경학적 불균형으로만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고통의 근원이 남아 있는 한 항우울제는 임시방편에 불과하다는 것을 말이다. 그렇게 의사로서 환자와 교감하는 동시에 환자로서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면서 펼쳐지는 고뇌와 딜레마의 여정은 깊이 있는 공감과 이해로 이어진다. 많은 사람이 여전히 우울증은 '화학적 불균형'이 원인이고, 양극성 장애는 창의적 천재를 낳고, 조현병은 '분열된 뇌를 가진' 도끼를 휘두르는 살인자를 만들어낸다고 믿는다. 나 역시 이 책을 읽기 전에는 저자가 말한 그대로 생각했었다. 정신 질환은 다리 골절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있다. 정신 질환은 어쩐지 골치 아프고, 꺼림칙하고, 숨겨야 하거나 피해야 하는 두려운 것으로 여기고 있으니 말이다. 


저자는 자신이 직접 항우울제를 처방받고 나서야 진단명에 가려진 환자들의 복잡한 사연과 상처를 헤아릴 수 있게 된다. 컨베이어 벨트 위 과일에 스티커를 붙이듯이 환자들의 증상만 보고 조현병, 양극성 장애, 인격 장애 같은 진단을 내렸던 과거와는 달라지게 된 것이다. 그렇게 정신 병동이라는 가장 특수한 공간에서 가장 보편적인 인간의 정서의 살피게 된다. 이 책이 더욱 특별한 것은 조현병, 양극성 장애, 인격 장애, 약물 남용 장애 등 심각한 질환을 앓는 중증 환자들이 계속 등장하지만, 어둡고 무겁지 않고 일종의 블랙코미디처럼 그려내고 있다는 점이다. 어릴 적 아버지의 학대로 경계성 인격 장애를 앓거나, 불안한 일이 생기면 마약이나 알코올, 자해를 시도하고, 머릿속에서 누군가 말하는 소리를 듣는 등 대부분 강제 입원하거나 여러 번 응급실을 들락 거릴 정도로 상태가 심각한 환자들이 등장했다. 마치 영화나 드라마 속에서나 존재한다고 생각했던 그런 사연들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 또한 이야기에 더욱 몰입하게 만들어 주었다. 이 책은 그야말로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를 일들이 끊임없이 펼쳐지는 과정 속에서 정신의학의 실제 현장을 생생하고도 사실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세상에는 직접 경험해야만 비로소 알 수 있는 지점들이 분명 있고, 그것을 고스란히 느끼게 해주는 책이었다.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에서 고군분투하는 한 정신과 의사의 유쾌하고, 신랄하면서도 가슴 아픈 이야기를 만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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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에다마처럼 모시는 것 도조 겐야 시리즈
미쓰다 신조 지음, 심정명 옮김 / 비채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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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하에다마님을 모시는 건 망것을 잠재우기 위해서야."

할아버지는 이렇게 말한 뒤에 비밀 이야기라도 하듯 작은 목소시로 가르쳐주었다.

"마을을 굶주림에서 구해주시는 당식선 주위에도 실은 망것이 우글우글 달라붙어 헤엄치고 있어. 그러니까 조심해야 된다."

마을 사람 누구에게 물어도 아니라고 하겠지만 너는 명심해두라고 할아버지가 무서운 얼굴로 말했다.

"좋게만 들리는 이야기도 때로 그 뒤엔 다른 면이 있는 법이야."              p.20


괴기소설이나 변격 탐정 소설을 집필하는 작가인 도조 겐야는 일본 각지에 전해지는 괴담과 기담에 사족을 못 쓰는 인물로 괴이담 수집을 위해 거의 항상 여행 중이다. 어쩌다보니 방문하는 곳에서 기괴한 사건에 휘말리는 경우가 많은데, 지역과 관련된 괴이담에 얽힌 살인사건이 대부분이라 자연스럽게 아마추어 탐정 역할을 하며 사건을 해결로 이끌어 왔다. 이번에는 같은 대학 출신 대학 후배인 편집자 오가키 히데쓰구가를 통해 그의 고향에 전해지는 괴담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직접 조사해보기 위해 마을을 찾아가는 여정이다. <창해의 목>, <망루의 환영>, <대숲의 마>라고 겐야가 명명한 세 가지 괴담은 에도시대와 메이지시대와 전전의 괴이담이었다. 나머지 하나인 <뱀길의 요괴>는 히데쓰구가 나고 자란 유리아게촌에서 닛쇼방적 공장이 있는 헤이베이 정까지 이어지는 산길을 무대로 요 몇 개월 사이에 일어난 무척 불가해한 체험담이었다. 게다가 이것은 현재진행중인 이야기라 더욱 겐야의 관심을 이끈다.


도조 겐야를 담당하는 여성 편집자 소후에 시노와 괴담에 대해 알려준 히데쓰구가 이번 여행을 함께 하게 된다. 그들은 험난한 길을 뚫고 마을에 도착하지만, 그들은 곧 살인사건과 마주하게 된다. 도조 겐야처럼 민속학을 연구 중인 민속학자 노조키 렌야가 현지에서 먼저 조사 중이라는 소식을 들었었는데, 바로 그의 시체를 발견하게 된 것이다. 이상한 것은 미로처럼 펼쳐진 대숲 한가운데서, 굶어죽은 것이 틀림없어 보이는 상태였다는 거다. 특별히 묶여 있지도 않았고, 두 다리 중 어느 쪽을 다친 것처럼 보이지도 않았음에도, 대숲 신사 한가운데서 아사한 것이다. 평범하게 걸어서 나갈 수도 있었을 터인데 말이다. 노조키 렌야는 무엇을 조사하고 있었던 걸까. 그는 어떠한 연유로 신사 안에서 아사한 것일까. 대숲 신사의 열린 공간에서 일어난 괴상한 아사에 이어 살인사건은 연이어 벌어진다. 망루의 시선으로 인한 밀실에서 일어난 수수께끼의 실종, 다루미 동굴의 모래땅 경내에서 일어난 발자국 없는 살인, 큰 헛간에서 일어난 위장 사살로밖에 보이지 않는 부자연스러운 액사까지..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연쇄살인을 관철하는 동기는 무엇이며, 사건의 진범은 과연 누구일까. 겐야는 이번에도 네 가지 괴담에 얽힌 수수께끼를 풀어낼 수 있을까. 




그 순간 겐야는 왠지 섬뜩했다. 어선에 당연히 불은 켜져 있지만, 진행 방향 일부를 비출 뿐이다. 배 주변은 압도적인 어둠에 싸여 있어서 그야말로 망선에 쫓기고 있어도 전혀 모를 정도다. 하늘에 별은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눈에 들어오는 유일한 빛은 북쪽에 이치한 이시노리 촌 인가의 불빛뿐이었다. 그런 희망의 빛도 마을 해안선을 지나고 나면 전혀 보이지 않는다. 다음 이소미 촌에 도착할 때까지 어선 주위는 완전한 어둠에 지배당한다. 대자연의 공포...... 산속에 있을 때도 이따금 문득 느낀 두려움과 똑같은 것이 별안간 겐야를 덮쳤다.               p.450~451


미쓰다 신조의 '도조 겐야' 시리즈 일본 번째 작품이다. 국내에는 <염매처럼 신들리는 것>, <잘린 머리처럼 불길한 것>, <산마처럼 비웃는 것>, <미즈치처럼 가라앉는 것> 네 권이 소개되었는데, 그로부터 무려 11년 만에 신작이 나온 것이라 아주 반가운 마음으로 읽었다. 참고로 시리즈 중에 번역되지 않았던 <흉조처럼 꺼리는 것>과 <기명처럼 바치는 것>도 계약이 되었다고 하니, 곧 국내에서 만나볼 수 있을 것 같다. 이 시리즈는 고립된 마을의 집단적 공포에 기반을 둔 오싹한 호러와 곳곳에 포진해 있는 복선으로 수수께끼를 풀어 나가는 본격 미스터리를 방랑 소설가 도조 겐야를 화자로 풀어낸다. 특히나 이 시리즈가 재미있는 건 정교한 트릭이 돋보이는 본격추리 방식에, 비현실적인 괴담을 접목시켜 독특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데에 있다. 그래서 이야기는 종종 웃음을 유발시키기도 하고, 등골이 오싹해지게 만들기도 하면서 종횡무진으로 달려나간다. 미스터리미스 요소가 돋보이면서도 시대적 배경으로 인해 괴기스러운 배경은 극에 더욱 매력을 부여해준다. 도조 겐야 만큼이나 엉뚱한 매력을 보여주는 여성 편집자 소후에 시노와의 에피소드도 유쾌하게 극을 이끌어 준다.  


도조 겐야 시리즈의 특징 중에 하나가 바로 얽히고설킨 인물 관계 도라 할 수 있는데, 책의 서두에 고라 지방 지도와 함께 주요 등장 인물이 마을 별로 정리되어 있으니 참고하면 좋을 것 같다.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며 속도를 더해가는 스토리가 페이지에서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작품이었다. 미스터리 고유의 수수께끼 풀이라는 것도 재미있지만, 특히나 돋보이는 것은 바로 장면마다 배어있는 으스스한 분위기와 공포라는 감정이다. 미쓰다 신조의 작품은 절대 밤에는 읽지 말라고 권해주고 싶을 정도이니 말이다. 이번 작품에서는 험난한 산과 깎아지른 절벽에 둘러싸여 왕래조차 쉽지 않은 바닷가의 다섯 마을에 전해지는 시대도, 배경도, 각기 전혀 다른 네 가지 괴담을 배경으로 이야기가 펼쳐졌다. 도조 겐야와 일행들이 고생 끝에 도착한 마을에서 괴담을 모방한 것만 같은 '열린 밀실' 살인사건이 연이어 벌어지는데, 그는 이번에도 괴담 살인사건을 해결해낼 수 있을까에 기대를 모으고 차근차근 따라가다 보면 충격적인 결말에 도달하게 된다. '도조 겐야' 시리즈는 밀실살인으로 대표되는 본격추리의 틀에 토속적이고 민속학적인 괴담을 접목시킨 독특한 작풍으로 읽다 보면 호러인지 미스터리인지 알 수 없는 그 독특한 매력에 푹 빠지게 된다. 아직까지 이 시리즈를 만난 적이 없다면, 이번 작품으로 시작해도 좋을 것이다. 어디서도 볼 수 없었던, 호러 미스터리의 고수가 보여주는 놀라운 이야기의 세계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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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에 스파이가 있다 - 어느 문외한의 뉴욕 현대 예술계 잠입 취재기
비앙카 보스커 지음, 오윤성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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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저 반질거리는 흰 벽 뒤에 어떤 비밀이 숨어 있는지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이들은 인간의 영혼을 위한 성스러운 오아시스를 지키려는 것일까? 아니면 세상에서 가장 뻔뻔한 사기극을 은폐하려는 것일까? 쓸데없이 기웃거리지 말고 꺼지라는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난 어떻게든 이 세계에 들어가겠다고 더 굳게 마음먹었다.

나는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모두의 허를 찌를 깜찍한 계획을.            p.26


난해한 현대 미술 앞에서 당황스러웠던 적 있을 것이다. 이게 대체 왜 아름다운 건지,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는 건지 이해하기 어려운 작품들 앞에서 예술가들과 큐레이터, 비평가들은 찬사를 보낸다. 왜 예술은 대중을 따돌리는 걸까? 이 책의 저자인 비앙카 보스커는 문화 저널리스트로 활발하게 하던 중 어느 날 갑자기 갤러리에서 미술품을 팔고, 작업실에서 작가들을 돕고, 미술관에서 경비원으로 일하며 몇 년의 시간을 보낸다. 이유는 단 하나, 현대 미술을 미치도록 이해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작품을 바라보는 안목을 키우고 싶었고, 동시대 미술계에서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무슨 장르든 마찬가지가 아닐까. 특정 분야를 제대로 알고 싶다면, 가장 깊은 곳까지 완벽하게 들어가서 경험해보는 수밖에 없다. 물론 머리로 아는 것과 직접 행동에 옮기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다. 비앙크 보스커는 그 어려운 일을 기어코 해낸다. 철옹성 같은 ‘순수 예술계’에 제 발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가 신세계를 온몸으로 겪어낸다. 그렇게 몇 년에 걸쳐 그간 살아왔던 정상적인 삶에서 벗어나 '순수'한 예술이 어디까지 지저분해질 수 있는지 목격한다. 우선 모두의 허를 찌를 깜찍한 계획으로 갤러리에서 일해보기로 한다. 예술 작품을 노려보기만 하는 게 아니라 음미하고 싶었기 때문에. 경험상 이런 일은 몸으로 배우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저자는 한 작은 갤러리에서 일하기 시작한다. 첫 업무는 아홉 겹의 페인트칠이었다. 그렇게 브루클린의 작은 갤러리 말단 직원으로 시작해 마이애미 아트 페어에서 그림 판매에 열을 올리고, 전시회 큐레이터와 신진 예술가의 작업실 조수를 거쳐, 구겐하임 미술관 경비원으로 일하기 까지의 여정이 마치 영화처럼 펼쳐진다. 




그때까지 나는 입장권을 사서 들어가는 관객으로만 미술관을 경험했지 배지를 달고 출입 통제 구역을 드나든 적은 없었기에 미술계의 최상층이요, 궁극의 지향점이라는 이 공간의 내부자가 된다는 생각에 흥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 한편으로는, 도망갈 곳 없이 매일 몇 시간씩 예술 작품 옆에 있는 일이 나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궁금했다. 나는 줄리의 작업실에서 예술을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게 읽는 방법을 터득했는데, 미술관 경비원 업무로도 그 방법을 배울 수 있다고들 했다. 아마도 그 누구보다 오래 작품을 보는 사람이 경비원일 것이다. 경비원은 컬렉터보다도 오래 본다.             p.382


보는 이로 하여금 ‘이것도 예술이야…?’라는 의문을 품게 하는 현대 미술에 눈을 뜨기 위해 수년간 부단히 애를 쓴 저자의 이야기는 예술의 존재 의미에 대해 근본적으로 생각하게 만들어 준다. 아름다움의 의미에 대해서, 예술 작품이 우리 삶에 필요한 이유에 대해서 말이다. 예술 작품을 오래 바라볼수록 그것을 더 잘 이해하게 된다. 그런데 왜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일까.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연구에 따르면 관객이 한 작품에 할당하는 평균 시간은 17초라고 한다. 이 또한 작품 앞에 멈춰 선 경우만을 계산한 것이라, 실제 평균 시간은 더욱 짧을 것이다. 저자 역시 마찬가지였다고 한다.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경비원으로 일하기 전까지는 한 작품을 40분간 노려보는 일 따윈 없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곳에서 근무를 하게 되면서, 15대의 보안 카메라가 돌아가는 가운데, 자리에서 벗어나거나 휴대폰을 꺼내면 해고당한다는 위협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한 구역을 지키는 40분 동안 단 한 작품만 바라보는 실험을 하며 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것들을 발견하게 된다.


저자의 이러한 경험은 우리가 억지로라도 예술 작품과 관계를 맺을 때, 작품이 달라지고 자신도 달라진다는 것을 보여준다. 저자는 깨닫는다. 미술관은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야 하는 책이 아니라고. 미술관에 있는 모든 작품을 꾸역꾸역 삼킬 필요없이, 원하는 몇 가지만 집중에서 보면 된다고 말이다. 하루에 한 시간씩 몇 주 동안 같은 작품을 보면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지켜보라고, 관객들에게 말해주고 싶다고 생각했을 정도이니 말이다. 예술은 선택이다. 안일함을 거부하는 선택이고, 더 풍요롭고 더 불편하고, 더 영혼을 강타하고, 더 불확실한 삶을 살겠다는 선택이다. 무엇보다, 더 아름다운 삶을 살겠다는 선택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취향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한 은밀한 진실,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사유, 완전히 주관적인 경험으로서의 예술에 대해 탐구하는 과정은 자신만의 미학을 찾아가는 여정이기도 해 굉장히 흥미로웠다. 무언가를 이론으로 아는 것과 몸으로 이해하게 되면서 아는 것은 전혀 다르다. 동시대 미술에서 무엇이 예술이고 무엇이 예술이 아닌지 궁금해 본 적이 있다면, 날 것 그대로의 예술계 이야기를 만나보고 싶다면 이 책을 적극 추천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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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의 숨 - 흙과 인간은 어떻게 서로를 만들어왔는가
유경수 지음 / 김영사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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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기후변화, 악화하는 지구 생태계, 변화하는 식량 수요에 맞서, 이 집이 무너질 조짐은 없는지 물어볼 때가 되었다. 사 층짜리 집이 덩치에 걸맞게 좋은 이웃인지, 즉 모든 이에게 고르게 양질의 영양을 제공하며, 작은 규모에선 주변의 생태와 환경에 도움이 되고, 지구 규모에선 기후변화를 극복하는 데 기여하는지 물어볼 때가 되었다. 이 질문에 답하는 과정은 계속해서 층을 올리는 것이 아니라 아래층을 찾아가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 아래층에는 마법과도 같은 오래된 기술이 새로운 발견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p.169


식물을 많이 키우다 보니 흙 냄새를 맡을 일이 자주 있다. 흙을 구성하는 요소에 대해서도, 좋은 책과 그렇지 않은 흙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고 찾아 보게 된다. 재미있는 것은 흙을 만드는 데 식물과 동물 및 미생물이 맡은 역할이 크다는 점이다. 그렇기에 흙에 대한 공부는 생태학으로 이어지고, 또 그것은 지질학으로 연결된다. 이 책은 미네소타대학의 토양학자 유경수 교수가 쓴 흙에 관한 탐구를 담고 있다. 토양생태학이라는 장르 자체가 생소하게 느껴졌는데, 그만큼 낯선 세계의 놀라운 이야기를 들려주어 매우 흥미진진한 책이었다. 


'수만 년 전 죽은 동식물에서 유래한 오래된 유기물부터 조금 전 뿌리에서 분비된 최신 유기물까지 서로 다른 시간이 뒤죽박죽 공존하는 곳이 흙'이라는 점이 가장 신비로운 부분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렇게 흙은 수십만 년 혹은 수백 만년에 흐르는 시간들을 고스란히 겪고 그만큼의 이야기들을 축적시켜왔다. 그러한 흙이 숨을 쉬고 있다는 표현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저자는 20여 년 전 흙 공부를 시작할 무렵, 자신을 사로잡은 주제가 '토양 호흡'이었다고 말한다. 시작은 물리학이었는데, 점차 생태학의 매력에 눈을 뜨게 된 계기도 '토양 호흡'이라는 단어에 매혹되었기 때문이라고 말이다. 실제로 토양학, 생태학, 지구과학에서는 토양 호흡 측정이 매우 흔한 작업이라고 한다. 그 방법은 사람이 수작업으로 하는 것인데, 직경 50센티미터 정도 되는 체임버를 통해 이산화탄소 농도 측정을 해 토양의 날숨을 알아보는 것이다. 토양 호흡을 대지의 숨결로 이해한 저자는 그 말이 가리키는 어떤 광대함과 아름다움에 홀려 숨이 막혔다고 하니, 과학자의 낭만인가 싶어 흐뭇해졌다. 




토양 호흡은 커다란 숨이다. 기후변화의 주범인 화석연료를 태워 나오는 이산화탄소의 양이 2023년을 기준으로 368억 톤이다. 흙이 해마다 뱉어내는 이산화탄소는 그것의 대충 열 배에 달한다. 그럼에도 인류가 화석연료를 태우기 시작할 때까지 대기 중 이산화탄소 농도는 지난 80만 년 동안 300피피엠을 넘지 않았다. 지구 규모에서 흙이 탄소중립의 언저리를 벗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적 같은 균형은 거대한 숨의 한 부분인 인간의 숨에서도 유효하다. 당신이 해마다 꼬박꼬박 배출하는 250킬로그램의 이산화탄소 또한 광합성을 통해 당신의 식량이 된 250킬로그램의 이산화탄소와 해마다 '퉁을 치고' 있는 것이다. 지구의 긴 역사를 통해 꾸준히 반복된 이 균형은 알면 알수록 위태롭다.                 p.339~340


이 책은 흙 속의 산 것과 죽은 것들의 순환, 농사와 지구 사이의 관계, 기후 변화, 지속가능성의 문제에 이르기까지 저자가 부지런히 발로 뛰며 채집한 지구 곳곳의 흙에 대해 이야기한다. 저자는 일 년에 수차례씩 답사와 탐사 여행을 떠난다고 하는데, 전라남도 진도부터 하와이의 화산섬, 인도 히말라야 기슭, 그리고 북극권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전 세계를 넘나들며 펼쳐지는 방대한 스케일만큼이나 깊이 있는 고민과 통찰력 있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인류의 가장 오래된 농경 방식 중 하나인 '화전'으로 경작을 하는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 히말라야의 해발 1000~3000미터 사이에 자리 잡은 나갈랜드에 가고, 캘리포니아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땅 구덩이를 파고 드러난 토양층을 관찰 기술하기도 한다. 스웨덴의 라플란드에서 100년 넘게 버려진 사미족의 순록 캠프를 방문해 대형 초식동물이 누비던 빙하기 시대의 북구를 상상해보고, 태평양의 화산섬 하와이와 사모아에서 수백만 년의 나이를 가지고 있는 흙을 찾아보기도 한다. 


그렇게 이 책은 공간적으로는 동서양을, 시간적으로는 1만 년 전부터 현재를 지나 미래 시점인 2100년까지를 아우른다. 그 장대한 여정에서 흙에 기반한 인간과 자연의 상호작용을 이야기하고 지속가능성을 같이 고민해본다. 기독교에선 '재의 수요일'마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을 기억하라"는 경구와 함께 이마에 재로 십자가를 새긴다고 한다. 흙은 인간의 시작이자 끝인 것이다. 흙을 파괴하는 것은 본향을 죽이는 일이자 돌아갈 곳을 없애는 일임에도, 생계를 유지하려면 흙을 갈아 엎어야 하는 것이 인간의 운명이라는 것이다. 기후변화와 생태 위기의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꼭 필요한 책이 아닐까 생각한다. 흙은 인간이, 자신의 육체를 제외하고, 가장 오랜 시간 가장 깊이 경험한 자연이다. 지구라는 행성에서 인간과 가장 가까운 부분인 '흙'에 대해 알고 싶다면 이 책을 만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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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번 랜드 - 에드워드 리 셰프가 안내하는 버번 위스키 가이드북 에드워드 리 컬렉션
에드워드 리 지음, 정연주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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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버번 위스키에는 말린 과일과 단맛이 느껴지는 동시에 쓴맛과 깊은 맛을 선사하는 풍미가 있다. 나는 이 맛을 오로지 '과일 가죽'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다. 마치 옥수수가 어두운 색의 달콤한 과일로 가득 찬 가죽으로 환생한 것 같은 느낌이다. 홉피는 버번 위스키를 만드는 데 들어가는 변수가 너무 많아서 옥수수 풍미가 정확히 어떻게 변하는지 명확히 말할 수는 없다고 말한다. "호밀은 스파이시한 풍미를 냅니다. 보리는 전분 느낌이 있지만 단맛이 조금 더 강하죠. 그 어떤 것을 오크통에 넣는다 해도 갈색으로 변하는 것은 마찬가지예요. 마법의 비결은 바로 옥수수라고 할 수 있죠." 그가 말했다.             p.92


<스모크 앤 피클스>, <버터밀크 그래피티>에 이은 에드워드 리 셰프의 세 번째 책이다. <스모크 앤 피클스>에서는 에드워드 리의 개인적인 성장 과정과 요리 세계가 확장되는 여정을 따라 소, 돼지, 양, 해산물, 피클, 버번에서 디저트에 이르기까지 가정에서 다룰 수 있는 모든 식재료에 대해 이야기했다. ‘요리’가 단순한 조리 행위가 아닌 문화와 정체성, 가족, 인간관계를 탐구하는 방식이자 자신의 뿌리와, 딛고 사는 터전에 대한 사랑이라는 그의 철학이 페이지마다 담겨 있어 아주 흥미롭게 읽었다. <버터밀크 그래피티>에는 그가 2년 동안 미국 전역을 여행하며 만난 사람들과 음식, 그리고 그 안에 담긴 문화와 정체성에 관한 기록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음식의 세계를 여행하며 수많은 이민자를 만나고, 그 과정이 고스란히 이민자들의 요리와 미국 음식의 이야기로 연결되는 아름다운 책이었다. 




이번에 나온 <버번 랜드>는 미국 대표 위스키인 ‘버번’의 문화와 역사, 그리고 식재료로서의 버번을 활용한 레시피를 담은 책이다. 요리사지만 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한 문학도이기도 한데, 개인적으로 작가로서 더 좋아하기에 이번 책도 매우 기대하며 읽었다. 버번 위스키가 오크통 속에서 숙성되는 데는 4년에서 6년, 8년, 그보다 더 긴 세월이 필요하다. 그 세월 동안 액체가 숙성되는데, 기업의 비밀과 가문의 레시피, 전승되는 지식, 역사와 전통이 증류소 위를 맴도는 유령처럼 벽을 통과하며 과거와 현재를 이어준다. 그는 버번을 가리켜 언제 만나도 마음 편한, 자신의 ‘가장 친한 친구’라고 소개하는데, 그만큼 모든 페이지에 애정이 듬뿍 묻어 있다. 


이 책에는 버번 위스키의 제조 과정과 역사뿐만 아니라 자신만의 버번 테이스팅 법, 잔과 얼음 고르는 법, 손님들에게 위스키를 대접하는 법, 위스키 수집하는 법 등 그가 애정을 갖고 공들여 탐구하며 알게 된 버번 위스키 정보들이 가득하다. 여타의 위스키 가이드북과는 다른 특별함은 버번을 가장 맛있게 즐길 수 있는 에드워드 리만의 버번 활용 레시피가 수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버번 위스키는 켄터키 최고의 증류주로 시작해서 미국의 입맛을 사로잡았다. 버번 위스키가 세계를 정복하는 것은 시간문제일 뿐이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옥수수를 재배하고, 화이트 오크를 발견하고, 구리를 두들겨 증류기를 만들고, 효모를 잡아내고, 계절이 네 번 지나며 오크통 속에서 놀라운 일이 벌어질 때까지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리던 미국의 작고 구석진 하나의 주인 켄터키에서 시작된 것이다. 다음에 버번 위스키 병을 열 때 이 점을 생각해주길. 그리고 눈을 감고 맛을 보며, 그 모든 역사와 전도유망한 미래가 잔 속에서 뒤섞이는 것을 느껴보자. 건배!               p.278


이 책에는 버번 위스키의 제조 과정과 역사, 켄터키의 유명 증류소 투어와 버번의 주요 인물 인터뷰 등 위스키에 대한 정보들이 가득한데 그 중 어떤 것도 단순 나열식 설명으로 그치는 것이 없다. 그의 문장들은 감각적이고, 문학적이며, 사색적이고, 매혹적이다. 특히나 그는 입안에서 느껴지는 것을 단어로 표현하는 데 탁월한 솜씨를 발휘한다. 위스키를 마셔본 적이 없는 사람조차 그 맛과 향, 풍미를 짐작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고 있으니 말이다. 


버번 위스키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다섯 가지 핵심 요소는 불과 옥수수, 오크, 효모, 구리라고 한다. 이 다섯 가지 구성 요소 안에 버번 위스키의 풍미를 결정하는 핵심이 존재한다. 여섯 번째 요소는 물이지만, 이건 풍미의 구성 요소라고 할 수는 없고, 누군가는 시간이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말하지만, 이는 좀 더 철학적인 개념에 가깝다. 향과 단맛과 짠맛이 어떻게 느껴지는지, 이 책을 읽다 보면 어쩐지 알 것도 같다는 느낌이 든다. 버번 위스키는 도수가 높은 술이라 아직 마셔볼 기회가 없었는데,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한번쯤 도전해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 책은 미국 출간 당시부터 위스키 애호가들의 필독서로 불리며 큰 주목을 받았고, 2025 IACP 어워드 와인, 맥주 부문 파이널리스트에 오르기도 했다. 이 책은 단순한 위스키 교본이 아니라 버번을 만들고, 마시고, 소비하는 사람들의 삶을 따라가는 여정이며, 한 잔의 술이 담아낸 욕망과 갈등, 자부심과 상처의 기록이기도 하다. 에드워드 리 셰프를 작가로서 좋아하는 가장 큰 이유는 모든 음식과 요리에 대한 이야기에도 나름의 '서사'가 있기 때문이다. 그의 글은 웬만한 소설 읽는 것보다 더 흥미진진하게 시선을 사로잡는다. 이 책 역시 읽다 보면 어느 순간 '버번은 결국 사람의 이야기'라는 것을 깨닫게 만들어 준다. 


요리로 즐기는 버번의 세계도 매우 흥미로웠다. 버번을 요리에 사용하기 위해서는 끓여서 에탄올을 거의 날리고 알코올은 최소한만 남긴 상태로, 풍미가 농축된 액체 상태로 만든 다음에 사용한다고 한다. 이렇게 졸인 버번 위스키는 유리병이나 기존 위스키 병에 담아서 실온에 수 개월간 보관할 수도 있다. 고기에 풍미를 더해주고, 부드럽게 만들어 주기도 하고, 생선을 효과적으로 절여주기도 하며, 날카로운 맛을 부드럽게 다듬어주기도 한다. 음식과 페어링해서 마시는 버번 위스키의 맛도 궁금하고, 버번 농축액을 사용한 요리의 풍미도 너무 궁금해졌다. 위스키를 즐기고, 잘 아는 사람이라면 이 책이 더욱 특별하게 느껴질 것이다. 하지만 잘 몰라도 상관없다. 이 책을 읽고 나면 자연스럽게 버번의 매력에 푹 빠지게 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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