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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러드문 ㅣ 형사 해리 홀레 시리즈 13
요 네스뵈 지음, 남명성 옮김 / 비채 / 2025년 10월
평점 :

"뭔가 멍청한 짓을 하게 되리라는 걸 알면서도 그냥 저지르게 되는 느낌 알아?" 외위스테인이 마지막으로 담배를 빨아들이며 물었다.
해리는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서 껐다. "전에 생쥐가 곧장 고양이에게 걸어가서 죽는 걸 봤어.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나도 모르지, 자기를 보호하려는 본능이 없나?"
"일종의 충동이겠지. 우리는, 아니 적어도 어떤 사람들은 벼랑 끝에 끌리나 봐. 죽음이 가까워질수록 살아 있는 느낌이 강렬해져서라더군. 하지만 빌어먹을, 모르겠어." p.160
부동산 재벌 ‘뢰드’가 개최한 파티 이후 실종됐던 여성들이 차례차례 사체로 발견되기 시작한다. 서로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이는 여자 두 명 가운데 한 명이 살해되고 한 명이 실종된 일이 우연일 수 없었다. 하지만 두 여성이 같은 파티에 참석했다는 사실 말고는 전혀 단서가 없었고, 자연스레 뢰드가 유력한 연쇄살인 용의자가 된다. 살인사건의 범인 80퍼센트는 희생자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던 사람이었으니까 말이다. 뢰드는 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결백하다는 걸 보여줘야 했고, 따로 수사할 사람을 고용하기로 한다. 최고 일류가 필요했다.
그렇게 로스앤젤레스의 허름한 술집에서 매일 술잔만 기울이던 해리 홀레가 다시 오슬로로 돌아온다. 이제 경찰이 아닌 해리는 사설탐정이 되어 연쇄살인사건을 해결해야 한다. 해리는 죽음을 준비하는 심리학자, 비리 경찰, 택시 기사, 전직 형사가 모여 수사를 시작한다. 끝없이 추락하고 부서지고 상처받아온 해리는 과연 이번에도 범인을 찾고 의뢰받은 일을 해내 한 여인을 구해낼 수 있을까.

전작인 <칼>에서 요 네스뵈는 차갑고도 무자비하게, 한치의 자비도 없이 날카롭게 해리의 행복을 난도질해버렸다. 시리즈가 거듭될수록 해리는 언제나 소중한 뭔가를 잃어 왔고, 그러면서 점점 어둠에 잠식되어가는 모습을 보여왔었지만 그 중에서도 단연코 최악의 비극이 벌어졌었다. 해리 홀레의 가장 소중한 존재가 죽음을 맞는 것으로 충격적인 포문을 열었던 전작을 기억한다면, 그 이후의 이야기가 어떻게 펼쳐질지 예상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이번 작품 <블러드문>에서 해리는 오슬로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곳에서 술에 취한 채 등장한다. 신용카드는 한도 초과였고, 텅 빈 통장 또한 그가 알거지라는 걸 보여주었다. 한 푼도 남지 않을 때까지 마셔대는 게 그의 목적이었다. 이제 남은 돈도 인생도 미래도 없었고, 남은 것이라고는 모든 것을 마무리할 용기 혹은 비겁함이 필요할 뿐이었다. 그가 머무는 숙소 방의 매트리스 아래에 낡은 베레타 권총이 있었다. 노숙자에게 25달러를 주고 산 물건이었다. 총알은 세 발 있었고, 이제 그의 결정만 남은 상황이었다. 하지만 한 나이든 여인이 술집에서 그에게 말을 건네왔고, 그리고 모든 것이 달라진다.

그녀가 실종되었다거나 납치되었다는 소식은 없었다. 그는 두 사람이 무엇을 공유했는지, 무엇이 그들을 연결했는지 깨달았다. 주차장에서 사건이 벌어지고 나서 발생한 외부의 위험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루실에게서 어머니의 모습을 본 것도 아니었다. 그녀는 교실 문간에 서 있던 여자, 그가 다시 구할 기회를 얻어낸 병원 침대 속 여자가 아니었다. 외로움이었다. 그들은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 지구에서 사라질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p.468
이번에 더 이상의 인생도, 미래도 의미가 없어진 해리 홀레를 다시 사건으로 이끈 것은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이유에서다.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던 해리 홀레를 다시 일어서게 만든 사건은 쉽사리 해결되지 않는다. 해리는 가장 유력한 용의자인 자신의 고용인에 대한 의심을 거두지 않은 채, 사건을 쫓기 시작한다. 사건이 벌어진 지 거의 3주가 지났음에도 경찰은 범인을 잡지도, 알리바이를 제시한 오슬로의 특정인을 향한 언론의 마녀사냥을 멈출 단서를 찾아내지도 못하고 있었다. 해리 홀레 시리즈에서 항상 제일 중요한 것은 바로 '동기'이다. 주도 면밀하게 계획한 살인사건에서 범인은 법의학적 증거들도 모두 없애고, 피살자의 사망 시간에 확실한 알리바이도 세우고, 살인 무기도 모두 버리더라도 사실상 절대 없앨 수 없는 것 하나가 바로 동기이니 말이다. 그렇다면 이번 사건을 저지르고 있는 범인의 동기는 뭘까.

요 네스뵈는 한 작품에서 '인물을 소개할 때 가장 중요한 점은 그 인물의 원동력이 무엇인지, 가장 은밀한 소망과 꿈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거'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래서 매번 범인의 시점이 거의 처음부터 함께 진행된다. 그의 동기가 무엇인지 독자들은 이야기를 따라가는 내내 조금씩 알게 된다. 재미있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정체를 밝히는 것은 극중 수사관들뿐만 아니라 독자들 입장에서도 결코 쉽지가 않다는 것이다. 그게 바로 해리 홀레 시리즈만의 매력이기도 하다. 이 작품 역시 끊임없이 범인으로 보이는 인물의 시점으로 이야기가 전개되지만, 마지막의 또 마지막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그의 정체를 파악할 수 없다. 그렇게 많은 조각들이 모여 하나의 커다란 모자이크를 이루며 확실한 사진을 보여주는 건 육백여 페이지를 훌쩍 넘어섰을 즈음이다.
이번 작품에서 해리 홀레가 꾸린 소박한 수사팀이 의의로 좋았다. 입원 중인 암 환자와 부패 혐의로 조사받는 경찰관, 택시 운전사와 전직 형사로 이루어진 홀레의 팀. 후반부에 사건이 해결된 뒤에 외위스테인이 "그냥 이 모임 계속하면 안 되나? 꼭 사건을 해결할 필요는 없잖아."라고 말했을 때 너무 공감되어 나도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을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떠나야 할 사람은 결국 떠나고, 우리는 이번 작품에서도 애정하는 캐릭터 한 명을 보내줘야 했다. 시리즈가 거듭될수록 해리 홀레는 나이를 먹어 가고, 주변 사람들도 하나씩 사라진다는 점이 마음이 아팠다. 우리의 실제 삶이 그렇듯이 말이다. 요 네스뵈는 여전히 탄탄하고 정교하게 플롯을 만들고, 거듭되는 반전과 치밀한 구성으로 끝까지 긴장감을 놓을 수 없도록 이 작품을 만들었다. 이야기는 '블러드문'이라고 불리는 개기 월식이 시작되기까지 이 주 간의 시간 동안 벌어진다. 그 핏빛 블러드문을 실제로 보게 되려면 이 두툼한 페이지의 시간과 밀도를 견뎌내야만 한다. 일단 시작하면 밤새도록 읽게 될지도 모른다. 자, 마음 단단히 먹고, 삼 년 만에 돌아온 해리 홀레를 만나보자!